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시대 순조시절 11년(1811) 홍경래가 평안도 지역에서 일으키고 12년(1812)에 진압된 민중 봉기.
2 난의 원인
역사학계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2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인 모순이고 또 하나는 한때 지역감정으로 남아 있던 서북 지방의 사회 경제적 특징이다.
고려 시대의 하급 관리에서 그 기원을 시작하는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조선 시대에 있어서 서북 지방은 여요전쟁 등의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서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해 왔으며, 결정적으로 후기에는 몽골의 침략에 아예 직통으로 갈리고 동녕부라는 이름으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얻어맞았기 때문에 고전적 양반이라는 계층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1] 심지어 북방 출신인 태조와 태종 시기부터도 무시당하였고[2],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시행된 사민정책이 시간이 지나 중종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죄인의 가족을 서북 지방으로 보내 버리는 형태로 변질되면서 완전히 유배지로 낙인찍혔다.[3]
설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고...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서울 사람은 서북 지방과 혼인하지 하거나 벗하지 않았다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고,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에서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 시대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성리학의 전파가 늦어져서 서북 지방에서는 양반들도 소학을 읽지 않는다는 장계가 올라올 정도에 이른 것이다. 결국 서북지방은 양반세계에서 완벽하게 왕따당한다.
일반적인 인식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서북 지방 출신은 승진의 길이나 마찬가지인 청요직에 임명될 수 없었고, 그 결과 조선후기 당상관 후보자의 명부인 도당록(都堂錄)에 서북지방 출신민으로 이름을 올린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관의 경우에는 상황이 좀 나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북 지역 차별은 여기에도 존재하여, 서북 지역인들은 문의 숭문원에 해당하는 선전관의 직책에 임명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서북 지역인들은 하급 무관만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그나마 고위가 아니더라도 관직을 얻어야 하는데 관직을 얻으려면 엽관 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이러다가 몰락한 인물이 홍경래군에서 가장 전형적 양반에 가까운 김창시이다. 김창시는 진사까지 지냈지만, 엽관 활동에 실패해서 집안을 말아먹었다. 게다가 엽관 활동을 벌일 능력이 없다면 당시 이미 망조를 보이던 과거에 합격하여야 했으므로 성공 확률이 더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이 코스를 밟지 못한 이들은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몰락해서 잘해야 훈장이나 묫자리 잡는 지관, 의사가 되었고 자칫하면 농민이나 상공업자로 전락해서 군역 걱정을 하는처지가 된다. 심지어 난 당시에 부원수로 칭한 김사용은 향반 출신이지만 가난해서 결혼도 못한 경우이다. 이게 현대여도 할 말이 없을 판인데, 대를 잇는 개념이 강했던 조선 시대 양반의 기준이면……. 지도자인 홍경래가 대표적인 인물로 왜 홍경래의 난과 그 이후에 정감록과 정진인설이 뻔질나게 등장하는지의 가장 큰 이유이다. 애초에 홍경래부터가 과거에 실패하고 풍수장이로 묘자리 보면서 전국을 떠돈 케이스이고, 주력 참모인 우군칙 역시 풍수 경력이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서북 지방에서 사족이 완전히 사라진 결과 다른 지역과는 달리 향인이 향권을 장악하였다. 잉류 지역으로서 부세를 중앙에 운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서북 지방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부세 행정에서 향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이 지역에도 수령과 결탁한 신향과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고, 서북 지방 수령들은 다른 지방 수령에 견주어 더욱 긴밀하게 세도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탈이 매우 심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수탈방법으로 매향(賣鄕)과 민고(民庫)가 등장한다. 매향은 수령이 돈 많은 상인들에게 향임을 강제로 떠넘기는 것이다. 가장 천시받던 이들을 향인으로 올려주는 것이니 일종의 승격이지만 이 과정이 강제적이고 워낙에 돈을 많이 뜯었으면서 동시에 광범해서 문제가 되었다. 이중 가장 압권은 이미 매향이 문제가 되었던 상황이엇던 정조 14년 정주목사 오대익이 총 4만 6천 8백 49냥을 받고 무려 400 여명을 향안에 올린 것이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 엽기적 사건의 배경이자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 중 하나가 민고였다. 중국으로 연행가는 사신의 경비와 각 읍의 경비를 서북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충당하게 한 창고가 바로 민고였다. 조선초에는 잦은 연행 자체로 인한 부담 자체가 엄청났고, 조선 후기 연행이 감소할 무렵에는 민고가 수령의 사금고화 되어서 뇌물창고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뇌물 문제로 텅 빈 민고의 부족분을 향인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매향으로 한 번 걷고, 그 매향으로 생긴 향임들에게 부족분을 메울 책임을 전가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수탈방법은 서북민에 대한 차별이라는 피해의식과 결합하기 딱 좋았다. 당장 이대로라면 서북민인 향임과 중앙출신인 수령이라는 대립구조가 형성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북민들은 이 정도 지위에 오를 양반 자체가 씨가 마른 상황이다. 당연하게도 중앙 정부에 대한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이런 상황 때문에 서북지방의 봉기는 말 그대로 곤궁으로 자연발생한 남부의 농민봉기와는 다르게 향임들 주도로 일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함경도에서 일어난 북청과 단천의 농민봉기(1808년)의 주도층도 향임이었고, 홍경래의 난 얼마 전에 황해도 곡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 역시 향임들이 주도한 수령에 대한 반관투쟁이었다.
덕분에 홍경래의 난 당시 향임들은 적극적으로 홍경래 군에 내응하였기 때문에, 홍경래군이 세력 확장하는 과정에서는 거의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이지 않는 파죽지세를 이어가는 계기가 된다. 다만 그런만큼 이탈도 빨라서, 홍경래군의 몰락은 이 향임들의 배반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홍경래 군의 몰락과정에서 향임층은 내응을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관군에 협력하여 의병까지 조직하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서북지방은 농업 생산력이 타지에 비해 비교적 높고 자원이 풍부하여 수공업과 광업이 활성화되었으며 특히 청나라와의 교역 과정에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공무역 외에도 사무역이 대규모로 진행되면서 평양, 개성, 의주, 안주, 정주 등이 중심지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잠채를 통한 광산업 역시 극도로 발달하였는데, 이 역시 상인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송상과 만상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은 독자적인 연결망을 갖추고 있었고, 서북민 차별철폐를 기치에 둔 홍경래의 반란의 이면에 있어서 송상과 만상이라는 서북지방 상인들과 한양의 경강상인을 중심으로한 중앙의 특권상인들간의 대결구도로 파악하는 견해도 늘고 있다. 이런 상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평안도의 거부였던 이희저로 초기 농민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선금으로 1~3냥을 지불하였는데 그 돈 역시 이 거상들에게서 나왔다.
다만 이들은 난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봉건화가 진행된 홍경래 군에서 안습의 존재가 되어서, 대부분의 상인들은 아무런 직책도 없었고 가장 주요한 인물인 이희저마저도 후방에서 군량이나 대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만다. 뒤에서 무슨 협약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희저가 홍경래와 우군칙에게 이용당했다'라는 소문이 도는 지경에 이른다. 정사에서도 이희저가 홍경래에 정감록 때문에 낚였다는 식으로 처리되었다. 다만 상인층 역시 향임층만큼이나 머리가 좋아서인지 이탈이 빨랐고 반란 진압후에도 상당수가 원상복권되었다는 점에서 그냥 뇌물 주고 뒷수습을 잘한 영향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조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16세기에는 직전법이 폐지되어 전주전객제가 소멸하고 지주전호제가 확산되었고 17세기에는 신분 질서의 동요와 유통경제의 성장으로 인하여 봉건적 지주전호제가 경제적 지주전호제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토지 소유에 있어서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농민층이 분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재정부족에 시달리던 조선 왕조는 부세 징수에만 급급하여 농민들의 체제이탈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무토불농층(無土不農層)이라 불리는 이들은 숙종 31년 경상감사의 장계에서 5만여, 충청감사의 장계에서 10만여가 언급된다. 기민(飢民)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땅 없이 떠돌면서 사회불만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 유난히도 빈발했던 각종 자연재해들은 이를 극대화시켰다. 1809년 발생한 기록적인 흉년으로 대대적인 기민이 발생하여, 1810년 순조실록에는 840만 1209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숫자가 언급되는데 이는 무려 그 해 말에 기록된 8부 5도의 총인구를 넘는 것이다.[4] 이런 이들은 삼남지방을 떠나서 서북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서북지방의 광산붐에 편승해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5] 그렇지 않아도 민고의 폐단에 고리대로 농민층의 몰락이 극심했던 기민들까지 몰려드니 서북지방은 그야말로 거지소굴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들이 가장 많이 몰린 것이 잠채, 그중에서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금광이었다. 홍경래군이 괜히 금광이 난다는 소문을 터뜨리고 농민들을 모집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국 이들은 돈에 고용된 광산노동자,[6] 또는 향임에 의해서 동원된 부대, 그리고 될대로 되라거나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홍경래군에 가담하여 세를 불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3 전개과정들
홍경래의 난은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될 수 있는데, 난을 주동한 세력 자체가 크게 변화되는데다가, 난의 성격도 크게 바뀌기 때문이다.
3.1 난의 전기
홍경래의 난은 1811년 12월 18일부터 1812년 4월 19일까지 5개월동안 진행되었다. 홍경래 난의 지도층에는 총지휘를 맡은 홍경래, 부원수로 불린 김사용, 광산을 경영하며 농민군 조직을 담당한 우군칙, 이념 지도를 담당한 김창시, 대상인으로서 물자 조달을 맡은 이희저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가산군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아 광산 노동자 모집을 구실로 군사를 모아 훈련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힘을 잘 쓰는 역사(力士)들인 홍총각,[7] 양시위, 김운용, 이제초 등[8]도 가담하였다. 조선 시대에 완전히 하급무관 양성소 취급을 했던 서북 출신답게 홍경래, 김사용 등 지도부는 상당히 전투적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모사로 취급받는 우군칙마저 칼 빼드는 모습이 기록에 남아있다. 완전한 문관은 진사출신 김창시 정도다. 여기에 더해서 역사 출신들은 농민층과의 연결고리로서도 그리고 일선지휘관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야말로 서북지방민들은 전투민족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와 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9]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10]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11]의 재주가 또한 이곳 서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토의 글을 빌었으니 사백년동안 서토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김모, 박모(박종경)의 무리[12]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13]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세상을 구제할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의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 신령함이 있었고 다섯 살 때에 신승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성장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여연에 머무르기 5년에 황명(皇明)의 세신 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병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14]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에 소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주,군,현의 고을원들에게 보내니 절대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15]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위 격문을 안주병사, 우후목사와 숙천부사, 순안현령, 평안감사, 중군, 서윤과 강서현령, 용강현령, 삼화부사, 함종부사, 증산현령, 영유현령에게 내리노라. 대원수[16]
10년에 걸쳐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들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불과 열흘만에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 정주, 태천, 곽산, 선천, 철산, 남창, 용천 등을 장악하였다. 이는 홍경래의 난이 보통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농민 봉기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잘 보여주며, 치밀한 계획하에 정부 전복의 목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런 난의 파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홍경래가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우군칙이 총참모, 김창시가 참모,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000명 정도의 봉기군중 대다수인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선봉대를 맡은 홍총각은 단숨에 가산·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그래서 홍경래군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한때는 진짜로 격문에 나온 5,000여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반란이 진행된 이유는 향임들과 상인등 여러 세력이 홍경래의 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성문을 내부에서 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관군이 다수 주둔한 의주나 안주같은 주요 지역은 점령하지 못했다. 원래부터 이런 곳은 일반 고을처럼 허술하게 관리되는 지역이 아닌지라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내응했다고 해서 성이 넘어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서 정부편인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봉기군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장 요해처인 영변에서 의견 대립으로 홍경래를 살해하려는 세력들이 발각되어 김대린 등이 처형되었다. 안주병영의 집사였던 김대린은 우군칙과 앞으로의 진격형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견이 무시당했다는 것만으로 미래가 없다고 판단[17]하고 배신하여 홍경래를 암습한다. 그리고 이 암습으로 지도자인 홍경래가 부상당한 결과 전 군이 멎어버린다. 덕분에 봉기군은 다시 군사를 정비하느라 전략적 요충지인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이런 틈을 관군이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전열을 정비하는 통에 제대로 된 편제를 갖추지 못한 채 관군과 격돌한 홍경래군은 12월 29일 안주성 공격을 앞두고 박천, 송림 전투에서 참패하여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부원수 김사용이 지휘하는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 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데다 송림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한 소식마저 날아 들어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또한 송림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해 온 관군에게 이제초가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과 함께 전사함으로써 그 동안의 승전으로 인해 병력이 2~3천 명에 이르던 북진군은 사실상 궤멸되고 말았다. 결국 주요 인물들은 남은 병력을 해산하고 정주성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반란군이 승리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붕괴된 이유는 여러 목적을 가진 다양한 집단이 한가지 목표를 위해 결집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난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잘 되면 승승장구하지만, 뭔가 일이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서로 발을 빼려 하기 때문에 한방에 붕괴되기 딱 좋다. 실제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향임층과 상인층이 먼저 발을 뺐고, 나중에는 의병까지 조직하여 되려 홍경래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3.2 난의 후기
이후 진압군이 초토화 전술로 밀어붙이면서 농민군은 연전연패하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진압군의 살육에 정주와 주변 지역인 박천, 가산지역의 많은 농민들이 정주성으로 들어와 100여일 동안 지도층과 함께 진압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이 농성과정에서 봉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초기 주도세력이던 향임층과 상인층이 이탈한 반면에 자발적인 농민층이 주도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지지세력층이 단일화하면서 난을 주동한 지휘부도 반란을 이어나가기 위해 내부에서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식량을 고루 배급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때문에 홍경래의 난을 농민전쟁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반란 자체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농성준비에 필요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의외로 정주성의 농성은 길게 이어졌다. 이는 진압군에 분격한 많은 민중들이 농성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관군은 홍경래의 난 전기때처럼 내부에서 내통자가 발생하기를 바랬으나, 이제 일치단결된 상황에서 그런 내통자가 나오면 미처 내응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거나 혼자서만 간신히 도망치기 일쑤니 관군 입장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완전포위된 상황에서 점점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므로 결국 정주성은 함락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농성이 엄청나게 치열했으므로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관군은 공성탑까지 동원하여 공세를 퍼부었으나 실패하였고, 종국에는 정주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고 1700근 이상이나 되는 화약을 묻어 성벽을 통채로 폭파시키는 발상까지 끌어내고서야 가까스로 정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홍경래는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로 처리되었다. 다른 지도자들 역시 모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농민들에 대한 처벌도 상당히 혹독했다. 정주성에서 체포된 이들은 총 2,983명이었는데, 이중 10세 이하의 남아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은 4월 23일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처형당했다.[18]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도 모두 노비로 전락했는데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공신들에게 분배했을 가능성이 높다.
4 의의와 한계
홍경래의 난은 체제 갈등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즉 단순한 계급적 저항이 아니라 계급 의식을 기초하여 일어난 최초의 봉기이다. 또한 홍경래의 난은 피지배층으로서 통치를 받아온 농민들이 봉건지배 체제를 부정할 수 있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저항 행위의 정당성과 승리에의 확신을 심어주는 일종의 감결사상으로서 홍경래 불사설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 동안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농민들이 정주성 농성 단계에서 능동성을 표출하면서 민중이 형성되는 초보적인 단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계급 의식의 성장을 통해 농민 항쟁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체제가 아니라 기층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때문에 정주성 항쟁시기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를 '평안도 농민 항쟁', '평안도 농민 전쟁', 심지어는 '홍경래의 혁명'이라고까지 칭하기도 한다.
한편 홍경래의 난은 봉건적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봉건권력의 교체에 우선 목표를 두었다. 즉 반정부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토지개혁, 신분개혁, 삼정개혁 등 반봉건을 위한 개혁 방안이 제대로 제시되지 못하였다. 또한 봉건적 사회 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차별만으로 여겨 삼남지방의 농민 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였다. 물론 난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후기에는 농민 항쟁과 비슷하게 성격이 바뀌면서 지휘부의 생각도 달라졌지만 이땐 이미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를 드러내는 사례가 정주성이 함락된 뒤의 모습이다. 정주성을 함락한 관군은 성 내의 향교, 사당, 관아 등이 거의 멀쩡하게 보존된 것을 발견했다. 이는 봉기군이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기존의 유교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항쟁 말기에는 만주의 청나라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위험성도 노출시켰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호병이 올 것이다라는 것은 초기부터 언급이 있었다. 이 호병은 사실 현실적인 청나라 군대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기자가 도읍했다고 해서 나름대로 자부심이 강했던 평양과 관련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자부하는 표현이었다. 즉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기 때문에 중국도 정통성이 있는 자신들을 지원할 것이라는 명분상 표현이었다. 그리고 정주성 농성기에는 더 자주 쓰이는데 이는 고립무원인 처지에서 농성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실제로 홍경래군이 청에 병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의 실질적 행동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19]
5 이모저모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민중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홍경래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언서 정감록을 전면에 내걸고 나선 최초의 농민봉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홍경래와 함께 수도 없이 돈 것이 정진인설로 대표되는 정감록이었다.
난중에 신천부사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했다가 재투항후 김창시의 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줘서 부탁한 다음 자기의 공으로 돌려 용서받으려고 했으나 그만 해당 사람에게 돈을 미리 주지 않는 바람에 들통나서 처형되는 블랙 코미디도 있었다. 김익순은 바로 김병연(김삿갓)의 할아버지이자 김병연이 평생 삿갓 쓰게 만든 장본인이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때 반란에 쓰인 물자에 대한 이야기와 반란군의 물주인 갑부 이희저의 자금력 이야기가 짧게 나온다.
평안도 박천군 한 가운데를 흐르는 대정강 일대에 금점판(금광)이 난다는 소문에 많은 유랑민들이 몰려들었는데, 사방 10리길에 걸쳐 엽전과 금싸라기가 널려있었다. 사람들이 이걸 주으면서 유인된 곳이 바로 다복동(多福洞), 여기서 유민들은 의식주(衣食住)를 제공받고 반란에 힘을 보탰다.[20] 관군이 정주성의 반란군을 소탕하는 데 걸린 4개월을 기준으로 - 쓰인 물자가 군량미 56,000섬, 각종 잡곡 5,700섬, 간장 388섬(큰 독), 소금 248섬, 잡아먹은 소 161마리, 그리고 백성들이 거둔 성금 14,500냥에 곡식이 214섬이었는데, 반란군 역시 이와 비슷한 자금을 들였다고 보면 거부 이희저가 댄 돈은 지금 가치로 족히 수백억원은 될 거라고 한다. 게다가 이 물자는 오로지 정주성 소탕전에서 쓰인 물자로 그 외에 홍경래가 점령했던 나머지 군들의 탈환과 여러 전투에 들인 군비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소설 및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상도에서 등장한 바 있어 임상옥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바 있다.
임상옥의 재주와 자금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상의 서기로 위장취업하여 임상옥을 포섭하려 했으나 임상옥이 이전에 만난 사람의 교훈으로 가담하는 걸 거절했으며 나중에 임상옥은 의주를 홍경래 군대로부터 지키는데 물심양면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야사로 추정된다. 최인호 작가의 흥미를 위한 소설적 장치까진 아니고, 이전부터 있던 이야기긴 한데 근거가 크진 않다. 소설에서는 나중에 이 일에 연류돼서 사실상 은퇴하는 걸로 처리한다.
1980년대 초반 신동아에서 두령격인 홍총각을 주인공으로 한 에로 역사 소설 반역이 연재되었으나 높으신 분들 보기에 제목이 안 좋아서 홍총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1990년대 재발간된 단행본은 이전 제목대로 반역이라고 했다. 극화로 만든 장면 설정을 제외하고는 나름 역사 기록에 충실하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를 정권의 핵심으로 보는 북한에서는 홍경래를 높게 치는 편이다. 그래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평안도 분리운동이라서 그런가[21]
최항기 작 홍경래의 난이라는 소설이 나와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은 편. 홍경래가 조선의 현실에 실망하고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서자 출신 우군칙과 합세하여 십년에 걸쳐 난을 준비하고 홍총각, 이희저, 김창시, 김사용을 모아 군사를 꾸리고 가산군수 정시가 눈치를 채자 봉기하여 한때 승승장구하지만 역사대로 결국 송림과 사송야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기세가 꺾이고 마침내 정주성에서 갇혀 농성하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수십년의 세월을 소설화했다. 괜찮은 퀄리티지만 옥의 티나 오류가 군데군데보이고 노론 음모론을 여과없이 수용해서 확 깨진다. 여기선 홍경래와 도모했는지 확실치 않은 박종일의 거사를 박종일과 홍경래가 젊은 시절 인연이 있었다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느 정도 연계가 있는 것으로 처리한다.
위키백과에서는 묘하게 홍경래의 난에 관하여 한국어 문서 이외에 토막글이기는 하나 태국어 문서가 있다.
홍경래의 난을 다룬 만화도 있었다. '바둑 스토리', '발바리의 추억'으로 유명한 극작가 겸 만화가 강철수 작가가 1970년대 중후반에 <민중 속의 혁명아>라는 제목의 문고판 단행본으로 발표한 작품으로, 작가의 명성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작이다. 주인공 홍경래는 여자친구인 '달래'를 부호의 첩으로 빼앗기고 과거에도 급제했었으나 서북인 차별로 급제가 취소된다. 이후 임꺽정 관련 픽션 비슷하게 동료들을 모으는 과정이 길게 나오며 결말은 역사와 같다. 정주성 벽이 화약에 폭발하며 홍경래는 넋을 잃고 관군들이 물밀듯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그 등 뒤에서 홍경래의 처자식들과 달래가 죽음을 맞이하는 비장한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2016년부터 다음에서 연재되는 봉이 김선달에서도 다뤄지고 있다. 김선달의 제자가 홍경래 군에 가담하였고, 김선달의 일가와 임상옥 등이 말려든다.그 과정에서 세도정치를 비롯한 썩은 정치를 보게 된다
웹소설 원작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주인공인 홍라온이 홍경래의 여식이란 설정으로 나온탓에 이때문에 몸을 숨기기 위해 남장을 한것으로 추정된다.
6 관련 항목
- ↑ 청야전술이 주된 전술이었기 때문에 농사도 좀 짓고 해서 경제력이 상승하려 하면 전쟁 터져서 다시 갈리고의 무한반복.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 거란, 몽골, 홍건적의 침략 등등 수많은 네임드 사건이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 ↑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와 있는 내용에는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는 '서북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 까닭으로 평안, 함경 두 도에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문제는 정작 태조 이성계 자신이 서북보다도 차별받은 동북면 출신이므로 그런 명령이 실존했을지는 의문이 크다는 것. 이에 대해서 후에 태조 이름을 팔아서 서북 차별에 정당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다만 서북이라는 표현은 평안도뿐만 아니라 함경도, 황해도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 ↑ 과거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본 시각, 혹은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본 시각을 생각하면 딱이다.
- ↑ 진휼을 마친 이후인 <<순조실록>> 순조 10년 5월 27(경진), 47 집 658 면의 기록에 따르면 ‘수원이 14만 1천1백45구口, 내하전 별순 2만 7백 87구, 광주가 4만 5천 3백 12구, 경기와 여주 등 28읍에서 38만 7천 8백 89구, 호서의 평특 등 50 읍진과 역에서 1백 31만 1천 9백 59구, 호남 전주 등 90 읍진이 4백 76만 4천 4백 57구, 영남의 경주 등 71읍진과 기민이 1백 72만 9천 6백 60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모두 840만 1천 2백 9명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순조실록>> 순조 10년 12월 30(경술)에 기록된 한성부에서 올린 인구 조사 기록이다.‘경조(京兆)에서 민수(民數)를 바쳤다. 오부(五部) 및 팔도(八道)의 총 원호(元戶)는 1백 76만 1천 8백 87호였는데, 남자는 3백 75만 4천 8백 90구(口)이였고, 여자는 3백 82만 8천 1백 56구(口)이였다.’남자와 여자를 더한 총 인구수가 758만 3천 36명이다. 기민과의 차이는 무려 81만 8천 1백 63명이나 된다.
- ↑ 이는 현대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몰락한 농민들의 상업적 잠채로 연결되는 모습이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 이후 몰락 농민이 일거리를 찾아 임노동자로 변하는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은 잠채가 산업발전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만….
- ↑ 앞서 언급한 것처럼 거상들에 의해서 1~3냥 정도의 선금을 받은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 ↑ 洪總角. 또는 홍봉의洪鳳儀, 홍이팔洪二八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홍총각은 말 그대로 총각의 음차이고, 홍봉의는 나중에 가져다 붙인 이름이 아닐까 추정된다.
- ↑ 이중에서 양반출신은 몰락양반으로 추정되는 이제초 한 명으로 나머지는 모두 농민출신이다.
- ↑ 정묘호란 당시 용골산성에서 분전했던 의병장
- ↑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당대에는 상당히 명성이 높았다. 인조대에는 성균관 사업(정 4품)에 제수되었고 상당히 후대인 고종대에 이조판서로 추증(1883)되기도 했다.
- ↑ 역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 ↑ 당시 외척으로 안동 김씨 급은 아니지만 권세가 셌던 반남 박씨들을 말한다.
- ↑ 혜성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807년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관측 기록이 자주 보인다.
- ↑ 정감록 사상을 이용한 것으로, 홍경래는 정시수 또는 정제민이라는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의 명을 받아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정진인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따위는 그냥 밟아버릴 수 있지만, 자비로우신 분이라 대신 대리로 자신(홍경래)이 나섰다는 것.(...)
- ↑ 당연히 실제 반군의 수와 질을 뻥튀기한 과장이다. 그냥 5000명도 몰래 양성하기엔 대단한 규모인데 철기(鐵騎)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 ↑ 홍경래의 난 당시의 격문으로 내신, 수능을 불문하고 홍경래의 난을 문제로 낼 때 단골로 발췌 및 요약되어 나오는 사료 중 하나이다. 그만큼 이들의 봉기 의도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 한계(반정부에만 국한되었고 반봉건은 내세우지 못했으며, 평안도 지역 차별만 내세워 스스로를 지역 고립시켜 지역에 국한된 반란에 불과했다는 것 - 이것은 그가 이 격문을 평안도 전역에만 보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등)도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다.
- ↑ 김대린은 (자기가 잘 아는 곳이라 그런지) 안주부터 재빨리 쳐들어가자고 했지만 홍경래는 모사인 우군칙의 조언에 따라 김대린의 의견을 묵살한다.
- ↑ 이건 기록에도 남았고 나중에도 비슷한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 굉장히 예외적인 케이스다. 반란의 주동자나 핵심 가담자는 사형이 일반적이지만 그 외의 반란 가담자를 모두 죽인 사례는 흔치 않았다. 수천, 수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원군 때 천주교 신자 8천 명을 처형한 바 있으나 이 경우는 반역과는 관계 없이 다른 사안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 ↑ 최항기의 소설 홍경래의 난에서는 이 호병이 청나라 병사들이 아니라 만주의 마적단을 의미하는 걸로 나오는데 홍경래가 특사를 보내 이들을 고용하려 했으나 선금으로 들고간 5천냥은 날로 먹었을 뿐더러 10만냥을 선금으로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와 결국 무산된다.
- ↑ 이후 후세사람들은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인 길을 '금싸라기 길', '엽전 길'이라고 불렀다.
- ↑ 농담이 아니라 북한에서는 평양을 중심으로 했던 묘청의 난도 꽤 높게 친다. 김일성의 난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평안도 3대 분리운동으로 묘청, 홍경래, 김일성이 있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