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군

順和君
1580~1607

1 개요

조선왕자. 선조후궁 순빈 김씨(順嬪金氏) 사이에서 태어난 6남. 본명은 이보(李𤣰). 사람을 잡아다 폭행하고 살해하기를 즐기면서 일반인이라면 수십 번 죽어 마땅한 악행을 수도 없이 저질렀지만, 왕자이기 때문에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던 터라 왕실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기록들을 요약하면 '살인을 포함한 온갖 범죄를 대놓고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권력의 보호를 받을 경우 어떻게 되는가?' 일것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악행의 시작

순화군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잔혹한 성품이였는데, 후술할 수원에서 벌인 살인사건을 두고 아버지 선조가 이렇게 회상했다.

“내(선조)가 말하는 것은 미안하긴 하나, 내가 만약 말하지 않으면 조정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순화군)의 성기(性氣)는 극히 이상하여,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잔인하였다. 이제 저곳에서 하는 일이 모두 사람을 때려 죽이는 짓으로 잔혹하기 그지없으니, 더욱 괴롭기만 하다. 비록 주색잡기(酒色雜技)와 같은 것에 광패(狂悖)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새나 짐승일지라도 반드시 잔인하게 상해시켜야 만족해 하였다. 대체로 이 또한 나 때문이니, 조정 대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가 없다.”

-선조 134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2월 10일(기묘) 3번째 기사

현대의 연쇄살인범들을 분석한 자료들을 보면 항상 어렸을 적 동물학대가 빠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400년전 순화군의 행동이 정확히 들어맞고 있다. 천성적인 사이코패스이자 극한의 새디스트에 가까운 인물이었던듯 하다. 소름

13살 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운동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강원도는 이미 함락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함경도로 가서 미리 파견되어 있던 형 임해군을 만나 함께 회령에 주둔하였는데, 자신이 왕자임을 내세워 함경도민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결국 열받은 국경인국세필왜군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서 임해군과 함께 왜군에게 넘겨버렸다.(…)[1] 다만 이때 나이를 감안해 보면, 이때는 그냥 개념없는 초딩 정도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후 약 1년 넘게 포로생활을 겪고 풀려났는데, 포로생활이 원인이었는지 안 그래도 막장이던 성격이 완전히 더 개막장으로 바뀌었다. 황해도 신계(新溪)에 머물 때는 10대 중반의 미성년자가 신계 주민들에게 트집을 잡아 하루에 여러 명씩 형장을 때릴 정도로 잔학해서 이이첨의 건의로 삭탈관직을 당할 정도였다. 10대 후반에는 전쟁 말기부터 살인을 저질러서, 전쟁이 끝날 때는 확인된 피해자만 여러 명일 정도로 완벽한 연쇄살인마가 되었다(선조실록 33년 7월 16일).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8년 12월에 원손[2]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사령으로 어찌저찌 살았지만, 인간성을 완전히 버렸는지 4달도 안 지나 또 사람 하나를 때려 죽이면서, 유영철을 능가하는 최악의 연쇄살인마가 되었다.(선조실록 32년 3월 25)일 이후로는 매년 사람을 10명 가까이 죽이는 연쇄살인을 넘어서 학살범이 되었다. 얼마나 인간쓰레기였는지 마찬가지로 쓰래기인 임해군이 그래도 이랍시고 순화군의 행실을 꾸중하자 순화군은 "전 남을 패기만 하지만, 형님은 집과 전답까지 빼앗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병림픽.

  • 순화군이 임해군에게 한 변명은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임해군의 약탈짓은 주로 그럴 듯한 집과 전답을 가진 부유층에 집중되었지만, 순화군의 강간, 폭행, 살인 등의 범죄 행각들(…)은 주로 가난하고 힘 없는 하인, 평민, 천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라면, 순화군은 사이코패스에 연쇄살인마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까 지가 그래도 더 나쁘지는 않다고 발언한 것이다. 아 그렇다고 임해군이 강간, 폭행, 살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쨌든 개소리라는데는 별 차이가 없다.

순화군 사건

2.2 궁녀 겁간 사건

이렇게 사람을 죽여놓고도 든든한 빽 덕분에 처벌할 인간이 없어서 지랄발광을 하던 순화군은, 마침내 궁궐에서 궁녀를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른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33년 6월 27일 선조의 첫 번째 정실인 의인왕후 박씨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던 7월 16일 순화군은 과거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대낮에 양어머니[3] 의인왕후의 관이 모셔져 있던 빈전(殯殿)[4] 옆 여막에서 강제로 붙잡아다가 겁탈했다. 순화군이 사람을 죽여도 아가리를 닥치고 있던 애비 선조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는지, 비망기로 아래같은 지시를 내린다.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가 어려서부터 성질이 괴팍하여 내 이미 그가 사람 노릇을 못 할 줄 알아 마음 속으로 항상 걱정하였는데 성장하자 그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었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살인을 하였으나 부자간의 정의로 아비가 자식을 위해 숨기며 은혜가 의리를 덮어야 하기 때문에 그때 나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유사(有司)의 조처에 맡겨두고서 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후 대사령으로 인하여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나 패악한 행동은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오늘 빈전(殯殿)의 곁 여막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궁녀)를 겁간하였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내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겠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군하(群下)를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

선조실록 127권 33년 7월 16일

아아……. 아들내미 때문에 속 태우는 건 왕후장상 고금을 막론하는구나!

결국 이 사건으로 수원으로 유배당했다. 그런데 실록을 보면…… 사실 순화군은 유배가 아니라 짤없이 사형 내지는 곤장+유배감이었다. 아래의 종부시(왕족들의 관리담당 기관)에서 선조에게 순화군을 어떻게 벌 줄지 검토한 기록을 보자.

종부시가 아뢰기를, "순화군(順和君)의 죄목을 의논하여 아뢸 것을 전교하셨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의 거상급승도범간조(居喪及僧道犯奸條)에 '부모의 상중에 있으면서 범간한 자는 평상의 범간보다 2등을 가중한다'고 하였는데 평상의 범간은 화간(和奸)이 장 팔십(杖八十)이며 유부녀 화간이 장 구십이니 이 죄목에 2등을 가중하는 것입니다. 동률(同律) 범간조에는 '모든 강간한 자는 교살한다' 하였으며 명례율(名例律)의 십악조(十惡條)에서는 '불효(不孝)란 부모상에 있으면서 스스로 가취(嫁娶)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전속록(大典續錄)》에는 '강상(綱常)의 범죄[5]로서 그 정상이 심히 중한 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6]한다' 하였고 수교(受敎)에는 '사족(士族)으로서(쉽게 말해 양반) 전가 사변에 해당되는 죄를 범한 자는 차율(次律)로 논죄하여 장 일백 유 삼천리로 한다' 하였으며 《대전》 금제조(禁制條)에는 '사인(士人)으로서 윤상(倫常)을 무너뜨린 자는 녹안(錄案)한다[7]' 하였습니다. 오직 이 율문밖에 달리 상고할 만한 율문이 없으나 빈소 곁의 여막에서 겁간한 죄는 더욱 중대한 것입니다. 아래에서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종부시 공무원들의 고뇌가 느껴진다.[8]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라고 하니 선조는……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를 외방으로 귀양보내고 법대로 녹안하라." 결국 법대로는 차마 못하고 만다……. 눈물겨운 부정.

선조실록 127권 33년 7월 20일

2.3 수원 유배

이때부터 순화군은 완전히 미친놈으로 취급되어 궁궐의 골치덩이가 되면서... 결국 수원으로 유배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왕도 손을 못 대는 망나니 왕자를 수원에서 어쩌라는 것인가? 수원에서도 왕자임을 내세워 위세를 부린 탓에 수원부사 따위가 단속할 도리가 없었다. 형구를 마음대로 꺼내가서 하인들에게 멋대로 형벌을 가하도록 해서 향리들이 죽을 지경으로 처맞았으며 관리들이 순화군을 피해 도망친 탓에 수원부의 행정업무가 완전히 마비되고 심지어 부사마저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단순히 유배시켜 놓는 걸로만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가택연금을 지시했는데 이랬는데도 불구하고 금부도사가 담장을 쌓을 때도 사람을 두들겨 패고 문을 잠그자 자기 손으로 직접 열고 나오는 등 여전히 제멋대로 굴었다.

처음 왔을 때 수원부사 최산립(崔山立)은 다른대로 옮겨지고 수원부사 권경우(權慶佑)가 부임해왔으나 부임하는 날 즉시 순화군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출관부터 하자 부사 권경우를 미워한 나머지 패악한 짓을 저지른다. 긴 을 차고 을 타고 달려와서는 기둥을 칼로 치면서 '부사(府使) 몸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더냐'고 협박을 하고 그 다음에는 하인에게 도장을 찍은 봉지 하나를 가져가게 했는데 그 안에는 먹으로 사람 머리를 그려놓고 '부사 권경우의 잘리운 머리통이다'라고 써 있었다. 권경우는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부의 업무들을 보지 못해서 결국 잘리고 말았다.

수원부사는 박이장(朴而章)으로 교체되었으나 여전히 순화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순화군의 집 궁문을 봉쇄해버렸으나 담장을 헐고 밖을 나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면서 채소밭을 맡고 있는 노(奴) 임동(林同)의 숙모를 잡아다가 직접 몽둥이로 20여 차례 두들겨 팼으며, 읍내에 사는 김영수(金永水)가 궁에 상직하러 나갔을 때 잡아다 들여서 두들겨 패고 옷을 불태웠다. 심지어 소고기생선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지기 노비 어리손(於里孫)의 가옥을 불태워 없애기도 했고 화공(畫工) 정업수(鄭業水)를 잡아다가 40차례 직접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또한 약주를 가지고 간 원금(元金)이라는 사람을 무수히 구타하거나 역시 약주를 가지고 온 계집종 주질재(注叱介)를 을 전부 벗겨 결박하고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장석을시(장돌똥 정도?) 사건을 벌인다. 군사 장석을시(張石乙屎)는 집에 질병이 돌아 맹인 윤화(允化)의 아내 맹무녀(盲巫女)를 데려다가 역신(疫神)을 쫓는 굿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화군이 이들을 잡아가서는 한 차례 형문을 한 뒤에 밤새도록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맹무녀의 위아래 이빨을 1개씩, 장석을시의 위아래 이빨을 9개씩 쇠뭉치로 때려서 깨부수고 집게로 잡아 빼버렸다. 무녀는 궁 안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장석을시는 이튿날 풀려났지만 죽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던 터라 아마도 곧 사망했을 듯.

결국 수원 사람들이 순화군을 피해 앞다투어 고을을 떠나 도망쳐서 수원이 망할 지경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서울로 불러들여 가택연금해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담을 허물고 나가 사람을 붙잡아다가 곤장을 치는 등 아주 개망나니 짓을 벌였다. 이때 임해군과 순화군의 악명들이 하도 높아서 이들을 사칭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까지도 다 나왔을 정도였다. 결국 사헌부를 비롯해서 순화군을 잡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선조는 아들의 이런 행각을 안타까워하며 계속 두둔하였다. 실록 그래도 성격이 워낙 흉포하여 고쳐질 생각이 없자 손을 쓸 수 없게 된 선조는 결국 군호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버린다.

2.4 서울로 다시 잡혀옴

서울에 잡혀와서도 훈련도감 소속의 포수와 무뢰배를 모아서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그들을 몰아 사람을 붙잡아서 두들겨 패고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다.

순화군 이보가 사람을 죽였다.

사관의 주석: 순화군 이보가 위리(圍籬)에서 벗어난 뒤부터 더욱 흉학(凶虐)한 짓을 마구하여 거리를 드나들면서 사람을 만나면 번번이 죽였었는데 이날에도 두 여인을 죽여 참혹한 독기를 뿌린 것이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진동하여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임금은 바야흐로 왕자(王子)들을 비호하기만 하여 감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 중한 배척을 가하였으므로 대관도 감히 논계하지 못하고 재상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출처:선조실록 37년 5월 25일 기사

아무튼 순화군은 애비가 범죄를 감싸주니 상태가 더 심해져서(...) 급기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쏘다니며 사람을 죽이고 곤장을 치길 먹듯이 했다. 순화군이 온다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도망치고 숨고 순화군 밑의 무리들은 이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해댈 정도. 이미 완전한 도적떼다. 다시 잡아 가두려 했는데 문 앞에 앉아서 닫지 못하게 시위를 벌이고 폐문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에게 죽이겠다고 협박해댔다. 당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순화군(順和君) (李𤣰)를 안치(安置)시킨 곳의 수리가 끝났으므로 봉쇄하려는데 보가 문에 버티고 앉아서 봉쇄하지 못하게 합니다. 반복하여 타일러도 끝내 듣지 않으니 본부에서 처치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선조가) '아몰랑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어쩌라는 거?

사관은 이같이 논한다 임금도 이를 억제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왕자(王子)를 죽이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백성은 무슨 죄인가. 오오, 강직하다!
(출처: 선조실록 177권 37년 8월 7일 기사)||

2.5 최후

결국 선조도 금위군 무사들을 보내서 단단히 가택연금했다. 이번에는 정말 단단히 갇혔는지 몇 년 간은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풍(風)을 맞아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어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가 마침내 죽음으로서 이 짓거리들도 끝을 맺었다.

1607년에 28세를 일기로 요절했는데 순화군은 그의 사후에 복권된 것. 후사가 없어서 익성군(益城君)의 아들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이 후사가 되었다. 이계여(李桂餘)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순화군의 부인은 인조 때까지 살아있었던 것 같다.

정조 때 희민(僖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평가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卒記)에 기록된 다음 문장이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준다. "비록 임해군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을 피하듯 했다".이를 통해 그보다 더하다는 형 임해군과 정원군이 얼마나 인간 막장인지를 짐작케 한다. 다만 임해군과 정원군의 범죄는 (살인과 강간도 저지르긴 했지만) 주로 폭행이나 협박을 통한 재산 강탈이라서 피해자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욕할 사람이 더 많았고, 순화군은 주로 평민층 피해자들이 많았고 대부분이 죽었기 때문에 욕할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어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선조의 아들중에 정상은 광해군하고 신성군 뿐인 듯 한데... 하긴 애비인 선조도 막장인데 광해하고 신성이 비정상이지 사실 신성군은 너무 어릴때 죽어서 기록이 안남은 측면도 있지만 같은 인빈 김씨 소생인데도 정원군을 세자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던 걸 보면 진짜 개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숙종실록에는 최유연(崔有淵)이라는 사람은 9살 때 집안의 계집종이 순화군에게 죄를 지었는데 순화군이 성을 내며 가장을 잡아가버리자 그는 부모에게도 묻지 않고 스스로 순화군에게 나가 빌고 빌어서 순화군이 화를 풀어 가장을 풀어주어서 효자로 칭송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보통 효자라 불리려면 기적에 가까운 무언가를 해야하는데 순화군으로부터 아버지를 살린 게 기적에 가까웠나 보다.(...)
  1. 국경인과 국세필도 역시 개념이 상당히 없기로 매우 유명한 작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랬다는 건, 정말 답이 없을 정도로 미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2. 이복형 광해군의 아들.
  3. 조선시대 후궁의 자녀들은 왕비의 양자로 들어갔다.
  4. 매장되기 전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건물.
  5. 패륜 내지는 풍기문란 관련 범죄
  6. 먼 외지로 귀양 보내는 것
  7. 이 녹안이란 일종의 블랙리스트이다. 현대의 명단공표나 성범죄자 알림e 같은 걸 생각하면 된다.
  8.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자라 감형을 하긴 해야겠는데(…) 법전을 뒤져보니 목 졸라 죽이거나(강간은 당시에도 중범죄로 사형을 했다고 한다.) 을 때려서 유배보내는 것 밖엔 답이 없으니 말을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