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보병여단

1 개요

제101 보병여단가

 
1절
월롱산 정기받아 한뜻으로 뭉친우리
산하를 넘고건너 적의 무리 쳐부수고
백두산 정상까지 씩씩하게 돌진돌진
나라와 겨레 위해 이 한목숨 바치리라
국군의 선봉주자 임진강 결사대
피 끓는 무적부대 제101 보병여단

'
2007년 겨울 군부대 개편사업에 의해 없어졌다. 병력과 시설은 인근부대에서 대부분 흡수했다. 따져보면 친정복귀인 셈. [1]

한국군 육군의 제101보병여단. 무적부대 혹은 임진강 결사대라고 불린다.

국군의 여단이라고 하면, 보통 기계화 사단 예하의 기보연대를 여단이라고 칭하거나 군단/2작전사령부 직할의 기갑/특공여단 등의 부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쪽은 기보사 예하연대도 아니고, 뭣보다 기갑도 특공도 아니면서 독립된 '보병'여단 편제인 점이 특이하다.

부대의 경례구호는 '무적'이었으며 부대 공식별명도 '육군 무적부대'. 자매품(?)으로 제102, 103보병여단도 존재하는데 아무튼 알보병 편제로 독립여단인 건 이 세 부대뿐이었을 듯. 재밌는 건 마이너하고 작은 부대라서 그런가, 군필자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걸 악용(?)해서 일부 전역자들은 '101특공여단 출신이다'라는 뻥카를 주위에 치기도 했다. 아주 제101공수사단 출신이라고 해버리지... 또다른 별명이 '임진강 결사대'였기 때문에 뭔가 그럴듯한 뻥카가 만들어지기도.

본래 서부전선 끝자락 임진강 철책경비를 맡고 있던 부대들에서 긴 철책선으로 인해 방어부담이 있어 이 부담을 덜어주고자 병력 일부를 차출하고(..) 신규병력을 더해 편성했다.

창설 당시(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다소 빡셌다곤 하나 창설 직후에는 당연히 군기를 잡았을테고 또 군사정권 당시에 안빡셌던 부대가 없을터(...) 본질적으로 경계전문 부대였기 때문에 사단급에 비해 힘든 훈련도 적고 부대 시스템 자체가 강안경계에 꽤 큰 비중을 둔 편. 아무튼 창설이래 강안경계를 담당하며 임진강을 건너오던 간첩을 두서넛 잡았는데 그때 '임진강 결사대'란 애칭을 하사받았다.

여단 섹터 자체가 워낙 작다 보니 대대급 훈련을 해도 행군 거리가 20~30km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대급 이상의 훈련도 사실상 없다(..). 3군 지역의 부대 중에 '꿈의 25사, 환상의 17사, 지옥의 3사, 사지절단 8사, 앞으로만 가는 1사'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는데, 사실 그 뒤에 '너무한다 101여단'이 있다고 한다.

유명한 간첩을 잡았던 섹터는 공을 탐낸(?) 9사단에의해 이후 9사단 관할이 되었다. 9사단과 101여단 사이에 공동 구역은 두 부대가 야간에 순찰을 하며 만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1995년에 기록적인 폭우로 임진강 일대에 홍수가 났을 때 강을 따라 설치된 모든 소초가 잠긴 적이 있었다. 이때 병사들은 모두 자유로 위에서 근무를 섰다.

2 편제상 특징

연대보다는 좀 더 큰 규모로, 준장이 ( 준장'진'이 오기도 한다 97년 당시) 지휘관으로 있는 독립된 부대로서 4개 보병대대 + 1개 포병대대 + 1개 전차중대 + 각 직할중대 총 3,000여명 가량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워낙 편제가 어중간하고 기계화가 너무나도 부실해서 양 옆에 포진한 1사나 9사에 비하면 시설, 장비면에서 안습 그 자체의 위용을 자랑한다. 해체 직전까지 보병 분대공용화기가 k-3가 아닌 m60이었다.(무거워...) 특이하게 여단 포대로 105미리 견인포대를 운용중이었다는데, 전설의 1개 포병대대만 배치되었다는 신형 105미리 견인포 KH-178이 배치 되어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는데. 그곳 출신인 사람 말로는 금시초문이다. 실제로 해체 당시 멤버라니 믿어주도록 하자. (99 군번인데 상병 때(2000년 여름무렵) 까지 KH-178 썼음 장비의 희귀성으로 유지 보수가 어려워 M101로 교체 했음)

재미난 건 원래 띄엄띄엄 있던 1, 9사 시절의 시설에 신규시설을 더해서 그런가 대대 울타리 안에 묶이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따로 노는 독립중대들이 꽤 많다. 허나 그 상태(?)도 다양하게 안습해서 코딱지만한 PX조차 없고 담이 무너져가는 중대가 있는가 하면 간단한 파이프 누수를 몇달째 고치지 못해(예산집행이 늦어졌다던가, 행보관이 누수 위치 찾는데 돈 들이기 싫어서 포상 외박을 미끼로 1개 분대씩 매일 작업 시켜서 주둔지 주변을 통채로 파냈다던가(경험담)...) 여름에도 물을 못 쓰는(!) 중대가 있는 등 흠좀무했다. 비오면 천장에서 물 새는 건 예사. 06년 태풍에 막사 지붕 일부가 날아간 적도 있다.
(독립중대도 독립중대 나름이다.
P.X는 없었지만 면회공간이 중대 앞 무적회관이어서 외박이나 외출을 나가지 않아도 면회객만 오면
무적회관에서 고기먹고 여관방에서 잘 수도 있었다 한여름에도 뜨건물로 목욕(샤워는 매일)도 한다)
독립중대중 몇 곳은 주위가 지뢰지대라 수도공사가 불가능해 급수차로 실어나르기도 했다.

사실 원래 적은 병력으로 강안철책에 순환식 투입을 했기 때문에, 전체 병력이 강안 들어갔다 나오는 사이클도 사단급에 비해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종심대대의 시설개선이 자꾸 미뤄지거나 백지화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던 것. 반면에 강안의 경계초소/소초시설은 상당수가 분대형 내무반을 갖춘 침대 신막사로 개축되는 등 대접이 달랐던 걸 보면 역시나 임진강 결사대(..).


또 워낙 작은 독립부대인지라 자체 신병교육기관은 물론 분대장 교육대도 없었다.(2003년까지는 분대장교육은 조촐하게(?) 지원중대서 자체적으로 했었는데, 곧 폐지. 이후 교육생들은 1사단 분교대에 위탁했다.)

이러면 재미있게 되는 부분이 있는데 우선 분대장 교육은 1사단에서 폭파 등 특수 교육은 9사단에서 받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101여단가를 포함해서 1사단가와 9사단가를 같이 암기하게 되는 기묘한 운명의 병사가 존재했다.

97년 당시를 기준으로 소총수를 기준으로 대부분 9사단 신병훈련소에서 훈련받고 101여단으로 왔다. 2000년대 들어서 신병은 근처 사단 (1사 9사 25사 28사 등)에서 골고루 보충 되었다. (그래서 신병들 모아 두고 경례시키면 오만가지 잡구호가 다 튀어나왔다)

참고로 유격은 감악산으로 간다.(감악산 올빼미가 되어보자.)
언제 바뀐지 모르겠지만 1996년과 그 이전에는 9사단 북한산 유격장을 사용했다.
00년대에는 1사단 유격장(용주골 옆에있는 거기...)을 사용했다. 시기별로 바뀌었는 듯.
유격조교는 여단내 수색중대인원들이 수행했다.

작전계획대로면 임진강변에서 고수방어(고기방패) 후 반격시(살아있다면) 평양 근교까지 진격하는 것이 목표. 9사단 흡수는 부대 괴멸시 상황이 와전 된듯

위수지역이 서울까지라 외박에도 서울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1997년 당시 외박이 서울까지 가능했으며 2006년 당시 3대대(탄현대대) 기준으로 위수지역은 일산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근부대 장병이 출타중 성범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곧 금촌까지로 제한 되었다)금촌에서 밥 먹고 라페스타 정도 방문하는 게 최대의 위안거리였다. 헤이리에서 금촌까지 어떻게 택시비 6천원이 나오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 바가지가 좀 있었던 것 같다.

98년 상반기에 중대급 새로운 부대가 생긴다고 해서 각 중대에서 문제아들을 뽑아 새로운 부대로 내보냈다.

98년 상반기에 여단내 일부 직할부대가 101여단 마크가 아니라 군단마크를 달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2006년에도 동일했는데 군단 마크까지는 모르겠으나 여단 사령부 내부에 소규모로 국직 파견 병력들이 존재하긴 했다. 항공 관련 병과로 기억하는데 101여단 마크는 달고 있지 않았었다.

2.1 강안 경계

최전방 철책에 대한 내용인만큼 자세히는 못 쓰고.. 아무튼 그저 밤낮으로 임진강 물결을 바라보며 시간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나마 대부분 평지고 철책 내 수색 같은것도 없어서(물이니까) 오로지 경계초소에 들어가 멍때리는 것이 다였으니만큼 산골짝 굽이굽이 동부전선 육상 철책에 비하면 무진장 편한 축에 들었다.

뭐 겨울에 춥고 고생인거야 최전방 어디든 다 마찬가지고.. 재미난 건 강안경계지 일부는 자유로와 수m거리로 맞닿아 죽 평행을 달리는 구획도 있었기 때문에, 해당 소초원들은 밤에 길가에 댄 차가 들썩들썩하는 꼴을 보곤 야시경으로 관찰하는 여흥(?)을 즐기기도 했다. 주말에는 공도 뛰는 외제차들 소리에 밤새 시달렸다.

일부섹터에는 바지선을 갖고 있는 바지 소대가 있었다. 유사시 강으로 바지선을 띄우는 임무를 맞고 있었는데 1997년 즈음 해서 일반 소대로 통합되는 수순을 밟았다.
--> 바지소대는 처음 들어본다. 단정과 바지선은 다르다.
97년 당시 같이 근무했던 단정 소대가 고무보트를 이용해서 강에서 여러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드문 일이지만 철책 안으로 가끔 나가기도 했는데 겨울에 임진강이 얼어 붙은 경우와 맞물려 나가면 슈퍼맨 남극기지 스러운 배경을 볼 수 있었다.

강안으로 들어가면 일단 부식이나 간식이 좋아졌다.
그 당시 설이나 추석에 특식으로 한 번 나오는 웨하스를 강안 투입되자 매일 매일 1인당 1봉씩 나왔다.
처음에는 미친듯이 먹었다가 결국 질리게 되었다.

사실상 전방이 바로 북이 아니라 포사격장이 중간에 끼여 있는 지역이 일부 있다.
옆에 부대가 포사격하러 101여단이 지키는 검문소로 통과한다.

2.2 기타 생활상

종교활동 시, 교회는 각 대대마다 있었으나 법당 및 성당은 여단 사령부에만 있었기에 불자 및 천주교인은 차량으로 사령부에 가야 했다. 대신 불교는 짜장면 천주교는 피자를 자주 준다.

여름이 되면 전투수영이라고 해서 3일간 지원중내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강안경계가 있다보니 훈련이 적다.
1년을 기준으로 혹한기 훈련, 유격훈련을 한번씩 뛰고, 대대 ATT, 중대 ATT 외 한 두번 정도 뛰면 훈련이 없다.
남는 시간은 오로지 삽질, 진지강화였다.

얼마나 진지강화를 했는지 오침도 무시하고 삽질을 시키고
심지어 가끔씩 기상시간도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으켜서 삽질을 시켰다. 겨울에도 삽질했다.

여단 사령부는 저 유명한 경기도 모 시 야동동(…)에 위치해서 직할대 병사들은 편지를 쓰거나 면회오는 사람을 안내할 때 미묘한 기분을 맛보기로 유명하다.[2] 야동 200M 짤방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3 그외

''이란 병영소재 웹툰을 그려 인기를 끌었던 주호민 씨가 이 부대 직할대 지원중대 출신이다.

전방 초소에 있던 한 소대는 농구 골대를 세우기 위해 잠을 자야 하는 주간에 반나절간 삽질을 하고 있었다. 이때 자유로 공사가 한참인 시절 이었는데 공사하던 포크레인이 등장해서 한삽(?) 퍼주고 갔더니 모든 작업이 끝나게 되었다. 알고보니 소대장이 자유로 공사 소대장과 동기였다고 한다. 좀만 센스를 일찍 발휘 했다면 군대식 맨땅 삽질을 줄였을지도 모른다.
  1. 여담이지만 자매품(?)인 102여단은 기갑여단으로 개편, 103여단은 인근부대로 흡수해체되었다. 사실 103여단의 경우도 친정복귀에 해당된다.
  2. 야동이 야한 동영상이 아닌 마을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을때는 미묘한 기분을 맛볼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