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Attachment/서주 대학살/006.jpg
이미지는 창천항로의 서주 대학살 묘사. 강을 막은 게 전부 사람의 시체다.
목차
1 개요
후한 말기의 군벌,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여 자행한 잔혹한 학살 사건을 말한다.
도겸의 침공을 막아낸 뒤, 193년 아들이 있는 연주의 허창을 향해 도겸의 영지를 지나가던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도겸이 보낸 장개와 수하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본래 조숭은 초나라 땅에 살고 있었지만, 군벌들이 합심하여 동탁을 토벌할때 그곳은 전쟁터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 난을 피하였는데, 조조가 이를 평정하고 연주를 근거지로 세력이 안정되자, 아들의 초청을 받은 조숭은 연주로 향했던 것이다. 당시 조숭은 낭야로 가서 난을 피하였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서주는 전란으로부터 안전한 곳처럼 여겨졌는데, 서주목 도겸이 자신의 아들인 조조와 충돌하니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전 재산을 싸들고 도망치다가 조조와 도겸이 전쟁을 하여 혼란 속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거나 이를 빌미로 조조는 도겸의 관할지인 서주에 쳐들어갔지만 이기지 못했고, 분풀이로 후퇴하며 서주의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조조를 덮어주려는 사람들은 청주병의 출신이 황건적인 점을 들어 조조를 변호하지만, 청주병을 본인의 휘하에 두고 그들을 통솔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조조였으므로 변명의 여지는 없다. 더욱이 황건적들은 일반 백성들이 봉기하여 일어난 거대한 반란 세력이었다.《정사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한 진수마저 서주대학살에 대하여 살육이란 단어로 묘사한다. 193년 이때가 1차 학살이다.
이후 194년에도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을 세워 다시 서주에 쳐들어가는데, 이때 또 다시 2차로 백성들을 대규모 학살했다. 백성의 시체로 강이 메워졌다고 기록되었고 진수 역시 백성들을 잔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도륙된 사람들은 서주 토박이 외에 전란을 피하여 관중에서 이주해 온 피난민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진행
2.1 군웅할거
동탁의 전횡에 반발해 제후들이 동맹을 맺었다. 원술의 부하 손견이 분전해 낙양까지 진군하나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했다. 목표를 잃은 제후들은 친원소파(유우, 조조, 유표)와 친원술파(공손찬, 도겸, 손견)로 갈려 서로 싸운다. 두 군벌 세력은 다른 군벌들과 제휴를 맺어가며 서로서로를 견제했는데, 이것이 공손찬의 종제 공손월의 죽음으로 터진다.[1] 192년 공손찬은 대군을 이끌고 계교에서 싸우나 국의의 전술에 크게 패한다.
2.2 도겸의 1차 침공
우독(于毒), 백요(白繞), 수고(眭固)[2] 등의 흑산적(黑山賊) 10여만 명이 위군, 동군을 공략하였으나, 왕굉이 막을 수 없어, 태조가 병사를 이끌고 동군에 들어가 복양(濮陽)에서 백요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원소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태조를 동군 태수로 삼고, 동무양(東武陽)을 다스리게 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2
이 당시만 해도 조조는 원소의 수하였다.
원술과 원소와 사이가 벌어지자, 원술이 공손찬(公孫瓚)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공손찬이 유비를 보내 고당(高唐)에 주둔하고, 선경(單經)은 평원(平原)에 도겸(陶謙)은 발한(發干)에 주둔하면서 원소를 압박하게 하였다. 태조가 원소와 합쳐 공격하여 그들을 모두 격파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2
조조는 192년 여름에 황건적을 크게 격파해 이기고 연주목에 오르며 청주병을 얻는다. 이때 원소와 원술-공손찬은 크게 대립하고 있었고, 마침내 계교 전투가 벌어진다. 그와 동시에 공손찬은 휘하의 연주자사 선경, 별부사마 유비와 동맹인 서주목 도겸의 군대로 조조를 치나, 조조는 이를 격파한다.
선경은 평원군 평원현, 유비는 평원군 고당현에 주둔한데 비해 도겸은 연주 동군 발한현에 주둔했다.
2.3 도겸의 2차 침공
193년 헌제는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와 태복(太僕) 조기(趙岐)를 시켜 둘의 분쟁을 화해하게 하였다. 이 시기 원담이 유비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선다. 하지만 원술-도겸과 조조의 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4년(193) 봄, 견성(鄄城)에 주둔하였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군량보급로를 끊으니, 원술이 군대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封丘)에 주둔하였으며, 흑산의 나머지 적들과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이 장수 유상(劉詳)을 시켜 광정(匡亭)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광정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원술이 퇴각하여 봉구를 보전하니, 마침내 이를 포위하였고, 합쳐지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으로 패주하니,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도착하여 도랑의 물을 터뜨려 성을 수공(水攻)하였다. 영릉(寧陵)으로 패주하니, 또 추격하여 구강(九江)으로 패주시켰다.여름, 태조가 돌아와 정도(定陶)에 주둔하였다.
하비(下邳)사람 궐선(闕宣)이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천자라 자칭하였다. 서주목 도겸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와 비(費)현을 취하고, 임성을 공략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2
193년 도겸은 궐선과 함께 다시 군대를 일으켜 연주 태산군의 두 현을 취하고 임성국을 공격했다. 궐선은 이후 도겸에게 죽는다.
그런데 이 화현과 비현은 다른 곳에서도 언급된다.
흥평(興平) 원년(194) 봄, 태조가 서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 태조의 부친 조숭(曹嵩)이 관직을 버린 후에 초현으로 돌아왔는데, 동탁의 난 때에서 난을 피해 낭야(瑯邪)에 가 있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래서 태조가 동쪽으로 정벌하여 복수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주 :『세어』에 이르길 「조숭은 태산군 화현에 있었다. 태조가 태산군 태수 응소(應劭)에게 영을 내려 자기 가족을 연주로 모시게 했는데, 응소의 병력이 채 이르기 전에, 도겸이 비밀리에 보낸 수천기에 붙잡혔다. 조숭의 가족들은 응송의 영접인 줄 알고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도겸의 병사가 이르자, 태조의 동생 조덕(曹德)을 문 가운데서 죽였다. 조숭이 두려워 하자, 먼저 그 첩를 나가게 했는데, 첩이 뚱뚱하여 문을 나갈 수 없었다. 조숭이 측간으로 달아나다 첩과 함께 해를 입고, 온 집안이 모두 죽었다. 응소가 두려워서 관직을 버리고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후에 태조가 기주(冀州)를 평정하니, 응소는 이 때 이미 죽었다.」고 한다. 위요(韋曜)의 『오서(吳書)』에 이르길 「태조가 조숭을 맞이하면 보낸 물자수레가 2백대였다. 도겸은 도위(都尉) 장개(張闓)를 보내 기병 2백명을 거느리고 호위하며 전송하게 했다. 장개가 태산군의 화현과 비현 사이에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여, 이로 인해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그 허물을 도겸에게 돌리고 그래서 정벌한 것이다」라 한다.
삼국지 『무제기』 3
2.4 조숭일가의 몰살기록
조숭이 살해당한 정확한 년도와 날짜는 불명확하지만 대략적으로 초평 4년 (193년)으로 추정된다.[3] 삼국지 무제기, 후한서, 삼국지 도겸열전에는 모두 초평 4년(19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고 무제기에 193년 가을, 조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분명 존재하고 이때 명분이 조숭 때문이다. 후한서, 정사 삼국지 도겸전을 봐도 어찌되었던 사건의 발생은 1차 대학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기에 따르면 193년에 조조가 1차 침공의 명분을 일가의 학살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다만 몰살의 주체가 사서마다 다른데, 두 가지의 기록이 전해진다, 하나는 정사 무제기 주석 세어[4]의 기록으로 도겸이 수천기를 보내 조숭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후한서 응소전의 기록도 이와 같다. 다른 기록은 역시 정사 삼국지 무제기 주석 오서의 기록으로 조조가 보낸 짐수레만 백여대였고 도겸이 도위 장개를 보내 조숭을 허창까지 호송해주려 하였는데, 본래 도적 출신이었던 장개가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고 회남으로 도주했으며 조조는 이를 도겸의 허물로 돌리고 이 때문에 그를 정벌했다고 한다. 정사 삼국지 도겸전에도 오서의 기록만 주석으로 인용하여 같은 서술이 되어 있다. 후한서 도겸열전도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졸들이 조숭의 재보에 눈이 뒤집혀 그를 습격하여 죽여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에는 '전임 태위 조숭이 난을 피하여 낭야에 있었는데, 아들 조조가 태산 태수 응소에게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조숭의 치중은 100여 대였다.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켰는데 병사들이 조숭의 재보를 탐내 화현과 비현 사이에서 조숭을 엄습하여 죽이고 아울러 어린 아들 조덕추도 죽였다.'라고 후한서 삼국지 도겸열전, 오서의 기록을 사용한것으로 보인다. 이후 주석들도 오서쪽 내용에 손을 들어 주고 있는데 오서의 내용인 '조조는 격문을 띄워 도겸에게 허물을 씌우고 서주를 정벌하려고 했다'는 기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5 조조의 1차 침공
오서 왈 – 조공의 부친이 태산에서 피살되자 도겸에게 그 허물을 돌리고 도겸을 정벌하고자 했는데 그가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표를 올려 주군에 일시 파병(罷兵-군대해산)을 명하도록 했다. 조서에서, "…(생략)…"라 했다. 도겸은 조서를 받고 이내 상서하여, "…(생략)…"라 했다. 조공은 도겸의 상주문을 받아보고 그가 파병하지 않으려 함을 알고 이에 진격하여 팽성을 공격해 인민들을 다수 죽였다. 도겸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고 청주자사 전해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구원하니 공은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신 송지가 보건대, 이때 천자는 장안에 있었고 조공이 아직 정무를 장악하지 않았을 때이니, 파병(罷兵)의 조서는 조씨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국지 『도겸전』
태조가 도겸(陶謙)을 정벌할 때, 자기 집안에 일러두길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탁에게 가서 의지하라"고 했다. 후에 돌아와 맹탁을 만나고서는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친근함이 이와 같았다.
삼국지 『장막전』 1
서주를 정벌하는데 종군하였는데, 조인은 항상 기병을 독려하여 군의 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陶謙)의 장수 여유(呂由)를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돌아와 대군과 팽성(彭城)에서 합류하여 도겸 군을 대파했다.
삼국지 『조인전』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하여 10여 성을 항복시켰지만, 도겸을 성을 수비하며 감히 나오지 않았다.
삼국지 『무제기』 2
초평 4년(193)에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고 십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팽성에서 도겸과 크게 싸웠다. 도겸의 군대는 패한 후 도주하였는데, 죽은 자의 수가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사수는 시체로 막혀 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도겸은 물러나 담성을 지켰다. 조조는 양식이 부족하였으므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지 『도겸전』
태조(조조)가 당도하여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만 명을 갱살(坑殺)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도겸이 그 군사를 이끌고 원무(팽성 원무현)에 주둔하자 태조는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을 따라 취려, 수릉, 하구의 여러 현들을 공격해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삼국지 『조만전』
초평4년 조조는 도겸을 공격하여 팽성의 부양을 격파하였다. 도겸이 퇴각하여 담에서 농성하자 조조는 이곳을 공격하여도 함락치 못하여 퇴각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취려, 저릉, 하구를 함락하여 모두 도륙했다. 죽은자가 십만에 달하였고, 닭이나 개도 남기지 않았으며 사수는 이 때문에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 이 후 다섯 개 현의 성곽에는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본래 삼보는 이각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이 도망와 도겸에게 몸을 의탁하여 머문 곳인데, 모두 멸하여졌다.
후한서 『도겸열전』
(초평 4년) 가을,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공격해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웠는데, 도겸군이 패하자 달아나 담현을 보전했다. 당초, 경(京), 락(雒)에서 동탁의 난을 만나자 백성들이 유이(流移-유망, 유랑)하여 동쪽으로 나와 서주 땅(徐土)에 의탁한 자가 많았는데, 조조가 당도하여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조조는 담현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이내 떠나서 취려(取慮), 수릉, 하구의 여러 현을 공격해 차지하고 이들을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자치통감
조조는 일단 도겸의 세력이 강한 것을 봐서 외교전을 시도했다는 일화까지 나올 정도로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고 배송지가 지적하지만) 조조는 도겸을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친족을 진류 태수 장막에게 부탁한다.
출진한 조조는 조인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삼아 도겸군을 격파하고 10여 개 성을 함락시킨다. 그 후 조인의 별동대와 합류한 뒤 팽성에서 전투를 치른다. 도겸은 대패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기가 죽은 도겸은 함부로 나오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장기간의 원정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양식이 부족해져서 군사를 물렸다.
문제가 되는 건, 조만전에는 팽성국 원무현으로 후퇴했다는 부분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담현으로 후퇴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지명 오기 같은 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자치통감에서는 해당 내용을 선해하여 기록했다. 자치통감은 조선에서 중국사의 교재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신뢰성이 높으니 그 쪽을 받아들이는게 맞다.
2.6 조조의 2차 침공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5성을 함락시켰으며, 마침내 공략한 땅이 동해에까지 이르렀다. 돌아와 담(郯)현을 지나는데, 도겸이 조표(曹豹)와 유비를 보내 담현 동쪽에 주둔하면서 태조를 요격하게 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한 곳이 많았다.주: 손성이 이르길 「무릇 죄악을 정벌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 예부터의 아름다운 궤범(軌範)이다. 죄지은 도겸 때문에 그 속부(屬部)를 잔멸시킨 것은 잘못이다.」고 한다.
삼국지 『무제기』 3
비(費), 화(華), 즉묵(卽墨), 개양(開陽) 공격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삼국지 『조인전』
흥평 원년(194)에 조조는 재차 동쪽 정벌에 나서서 낭야와 동해의 몇 개 현을 평정시켰다. 도겸은 두려워하며 단양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마침 이 때, 장막이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를 맞아들였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돌려 여포를 공격했다. 이 해, 도겸은 병으로 죽었다.
삼국지 『도겸전』
조조가 사마 순욱, 수장령 정욱을 시켜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가서 도겸을 공격했다. 땅을 공략하며 마침내 낭야, 동해에까지 이르렀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시켰다.
자치통감
양분은 동해군 양분현을 말하고, 담현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다. 이때 역시 분명히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진수, 손성, 배송지, 사마광 등이 일제히 잔멸이라는 용어를 써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표현했다.
〈무제기〉의 표현은 여포가 연주를 차지해 돌아가 담현을 지나는데 조표와 유비가 동쪽에서 요격했다고 한다. 조조는 이를 격파하고 담현을 지나쳐 담현 서쪽의 양분현을 함락시켰다. <조인전>에서는 조인이 비, 화, 즉묵, 개양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고 한다. 여기서 '별장'에 해당되는 건 무제기의 기록을 볼 때, 조표와 유비로 판단된다.
3 영향
서주를 지배하고 연주, 예주, 양주(楊州)의 일부까지 영향력을 미치던 도겸의 힘은 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하여 크게 쇠퇴한다. 태산군과 임성국을 잃고 팽성국은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졌으며, 낭야국과 동해군(어쩌면 하비국을 포함하는)에서는 조조군의 병사들이 학살까지 저질렀다. 광릉군도 설례와 착융의 약탈을 겪고 서주백을 자칭한 원술의 침입을 받는다. 원술은 오경을 광릉태수로 명하고 노숙에게는 동성현장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유비는 하비로 치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하비의 피해가 적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후 하비는 유비, 여포, 원술, 조조의 각축장으로 변해 노숙에게 "회수와 사수 사이에는 자손을 남길 땅이 없다"는 말까지 듣는다.
팽성상 설례와 하비상 착융은 양주로 도망치고, 그 와중에 광릉태수 조욱도 사망한다. 기도위 장패는 독립해 소규모 군벌이 된다.
그렇게까지 털었는데도 조조랑 여포가 싸우는 연주보다는 상태가 좋았는지, 아니면 하비 일대는 멀쩡했는지 거듭된 싸움으로 인해 식량이 궁해진 조조가 서주를 다시 치려 하자,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위벌(威罰)이 실행되어 二 그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의 치욕을 생각하니 필시 사람들마다 스스로 지키려 하며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격파할 수 있다 해도 가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정사 순욱전[5]
여기서 二에 조만전이 주석으로 들어간다.
그 외에도 제갈량의 일가가 형주로 이주한 시기가 서주 대학살이 벌어진 시기와 비슷해서 제갈량의 집안이 서주 대학살로 어떤 형태로던 피해를 입은 것 아니냐는 설도 있다. 삼국지 공명전 등에서는 이 설을 채용해 제갈량이 어린 시절 서주 일대에 살다가 조조가 학살을 저지르자 형주로 피난갔다는 식의 내용이 나온다.
4 학살의 영향
우선 조조의 근거지였던 연주 지역의 명사, 주민들이 크게 조조에게 반발하여 모반을 꾀했고, 여포가 장막, 진궁과 함께 연주에서 조조의 세력을 위협할 만큼 크게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흔히들 여포의 뒤치기를 단순하게 조조의 주력이 떠난 사이 여포가 습격하고 진궁이 배반하여 그에 동조했다는 정도로 보는 사람이 많은데, 이 당시 여포는 원소의 객장으로 있다가 쫓겨나 장양에게 의지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로 도저히 그럴 처지가 아니었고, 진궁, 장막 또한 조조 진영내에서 그리 큰 세력이 아니었다.[6] 이렇게 전력이 거의 없었던 그들이 조조의 세력을 크게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서주대학살에서 보여진 조조의 잔혹성 때문에 그로부터 등을 돌린 연주의 명사들이 엄청나게 많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이 일과는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살육했던 조조는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즉시 복수를 포기하여 회군하고 마니, 조조의 서주 정벌 실패에도 기여했다고 평할 수 있다.
형주에서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 도망간 데에는 이 서주대학살로 인한 조조의 악명이 큰 몫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을 바탕으로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이때 백성들이 누가 뭐라 하기 전에 "조조가 오면 다 죽는다!"면서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다.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에서는 제갈량이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가 어렸을 적에 겪은 서주대학살을 설명한다.[7]
또한 삼국지 공명전에서도 서주대학살 때 어린 공명이 가족과 함께 도피하는 부분이 프롤로그로 나오는데, 조조군의 학살로 인하여 그는 부모를 잃고 형 제갈근과 아우 제갈균과 함께 셋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피난길에 서주를 구원하러 가는 유비를 보고 제갈량이 감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하튼 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 공명은 조조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이후 서주를 구하러 간 유비에게 출사하여 조조가 형주로 진격하였을 때 적벽대전에서 크게 복수하였다.
그리고 서주에서 일어난 학살을 피해 달아났던 재사들은 근처에 있던 강동으로 피해 훗날 오나라에 출사한 경우가 많았다.[8] 결국 서주 대학살은 훗날 조조와 맞서게 될 유비와 손권 측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 것이다. 유비에게는 학살자 조조에 맞서는 영웅의 명성과 당위성을 주었고, 손권에게는 많은 인재를 주면서 오나라에 맞서야할 후방 지역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삼갤의 한 능력자가 학살이 시작된 193년부터 유비가 서주에서 쫒겨나는 200년까지의 삼국지 인물들의 열전을 모두 찾아봐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 당시 서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오나라의 장소(서주 팽성), 제갈근(서주 낭야), 보즐(서주 하비), 노숙(서주 임회 → 하비), 여대(서주 광릉), 촉나라의 제갈량(서주 낭야), 미축(서주 동해)로, 그야말로 각 나라의 중신들이다. 이 사람들이 이때를 기점으로 서주를 떠나 타지역에 정착하는데 특히 오나라에 중용되어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어떻게 보면 조조가 통일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고 당대와 후세에까지 큰 오명과 원한,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는 이렇게 조조가 스스로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설사 조조가 적벽대전 승리 이후 통일 이루었다고 해도 서주 대학살이라는 악명 때문에 증오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그래도 조조는 스스로 승상에 머물렀으니, 자신은 황제의 자리에 뜻이 없었고 아들 조비도 그 뜻을 천천히 이루기를 바랬던 것 같다. 이를 두고 조조는 죽을 때까지 국가의 수반이 아닌 환관 귀족 출신의 심리적 기반에서 행동했다며, 조조의 개인적이고 세도적인 성향에서 나온 결과물의 하나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5 이유
후세에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행해진 일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말 조조가 아버지를 잃은 분노와 원한을 제어하지 못하고 부모의 원수를 애꿎은 서주의 백성들에게 갚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조조는 문학에서든 개인적인 대화에서든 당시로써는 드물게 자신의 감정을 항상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고, 젊었을 때는 추씨를 범하다가 장수에게 반격당해 아들을 잃거나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십상시 장양의 방에 뛰어들어 칼부림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등 감정적으로 행동해 몸을 망친 적이 꽤 있는, 상당히 성정이 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몽골의 칭기즈 칸처럼 공포를 적 사이에 퍼뜨리기 위해 본보기를 보였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복수로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조조의 세력권 안에 들 수 있었던 명사들을 모조리 남하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고, 도겸은 항복하긴 커녕 계속 항전했으며,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결국 후에 조조 자신의 영토가 될, 중원의 알토란 땅인 서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게다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도 너무나도 많았으며, 조조에 대한 공포는 식자와 민중 사이에 아로새겨져서 조조가 아무리 그럴싸한 정책을 수립해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켜도 사람들은 조조를 쉽게 믿지 않았다. 즉 만약 이 목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면 완전한, 평생 그 부작용이 두고두고 이어진 대실패다.
간혹가다가 지도상의 서주 크기가 그리 크다지 않아서, 서주 대학살이 큰 규모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서주가 중요한 땅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기록상의 서주는 정사에서나 연의에서나 교통의 요지로 조조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기록되며, 조조 역시 여포의 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는 신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주를 공격했고, 역시 원소가 빈 허창을 공격해 헌제를 뺏어갈수 있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끌어모아 유비가 있는 서주를 공격했다. 원소가 자기 아들이 아프다는 이유로 조조를 치지 않아 성공했지만, 오나라 역시 합비 공방전 당시 합비 → 서주 → 위 공략 루트를 타려는게 주요 전략이었다. 손제리가 괜히 여기다 그렇게 꼴아박은 게 아닌 거다.
굳이 정사상의 기록을 들출 필요도 없이 서주의 크기는 익주의 불과 1/10조차 되지 않는데, 현의 개수는 익주의 1/2를 넘었다는 것만 봐도 다른 여러 주들과 동등한 주로 대우받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너무나 간단히 반박 가능한 사실이다. 그리고 주는 아무 기준 없이 대충 선 그어서 만들어지는 행정분류가 아니라 엄연히 각 주의 인구, 정치적 중요성들을 고려해서 구분된다. 게다가 서주는 어디 멀리 산골짜기속의 분지나 접경지대에 위치한 주가 아니라, 한족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사통팔달로 교통의 요지가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분쟁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의 요충지가 서주다. 심지어 항우가 패왕에 올라 전중국을 호령할때 본인의 근거지로 삼은곳은 팽성 즉 서주이고 이는 고향인 초나라땅과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유사시 공격가기 좋은 교통의 요지였기때문이다. 물론 이는 공격받기 쉽다는 말도 되긴한다.
따라서 조조가 서주 대학살을 일으킨 이유는
- 정치적 목적에 의한 계획적 학살
- 아버지를 잃고 눈이 뒤집혀 벌인 만행
두 가지로 나뉜다. 후세의 창작물은 대부분 조조의 캐릭터성을 망치지 않기 위해 전자를 택하지만, 이런저런 사료를 들춰 보면 후자로 볼 근거도 꽤 많기 때문에 사실상 현재는 추측밖에 할 수 없다. 가령 삼국(드라마)에서는 조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오직 서주를 칠 구실로만 활용할 뿐 사실은 그닥 분노하지 않았으며, 그 많은 포로와 민중을 먹여살릴 도리가 없으니 그냥 죽여 없애자며 상당히 단순한 동기로 학살을 명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런 동기로 학살을 했던 인물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막장이지만.
단, 후자의 해석을 택하면 눈이 뒤집힌 조조가 여포가 근거지를 쳤다는 소식에 재빨리 철군 결정을 했다는 사실에 의문이 남는다. 복수의 목표인 도겸은 멀쩡히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친지의 죽음에 대한 명분으로 복수극을 벌인 유비는 이릉대전 끝까지 명분(의리)를 고집하며 백제성에서 재기를 노리다가 병사하여 죽는다. 그러나 조조는 양민을 학살하다가 자신이 피해를 볼 처지가 오자 바로 복수를 포기한다. 물론 단순히 제정신을 차리거나 참모들이 만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조조는 감정적으로 일을 저지른 적은 많지만 이후에는 충고를 받아들인 경우가 많은 인물이다. 단, 이렇다보니 유비만큼 복수에 대한 명분이 개운치는 못했다는 점에서 뒷처리가 더욱 허전한 면도 있다.[9]
6 당시의 여론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고대사회이고 상 왕조 이래 잔혹한 풍습에 상당히 익숙했던 고대 중국에서도 인명을 많이 살상한 사람은 절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백기, 항우 등도 가는 곳마다 학살을 저지르면서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조조와 동 시대인인 사마의 역시도 공손연의 세력을 궤멸시키면서 요동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시체를 쌓아 전승비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사마씨도 오래 못 가겠구나"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후손조차도 그런 조상을 뒀으니 자기 나라는 망할 거라는 논리의 여론이 있었다.
조위 정통론을 내세우는 진수조차도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坑殺(갱살: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 하여 죽임)이라는 잔학한 뉘앙스로 기술[10]하였으며, 이는 조조를 창업군주로 받드는 서진의 정치적 입장에 입각하여 쓴 글로써는 상당히 직설적인 표현이다. 즉, 조조의 행위는 당시에도, 조조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하는 정치집단의 일원조차 그가 일으킨 서주대학살을 좋게 평가하지 못할 만큼 표독스럽고 악독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주인공이 되는 인물의 악행을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는 기전체 형식으로 쓰여진 〈무제기〉에서까지 주인공이자 창업군주인 조조는 줄기차게 비판당한다. 원서인 《정사 삼국지》의 진수와 이 책에 주를 단 배송지도 '갱살'이라는 어휘까지 사용하여 부정적으로 기술했고, 이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후대의 역사서인 《후한서》의 범엽(남북조시대) 역시 이 사건에 대해 크게 개탄하며 이를 준엄하게 비판했다.
관도대전 직전 원소가 선포한 격문에서, 진림이 조조의 조상까지 들먹이면서 조조를 철저하게 비난하였는데, 그가 그런 방식으로 조조를 비난할 것이였다면, 조조가 대한 모든 부정적인 점들을 문장으로 옮겼을 텐데, 그가 스스로 붓을 들어 쓴 조조를 비난하는 내용의 격문에서 조조에 의하여 서주에서 벌어진 큰 학살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어떤 이들은 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원소가 천하의 중소군벌들에게 격문을 띄운 이유는 전국에 난립한 중소군벌들에게 조조를 적으로 돌릴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조의 학살을 과장하여 이를 격문의 내용에 넣는다면 오히려 뭇 군벌들의 조조에 대한 공포심을 부추길 우려가 있었다. 또한 원소 역시 조조의 서주 침공 당시 장수 주령을 보내 조조를 지원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원소 역시 서주 대학살에 대하여 떳떳하지 못했기에 진림은 이를 격문에서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난세에는 다들 비슷한 짓을 했다'는 피장파장의 오류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다. 원소나 다른 군주들 역시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한 기록은 발견되며, 이들도 다른 자들을 비난할 처지가 아니기는 하다. 그러나 유비는 학살이나 약탈 모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탈과 군단위로 이루어진 대규모 학살극은 엄연히 다르고 후자가 더욱 끔찍한 범죄이다. 게다가 조조는 신체 건강한 남성은 기본으로 힘 없는 여성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까지 수십만이나 도륙하여 거대한 강이 시체로 가득차 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런 규모의 학살은 그 당시 시대는 물론이고 중국사 전체를 살펴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과거 항우가 학살을 자행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한고제 유방은 인심을 배풀어 민심을 끌어모아 천하를 얻었던 것처럼, 유비가 대중들의 기억에 좋은 군주로써 각인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늘상 비판의 여지가 다분한 행보를 보였던 조조와 반대되는 모습을 뭇 대중들에게 늘상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서주대학살과 같은 조조의 악독함의 현실화는 오히려 유비와 손권의 세력을 키워주는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할 될 수 있다.
7 학살에 대한 해석
현대에 서주 대학살이란 명칭이 한국 삼국지 팬덤에 의해서 부각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에서 서주 대학살이라는 명칭과 이미지는 한국 팬덤이 만든것이 아니라 2000년에 한국에 발간된 한 일본의 삼국지 인물평가 서적에서부터 처음으로 등장했다.[11] 상술했듯이 서주의 학살은 당시부터 조조의 나쁜 이미지를 만들고 쌓아나가는 데 일조한 일이지만, 인권 사상이 없던 고대에는 민중에 대한 학살보다 한두 명사를 죽인 것이 고대 지식인들에게 더 크게 까였다.
기록을 보면 서주에서의 학살보다는 오히려 현대에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명사인 변양을 살해한 일이 크게 언급되어 있고, 진궁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끌어들인 사건에 대한 설명, 진림의 격문 등에는 서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 [12] 당대 지식인들의 눈으로 볼 때 서주에서의 학살이 명사 살해보다는 다소 중요도가 낮은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명사 살해보다 중요도가 낮을 뿐이지 6번 항목에서 서술했듯 그 당시의 관점으로도 대규모의 학살은 비판받을 일이 맞다.
조조의 악행을 상당히 부각시킨 《삼국지연의》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관련된 전설이나 경극 같은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다는 걸 근거로 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서주 대학살이 당대의 지식인들은 물론 민중들에게도 별거 아닌 사건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당시와 얼마 시간차가 없는 남북조 시대의 세설신어 같은 문헌에도 조조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 사건 때문에 민중 사이에 폭넓게 조조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퍼졌다는 추론이 합당하고,[13] 삼국지 정사 기록을 보면 대표적으로 형주침공 등 조조를 피해 백성이 도망친 기록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는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 한다.
애초에 중국 역사상 어느 학살 사건도 전설이나 경극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다 동일하기 때문이다. 삼국지 연의의 내용을 근거로 서주 대학살의 나관중과 같은 고대의 지식인들이나 그 당시의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엄연한 비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극이나 소설 등은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하고, 이런 작품들에서 백성만 대거 죽어난 사건이었을 뿐 딱히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서주대학살을 다룰 이유가 없다. 이것이 다루어진다면 재미와 대중성 둘다 해치는 길일 것이다. 실제로 삼국지 평화를 비롯해서 대다수 경극에서 서주 전투 자체가 생략된 경우가 많다. 삼국지 평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삼국지 연의 역시 마찬가지로 이해하는게 옳다.
6번 항목과 7번 항목을 종합하면, 서주 대학살은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비판받는 행동은 맞으나 명사들 몇명 살해한 사건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졌다. 일부 현대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은 이 사건을 명사들을 죽인 사건보다 더 큰 문제로 보았고, 최소한으로 봐도 백성들에게 상당히 나쁜 이미지가 형성되는데 이바지한 사건이다.
결국 현대에 조조가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하고 또 인권과 민주주의 사상의 대두로 인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규정되면서, 기존에는 비중이 컸던 명사 살해에 대한 악행은 별거 아닌 수준으로 하락하는 대신에 비중이 덜했던 그의 악행이 새롭게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조는 학살을 이 때만 벌인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벌였는데, 여포군을 공격할 때 팽성을 함락해 학살하거나 관도대전 때 원소군 포로 8만명을 생매장하고, 순우경 휘하의 천여 명을 죽여 그들의 코를 잘랐다.
8 창작물에서
삼국지 매체의 원조인 연의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이 때문에 조조가 재평가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 사건은 전혀 조명받지 못했었다. 정사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서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 사건은 서서히 알려졌지만, 그마저도 '군웅할거의 난세 속에서의 일반적인 학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재평가되면서 이 사건 역시 재조명되었으며, 재조명됨에 따라 이 사건은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이자 치부로써 부각되었으며, 이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기류를 막게 되었다. 이 사건은 여백사 사건과 결합함으로써 조조라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바뀌게 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조조에 대한 해석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 조조를 냉혈한이 아닌, 기존의 연의를 중심으로 해석된 '냉정하고 포부가 크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호걸'이라고 해석되는 매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 사건을 은근슬쩍 축소시키거나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심한 경우 아예 없었던 일 취급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백성들이 "조조가 오면 다 죽는다"고 패닉하는 묘사는 나오나 직접적인 학살의 묘사는 없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한 컷만 나오지만 조조의 학살이 인디언을 학살한 솔저 블루나 베트남전의 밀라이 학살에 대놓고 비유된다.
《화봉요원》에선 서주의 양민들을 1만 명 가량 도륙한 것은 사실이나, 조조가 새로 얻은 군사인 곽가의 암흑병법으로 30만을 학살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설명된다. 서주 군민들에게 조조군의 잔혹성을 각인시킴으로써 저항할 의지 자체를 상실시켜 버리자는 어마어마한 뻥카. 곽가 자신이 '대의를 위한 희생'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 암흑병법을 구사하는 책사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한편 제갈량은 학살의 희생자들을 부등켜 안고 '눈물조차 다 말라버렸다'고 독백하면서 심리적으로 조조세력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얼핏 보면 서주대학살의 진상을 과장으로 일축해 버리는 황당무계한 전개지만, 합리적으로 따져 보면 은근슬쩍 말이 된다는 것이 함정(...). 애초에 서주대학살 자체보다 더 황당해질 수도 없다
드라마 삼국에선 조조가 자신의 군은 수많은 백성들을 먹여살릴 군량미가 없다고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명령을 내린 직후 여포가 연주를 공격했다는 정보가 도달해, 명령을 시행하기 전에 조조군이 철군한 것으로 나오므로 극 중의 비중은 거의 없다. 한마디로 없었던 일 취급한다. 이 때문에 작품 자체가 조조빠 성향이 강하다는 말도 있다. 그나마 조조의 다른 비정하고 음흉한 면들도 묘사하기는 하지만.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서주 보복전"이라는 미션이 있으며 유비가 등장하는 턴에서 유비의 대사 중에 조조군이 서주 백성들을 학살한다는 대사가 있다.
《창천항로》에서는 시체가 강을 한가득 메우고 있는 장면이 두 페이지를 할애하여 묘사가 되었다. 극렬 조조빠 창작물치고는 의외로 묘사 만큼은 솔직하게 했다. 작중 유비 삼형제의 입을 빌어 이는 악행이며 대학살이고 참상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고, 도겸도 "조조가 죄없는 우리 서주 백성들을 학살했다"고 말했다. 조조군의 학살행위 자체를 '정당한 행위이거나 마땅히 죽였어야 했다' 라고 한 부분은 없다. 까여야 할 곳은 학살 행위 그 자체와 마치 인간이 아닌 듯, 그러한 학살을 하고도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듯한 조조의 캐릭터 그 자체이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학살했다는 묘사자체가 아예 안 나오며 그저 침공을 했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고 어거지로 대강 넘겼다. 비판을 받자 나중에 사마의 사후를 묘사할 즈음에 지나가는 투로 살짝 언급된다... 지만 사실 <북해 전투5>에서 폭발한 조조가 서주에 사는 쥐새끼 한마리, 풀 한포기 안남기겠단 발언을 하긴 했다. 직접 표현은 안 됐지만. 근데 여담으로 이부분 자체가 조조를 띄우기 위해 도겸을 찌질이로 만든 경향이 있다.[14] 정사기록을 따르면 애초에 도겸이 조조를 친건 찌질해서가 아니라 공손찬과의 동맹 때문이었다. 또한 작가의 착각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10여성을 뺏긴것도 또한 가을이라 기술되어 있으므로 조숭이 죽은 후이다. 애초에 1차 학살자체가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였으나, 도겸의 수비가 굳어 어쩌지 못하자 후퇴하면서 화풀이 겸 학살을 한것이다. 그러므로 도겸이 겁을 먹어 조숭가지고 협박하다가 실수로 죽였다는건 어폐가 있다. 애초에 위진세어와 오서가 충돌했는데 오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위진세어의 기록을 따랐는데 위진세어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역사서가 아니다. [15] 이는 제갈량의 북벌논란에서도 제기 되었듯이 작가가 사서간 애초에 위진세어는 사서도 아니다 내용이 충돌하면 그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내용이라도 지 입맛에 따라 고른다는 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 삼국지 12의 경우엔 아예 대놓고 조조가 서주에 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학살을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단 한번도 서주 대학살을 다루지 않고 있다. 이미 조조를 야심차고 고독한 패왕으로 묘사하다보니까 그의 이런 캐릭터에 해가 될 수 있는 서주 대학살 묘사를 의도적으로 안 넣는 걸로 보인다. 그나마 서주에서 싸우는 것도 조조가 세력을 확장할 때 도겸이 괜히 걸려든 걸로 묘사된다. 단 6편 서주전투 촉편에선 진지 대화에서 서주 병사들이 조조군을 가차없는 자들, 귀신같은 존재라 칭하며 공포에 떠는 것으로 조조군의 잔학함을 간접적으로 묘사했다. 요코야마 삼국지 수준의 묘사라고 보면 된다.
평설 인물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도겸이 백성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우고 뒤에 숨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복수를 갈망하던 조조가 도겸의 목을 따러 가는데 방해가 되자 백성까지 죽이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학살이 발생했고, 도겸은 더이상 안되겠다 싶어 유비를 불렀는데 유비는 백성들을 뒤에 숨겨 보호했기 때문에 손건, 미축이 근거지까지 버리고 유비를 따라나선 계기가 된 것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건 조조와 유비만 돋보이기 위한 전형적인 영웅관 위주의 해석이고, 현실적으로는 말장난에 가까우니 주의하자. 도겸이 어떻게 백성들의 뒤에 숨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백성들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리도 없기 때문이다.- ↑ 사정은 18로 제후의 해체 참조.
- ↑ 眭 음은 반절법상 신수절(申隨切)로 ㅅㅣㄴ+ㅅㅜ의 합으로 인해 수가 된다.
- ↑ 유독 후한서 응소전에만 194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 곽반이 지은 필기소설집인 위진세어를 뜻한다. 책의 성격상 사실에 풍문이나 과장이 좀 섞인 쪽에 가까울 것이다.
- ↑ '위벌'이라고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서주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점에서, 순욱 역시 이걸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으니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 ↑ 조조가 장막을 연주목으로 내세운 것은 거의 세력이 없다시피 했던 진궁과는 장막이 달리 어느정도 명성과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 ↑ 실제로 제갈량의 고향은 서주 낭야현으로 그가 아직 어렸던 때에 서주에서 형주로 이주했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당대 서주 명사들이 급히 남하하였다는 점이 확인 된다.
- ↑ 양주 다음으로 오나라의 인재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 서주다.
- ↑ 여담이지만, 유비의 이릉대전은 당대의 역사가들도 딱히 비판하지 않는다. 그만큼 유비는 동료에 대한 명분을 중시했고, 학살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승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유비 쪽은 실리적인 문제 때문에 실패한 복수전이 되었지만, 오히려 내정의 균형면에서는 도움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애초에 유비가 오로 쳐들어가면서 조조마냥 학살을 한 적이 없잖아 - ↑ 진수의 삼국지 정사 모든 저서를 통틀어 학살을 뜻하는 단어가 쓰인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 ↑ 해당 책의 원본 출판연도를 계산해보면 일본에서는 90년대에 이미 이런 개념이 존재했다는 소리
- ↑ 다만, 진림의 격문을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위에 설명되어 있듯이 조조의 학살을 강조하면 도리어 군웅들이 조조에게 두려움을 품고 싸우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원소는 서주 침공 당시 장수 주령을 보내 지원했으므로 이 문제에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언급을 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 ↑ 예를 들어 《세설신어》에 보면 조조가 수면 중에 누군가가 다가오면 그 사람을 죽여버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는 몽중살인이라는 일화가 있다. 《세설신어》는 단순한 소설집이나 루머 모음집이지만, 당대 사람들이 특정 인물에 대하여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추측하는 데 이용되는 귀중한 사료이므로 남북조시대 사람이 조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 ↑ 정사에서 도겸은 탐관오리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름 고증에 맞긴하다.
- ↑ 곽반이 지은 필기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