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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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천하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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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순행 행렬

沙丘政變

역사에서 사구정변은 두차례 있었다. 기원전 295년 조나라에서 한 번,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천하순행 도중에 사망하면서 호해가 제위를 찬탈한 사건으로 또 한 번 있다. 저주받은 땅이다

1 진나라의 사구정변

1.1 배경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군현제 도입, 문자와 도량형, 화폐 등을 통일시키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지만 갑작스럽게 이루어져 백성들의 불만이 컸으며, 진나라의 통치 이념인 법가 사상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져 각 지역에서는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가 이어졌다. 까다로운 법률과 무거운 형벌로 인해 민심은 피폐해진 상황이었는데, 부소는 법을 엄하게 하는 것에 대해 염려해 간언했지만 진시황은 노해서 부소를 북쪽의 상군으로 파견해 군대를 감독하도록 했고 몽염은 그 군대의 장군이었다.

또한 진시황은 나이가 들면서 죽음을 두려워해 불로불사나 미신에 집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재정을 낭비하기 시작했다. 호가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점괘를 믿어 몽염에게 장성을 쌓게 하거나 자신이 꾼 꿈 속에서 나온 홍의동자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것이라는 해몽을 믿고 5차례 순행길에 올랐다.

승상 이사, 중거부령 조고를 포함해 5차에서는 공자 호해까지 진시황의 순행에 대동했는데, 그 와중에 사구에서 진시황이 사망한다.

1.2 진시황의 붕어 은폐

진시황은 평원진에 이르러 병이 생겼지만 군신들은 진시황이 죽는다는 말을 싫어해 함부로 말하지 못했으며, 진시황은 몽의에게 산천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도록 여러 산을 돌아다닐 것을 명령했다. 진시황은 병이 심해지자 부소에게 돌아와서 상사에 참여해 함양에 안장하라는 내용이 담긴 조서를 썼지만 사자에게 조서를 주기 전에 사망했다.

이사는 진시황이 외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인해 모든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으며, 진시황의 관을 수레에 싣고 예전에 총애받던 환관을 함께 타게 해서 가는 곳마다 음식을 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신하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국수를 상주하면 환관이 수레 안에서 상주된 일을 허가하는 식으로 속였다.

여름철에 진시황의 수레에서 시신이 썩는 악취가 나자 수행관원들에게 소금에 절여서 말린 고기 1석을 수레에 싣게 해서 시신의 악취와 어물의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게 했으며, 직도를 따라 함양에 도착한 후에 발상했다.

1.3 유서 조작과 부소의 죽음

사자가 이르러 편지를 보고 부소는 울면서 안으로 들어가 자살하고자 했다.

몽염이 부소를 제지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바깥에 계시며 태자를 세우지 않았으며, 신을 시켜서 3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변경을 지키게 하고 공자가 감독하도록 했으니 이는 천하의 중임입니다. 지금 사자 한 명이 왔다가 곧바로 자살하면 어찌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청하기를 다시 용서를 빌고 다시 간청한 후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사자가 몇 번이나 재촉했다. 부소는 사람됨이 인자했기에 몽염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죽음을 내렸는데 어찌 다시 용서를 청한단 말이냐! 그리고 곧 자살했다.
-사기 이사열전

이사, 호해, 조고를 포함한 5, 6명 정도의 환관만이 진시황이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호해는 조고에게 서법, 옥률, 법령을 배운 적이 있어 그를 총애했다. 조고는 호해를 설득하고 이사와 모의해서 진시황이 부소에게 보내는 조서를 뜯고 사구에서 진시황의 유조를 받은 것처럼 꾸며서 호해를 태자로 삼도록 했으며, 부소에게는 한치에 공훈도 없으면서 비방하는 일만 많아 효성스럽지 못하고 몽염은 부소에 대해 바르게 시정하지 못했다는 죄목을 들어 자결하라고 했다.

사자의 조서를 받은 부소는 그 내용을 보고 울면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몽염은 부소에게 자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변방을 지키게 했고 태자에게는 그 군대를 감독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에 한 사람의 사신이 왔다고 해서 자살한다면 그 진위를 알 수 있겠냐면서 다시 용서를 간청한 후에 자살해도 늦지 않다고 만류했다. 사자가 여러 번 자살을 독촉하자 부소는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죽음을 내린 것을 어찌 다시 용서를 간청하겠냐면서 자살했다.

1.4 몽씨 형제의 죽음

몽염은 명령을 의심해 다시 한번 명을 내려달라고 청했다가 사자가 몽염을 관리에게 넘겨 양주현에 감금시켰으며, 사람을 파견해 몽염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부소가 죽은 것을 안 호해는 몽염을 놓아주려고 했지만 조고는 몽씨가 다시 귀하게 되어 정권을 잡으면 자신을 원망할까봐 두려워했다.

뒤늦게 몽의가 돌아왔고 조고는 몽의가 법대로 처리해 자기를 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는데, 조고는 호해에게 충성하는 척 하면서 몽씨를 없애기 위해 선제(진시황)께서 현명한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지만 몽의로 인해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고 모함하면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로 인해 호해가 몽의를 대의 옥에 가두었고 조고가 호해를 모시면서 밤낮으로 몽씨 형제를 헐뜯고 그들의 죄를 찾아내 탄핵했으며, 자영이 조나라, 제나라 등이 멸망한 이유가 중신들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몽씨 형제를 죽이지 말 것을 간언했지만 호해는 듣지 않았다.

호해는 사자를 보내 몽의, 몽염에게 죽음을 내리도록 조서를 보냈으며, 몽의는 정당한 죄명으로 죽게 해달라고 했지만 사자는 호해의 뜻을 알았기에 몽의의 말을 듣지 않고 죽였다. 몽염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있어 그 세력이 진나라를 배반하기에 충분하고 조상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의리를 지킨다면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사자가 명령을 받고 집행할 뿐이라 이 말을 전할 수 없다고 하자 몽염은 한탄하다가 음독 자살을 한다.

1.5 결과

호해는 이 사건으로 최초로 찬탈한 황제가 되었으며, 조고가 낭중령이 되어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또한 호해는 다른 형제들을 모두 죽였고, 선제(진시황)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순장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실제 진시황릉 배장갱 중에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부장품이나 관은 호화로웠으나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 있거나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상태였다. 이는 호해가 죽인 진시황의 후궁들 및 호해의 형제자매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사기 이사 열전에 보면 호해의 형제 중 유일하게 공자 고(高)는 먼저 죽음을 청했기 때문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고통없이 자살하도록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 배장갱 중 딱 남자 유골 1구만 외상이 없이 멀쩡한 상태여서 이것이 공자 고의 유해라고 추정되고 있다.

호혜가 비정상적으로 승계하고 정식 승계자인 부소가 죽은것은 백성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승계였다.[1] 세간에서는 초나라 항연과 더불어, 부소가 살아서 숨어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마침 진나라의 폭정으로 분노했던 사람들은 부소나 항연을 사칭하며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1.6 의문점

한마디 요약 : 대체 누가 저 사실을 저렇게 명확하게 알 수 있는가?

사기 이사열전에 실려있는 대화의 내용은 옆에서 직접 보고 듣지 않으면 도저히 알기 힘들 정도로 구체적이다. 정보가 전보다 쉽게 공개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대통령이 비밀스럽게 하는 말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데, 조선시대 사관이 있는것도 아니고고대 구중궁궐의 저렇게 비밀스러운 대화 내용이 알려지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 정도로 구체적인 대화의 내용을 대체 누가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거기에 진시황은 당시 태자 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말년에 수은중독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의심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영호해에게 계승한다는 유서가 조작이 아니라 사실일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다. 이를 두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조고의 교활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창작된 내용 영호해의 비정상적인 승계를 두고 진승 · 오광의 난 때 과장된 소문들을 넣은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반론하자면 조고 외에도 호해와 이사를 비롯해서 그들의 측근들이 현장에 있었다. 당시의 사회상을 고려하면, 아무리 은밀하게 모의해서 유서를 조작한다고 하더라도 이사와 조고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으슥한 산속에 들어가서 밀담을 나눈 후 직접 종이를 구해와서 손수 먹을 갈아서 글을 쓰고 자기 손으로 도장을 꺼내와서 찍었을 리는 없다. 물론 시중을 들거나 이런 실무를 담당한 이들은 믿을 만한 측근들이었겠지만, 이사와 조고가 죽고 진나라까지 멸망한 후에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가 숙청될 때 조고에 대한 마지막 발악으로 누설했을 가능성도 크다. 또한 사후 유서조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시황제가 병마로 사리분별이 불가능할때를 이용해 호해를 차기황제로 올리게끔 유도했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선 사실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록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진실은 미궁 속에 남아있을 것 같다.

1.7 가정 : 만약에 부소가 황위를 계승했다면?

이사가 조고의 유혹에 넘어가 호해를 옹립하지 않고, 시황제가 남긴 유언대로 만리장성 축조 현장에 가 있는 부소가 다음 황제라고 공표하여 부소가 황위를 계승하여 2세 황제가 되었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일단, 부소는 진시황의 장남이자 황태자이므로 정통성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또한 만리장성 축조 현장에서 장성 건설에 종사하는 최정예 30만 병력 및 명장 몽염이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으므로 무력으로도 맞설 상대가 없다.

대부분의 왕조국가에서, 국가가 안정되려면 창업군주 당대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 뒤에 2대 정도는 지나야 국가 체제가 안정되고 틀이 잡힌다는 점을 생각하면 진이 망한 것은 호해라는 막장 2대 군주의 탓이 결정적이었다. 인망 있고 자애롭고 유능하고 관대한 부소가 2세 황제가 되어 시황제의 가혹한 통치에 지친 백성들을 적당히 위무했다면, 진나라는 중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진나라는 봉건제로 되돌아가버린 대륙에 강림한 코른버서커 및 후대에 벼락출세한 이름도 음란한 촌놈나라랑은 달리 주나라 때부터 대대로 내려져온 오랜 열후국이란 튼튼한 전통이랑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강력한 이점도 있었다. 부소가 즉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반란 대신 현 진제국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택했을 사람이 더욱 늘어났을 것은 분명하다. 그랬다면 오늘날 역사에서 한이 차지하는 자리에 진이 들어갔을 것이고, 중국의 한족은 진족, 중국어[2]는 진어, 한자 한문은 진자랑 진문, 한푸는 친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박도 있는데 진나라의 멸망은 2세 황제 호해의 뻘짓 뿐만이 아니라 가혹한 법가 통치랑 온갖 정벌과 건설공구리로 천하를 피폐하게 만들고 민심을 떠나게 한 진시황 및 통일제국 진나라의 취약성에 한계가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에도 춘추전국시대 각국을 완전히 통합하는 것은 힘들었고 결국 진시황 사후 옛 육국 지역에서는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진나라의 멸망은 그 전례없는 천하통일의 후유증이라는 것. 반면 그럼에도 부소의 능력대로라면 설령 육국의 부흥운동을 진압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함곡관 서쪽으로 후퇴하여 옛 진나라 본토는 건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진제국은 일시 축소되고 전국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최소한 호해처럼 순식간에 망하진 않았을듯.

정리하자면 애초에 진나라의 초대 황제인 진시황대에서 너무 많은 뻘짓이 일어난 것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는건 거의 확정일 수도 있지만 대장군 몽염과 정예 30만명에게 인정받을 정도에 호해와는 다르게 개념인으로 보이는 피를 이은 부소라면신기하게 이 피는 훗날 부소의 아들이 이어받았다. 다만 그 때 나라는 이미(...) 어떻게든 민심을 수습해서 선대의 문제점들을 처리해가며[3] 다시 인정을 받아 아무 문제없는 평화로운 통치를 하던지 적어도 나라를 수습해 송나라가 남송이 된 것처럼 진나라라는 명목은 꽤나 잘 유지가능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부소가 안죽었다는 가정이면 몽염과 정예 30만도 고스란히 남았을 것이고 진나라 최후의 명장이라는 장한도 있으므로 부소의 인품과 군사력 등등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은 가정이다.

거기에 진시황의 문제도 크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반란이 터진건 무능함이 여기저기 널리 퍼진 2대황제 호해때라는걸 고려해보면[4] 적어도 부소의 재능이면 반란해 볼 사람들도 저녀석 괜찮아 보이는데 좀 더 지켜볼까?수준은 되었을 것이고 부소와 그들이 협상을 해볼 여지도 있을 것이며[5] 애초에 황제도 멀쩡하고 병력은 멀쩡하고 인재도 멀쩡하니 진나라 공략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대의명분이 없으니[6] 민심 자체도 따를리가 전무하다.

2 조나라의 사구정변

2.1 배경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령왕의 정실부인은 한나라 출신으로 그의 아들인 공자 장은 무령왕의 뒤를 이을 태자였다. 정실 부인이 죽은 후 무령왕은 한 미녀를 꿈에서 만났고 이에 한 대신이 그 형상을 닮은 미녀인 맹요를 바친다. 그후 맹요도 죽게 되는데 무령왕은 자신을 즐겁게 해준 맹요에게 자신은 준 것이 없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의 아들인 공자 하를 태자로 세운다. 이렇게 어이없이 폐위당한 공자 장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안양군으로 분봉하고 전불례를 보내여 보좌하게 한다. 그후, 무령왕은 왕위를 태자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주부의 신분으로 정사에 관여한다. 하지만 보좌관으로 보내진 전불례는 오히려 공자 장의 야심을 자극하여 반란을 부추겼고 한편으로는 무령왕 본인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대군 지역을 공자 장에게 넘겨주어 대왕으로 봉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당시 상국이였던 비의[7]의 만류로 단념한다.

2.2 공자 장의 반란

결국 혜문왕 4년(기원전 295년), 사태가 터지고 만다.

당시 세 부자는 사구 지역에서 따로 별거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공자 장은 비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비의가 사전에 대책을 세웠기 때문에 혜문왕을 죽일 수 없었고 여기서 제3의 인물인 공자 성과 이태가 군사를 이끌고 난입하여 반란을 제압한다. 공자 성은 무령왕의 숙부뻘 되는 사람으로 무령왕의 호복기사 개혁을 반대하다가 실각당한 인물로 당연히 자신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속셈이였다.

2.3 결과

결국 실패한 공자 장은 무령왕의 거처로 피신하지만 무령왕도 공자 장을 보호할 수 없었고 공자 장은 결국 살해당한다. 하지만 사태가 이로서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공자 성과 이태는 무령왕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던 만큼 무령왕의 추궁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직접 죽이기에는 명분이 없다 보니 결국 사구의 행궁을 포위하여 무령왕을 사실상 감금한다. 물론 음식 같은 건 일절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3개월의 포위 끝에 무령왕은 굶어죽는다.

2.4 무령왕 배후자설

사구정변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공자 장이 야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애먼 무령왕까지 말려들었다는 뉘앙스였지만 근래에 와서는 무령왕이 왕위를 물려준 이후 점차 실각당하자 공자 장을 끌어들여 다시 권력을 되찾으려고 공자 장을 끌어들였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8]
  1. 진나라의 중심사상인 법가는 성리학 못지않게 적서처별이 심한 사상이다
  2. 중국에서는 중국어를 한어(漢語)라 불른다.
  3. 일단 만리장성의 건설의도 자체는 합당한 것이었다. 오랑캐는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했고 기나긴 중국의 국경상 그걸 차단하기 위한 합리적인 방법이 만리장성인 것도 맞다. 문제는 그걸 너무 서둘러 짓겠다고 강제징병과 너무 엄격한 규율을 정하여 백성들을 동원한 것이 문제라는 것. 즉 장기 플랜을 세우고 합당하게 노역자들을 대접해 주면서 착실히 쌓았으면 민심이 그리 문제될 리가 없다. 그 당시에 공사현장에 동원되는건 백성의 의무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어느정도 납득할 선은 있었을 것이다.
  4. 그전에도 기미가 없던건 아니지만 진시황 생전에는 있어봤자 장량의 암살 미수 사건 정도였고 대부분의 반란군도 때만 보면서 쉬쉬하고 있었다.
  5. 대표적인 반란군 중 하나인 항우의 삼촌이자 초나라 출신 반란군의 초대 통솔자인 항량만 보더라도 처음 의도는 초나라의 깃발을 다시 이 땅에 세우고 싶다였지 중국 전역을 초나라로 통일하자 같은 게 아니었다. 즉 봉건국가 정도만 인정해 줘도 일처리를 줄일 수 있는 부소든 다시금 나라를 세우게 된 항량이든 그리 나쁜 거래도 아니라는 것.
  6. 반란군들 대부분의 기본적인 대의명분을 보면 1. 멸망당한 옛나라를 되찾자 2. 저런 폭군이나 암군들 밑에서 제대로 살 수 없다. 정돈데 (당연히 토지와 권한은 좀 줄여야 겠지만) 다시금 봉건제를 어느정도 인정해 주고 부소의 인품을 생각해보면 폭군도 암군도 아닐테니 대의명분이 없고 그럼 병력이 따를리도 없을것이다. 물론 대의명분 없이 병력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민심은 잃었을 것이고 민심버린 코른의 초즌 워리어인품하난 쩌는 분중 누가 최후의 승자였는지 보면 결과는 나온다.
  7. 북쪽 호인 출신으로 삼국시대의 비의는 한자가 다르다.
  8. 공자 장의 대왕 분봉 시도도 단순한 미안한 감정 때문이 아닌, 권한과 명분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