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昱
생몰년도 미상
낭야 사람으로 몸을 깨끗이 하고 악을 미워하면서 뜻을 숨기고 학문을 즐겼으며, 비록 친구라도 경솔하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귀는 헛된 것을 듣지 않고 눈은 허망한 것을 보지 않는 인품이었으며, 13세 때 어머니가 3개월간 병상에 있자 슬픈 나머지 몸이 여위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자 고향 사람들이 그 효행을 기렸다.
충불이 방정으로 추천했고 서주에서 왕랑, 장소와 함께 이름을 날린 서주의 명사로 함께 벗으로 사귀었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군현은 병사를 동원했고 조욱이 먼저 이에 응하면서 서주자사 파지가 조정에 조욱을 공훈 제일로 상소해 은상을 내리게 했지만 조욱은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충성스럽고 정직했지만 도겸으로부터 소원시되었고 여현의 장을 역임했다가 별가가 되었으며, 헌제가 삼보의 난으로 떠돌아다닐 때 사신을 보내 왕명을 받들고 계승해야 한다고 권했다. 이로 인해 조욱이 상주문을 받들고 조욱이 장안으로 파견되었다가 도겸이 안동장군이 되었고 도겸이 무재로 추천해 광릉태수에 임명되었다.
장굉을 효렴으로 천거했고 도겸이 장소를 무재로 천거했다가 응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체포되자 조욱이 온 힘을 기울여 장소를 구하려고 노력해 장소를 풀려나게 했다.
193년에 서주 대학살로 인해 착융이 광릉으로 도망쳤는데, 조욱은 착융이 오자 빈객을 대하는 예절로 그를 대우했지만 주연을 베풀 때를 틈타서 착융에게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조욱의 가문이 끊어졌고 장굉이 동부에 있을 때 주부를 파견해 낭야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조욱의 친척들의 후손을 찾기 위해 장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장패가 조욱의 문중에서 5살 짜리 남자 아이를 찾아내 조욱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