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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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10대 산상왕 고연우11대 동천왕 고우위거12대 중천왕 고연불
시호동천왕(東川王) / 동양왕(東襄王)
고(高)
우위거(憂位居) / 위궁(位宮)[1]
생몰년도음력209년 ~ 248년 9월 (40세)
재위기간음력227년 5월 ~ 248년 9월 (21년 4개월)

1 소개

고구려의 제11대 . 위궁이라는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본 것이 태조대왕과 닮았기 때문에, 그의 휘인 궁(宮)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아명은 교체(郊彘). 교제(郊祭, 제사)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선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한다고 전한다.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소왕후(小王后)이며,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213년 태자로 책봉된 후, 227년 5월,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2 성격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단 한번도[2] 내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시대에 있던 진정한 대인배 본좌인 왕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동천왕의 성격이 어질어서라기보다는, 성씨도 전하지 않을만큼 한미한 집안 출신의 후궁 소생인 동천왕이 고국천왕의 왕후였고 산상왕을 스스로 선택해서 왕위에 앉히고 또 왕후가 될만큼 여걸인 우씨에게 숙이지 않았다면 왕위는 고사하고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권력의 역학관계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역학 관계라고 해도 아무나 이렇게 할 수 있는건 아니다 대인배 맞음하지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서 따라 죽으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에 신민들에게 매우 존경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적어서 그렇지 당시에는 성군으로 존경받지 않았나 싶다.

3 내정

재위 4년째 되던 해, 국상 고우루가 사망하고 국상의 자리를 명림어수를 앉혔다. 그리고 의외로 정복군주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242년에는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 깨트렸고 245년 10월에는 신라 북쪽을 침공하기도 했다.

3.1 위나라와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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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지도로 보면 누가 이겼는지 알기 힘든데, 까놓고 말해서 고구려가 탈탈탈 털렸다.(...)

치세 초기에는 위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오나라손권이 요동을 지배하던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하려 했는데, 공손연은 손권을 배신하고 사신들을 잡아 가둬버렸다. 이 사신들 중 몇몇이 탈출하여 도망친 끝에 고구려까지 왔는데, 오나라가 위나라보다 강대하다고 뻥을 쳤는지 동천왕은 그들을 잘 대접하고 보물과 호위무사(조의라는 언급이 있음)를 딸려서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신들이 돌아오자 손권은 기뻐하며 공손연 대신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다시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234년에 위(魏)와 화친하고, 236년에는 왕(吳王) 손권(孫權)의 사신 호위(胡衛)를 처형하고 목을 위나라에 보내버렸다. 또한 238년에는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도왔다.[3] 이 때까지의 위나라와의 화친관계는 위나라를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형당한 사신과 뒤통수 맞은 오나라가 불쌍할 뿐.

그러나 공손연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하였다. 242년에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로 인해 244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처음에는 관구검을 격파하자 신이 나서 관구검을 뒤쫓아가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역관광을 타 버려서(...)우왕1[4] 당시 도읍이었던 환도성[5]까지 내주고 말았다. 우왕2

245년 재차 관구검이 밀고 내려오자 동천왕은 매구루라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우왕3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는데 우왕4 246년에 이르러 동천왕은 밀우유유의 계책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죽이고 왕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유유는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 군에 제공하고,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라고 제안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과 함께 동귀어진했다. 오오 유유! 오오 유유!

하지만 환도성으로 돌아오자 환도성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어서 도읍을 임시로 평양성[6]으로 옮겼다. 태자인 중천왕이 왕위에 오르고서야 다시 국내성으로 환도했다.

248년 동천왕이 죽자 신하나 백성들이 크게 슬퍼한 나머지 동천왕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고 한다. 후임 중천왕은 이것은 예가 아니라고 금지했지만 결국 장례일에 장지에서 왕을 따라 죽는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그 때 백성의 시신들을 죄다 땔나무로 덮어버려서 동천왕릉이 있는 곳을 땔나무 시(柴)를 써서 시원(柴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이 내용이 등재되어 있었지만 동천왕벽비[7]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한때 삭제되었는데 이 이야기 자체는 삼국사기 동천왕조 맨 마지막에도 분명히 나온다. 동천왕벽비에 동천왕 자신이 자살하려고 했다고 나온 것과 헷갈린 듯.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시원(柴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동천왕이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왕은 예가 아니라고 여기고 그것을 금하였다.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을 시원이라고 이름하였다.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ㅡ 《삼국사기》 동천왕 22년(서기 248년)조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최훈삼국전투기에서는 태왕북벌기담덕으로 패러디된다. 너그럽지만 의외로 싸움은 잘한다나. 그리고 최훈은 위나라가 낙곡대전에서 왕평에게 쳐발린걸 숨기기 위해 관구검을 높이 띄워줬다고 평했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동천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을 단행하다
二年春三月 우씨를 왕태후로 삼다
四年秋七月 명림어수를 국상에 임명하다
八年 조위가 사신을 보내오다
八年秋九月 태후 우씨가 죽다
十年春二月 오의 손권이 사신을 보내오다
十一年 조위가 연호를 개정한 것을 축하하다
十二年 조위를 도와 공손연을 공격하다
十六年 서안평을 공격하다
十六年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사면을 실시하다
十九年春三月 동해의 미녀를 후궁으로 맞이하다
十九年冬十月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二十年秋八月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침략해오다
二十年冬十月 위의 관구검의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다
二十一年春二月 평양성을 쌓고 천도하다
二十二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오다
二十二年秋九月 동천왕이 죽다

  1. 진수삼국지의 기록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산상왕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차피 고구려어 이름을 한자가차한 이상 연우보다는 우위거가 위궁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지만, 삼국지의 기록을 인정할 경우 고국천왕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삼국지에서 동천왕이 태조왕의 증손이라고 기록이 있는데, 신대왕이 태조왕의 아들이라면 동천왕이 태조왕이 증손이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맞는 이야기가 된다.
  2. 의붓어머니인 왕후 우씨가 궁녀를 시켜 일부러 국을 엎지르게 했는데도 궁녀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음 번엔 아끼는 말의 갈기를 잘라버리게 하자 말을 쓰다듬으면서 "말이 불쌍하구나."라고만 했다.
  3. 신채호수만(數萬)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4. 당시 전사를 다루고 있는 많은 책들에서는 동천왕이 "기병>보병"이라는 생각에 빠져 위나라 보병들의 기병에 대한 전법을 몰랐다고 지적한다.
  5. 고구려는 평화시기에는 국내성, 전시에는 환도성을 도읍으로 했다.
  6. 이 평양성이 평양에 있는 대성산성 등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불명확하다. 대체 장안성은 어디인거냐... 평양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
  7. 위조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