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령왕

趙武靈王
본명 조옹(趙雍).

선왕이 승하하고 조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주변나라에서 조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조나라땅을 나눠 갖으려 했지만 당시 14세도 안된 어린 나이였던 조옹이 나서서 정국을 안정시키기고 진 혜문왕의 도움을 받아 조나라의 왕위에 올랐다.[1]

전국 시대 의 왕으로[2], 호복을 채택하고[3] 기마 전술을 도입하여 군사개혁을 시도했고, 변방을 개척해 나간 조의 중흥 군주다.

호복을 입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시행한 덕분에 강화된 군사력으로 조나라 한복판에 있던 중산국을 정복하고 임호와 누번을 격파하는 등 국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27년에 맏아들 장을 대안양군으로 책봉하고 둘째아들 하(조 혜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그 후에도 주부(主父)[4]라는 이름으로 정사에 계속 관여했다. 맏아들 장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도망오자 숨겨주었다가 혜문왕의라 읽고 공자 성[5]의 라 쓰는 군대에게 포위당해 끝내 굶어 죽는다. 자세한 내용은 사구정변 2번 항목 참조.

참고로 허생전에서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랑캐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언급되는 무령왕이 바로 이 무령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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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인연 덕분인지 나중에 진 혜문왕의 아들인 진무왕이 죽고 진나라 정국이 불안할때 연나라의 인질로 잡혀있던 진 소양왕이 진나라의 왕위에 오를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그렇게 즉위한 소양왕이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기는데...
  2. 다만 본인은 죽을 때까지 왕을 칭하지 않았고 무령왕이라는 왕호는 아들 혜문왕이 추증한 것이다.
  3. 여기서 말하는 호복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패션으로 바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무령왕의 정책 이전에는 조나라 남자들은 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것으로, 허벅지 부근까지 덮는 셔츠 비슷한 옷이나 짤막한 치마를 입었다. 속옷도 없었기에 현대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대담한 패션이다.
  4. 군주아버지라는 뜻으로 훗날 진시황이 아버지 장양왕을 태상황으로 추존하면서 태상황의 기원이 되었다.
  5. 무령왕의 숙부로, 무령왕의 호복기사 개혁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