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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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에서 고려시대 문하시중, 조선시대 의정부의 삼정승(三政丞)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같이 재상에 해당하는 최고위 관료를 이르는 말. 삼공(三公)으로도 불렸다. 과거 중국의 경우엔 승상에 해당한다. 다른 자세한 설명은 재상 문서 참조.

2 삼정승

2.1 영의정

  • 자세한 내용은 영의정 문서 참조.

2.2 좌의정

이 문단은 좌의정 · 좌상(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의정, 우의정과 더불어 최고 간부인 의정부 3정승 중의 하나. 영의정 아래, 우의정 위의 관직이다. 좌상(左相)이라고도 불렸다.

일반적으로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위관직으로 실권도 대단했을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은 신료들에게 원로로, 조정의 영수로서 존경은 받았지만 실권은 크지 않았다. 자세한 점은 영의정 문서 참조. 오히려 실권은 좌의정이 삼정승 중 가장 강력했다.

의정부는 6조 판서(장관)들을 감독하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그 중 좌의정은 판이조사를 겸직해 조정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이조의 판서를 감독했다. 6조의 서열 중 가장 높은 이조를 감독하는게 좌의정였던 것. 이는 KBS의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이조판서로 승진한 류성룡에게 좌의정 정철이 자신에게 업무를 보고할 필요가 없이 소신대로 하라는 대사로 좌의정의 막강한 파워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영의정 이하 의정부 찬성 참찬들도 판사직을 겸하는 경우가 있었다.

실제로 조선 시대 강력한 권한(권력)을 행사한 권신들을 보면 영의정보다는 좌의정을 역임한 인물이 많다. 의정부서사제로 조정을 좌지우지해 수양대군의 눈밖에 났던 김종서단종 때 좌의정이었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해서 출세를 한 김질 역시 좌의정까지 지냈다. 세조 때의 공신 이사철 역시 좌의정까지 지냈고 계유정난에 무사로서 큰 공을 세운 홍달손도 좌의정이었다. 심지어 세조의 책사였던 권람도 최종 관직이 좌의정이었고, 또 세조의 사돈인 한확도 좌의정까지만 지냈다. 성종폐비 윤씨 사사에 앞장섰던 윤필상도 당시 좌의정이었다. 또 훈구파이자 정희왕후의 측근이던 홍응 역시 좌의정까지 지냈다. 또한 무오사화 당시 실록청총재관이던 어세겸도 좌의정까지만 지냈다.

또한 연산군의 처남이던 신수근중종조광조를 추천한 안당, 그리고 심정이행, 조선사 최강의 권신이라 할 김안로도 좌의정까지만 지냈다. 명종을사사화를 주도한 3인방 중 이기도 당시 좌의정이었다. 또 인조반정 공신이던 구인후도 무관 출신으로, 좌의정까지만 지냈고 또 인조반정 공신이자 서인의 거두였던 원두표 역시 좌의정까지만 지냈다. 또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도 좌의정까지만 지냈다. 그리고 숙종의 외척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인 민정중도 좌의정까지만 지냈다. 또 귀성군을 영의정 자리에서 끌어내릴때 적극적으로 동의했던 박원형도 당시 좌의정이었다. 장희빈이 사사될 당시 강력하게 사약을 주청했던 이세백도 좌의정까지만 지냈다. 또 노론 4대신 중에 이이명, 이건명도 좌의정까지만 지냈으며, 영조 때 노론 영수 민진원도 좌의정까지만 지냈다. 또 노론 선봉 이관명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홍봉한도 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좌의정에 있었고, 동생 홍인한 역시 좌의정을 역임했다.또 노론 벽파의 영수급인 김종수도 좌의정일 때 영의정이던 채제공과 대립했다. 또 채제공도 좌의정으로 있을 때 독상 체제로 정조를 보필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참고로 판사제도는 고려 시대때 부터 내려오던 제도로 중서문하성의 장관들이 상서성의 판사를 겸직하며 상서성을 의미없는 기구로 만들고 철저한 재추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는데 악용 되었다. 이에 조선은 고려 문하시중이 겸직하던 판이부사를 no.2인 좌의정에게 넘기고 영의정의 권한을 약화시키면서 좌의정이 no.1인 영의정의 눈치를 보게하는 환경을 조성해 6조가 소신껏 일할 수 있게한 것이다. 실제로 6부가 유명무실했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철저한 6조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 졌다.

2.2.1 나무위키에 등재된 좌의정

2.2.1.1 나무위키에 등재된 창작물에서의 좌의정

2.3 우의정

이 문단은 우의정(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의정, 좌의정과 더불어 최고 간부인 의정부 3정승 중의 하나. 3정승 중 가장 아래다. 우상(右相)이라고도 불렸다.

우의정은 병권을 담당한 병조판서를 감독하는 판병조사를 겸직했다. 6조 중 병조는 조선 건국 초창기에 인사권을 담당한 이조 다음 가는 서열이었으나, 이후에는 국가의 의례를 담당한 예조호구, 회계를 담당한 호조보다도 서열이 떨어졌다. 그러나 병조는 병권(군권)을 행사하는 만큼 그 중요성이 결코 떨어지지 않았고, 특히나 반정(쿠데타)을 꾀할 때는 반드시 포섭해야하는 기구여서 이를 감독하는 우의정의 역할을 대단히 중요시 했다. 형벌재판형조의 담당이었으나 국문(형벌)과정에서 동원되는 의금부의 군사는 모두 병조를 거쳐갔기 때문에, 우의정이 의금부의 수장인 판의금부사를 겸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소윤의 영수로 척신정치를 행한 윤원형은 영의정이 되긴 했지만 정작 권력이 최강이던 시절에는 우의정이나 영중추부사같은 자리에 있었다.

좌의정이 인사권으로 6조를 견제했다면(6조 직계는 왕권 강화이므로, 왕권을 견제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음), 우의정은 의정부 정승이지만 병권과 의금부에 대한 권한으로 때론 왕권을 지탱했으며, 영의정은 실권은 없었으나 다른 정승인 좌의정과 우의정에 대한 인사권을 왕에게 주청할 수 있었다.

2.3.1 나무위키에 등재된 우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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