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선인(역사)

1 개요

조의(皂衣, 皁衣, 帛衣[1])와 선인(先人, 仙人)은 고구려에 있었던 관등이다.

2 정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조의'와 '선인'은 초기 고구려에서 왕 또는 대가(大加)의 휘하에 있었다는 가신적 성격의 하위 직책으로 시작되었다.

그 구체적인 성격은 알 수 없지만, 동천왕이 오나라의 사신단을 조의 25명으로 호송하는 기록이 있어 조의는 무사적 기능을, 선인은 문사적 기능을 띠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4세기 경, 각 나부가 해체되면서 고구려에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등제가 성립되면서 조의는 사라지고 선인은 관등제 내에 편입되어 고구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최하위 관등으로 유지된다.

조의는 이후 고구려 말기에 이르러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이라는 관등이 다시 등장하는 사실과 연관성이 시사된다.

3 조의선인 무력집단설

1에서의 조의와 선인[2]을 하나로 연결하여 신라화랑과 유사한 무력집단으로 간주하는 주장이다.

주창자는 신채호로,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가장 처음 확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최영전에 언급된 고구려의 승군(僧軍)과 고려도경에 등장하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을 서로 동일시하고, 이 실체를 고구려의 조의-선인에 접목시켜 이것을 마치 신라의 화랑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으로 파악한 것이다. 신채호는 이러한 무사집단 및 사회적 중추 인재 양성집단의 성격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유는 당연히 일제시기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정신 고취와 상무적 기풍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신채호 외에는 담원 정인보가 이러한 주장을 하였는데, 그가 쓴 '의승장기허당대사사적비'의 내용을 보면 영규대사를 기리면서 한국의 고승들이 국난에 몸을 던진 것을 신라의 국선(화랑)과 고구려의 조의선인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들의 유풍이 불교에 스며들었다고 보았다.[3]

그러나 이외에 이렇다 할 증명 문헌이나 금석문이 있는 것은 아니며, 주창될 당시 상당부분 신채호의 추론과 직감에 의지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4] 애시당초 자료의 부족도 한 원인이지만 조의와 선인은 분리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단, 한원의 고려기 인용 부분과 신당서 고려전에는 조의와 선인을 하나의 실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를 통해 더욱더 확대 재생산되어, 드라마 연개소문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기에 이르렀다.[5] 그리고 최근에는 웹툰웹툰을 통해 퍼졌다.

4 선인(先人)과 선인(仙人)

조의-선인 가운데 선인의 표기가 先人인지 仙人인지는 인터넷상에서 오래 된 떡밥이다. 굳이 식민사학이 아니더라도 이런 저런 데서 수많은 얘기가 나오는 것이 사실인데... 결론적으로 현존하는 문헌에는 둘 다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정설을 보자.

『삼국지』 및 그를 전재하였다고 보는『후한서』와『양서』의 고구려전 관명에서는 ‘皁衣先人’으로 되어 있으며,『주서』·『북사』·『구당서』에서는 ‘仙人’으로, 그리고『신당서』와『한원』소인『고려기』에서는 ‘先人’으로 되어 있다.[6]

학계 일각에서는 조의나 선인의 가신적 구조 체계가 화랑-낭도로 구성되는 화랑도의 설립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정설은 아니고, 일부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썰 수준이다.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육군 정훈교육에서는 무사집단설을 강하게 밀면서 상무정신의 전거로 인용하고 있다.
  1. 마지막의 帛衣는 원래 '백의'라고 읽어야 하나...
  2. 신채호는 선인을 '선배'라고 부르며 이를 곧 수두교 신자의 일반 명칭으로 간주한다.
  3. 자료 출처 -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정재서 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발행
  4. 심지어 신채호는 태대형을 '신크말치'라 하여 이러한 무력집단의 수장이라 보기도 했다.
  5. 해당 드라마의 조의선인은 현실의 대한민국 해병대의 이미지를 차용하였다.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