한자 | 鄭晩錫 |
본관 | 온양(溫陽) 정씨 |
생몰년도 | 1758 ~ 1834 |
자/호 | 성보(成甫)/과재(過齋) |
1 소개
2 생애
1758(영조 34)에 태어난 정만석은 1783년(정조 7) 과거 급제하여 정계에 발을 들였다. 성균관전적(정6품)을 시작으로 병조참의(정3품)에 오른다. 1794년에는 호남·호서 암행어사를 맡아 명성을 떨쳤다. 1801년(순조 1)에는 하정사[1] 자격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2] 조선으로 돌아온 정만석은 다시 경상우도암행어사를 거쳐 동래부사에 임명되었으며, 뇌물을 받고 서계[3]를 조작한 역관을 처벌하였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자 조정은 정만석을 위무사로 임명하여 평안도 민심을 수습하게 하였다. 이후 평안감사가 되어 반란 관련 죄인들을 직접 문초하였으며, 사건의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난을 수습한 공로를 인정받았는지, 한성부판윤을 거쳐 호조판서[4], 우의정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3 평가
청백리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또한 암행어사와 같이 외직에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다만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일에 집착하여 기본적이고 큰 줄기를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졌다는 평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