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1 개요

1624년 1월(조선 인조 2년)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정치적인 혼란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

조선 역사에서 한양 외부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한양을 점거한 유일무이한 반란이다.

정치권의 삽질로 베테랑 장교들이 주축으로 서로 죽이고 분열되면서, 조선의 국방력에 큰 구멍을 뚫어버렸다. 서인들의 가장 큰 병크 중 하나.[1]

2 배경

조선중기의 무신 이괄인조반정 때 군사적으로 지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총애를 받던 김류이귀처럼 다른 공신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2등공신으로 밖에 배정을 받지 못했다.[2] 물론 이괄도 그다지 잘한 짓은 없는데, 한성판윤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잠깐 치안담당으로 그를 시험할 때부터 난폭한 월권을 행하여, 당시 생존 자체가 불확실했던 서인들이 그를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하는 상황이 벌어졌다.[3]

이괄은 반정 당시에 집에서 벌벌 떨다가 막판에나 등장한 김류가 1등공신이 되고,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했던 자신이 2등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4] 하지만 인조는 가벼운 생각으로 청나라에 대비하여 이괄을 평안 병사로 보낸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이괄의 앙금은 더 커졌다.[5]

3 전개

3.1 금부도사를 죽이다

이괄이 북방으로 좌천된 이후에도, 정적인 김류이귀를 비롯한 서인들의 견제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무고를 받고 압송될 처지에 놓인다.[6] 당시 조선의 법으로 볼 때 이괄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관서의 병사들이 두려웠으므로, 주모자로 거론된 이들 중에 이괄정충신에 대해서는 체포하지 말라고 했으나, 이괄의 아들은 압송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분노한 이괄은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 라고 묻고,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살해하였다.

이괄의 반란은 붕당의 대립에 의해서 더욱 큰 사단으로 치닫게 된다.

3.2 뿌리가 미약했던 서인 정권

이괄이 난을 결심한 데에는, 이괄의 지지파였던 이귀의 갑작스런 배신도 한 몫을 했다.

인조는 '나의 이괄은 그러지 않아'라고 비호했으나, 이귀는 끝까지 이괄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귀는 자신의 문집인 묵재일기에서 '김류와 이괄의 뿌리깊은 불화가 결국 이괄이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라는 기록까지 남길 정도로 이괄을 후원하는 연기를 했으나, 실제로는 매우 강력하게 이괄을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김류증거도 없이 이괄을 잡을 수 있냐고 이괄을 비호할 정도였다. 그러자, 이귀는 김류가 이괄과 내통했기에 감싸고 도는 것이다라는 모함까지 하면서 강경한 주장을 반복했다. 이름이 바뀐듯하지만 분명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7]

어찌되었든, 서인 측에서는 이괄의 반란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8] 이때가 1월 24일. 이괄은 항왜 100여 명과 휘하 병사 1만여 명을 모두 통솔하여 영변에서 남하하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또, 김류의 주장에 따라서 반란군과 내통할 수 있다며 아무런 심문 없이 전 영의정 기자헌 외 37명을 처형하여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다.[9] 이때 이괄과 내통했다고 알려진 한명련을 잡아 압송하였으나 이괄이 구출해내어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반면 함께 이괄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은 안주목사 정충신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토벌군의 선봉에 섰다.

3.3 반란 초기, 양측의 삽질

반란 초기에는 변변한 전투가 없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임금님 옆 간신배'를 몰아내자는 식의 주먹구구식 궐기였으니 제대로 된 전략이 있을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괄이 택한 전략은 빠른 전격전이었다. 이괄군은 토벌군과의 전투를 극도로 회피하며, 철저하게 산속 오솔길만을 통해 진군했으며[10] 관군이 징발되어 빈 고을들을 빈집털이하여 쌀과 군수품을 노획하는 식으로 보급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괄군이 후발대로 남겨둔 김효신이 투항해버렸고, 한명련의 옛 부하들 역시 투항하는 바람에 이괄군은 숫자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장만이 자만하여 정찰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이괄군은 산속으로 숨어 이동했고 결국 평양을 우회해 배후로 돌아갈 틈을 내주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한 최고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11] 심지어 '애초에 네(장만)가 일을 똑바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진 안 됐는데 지가 일을 키워놓고 역적 토벌공신이라니, 아이고' 라는 사관의 기록도 있다. 그런데 뒤의 병크들을 보면 까일 만도 하다.

3.4 황주 전투

1624년 2월, 평양 남쪽의 요충지인 황주를 우회하여 진군하던 이괄군은 황주와 봉산 사이의 산산(蒜山)에서 관군에게 덜미를 잡힌다. 장만이 이끄는 관군의 본대는 중화로 나아가 이괄군을 쫒는 한편, 황해 감사 임서(林㥠)로 하여금 황해도의 병사들로 황주 동쪽에 위치한 상원과 수안을 지키도록 하였다. 황주 남쪽의 봉산에도 관군이 집결하여 이괄군을 막을 준비를 하니, 이괄군은 북, 동, 남 삼면으로 포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은 봉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관군에 의해 차단되자, 남쪽으로 이동하던 군을 되돌려 지나쳤던 황주로 되돌아가서 포위망을 살짝 흔들어본다.

뜻밖의 움직임에 당황한 장만은 선봉이었던 정충신에게 남이흥을 비롯한 지원군을 보내 맞서게 하였다. 하지만 정충신군은 기동 병력에 약간의 지원군만 받고 이괄군을 상대해야했으므로, 장만의 포위망은 단순히 관군의 병력만 여러 갈래로 분산시킨 채 정작 전투부대에는 큰 지원을 못 해주는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2월 2일, 황주 신교(薪橋)에서 이괄군과 관군은 처음으로 회전을 벌이게 된다. 정충신 남이흥 군은 급작스러운 작전 변경으로 휘하 병력만 이끌고 왔기에 규모가 크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기록된 정충신의 병력은 2천여 명 이하이며, 다른 장수들도 포함한 것이기에 추가 병력도 확실치 않다. 최대로는 8,000명을 초과한 이상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북방 병력들의 분포를 보면 굉장히 미심쩍은 수준이다.

그런데, 교전이 시작될 무렵 이괄의 병력이 대규모로 관군에게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실록에 따르면 교전 중 정충신과 남이흥이 반군을 향해 "옳바른 이치"에 대해 크게 소리치자 반군 1천여 명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이괄군의 선봉이었던 허전, 송립 등이 관군으로 투항해 왔다고 한다.[12] 흩어진 병사 1천여 명도 대부분 토벌군에게 귀순했으나, 관군이 투항병들로 어수선해져 진형이 무너지자 이괄은 과감하게 항왜들을 앞세워 기습하여 관군을 패퇴시킨다.[13]

의아하게도, 관군은 완전히 와해되고 장수 중에서 사상자와 포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는 전사 30여 명, 포로 30여 명에 그쳤다고 연려실기술은 기록하고 있다. 이토록 황당할 정도로 적은 피해자를 두고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충신은 패배 이후에도 큰 타격없이 이괄을 추격하기 때문에 정말로 피해 자체는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애초부터 관군 장수들이 적은 병력으로 싸움을 걸었고, 첫 번째 해프닝만으로도 병사들이 붕괴되어 장수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 자체는 아귀에 맞는다.

즉, 당시 관군 측에서는 장수들을 제외한 병사들이 싸움조차 하지 않고 흩어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한편으로 전투는 승리했을지언정 1천이 넘는 병사가 관군에 투항한 이괄군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은 결속력도 확인할 수 있는 전투이다.

3.5 마탄 전투

황주에서 패배한 것은 정충신의 선봉대뿐으로, 관군의 포위망은 아직도 건재했다. 또한 이괄군이 한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영변에서 황주까지 진군해왔던 거리보다 먼 거리를 가야 했다. 따라서 황주전투 이후에도 이괄은 소모전을 피해서 오솔길을 골라 진군하고, 정충신은 이괄의 뒤를 지독하게 추적했으며, 장만의 본대는 투항병들과 패잔병을 추스려 봉산 남서쪽 서흥에서 평안도병마절도사 이수일과 합류하는 전개가 이어진다.

이괄군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각 지역의 관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한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예성강을 건너야 했으므로 스스로 사지를 돌파해야 했다. 때문에 관군은 예성강을 방어선으로 설정하여 방어사 이중로 등의 방어군이 강을 지키고, 정충신의 추격부대와 장만의 관군이 뒤에서 협공을 가해 이괄군을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괄군이 예성강을 건너게 된다면 개성이 지척일 뿐 아니라 계속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관군의 입장에서 예성강은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설령 이괄군을 섬멸하지 못한다고 할 지라도 방어선이 제대로 형성되어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병사들이 집결하는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이괄의 반란은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14]

결국 이괄은 최대한 소모전을 피하고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으로 이동한다. 이중로 또한 이괄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마탄에서 미리 병력을 결집했다. 문제는 황해도 지방군이 나름대로 훈련 수준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이괄군에 합류한 북방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데다가, 지원군이라고 도착한 경기도 지방군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에 160리나 되는 거리를 강행군한 끝에 겨우 도착한 상황이라 절대로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이들의 후방에는 재편성을 마친 정충신군[15]이 이괄을 뒤따라 오고 있었지만, 당시는 한 겨울인 데다가 이괄군이 앞서 진격하면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불살랐고 배후에는 항상 복병을 두어 10리간의 간격을 유지했다. 게다가 이괄군의 진로가 험악한 산길이었기에 그 뒤를 뒤따르는 정충신군의 고생은 엄청났고, 결국 지치고 굶주린 정충신군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만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병사들이 먼 거리를 행군하여 피곤하니 안타깝고 염려된다고 썼을 지경이다.

결국 2월 7일, 마탄에서 관군은 이괄의 기습으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고 인조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16] 전투의 양상은 황주 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괄군은 기동력, 훈련도, 숫자까지 관군을 크게 웃돌았고, 순식간에 얕은 여울을 건너 관군을 격파해 버린다. 이중로를 포함한 8명의 장수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강을 건넌 이괄군이 역으로 관군을 강쪽으로 몰아서 포위해 버려 전멸한다.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항복했다고 하며 관군을 이끌던 장수들이 7명이나 전사했다. 이 중 이중로는 직접 조총으로 적병 7명을 쳐 죽였다(擊殺) 라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을 정도니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17] 그나마 살아남은 평산부사 이확(李廓)은 자신의 말을 일부러 죽인 뒤 피를 바르고 밑에 숨어 죽은 척 해서 살아남았을 정도니 관군의 참상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이 必要韓紙?[18]

이괄은 전사한 관군의 충성파 장수 7명의 목을 베어 뒤늦게 도착한 추격군에게 보내 일시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본 남이흥이 "잡혀간 우리 장수는 나와 잘 아는 자들이다. 이 얼굴들을 보니 모두 장수가 아니다. 틀림없이 군졸들의 머리인데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다." 라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여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7명이나 사망하고 반란군에게 효수까지 당한 사건으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19]

3.6 임진강을 넘어 한양으로

관군은 최종 방어선인 임진강이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기서도 엄청난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이괄군의 기동력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임진강 하류에는 이귀, 상류에는 수원부사 이흥립, 임진강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인 청석령에는 이서를 배치해놓았는데, 정작 도하지점인 임진나루에는 파주목사 박효립이 지방 포졸도 아닌 민병대 수백(...)만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20]

이괄은 이를 신속한 기동으로 돌파했는데, 일단 청석령에는 항왜 병사들을 보내 밤중에 소리를 질러 마치 포위되었다는 인상을 주어 이서군을 묶어둔 후에 샛길로 지나쳤으며, 너무나 신속한 나머지 이귀는 임진강 방어선에 도착하지도 못했고, 게다가 이흥립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여 통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괄은 임진강의 나루가 허술하다는 점을 간파해 신속하게 강을 건넜다. 결국, 인조는 급히 공주 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이괄은 2월 10일에 한양에 입성했다.

3.7 단 하룻밤 동안의 한양 생활

인조는 기자헌 외 37명의 정적들을 몰살시키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분이 없는 숙청이라며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다. 덕분에 이괄군은 환영을 받으며 한양에 입성했다. 이괄은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살아남은 북인들을 등용하려고 했으며,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려고 했다.

수도 한양을 내어준 관군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최고 지휘관인 장만조차 "군사를 물려 힘을 기른 다음 다시 싸우자" 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상 패배를 인정한 셈. 하지만 이괄이 한양에 입성한 것부터가 큰 실수였는데, 정충신이 예언한대로[21] 왕인 인조를 붙잡는데 실패하자 추격할 생각은 안하고 한양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스스로 관군의 포위를 기다리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22]

한양에 도착한 정충신은 후퇴를 주장하는 장만에게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안령(무악재)을 점거하면 한양을 내려다 보니 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높은 곳에 있으니 적을 이길 수 있다' 라고 주장했다. 이에 남이흥이 동조하여, 2월 10일 저녁에 정충신의 추격부대는 병사 2천 명으로 야음을 틈타 안령을 점거한다. 안령을 점거한 뒤 마치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이상없다는 봉화를 올려 반란군을 안심시키는 바람에 2월 11일 아침이 되어서야 이괄은 안령이 점령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3.8 안령 전투

정충신의 예측대로 이괄은 관군이 무악재(안령)에서 자리를 잡으면 한양의 민심이 이반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양 농성을 포기하고 정면으로 대결을 결심한다.

이괄은 안령을 점령한 정충신의 병력이 작은 규모라는 점을 파악하자, '저 정도 병력은 점심 먹기전에 처리 할 수 있지' 라고 생각하여 판을 크게 벌인다. 이괄은 방을 붙여 "큰 싸움이 있으니 싸움 구경하고 싶은 자는 오라, 관군을 정ㅋ벅ㅋ하겠다"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백성들도 얼씨구나하고 구경을 갔다. 이리하여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안령 전투는 2월 11일 아침(묘시. 5시 ~ 7시 사이)에 수많은 백성들이 몰린 가운데 펼쳐지게 된다. 이기는 사람 우리편!![23]

이괄의 군대는 북방에서 조련된 군대라 조선군의 정예였고[24] 관군은 이에 비해 급조된 병력인 데다 2천 명밖에 안 되는 등 전력이 딸렸기에, 선천부사 김경운이 전사하고 토벌군 전체까지 궤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애초부터 정충신이 높은 곳에 견고한 진지를 확보해놓았기에, 이괄군은 진격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고, 점심을 먹기 전에 끝내겠다던 생각과는 달리 전투는 4시간 가량 지속되면서 만만치않은 피해를 입는다.[25]

하필 이괄의 진영으로 엄청난 돌풍이 불었을 때, 돌풍으로 인한 먼지[26]시야가 확보되지 못해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 와중에 이괄의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자꾸 기우는 데다 부장인 한명련이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한다. 이때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란 군관이 탄환에 맞아죽게 되자, 남이흥이 기지를 발휘해 이괄의 깃발이 쓰러지고 한명련은 죽었다!! 너네들은 졌다!! 이괄이 도망친다!!라고 외쳤고 눈이 보이지 않던 이괄의 군대는 그 소리를 듣고 헐 우리가 정말로 졌나?하면서 이속오라 사기가 꺾여 이괄 등 지휘관들의 명령도 씹어버리고 전부 도망가 와해되고 만다(…). 이괄 측은 숫자, 숙련도, 사기까지 절대적으로 우세했음으로 더 공세를 퍼부었으면 정충신의 군대는 패배했을 것이고, 관군의 본대를 이끌었던 도원수 장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관군 입장에선 말 그대로 기적같은 역전승이었다.[27]

성벽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양 주민들은 이괄군이 패배하자 서대문을 지키던 이괄군을 몰아낸 다음 성문을 걸어잠가버렸고[28] 그리하여 이괄군은 한성을 뺑돌아 남대문으로 겨우 입성하나 이젠 지킬 병력이 없어서 한성에서 물러나게 된다.[29]

이괄은 결국 패배했고 사기가 오른 관군이 추격하러 했으나 남이흥과 정충신이 궁지에 몰린 적은 쫓으면 안된다고 극구 말리며 이괄의 목은 앉아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 관군은 추격을 멈춘다.[30]

4 결말

결국 이괄은 예상대로 경기도 광주에서 도주 중 밤중에 잠을 자다가 부하장수이던 기익헌, 이수백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둘은 참수 대신 유배로 용서받았는데, 기익헌은 7년 뒤 유배가 풀리고 하위 군관으로 평생을 잘 살았던 반면에, 이수백은 유배로 풀려난지 몇 해 안 있어[31] 마탄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로와 박영신의 아들들인 이문웅, 이문위 형제와 박지병, 박지원, 박지번 형제에게 대낮에 끔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마탄 전투 막바지에 관군 8대장의 목을 베어 보내게 한 모략을 꾸민 장본인이었다고 한다.[32] 이들 형제는 이수백의 목을 잘라 대궐을 찾아가 자수하는데[33][34] 이에 대한 처벌을 놓고 비록 역적이었다곤 하나 이미 왕이 용서를 해주었는데도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수백은 수절하는 과부를 모욕하고 겁탈한다든지 거리에서 행패를 부려 민심도 나빴고, 정작 이수백이 5명에게 끔살당하자 주위 반응은 '고놈 당해도 싸다' 라는 분위기라서 안습... 삼정승은 이수백이 역적이라는 점과 효도라는 가치관을 들어 용서해줄 것을 청했으나 임금인 인조는 법 기강확립을 들어 처벌할 것을 명했다. 다만 부친들이 충신이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이씨 형제는 전라도 익산, 전주에, 박씨 형제는 경상도 창평, 의성에 유배보내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이괄의 아내 예이와 며느리 계이는 마탄 전투가 있던 시점에 빡친 인조의 명령으로 칼이 채워진 채 연행당한 후 모두 효수당했다. 이괄이 승승장구하던 시점인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에 입성한 만큼 거리에 매달린 이들의 수급을 봤을 이괄의 입장에서는 참 암담했을듯... 물론 이괄 본인도 마탄 전투에서 충성파 장수들의 목을 베는 짓거리를 했으니 별로 불쌍할 것은 없다.

이괄의 난으로 북방의 정예군단과 임진왜란 때부터 유지되었던 명장들은 패가 갈려서 와해되었고,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 등 이괄 밑에 있던 장수들은 후금(청나라)으로 도망가서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겼다. (…). 결국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조선군이 거의 반토막이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군에게 싸움다운 싸움조차 못 해보고 당한다.[35] 게다가 청나라로 도망친 부하들이 이괄의 난 진격루트를 그대로 알려주는 바람에 청군은 이전의 어떤 보다 빠르게 내려와 왕을 붙잡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리고 허수아비로 왕위에 며칠 올랐던 흥안군 이제는 대역죄로 심기원에게 참수 당하는데, 흥안군이 참수당할 때 억울하다고 외치며 심기원에게 "네놈도 억울한 대역죄로 죽을 것이다!" 라고 저주했다는 야사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야사는 야사일 뿐, 흥안군은 이괄의 난 초기부터 내통했다는 기록이 많으며, 인조를 호종하다가 중간에 달아나 한강까지 도로 건너서 이괄과 합류했다.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그냥 배신자 맞다. 그런지 200여년 뒤인 고종 초기(1871년)에 복권되었다가 30년 뒤인 1900년에 도로 복권이 취소된다.

한편 심기원은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세우는 역모를 모의하다가 소현세자가 왕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곤 인조와 소현세자를 모두 몰아내는 역모를 꾀하다 들켜서 능지처참 당하고 만다. 그리고 또 7년 뒤 심기원 처형에 관여한 김자점도 아들들과 난을 꾸미다가 들키는 바람에 일가와 함께 처형당한다.

반란 당시 선봉에선 항왜들이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발휘하자 동래에서 인 1천명을 용병으로 사용하자라는 건의가 있자, 정신없던 나머지 다들 좋다고 했으나, 이원익이 "천명보다 많이 보내면 어쩔 것이며 그 왜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당시 인조는 가도의 모문룡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다급해 했는데, 이괄의 항왜들은 무악재(안현)에서 섬멸당했다. 안현에서 살아남아 이괄과 함께 도망쳤던 항왜들은 왜관이 있는 경상도 쪽으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같은 항왜 출신 장수 김충선...... 망했어요 당시 김충선은 대구 우륵동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전란의 화가 미칠것을 두려워한 경상감사의 명을 받아 자신을 따르는 항왜 25명과 조선인 포수 17명을 데리고 52세의 노구를 이끌고 추격전을 벌여 서아지를 비롯한 항왜들의 목을 베어 난을 마무리 짓는다. 다만 같은 항왜들을 처벌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김충선은 상으로 받은 벼슬과 토지를 극구 사양했고 억지로 떠받은 서아지의 토지조차 수어청에 반납하여 둔전으로 쓰게 했다.[36] 심지어, 13년 후 김충선은 남들 은퇴할 나이에 다시 한 번 전쟁에 참가한다.

이 사건으로 춘추관 사고가 불타 전란 이후 복원한 조선왕조실록 5질 중 1질이 소실된다. 이후 조선 멸망까지 춘추관 사고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5 평가

서인들이 벌인 가장 큰 삽질 중 하나

국가의 거물들이 미묘한 정치감정을 참아내지 못하고 서로를 쳐죽일 때의 위험성, 미숙하고 혼란한 정치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조심해야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반란이다. 서인들의 섣부른 숙청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대체로 붕당의 정치 상황을 모르거나, 아예 부정하여 왜 이괄에 북방군 다수가 합류했는지를 넘어가려는 태도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인터넷과 여론에서는 정치적인 배경을 무시하거나, 단순히 무인들을 홀대해서 일어난 반란[37]으로 의도를 잘못 해석하는 경향 또한 심하다. 말 그대로 권위에만 의존하려는 정치가들이 큰 교훈을 얻어야만 하는 반란.

만일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병자호란이 해볼만한 전쟁이였을 것이란 낡은 떡밥이 자주 보인다. 북한에서는 이괄을 홍경래와 동급으로 존경하다고도 한다. 이유는 썩은 나라를 빨리 망하게 만들어서 라는 패기넘치는 주장이다. 어찌되었든 이괄은 관군 2천 명에게 패배했으며, 대다수의 승전은 급조되고 작았던 방어군들을 무너트린 것에 가까우므로 이런 주장은 무리수이다. 실제 교전 병력이 의외로 적은 편이며, 큰 전투로 묘사되어 있는 기록들은 굉장히 미심쩍다. 이괄부터가 큰 교전을 피해서 꼭 돌파해야 하는 지점을 급습하는 전략이었으며, 관군측 장수들이 입은 피해는 장만의 포위망에 병력을 잘못한 분산한 상황이나, 병력차를 무시하고 목숨으로 거점을 막아선 장수들이 입은 피해였다.[38]

이괄이 있었다면 병자호란이 해볼 만했을 거라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만약에' 일 뿐이다. 애시당초 숫적, 질적인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이괄군이 수도를 휩쓸었다는 업적 자체도 인조반정에서 약점을 노출했던 광해군 시대의 군사전략이 2년만에 다시 터진 문제에 가깝다. 광해군도 같은 원인으로 인하여 몰락했을 정도였는데, 북방이 무너지면 탈출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던 셈이다.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같은 야사를 다룬 서적에는 이괄의 평이 극과 극. 악역 같이 나온 장면이 많다. 가령 인조반정 직후 인조가 용상에 앉기 머뭇거리자, 뭐가 두려울 게 있겠냐면서 자기가 용상에 털썩 주저앉아 어그로를 산다거나, 벼슬에 불만이라는 점과 무작정 왕을 추대하고 군림했다든지 백성들이 이괄의 횡포가 싫어 한양 문을 열지 않았다고 나온다.[39] 하지만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이괄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인정하며, 무인임에도 시와 글짓기에 능하며, 왕이 되기 전 인조의 성품을 테스트 하는 등 복합적인 인물로 나온다. 대체로 이괄이 악역이 된 계기를 만든 김류가 나쁜 놈이라는 분위기. MBC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안하무인으로 나온다.

6 관련 인물

6.1 이괄군

  • 이괄 - 주모자. 항목 참조.
  • 김효신 - 후발대로 남겨두었으나 관군에 투항. 공을 세워 속죄하겠다며 전투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장만이 이를 위장투항으로 의심하여 전투에 기용하지 않았다. 결국 역모에 가담했다는 비난과 질책, 그리고 죄책감으로 자살하고 말았다.[40]
  • 한명련 - 서인들의 모함으로 이괄과 함께 엮여들어간 인물. 호송 중에 이괄에게 구호를 받아서 반란에 동참한다. 한성 전투 도중에 부상을 받고 사망한 걸로 알려지면서, 관군의 기적적인 역전승의 원인이 되었다.
  • 기익헌, 이수백 - 부장들. 패주한 이괄의 목을 베어 바친다. 위 항목에서 소개한대로, 이수백은 그야말로 인간쓰레기(…)
  • 한윤 - 한명련의 아들. 패잔병들을 이끌고 청으로 도망가서 호란을 일으키는 원흉 중 하나가 되었다.

6.2 조정

  • 인조 - 이괄의 난을 폭발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아쇠를 당겼다. 게다가 도중에 이괄의 며느리와 아내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더 평가가 안 좋다. 심지어 이후로도 무신들을 중용하지 않아서 2차례의 호란을 자초했다.
  • 이귀 - 인조와 함께 이괄의 난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김류의 라이벌 수준이었던 현실과는 달리, 현대에는 막나가고 수습못할 사건들을 벌이는 성격이 멋있다고 옹호해주는 여론도 많은 편이다.
  • 김류 - 사실은 이괄의 난을 막으려고 했던 인물. 하지만 배경 자체에는 그도 책임이 있었다. 항목 참조. [41]
  • 장만 - 도원수. 관군 총지휘관. 문인 출신. 행적을 보면 딱히 유능한 군인은 아니었지만, 반정공신이었기에, 당시 조선의 군사활동을 총괄한 인물. 관서에 이괄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바로 장만. 하지만 조기에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실패하고, 이어서 벌어진 정묘호란-병자호란까지의 병크로 이어지는 행보를 보였다. 당연히 역사가들의 평가도 박하다. 당대의 굵직한 사건에서 고위직에 있었을 데도 불구하고, 대중에서의 인지도가 거의 제로에 가깝다.[42] 다만 완전히 무능하다고 평가하기만은 애매한 것이, 최소 이괄의 난 과정에서는 자기 한계를 알고 처신했다는 점이다. 애초 이괄에게 주전력을 맡긴 것도 그렇고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병력을 전부 정충신에게 맡겨 실전을 치루게 하고, 자신은 후방에서 예비전력을 편성하고 보급품을 마련하여 바로바로 정충신에게 보내주었다. 때문에 이때 장만을 가리켜 도원수는 군사없는 장수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황주에서 정충신이 패전하고 조정에서 정충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자 오히려 패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정충신을 감싸고 계속 이괄군 추격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딱 자기 한계만큼 일 했던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 이원익 - 당시 영의정. 조선역사에서 손꼽히는 명재상 중 하나. 일명 오리정승으로 유명한 그 분. 임진왜란정탁과 함께 이순신을 옹호한 인물이며, 쿠테타를 일으킨 인조 세력에게조차 필요한 인재로서 평가받은 내정의 1인자이다. 평안도의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선조 초에 전염병이 돌던 평안도 지방을 구제해내면서 평안도 백성들이 따랐기 때문이었다.[43] 당연히 남인이라 말년에는 밀려나고 오리곡에서 여생을 보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이괄의 난에서는 김류에게 홀라당 넘어간 인조의 명령으로 역적으로 몰린 신하들을 숙청했다.
  • 흥안군 - 인조가 수원으로 도망갈 때, 이괄이 왕으로 옹립했다. 행실이 무척 나쁜 인물이었다. 이런 놈을 왜 왕으로...

6.3 관군

  • 정충신 - 이괄의 난에서 관군 측의 진 주인공. 각 상황에서 예언자 수준의 기록을 남긴 인재다. 당대부터 고령,질병,정치적 요인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기록이 있었다.
  • 남이흥 - 정충신과 함께 활약한 무관. 정충신이 철두철미하고 예리한 참모라면, 남이흥은 호탕하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호걸이다. 황주전투부터 정충신과 나란히 관군을 이끌어 관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안타깝게도 정묘호란 때 전사하여, 충장공 칭호를 받는다. 이전 항목에는 왠지 조정에서 이쁨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나, 오히려 인조에게 직언을 했다가 졸렬한 인조에게 보복성으로 제대로 된 군사지원을 못 받고 폭약으로 자폭까지 했던 불행한 인물이다.
  • 김충선 - 네임드 항왜출신 명장. 대구 지방에 은거하여 잘 살고 있었으나, 이괄의 패잔병 토벌에 나서서 항왜들을 썰어버렸다. 그리고 병자호란까지 참전한다.
  • 이중로, 이성부, 이시발, 이확 등 - 마탄 전투에서 대패. 앞의 두 명은 사망. 이확은 말의 피를 바르고 생존. 참고로 이중로는 사격술이 뛰어나 마탄 전투에서 이괄군 군관 7명을 조총으로 저격했다고 한다. 그래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이후 사망한 7명은 반란군에게 효수당하여 후대까지도 큰 문제가 되었다.
  • 임회 - 패주하던 이괄을 막다가 역습으로 사망했다.

7 관련 링크

8 관련 서브 컬쳐

네이버 웹툰에서 고일권이 연재하는 만화. 이괄의 난을 배경으로, 굉장히 좋은 고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괄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미화가 있는 편이라, 댓글을 보면 죄없는 관군들이 이괄군에게 죽어나가는 모습을 신난다고 적거나, 병사 없이 싸웠던 충신들을 무능하다고 조롱하는 무개념 이괄빠들이 불편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자.
  1. 당시 서인들은 남인과 북인들이 많았던 관서군을 길들이려고 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괄의 아들에서 시작된 정치혼란으로 그들을 묶어서 문책하려고 했던 스캔들이 한번에 폭발한 것이다. 즉,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트집부터 반란군이 하나로 뭉친 것까지 붕당이 배경요소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 실제로 중심인물의 대다수가 붕당 관련자들이거나, 그에 의한 트집을 잡힌 사람들이었다. 서인들의 실수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명백히 무신홀대가 아닌 붕당의 정치적인 배경이 상당함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오해없길 바람.
  2. 하지만 도성의 문을 열고 광해군을 붙잡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수일은 아예 공신목록에 오르지도 못했다. 현대에는 이괄을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초기까지는 이괄에 대한 처우가 딱히 모자라지 않았다.
  3. 참고로 한성판윤은 정2품 당상관이자 대감으로도 불릴 수 있는 품계.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지금이야 대권까지 바라볼 수도 있는 요직이지만, 당시는 며칠마다 사람이 바뀌는 한직에 불과했다.
  4. 물론 이것은 이괄이 주제 넘은 판단을 한 것이다. 김류는 능양군을 왕으로 추천한 인물, 즉 킹메이커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1등공신이 확정되어 있는 거물이었다. 이괄이 무턱대고 동급으로 접근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물론 옹졸한 행보를 보인 김류도 잘한 일은 없으며, 양측 모두 자존심 때문에 큰 비극을 부르게 된다.
  5. 실록에 의하면 "인조: 도원수(장만), 중원(명나라)과 힘을 합쳐 적(청나라)을 물리치려면 병사가 얼마나 필요함? / 장만: 10만은 있어야죠. / 인조 : 10만은 너무 많은데? / 장만: 못해도 5만은 있어야 함. 그리고 부원수 자리 비었는데 이괄이나 이서 중에서 보내주세요." 이라는 기사가 있다.
  6. 쿠데타 초기에 반정권적 발언을 했던 젊은 장교의 아버지가 이괄이었다 라는 점 때문에 도성과 정치계에서 큰 혼란이 벌어진다. 이괄의 아들은 스물도 안 되는 애송이 장교였으나, 피바람이 불던 숙청의 여파로 인하여 수습할 수 없는 상황까지 굴러가버렸다.
  7. 어쨌든 김류와 이귀 어느 쪽의 주장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괄은 당시 조선 최강의 정예군단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김류의 주장처럼 이괄을 건드리지 말거나, 이귀의 말처럼 이괄을 확실히 죽여야 뒤탈이 없었을 것이다. 인조가 어설픈 중도책을 써서 이괄의 아들만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정예군단을 가진 이괄은 그대로 반란을 일으켜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8. 애초에 반정공신이 반란을 일으킬거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조는 이괄을 평안도로 파견보낼 때 엄청난 신임을 보여주어서 마차를 손수 밀어주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금부도사 보냈다는 거 자체가 왕권사회의 풍토상 이괄 너를 죽이겠다 라고 충분히 읽힐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이징옥의 사례처럼 궁지로 몰린 북방의 장수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예상해야 했다.
  9. 이괄의 난에서 김류의 잘못은 이런 숙청으로 백성들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킨 점에 있다. 백성들도 눈과 귀가 있었으므로, 왕이 아무런 명분없이 정적들을 몰살시켰다는 사실에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10. 나중에 정충신군이 이괄군의 진격로를 따라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길이 말 그대로 절벽을 타고 벼랑에 매달리는 엄청난 악조건이었다. 결국 추격군은 전부 녹다운되어 지쳐서 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괄군이 강병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11. 덕분에 이괄의 난 직후 장만은 책임지고 형식상 잠깐 백의종군 하기도 한다.
  12.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 해서 적진을 혼란케 하려는 이괄의 계략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당시 투항한 송립은 훗날 병자호란 때 왕을 보호해 남한산성으로 피난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 정2품 관직인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기 때문에 단순한 거짓투항으로 보기 어렵다. 사후엔 장정(壯靖) 이라는 시호까지 받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오히려 이괄군에 거짓으로 동참했다가 기회를 엿봐서 휘하 병사들을 이끌어 투항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3. 투항병들을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이라 착각한 관군이 스스로 와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4. 실제로 2월 7일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경직이, 2월 9일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완이 병사를 이끌고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미 2월 7일에 관군이 마탄에서 대패하고 한양까지 한번에 뚫리는 바람에 구심점을 잃은 상황이었다.
  15. 모자라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이괄군 투항자들까지 그대로 뽑아 올릴 정도로 반란군에 비하면 숫자와 훈련도가 부족했다.
  16. 황주 전투와 마찬가지로, 마탄을 수비군 자체가 이괄군에 비하면 질과 양이 모두 빈약한 병력이라서 패배는 확정이었다. 하지만 마탄 전투는 황주 때와는 달리 관군이 전멸해버렸고, 죽은 장수들이 임진왜란부터 활약한 베테랑 장교들이자, 목숨으로 조정을 사수하려고 했던 충신들이 많아서 굉장한 파장을 일으켰다.
  17. 저격(狙撃) 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격살은 총으로 저격해 죽였다는 의미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본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변역한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하고 있다.
  18. 이 패전으로 이확은 죽을 고생을 하고 겨우 목숨만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괄군과 내통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아 이를 해명하기 위해 고생했다. 그리고 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원수인 청 황제한테 절하고 왔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훗날 해명이 될 때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안습.
  19. 이괄의 난에서 죄없이 죽은 선전관이나 이괄의 처자식들과 함께 대표적인 비극으로 언급된다. 결국 충성파 장수들의 목을 베어서 욕보이는 계책을 냈던 이수백은 이후 그 장수들의 아들들에게 백주 대낮에 참살당한다. 같이 계책을 냈던 부장들과는 달리 죽어도 싼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
  20. 당연하게도 박효립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으며 박효립 본인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애초에 민병대만을 이끌었음을 생각해보면 좀 안타까운 죽음이다. 갖춰야할 것을 갖춰주지도 않고 처형한다는 것 자체가...
  21. 정충신은 장만에게 이괄이 바로 추격하여 어가를 사로잡는다면 상책이고, 가덕도에 주둔중인 모문룡과 합류한다면 중책이며, 한양에 머무른다면 하책이라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장만이 이 말을 했다고 하거나, 청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상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야사에 기록된 것이라서 그리 정확한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다.
  22. 이괄의 반란군이 장만이 펼쳐놓은 포위망에 갇히기 전에 도망치듯이 한양으로 달려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미래가 없는 판단이었다. 물론 장만이 인정했듯이 관군 측에 이괄군을 쫓아낼만한 정예병력이 모자랐으며, 수도를 점령한다는 상징성 자체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23. 한양의 백성들 입장에선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전투였다. 광해군도 서자에다 조카를 죽였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리서 왕권이 약했는데, 그걸 몰아내고 쿠데타로 정권 잡은 인조의 인망은 더욱 낮았으며, 왕자시절부터 평판이 쓰레기였다가 반란군에 붙어서 왕이 된 흥안군까지, 그들의 권위는 도저히 왕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본격 왕위 계승 스포츠 개싸움 물론 이괄 측은 날라리로 유명했던 흥안군을 내세운 만큼 인조보다 왕권에 대한 명분이 빈약했고, 관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 이괄측이 고립되리라는 점은 한양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의 눈으로도 명확했을 것이므로, 그냥 재미있는 구경꺼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24. 평안도 최정예 병사 1만2천 명과 임진왜란 당시 귀순한 항왜 출신 조총수 및 검객 13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기록을 보면 이괄의 기마병은 대여진족 기병이라 편곤의 길이가 조선군 표준보다 훨씬 길어 기병전에서 우월한 전투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25. 게다가 정충신이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곁에서 행주대첩을 경험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산악 방어전은 정충신에게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26. 관군이 이괄군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려고 뿌렸다.
  27. 실록에서도 승장인 정충신이 "하늘이 도와 이겼다" 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달리 생각해보면,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서 진을 쳤던 정충신의 깡이나, 황주전투에서부터 미약한 병력으로 이괄을 상대했던 충성파 장수들의 용기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28. 이괄 일당과 한편으로 취급돼서 반역죄로 연좌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관군이 한양에 입성한 후에 무고하게 처형당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런 사람은 극히 일부여서 별로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29. 이후 한양에서는 이괄은 꽹괄이고 장만은 볼 만했네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이괄이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꽹과리를 쳤으나 당해낼 수 없었다 라는 다른 어원도 있다.
  30. 이게 옳은 판단이었는데, 당시 승리 자체가 정충신군의 소수 특공작전을 통한 기적이었고, 이후에 이괄을 막던 부사 임회는 잔당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여담으로 임회는 송강 정철의 사위.
  31. 실록에 의하면 이괄의 난이 끝난지 10년 후.
  32. 이 형제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말 그대로 영화같은 일까지 벌였는데 어엿한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비로 위장하여 가짜 노비문서까지 만들었으며 이수백의 이웃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심지어는 이수백의 집 여종과 위장결혼까지 하여 이수백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하나 추적했다. 출처는 《성호사설》 권17 '이문웅(李文雄)' 편이다.
  33. 조선은 엄연한 법치국가였고 사적인 복수에 대해서도 같은 시대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엄격한 편이었다.
  34. 《인조실록》 권29 12년 3월 13일 기해 2번째 기사. [1]
  35. 특히, 여진족을 상대해야 할 관서군의 기병 상당수가 이 난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안습.
  36. 서아지와 김충선은 사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직접 목을 베었으니...
  37. 당시 이괄을 북방으로 보낸 사람은 인조였고, 조선에서 제일 중요한 군대를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왕의 목숨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신뢰였다. 오히려 서인측과 친밀한 관계이며 문신 출신의 도원수 장만에게는 병력을 거의 주지 않았던 점을 보면 결코 홀대가 아니다.
  38. 하지만 인터넷에는 중과부적에도 싸우다 사망한 장수들을 무시하는 서술이 상당한 편이다. 관군측에서 나온 사망자들도 상당수가 임진왜란 때부터 활약한 베테랑이었으며, 반란군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졸렬한 관군들이 튀어도 목숨을 바쳐 싸운 행적은 어리석어서 내린 결정이 아님에도, 조롱조로 무시하거나 그들의 희생을 이괄의 동기보다 축소하려는 경우가 있다.
  39. 이괄이 한양에 도달할 당시에 백성들이 반군을 죄다 반겼다고 한다. 다만 이건 김류가 기익헌을 국문없이 처형하는 병크를 저질러서, 인조에 대한 여론이 '인간쓰레기 급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결국 관군에게 패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아마도 권세가들이 주축이 돼서) 도망 못 가게 한양성문을 잠가버렸다.
  40. 반란으로 상당수의 베테랑 군인들이 서로 죽고 죽였으며, 이긴 사람이든 진 사람이든 패거리가 갈려서 영원히 적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괄의 압박이나 선동에 넘어가서 가담한 군인들의 죄책감은 현대적인 기준으로도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41. 본 항목에도 그렇고 현대인들에게는 김류가 이괄을 모함했다는 낭설 널리 퍼져 있으나, 김류는 오히려 신중론자였기에 굉장히 현실적인 입장을 보였다. 오히려 이괄의 난에서 직접적인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인조와 이귀였다. 하지만 워낙 평판이 나쁜 인물이라서 어떻게든 이괄이랑 엮어서 욕을 하려는 왜곡이 많은 편이다.
  42. 인조반정-정묘호란-병자호란까지 트리플 크라운 걸친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고위공직자인데도 인지도가 바닥이다. 그의 무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결국 대차게 까이고 백의종군했으나, 이후에도 같은 짓을 반복한다. 숨겨진 먹튀.
  43. 실록의 표현을 옮기자면 평안도 백성들이 이원익의 말이라면 어버이처럼 따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