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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의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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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暗行御史
정식 영어명: Royal Secret Agent(로열 시크릿 에이전트, 왕실 비밀요원), Royal Agent(로열 에어전트, 왕실 요원)[1] 혹은 Secret royal inspector.[2] 킹스맨 현대로 치면 사실 대한민국 감사원(어사대와 비슷)에 있는 공직감찰본부에 가깝다.
임무는 민심 시찰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여러 지방을 순행하면서 못된 고을 수령이나 탐관오리들을 잡아내는 관직이다. 참고로 암행(暗行)이라는 말 그대로 정규관직이 아니다. 원래 어사라는 관직 자체는 존재하지만 암행어사는 임시관직이다. 조선에서 모델로 삼은 중국(명)의 제도에도 일반적인 어사는 있으나 암행어사는 없었다. 대신 이쪽은 훨씬 악질적인 동창, 서창등의 비밀 감찰 기구가 존재했지만.
일반적으로 파견하는 어사는 지방에 변고가 있을 때 왕명으로 보내기 때문에 전부 알려지지만, 암행어사는 모두 비밀에 부쳐져서 은밀하게 시찰하기 때문에 며느리도 모른다. 당연히 아무나 뽑히는 게 아니고, 대개 당하관에 젊은 시종신(侍從臣)들 중 대체로 왕이 평소에 눈여겨 보고 있던 충직한 신하들이 암행어사로 발탁된다고 한다.
암행어사라는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성종 10년이다.[3] 하지만 워낙 반발이 심해서 주로 시행되지는 못하다가 본격적으로 틀이 잡히고 파견이 잦아지는 것은 인조 시기부터이다.
암행어사는 왕이 직접 임명하며 임명시 업무 지침서인 '사목'과 함께 숭례문을 나갈때 뜯어보도록 봉서를 한 장 준다. 숭례문을 나서 봉서(封書)[4]를 뜯어보면 "너는 이제부터 암행어사다. 어디도의 어느 마을에 가서 수령과 관리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보고하라" 같은 퀘스트가 적힌 스크롤이 있었다. 그외에 신분증 겸 역마와 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마패(馬牌) ,암행어사의 직무규칙이 적힌 사목(事目), 지방 수령이 도량형을 속여서 백성을 착취하고 있는지 파악 및 시체를 검사할 때 쓰이는 놋쇠로 만든 자인 유척(鍮尺)등을 함께 받았으며, 이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파직당했다.
암행어사의 상징하면 마패(馬牌)인데, 마패는 길 중간중간에 있는 역에서 말을 빌려서 탈 수 있다는 증표이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숫자에 따라서 역에서 빌려 탈 수 있는 말의 수가 달라진다. 1~10마리가 새겨져 있었으며[5] 암행어사가 출두할 때에도 증표로 사용했다.
암행어사는 지방 관리가 부패해서 백성들이 도탄을 겪고 있다고 판단되면 '출도'(출두)를 통해 정체를 밝히고 관리를 왕명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보통 암행어사하면 흔히 생각하는게 출두인데, 왠지 보통 출도할 때는 마패를 번쩍들고 "암행어사 출도야!" or "암행어사 출두요!" 를 외치고 육모 방망이를 장비한 관군들이 관아로 몰려들어 관아 휘하의 관졸들과 이방, 사또등을 포박하고 암행어사는 윗자리에 자리를 잡고 재판을 하는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 이게 다 춘향전 때문이다.
오후에 일제히 길을 떠나 그대로 황혼에 순안현 관아 문 앞에 도달했다. 본관 수령 이문용은 마침 산사로 놀러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관속들은 그를 마중하려고 모두 관문 밖에 모여있었다. 역졸들이 빠른 소리로 암행어사 출도를 한번 외치니 사람들이 무리지어 놀라 피하는 것이 마치 바람에 날려 우박이 흩어지듯 하였다.(중략) 암행어사의 위엄과 서슬은 과연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참 있자 차차 모여들더니 병풍을 두르고 자리를 펴며 책상에 촛불을 밝혀 점차 위엄과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암행어사가 관직비리만 잡는 관직은 아니고 애초에 완벽한 결정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일단 수령의 잘못이 밝혀지면 죄질에 따라서 관인 빼앗고 봉고(관가의 창고문을 닫고 수령을 직무정지 시킴)[7]한 다음에, 임시로 형벌을 심리하고 백성들 민원도 좀 들었다. 그리고 임무가 완전히 끝나면 수령의 행적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별단으로 민정과 효자, 열녀 등에 대한 미담도 적어서 효자문이나 열녀문이 건립되는 계기도 되었다 .
여러모로 슈퍼히어로의 모든 덕목(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등장하여 악당들을 처벌, 항상 민중의 편에 서는 정의의 우리편)을 갖춘 관직이다. 덕분에 일본의 사무라이나 닌자, 서양의 기사처럼 실제보다는 와전된 이미지가 민중에 박혀있고, 조선시대의 폭풍간지 관직으로써 일선에서 지휘하는 장군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
2014년 렛츠고 시간탐험대라는 예능에서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생존율이 30% 미만이라는 내용을 방영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기록이나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소설이다. 역덕PD라더니 그냥 인터넷 검색한듯
이에 대한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왕과 암행어사의 관계는 엄청 각별했다는 점이다. 암행어사는 오직 임금만이 간택 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를 뽑을 지 말지, 누구를 뽑을지, 어디로 보낼지도 모두 임금만의 권한이었다. 신하가 주제넘게 암행어사의 파견을 주청했다고 책망받거나 파직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즉, 수령이 암행어사를 죽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임금에 대한 도전, 즉 역모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암행어사가 파견지에서 죽었다면 가장 의심받게 되는 대상 1순위는 누구일까? (앞서 서술했듯이 임금은 암행어사 누구를, 어디로 보냈는지 모두 다 꿰고있다.) 수령입장에서는 미치지 않고서야 굳이 저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로 암행어사로 간택된 이들은 대다수가 문관, 그것도 경험있는 완숙한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흔히 암행어사 생존률 30% 미만설과 함께 셋트로 묶여다니는 낭설이 바로 "암행어사는 죽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젊고 건강한 무인 출신을 뽑았다."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이와 정 반대로 암행어사들은 절대다수가 노련한 문관 출신들이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삼사(三司)와 시종(侍從) 가운데 공정(公正)하고 강명한 자를 가려 보냄이 암행어사 선발의 원칙이었으며, 암행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수령을 지내 시무(時務)에 숙달된 자를 뽑았다고 기록되어 있다.[8] 왜냐하면 수령을 지내지 않은 자는 외방의 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령의 비리는 해본 사람이 더 잘 안다 반드시 암행어사는 일찍이 수령을 지내고 물정에 아주 익숙한 자로 뽑아서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실제로 연소하고 경험이 없는 어사의 경우 남 몰래 갔다가 남 몰래 돌아오는, 즉 한번도 출도하지 않는 미숙함을 보여 처벌받기도 하였다.
실존인물들을 예로 들자면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도 문관이었으며 퇴계 이황, 만포 심환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도 모두 문인 출신이다. 특히 심환지의 경우 마흔 두 살에야 급제하여 예순이 다 된 58세 때(정조 11년, 1787년) 호서(충청) 암행어사가 되었다. 암행일지인 <서수록>을 남긴 문관 출신 박내겸은 아예 나이 40이 넘어서 암행어사로 임명 되었으며,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존모델인 성이성 또한 문관 출신이다. 정말 암행어사의 생존률이 그토록 낮았다면 튼튼하고 오래가는 무관 출신들을 파견하지, 문관들을 파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로 암행어사는 절대 혼자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암행어사는 반드시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활동하였다. 물론 시대나 상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박내겸같은 경우에는 동행하는 무리가 무려 12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박내겸은 조를 짜러 따로 활동하고, 만나고를 반복 했다. <해서암행일기>를 저술한 박만정도 6명의 일행을 거느렸으며, 심지어 정조실록에서는 어사들이 어중이떠중이들을 다수 데리고가서 정체가 들켜버리니까(...) 정조가 이런 무리의 수행을 금지시킨 일도 있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어사가 산지나 험지에서 홀로 객사할 가능성은 굉장히 적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9] 때문에 창작물에서 암행어사의 방자가 1명 뿐이라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고 실제로는 아무리 못해도 최하 3명 이상 데리고 다녔으며 이들 중 일부는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장계를 배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장계가 보통 문서가 아닌 특수문서인지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창작물에서처럼 방자가 1명 뿐이라면 암행어사는 임금에게 보고서를 못올린다.
넷째로 암행어사 제도는 최소 30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암행어사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이후 파견된 횟수는 기록에 의하면 348년동안 총 613회라고 한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동시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정교한 관료제 국가로서, 어떻게든 국가인재의 뽕을 뽑아먹으려고 이리저리 굴리고 겸직까지 시키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런 국가에서 시무에 능하고 노련한 인재들을 생존률 30%도 되지않는 최악의 임무에 투입시켜 날려먹는다? 실제 실록을 보더라도 신하들이 "어사를 보낸지 오래됐으니 이제 보낼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주청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국가 인재의 손실이 막심하니 암행어사 제도를 폐지해야 합니다."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생존률이 30%는 커녕 70%라 할지라도 마땅히 제도가 폐지되었을 터인데 그런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앞서 보았듯이 조정의 대신들마저 어사는 정기적으로 보내야 한다고 인식되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관료들이 카미카제도 아니고...
물론 암행어사 제도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고, 어사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사망자가 없던 것은 아니었고, 실록에 기록이 남아있기에 상세히 알 수 있는데
전라도 암행 어사 홍양한(洪亮漢)이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중독(中毒)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 4월 9일 병신 4번째기사 1763년 청 건륭(乾隆) 28년
평안 감사 김이교(金履喬)가 청북 암행 어사 임준상(任俊常)이 강계부(江界府)에 이르러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하다가 죽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지금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니, 놀라움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겠다. 평소 그 사람이 쓸 만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복명하기를 기다려 발탁해 쓰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혹하고도 참혹하다. 소중하기로 말하면 이목(耳目)의 구실을 맡겼고 공로로 말하면 사신이 들판과 늪 지대를 알리는 것보다 더하였는데, 그 죽음 또한 국사 때문이었다. 별도로 돌보아주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고 청북 어사 임준상을 특별히 동부승지로 증직하고 널을 싣고 돌아오는 것과 장사를 치르는 절차에 대하여 각도로 하여금 특별히 돌보아 주게 하라. 그리고 그에게 아들이 있으면 나이가 성년(成年)이 되지 않았더라도 복을 벗기를 기다려 채용하라고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6월 26일 무진 1번째기사 1822년 청 도광(道光) 2년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일우(南一祐)가, ‘우도 어사(右道御史) 조병로(趙秉老)가 죽었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지금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 사람은 평소에 쓸 만한 인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복명한 뒤에 크게 등용하려고 했는데, 이런 소식이 올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이다. 귀와 눈 같은 중요한 직책에서 3년 동안 애써 수고했으며 국가에 봉직하다가 죽었으니 조정(朝廷)에서 우휼지전(優恤之典)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고 영남우도 암행어사(故嶺南右道暗行御史) 조병로에게 특별히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는 동시에 원래의 치부(致賻) 외에 후하게 더 지급하라. 반구(返柩)와 귀장(歸葬) 등의 절차는 특별히 해도에 신칙하여 규례를 벗어나서 각별히 비호하며 그의 아들은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상을 마친 뒤에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23권, 고종 23년 5월 17일 기유 1번째기사 1886년 조선 개국(開國) 495년
정작 실록에 등장하는 임무중 사망한 암행어사 기록은 이게 전부다.
각각 내용은
- 영조실록 -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 의문사. 독살로 추정된다는 내용
- 순조실록 - 청북 암행어사 임준상이 설사와 구토로 사망했다는것을 전해듣자 그에대해 보상할것을 명하는 내용
- 고종실록 - 우도어사 조병로의 사망을 전해듣고 그에대해 보상할것을 명하는 내용
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약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암행어사 제도사에서 극히 일부분이었고, 또 희귀한 사례였기 때문에 기록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암행어사의 생존률이 30% 미만이었다면 무려 3번씩이나 암행어사를 역임한 성이성[10]은 최대 2.7%의 극악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전투종족이라는 말이 된다... 지나가는 선비 돋네.
오히려 암행어사들은 무사히 임무를 완료하고 난 후에, 정치보복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는 자신들이 암행어사 시절 봉고파직한 관리들의 미움을 사 훗날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고종조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던 이건창[11]은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을 감히 탄핵했다가 결국 벽동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벼슬길 포기하는 루트를 타기도 하는 등 암행어사와 수령의 파워게임에서 밀리면 어사가 깨갱이된 경우도 많았다.
다만 저런 근거없는 낭설이나, 사망사례들, 정치보복사례등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암행어사가 엄청나게 고생스러운 직업(?)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가령 보고서를 써서 올려야 되는데, 너무 자주 쓴다, 너무 안쓴다, 너무 악필이다, 문맥에 안맞는다 등등 갖은 이유로 징계를 받기도 했으며이쯤되면 암행어사 하다가 달필에 달변가로 거듭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활동비는 심각하게 낮아서 사실상 그 돈으로는 활동이 불가능한데, 다른 사람에게 식량 등을 조달하는것을 전부 뇌물로 봤기 때문에, 그 상황을 견디다못해 부패한 지방관리와 오히려 결탁해버린 사례도 있었다. 어차피 뇌물로 걸릴거 크게 한탕하자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좀 심한 경우에는 인근 고을에 암행어사가 나타나면 주변 고을 수령이 미리 알아채고 성문을 닫고 농성하거나, 반대로 아예 관아를 비워버리거나, 군사를 풀어 어사를 잡아다가 협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사출두할때 튀어나오는 병사들은 평소에는 역(驛)에서 일하는 역졸이나 다른 관청의 병사들인데, 여기서 병력을 차출하면 인근 고을 수령들의 귀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응할 시간을 주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춘향전의 예를 들자면 변학도가 사또로 있는 지방의 인근 지역인 익산현감은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두로 대응할 시간을 엄청 벌어놓은 셈.
(전략) 어떤 고개에 도달하여 말과 마부, 수행원을 먼저 보내고 나무 아래에서 홀로 쉬노라니 추적하는 자가 다가왔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먼저 엉뚱한 일을 말하면서 내 모습을 살폈다. 나는 얼굴색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묻는대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또 가짜 어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남몰래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내 행동거지가 수상하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더니 민간에서 붉은 실(紅絲)이라고들 부르는 쇠줄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길손은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12]이 지경에 이르러 재앙의 징조가 곧 머리에 닥치는 터라 나도 대답없이 가슴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며 말할 따름이었다. "너는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순간 그 사람은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면서 쳐다보더니 곧 자빠졌는데 언덕을 따라 판자 위의 구슬처럼 몸이 굴러가다가 평평한 곳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나는 마패를 들어 다시 가슴 속에 넣은 후 밑으로 내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위로하였다. "너나 나나 모두 각자 나라일을 하는 사람이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니 힘을 내서 일을 해 가자." 이어서 먼저 자리를 떠서 고개를 넘어갔다.(후략)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4월 22일자.
위 기록처럼 진짜 암행어사가 가짜 암행어사로 오해받아 일어난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고 아니 저거 엄청 웃긴데? 역관광 보소. 심지어 전라우도 무안현감으로 부임한 성수묵이라는 관리는 주막에서 괴한들에게 살해당할 뻔 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 괴한들의 정체는 바로 2년 전 성수묵이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왔을 시절 곤장을 쳐서 죽인 부패한 아전들의 자식들이었던 것.[13][14]
이렇게 보기와는 달리 애달픈 직책이다보니, 암행어사에 임명되자 "제가 전하에게 뭐 잘못한게 있길래 나한테 이러십니까" 라고 끄적거려 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현실은 시궁창. 왕이라고 있는게 사람 하나 부리는 것도 똑바로 못하냐.
결국 암행어사 제도는 고종 33년(1896년)에 나이 74세의 정2품 암행어사 장석룡의 보고서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암행어사의 마지막 기록이다.[15] 이 시기에는 고종조차도 어사에 대해서 한탄했을 정도로 어사제도가 타락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점차 강명함을 잃어가기 시작하자, 수백년동안 조선의 버팀목이 되어 준 어사제도마저 결국 그 기능을 다하고 만 것이다.
1.1 창작물의 암행어사
80년대 스타 이정길이 나온 암행어사라는 드라마가 유명했다. 여기서 호위무사로 상도가 나왔는데, 신암행어사에서 나온 산도가 바로 이 상도를 변형 한 것이다.[16]
앞서 말한 암행어사가 온다니까 사또들이 대비하는 설정을 비틀어서 최무룡이 주연한 마패없는 어사라는 작품도 나왔다. 암행어사를 연상케하지만 사실은 암행어사가 아닌 최무룡이 전염병으로 가족이 몰살돼 도적질을 하는 남자를 구해서... 하인삼아 어느 탐관오리 고을에 갔는데. 그 행색을 보고 어사인줄 알고 벌이는 촌극인데, 나중에 어사가 아닌 걸로 밝혀져서 곤욕을 치루...다가 알고 보니 폐서인된 왕자인데 이제 사면 복권돼서 한양으로 소환된다는 이야기.[17]
90년대 사극 중에 암행어사가 마패와 노잣돈을 도둑맞는 게 있었다. 위에 언급대로 마패를 잃으면 바로 파직이지만, 드라마 진행상 어사는 파직되지 않고 일단 노잣돈이 없어서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밭일을 하다가 임시 신분증을 얻어 활동한다. 마패를 훔친 도둑과 그 일당들은 어사 행세를 하면서 어사 대신 탐관오리와 나쁜 양반들을 혼줄을 내주는데, 결국 마지막회에 진짜 어사 일행과 마주쳐서 잡혔다.(...) 그래도 마패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기에 방면되었다는 훈훈한 마무리로 끝난다.
춘향전의 영향인지 주로 수행원으로 방자를 하나 데리고 다닌다. 하지만 방자는 '고을 원님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하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는 고증오류다. 춘향전에서도 이몽룡이 방자를 데리고 다닌 것은 도령이었을 때지, 어사가 된 뒤에는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18]
피를 마시는 새에선 사자패주란 이름으로 패러디. 마패 대신 '사자패'를 드는데...사자를 타진 않는다. 오등작 개념을 쓰는 피마새에서 신분이 백작 취급이다! 백작!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미토 고몬(水戶 黃門) 항목 참고.
영화 YMCA 야구단에선 주인공인 호창이 원래 과거시험으로 암행어사가 되는게 꿈이었다. 여주인공인 정림과 대화를 하는데 이 때 정림이 '저의 외삼촌이신 이면상 님이 마지막 암행어사이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정림이 호창에게 마패를 선물하는데 이게 후반부의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1.2 나무위키에 등재된 암행어사 역임자
- 이황 : 중종 말년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기록이 있다.
- 김만중 : 현종 말엽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으며 보고서까지 올린 기록이 있다.
- 박문수 : 설명이 必要韓紙?
- 심환지 : 충청도 암행어사. 58살에 임명되었는데, 암행 중에 보령 근처에서 일흔이 다 된 정혁신을 발굴했고, 정조는 그를 초사(初仕) 벼슬, 즉 신입사원에 임명했다.
헤드헌터# 실록의 기록. 3, 6째 문단에 주목할 것 - 정약용 : 경기도 지역의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이 때 그가 지은 한시 '적성촌에서'는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김정희 : 충청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2011년 11월에 그가 친필로 쓴 암행어사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 이건창
1.3 관련 항목
2 화투의 섯다 룰에서 광땡만 잡을 수 있는 변칙 족보
4월 새, 7월 멧돼지 조합
말 그대로 광땡(1-3 1-8 3-8)만 잡을수 있다. 그외에 잡을수 있는건 망통없다!
지역마다 룰이 다르기 때문에(다른지역 의 망통 인 3 과 7 인 경우도 꽤 있다.) 낯선 곳에서 화투할때 확인없이 함부로 들이밀진 말자.
3 각종 스포츠에서 최강팀에게만 강한 팀
2번에서 유래되었다. FIFA 월드컵의 경우 조별리그에서 그 월드컵 우승팀만 이긴 팀이 이에 해당되며 각종 대회에서도 대회 초반에 우승팀만 이긴 팀이 해당된다. 예를 들면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 지금으로 치자면 국정원이나 FBI 같은 정보국 요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을 듯. 어차피 Agent의 라틴어 어원이 '행하다'라는 뜻의 (한자의 다닐 행 자와 모든 의미가 같다. 행동하다의 뜻과 가다의 뜻이 다 있는 것까지) Agere에서 온만큼 의외로 적절한 번역인 셈.
- ↑ 위키피디아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 ↑ 《성종실록》 권111 10년 11월 23일 갑진 2번째 기사. [1]
- ↑ 봉서는 대개 한양 안에서 뜯는 것이 대부분. 엄격하게 따지자면 당시의 개념으로는 4대문 안이 한성이었고, 그 밖 10리까지는 '성저십리'라고 해서 한성부 관할의 한양으로 취급했으며, 그 밖을 경기도로 취급했다.
- ↑ 10마리는 왕 전용, 영의정은 7마리까지, 암행어사는 보통 2~5마리 정도.
- ↑ 순안현감 이문용은 박내겸에게 결국 봉고 조치를 당하고 조정에 봉고 조치가 보고되자마자 관례대로 파직당했다. 여담이지만 주인의 파직으로 끈떨어진 신세가 된 이문용의 하녀가 서낭당에 가서 "내 밥줄을 끊은 암행어사에게 천벌을 내려주세요" 하고 빌었다는 이야기를 후에 박내겸이 듣고 씁쓸해하는 내용도 일기 뒤쪽에 나온다.
- ↑ 암행어사에게는 수령의 직무정지 명령에 해당하는 봉고 권한만 있었다. 춘향전처럼 현장에서 봉고파직까지 할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암행어사의 봉고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 왕명으로 수령을 파직시키고 신임 수령을 임명하는 것이 공식 절차였다.
- ↑ 《영조실록》 권9 2년 5월 6일 정유 4번째 기사. [2]
- ↑ 오히려 어사들은 각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외진 곳보다는 일부러 인파가 많은 곳을 선호하였다. 물론 그 점이 어사 입장에서는 더 편하기도 하고...
- ↑ 앞서 서술했지만 이분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존모델이다!
- ↑ 병인양요 당시 순절한 이시원의 손자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도들을 나라를 어지럽히니 마땅히 진압하되, 무고한 백성들까지 해를 입히는 탐관오리들은 더욱 엄중히 벌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서재필이 국내 입국했던 시절에 그의 무례함과 위선을 비판한 적이 있다.
- ↑ 붉은 쇠줄은 관아에 소속된 정식 포졸만이 사용할 수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공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 ↑ 주모자는 효수되고 나머지 2명은 감형받아 노비로 전락. 성수묵 또한 당시의 책임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무안현감에서 파직되었다.
- ↑ 《순조실록》 권32 31년 4월 5일 정해 2번째 기사. [3]
- ↑ 비공식적 기록으로는 1899년 윤현섭을 충청남도 어사에 임명했다는 봉서가 존재한다. 봉서가 진품이라면 실질적으로는 윤현섭이 마지막 어사인 셈이다.
- ↑ 그런데 막상 드라마 본편에서 상도는 큰 비중이 없고 암행어사의 종(임현식 분)이 더 비중이 크다.
- ↑ 소매 사이로 보이는 술(장식용 패물..취하는 술이 아니다.)을 보고 그게 마패인줄 알고 모두들 암행어사로 착각 했는데... 그건 그냥 장식용 일뿐 그것도 검 도 아닌 왠..피리(대금 으로 보이는)였다.
- ↑ 오히려 기밀이 누설될까 봐 이몽룡이 꾀를 써서 방자를 옥에 가두는 판본도 있다. 방자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