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

鄭文孚
(1565~1624)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의병장. 현대 사람들에게는 임진왜란 당시 북관대첩을 주도한 의병장 이미지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義)

2 생애

15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585년 생원이 되었고, 1588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한성부참관이 되었다. 문관으로 시작했지만 관직은 무관으로 시작했는데, 이후 1589년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했다.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1591년 함경북도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鎭)을 순찰하였다. 이 때의 관직은 정육품 무관직인 북평사.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로 피난한 임해군순화군의 깽판으로 인해 국경인, 국세필, 정말수 등은 이들을 오히려 사로잡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함경도에 임관하고 있던 정문부는 이 사실에 격분, 의병을 일으켜 경성과 회령에 주둔하고 있던 이들 무리를 처단했지만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병력이 한참 모자랐다. 그러나 열세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길주성을 포위하고, 이후 일본군을 상대로 2차례 승리(석선령 전투, 길주 전투)를 거두면서 일본군이 함경도 지역을 퇴각하게 만드는 북관대첩을 이루게 된다. 이런 전과가 가능했던 것은 정문부의 지휘도 있지만 함경도에 모집한 의병들이 다수의 관군 출신들이 가담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북관대첩의 성과에 비해 정문부는 선무공신에도 책봉되지 못했고 단지 영흥부사로 승격된 것에 그쳤는데, 이는 그의 공적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순찰사 윤탁연의 반대가 작용해서 승진으로 국한된 듯. 정문부도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1599년 장례원판결사와 호조참의를 겸했고, 1600년 용양위부호군이 되었다. 이후에도 예조참판, 장단부사, 안주목사 등이 되는 등 1615년까지 관직활동을 겸했지만 북인의 정치문란을 통탄하며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귀, 전주부윤이 되었고 1624년 부총관이 임명됐으나 병으로 관직을 받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정문부는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아 사망한다. 연루된 이유는 그가 지은 초회왕의 시가 이괄의 난에 관련있다는 죄목인데...안습

다행이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으로 신원이 복구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농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