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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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화랑[1].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 워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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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화랑 복식 재현.
늙었다
한자: 花郞 꽃돌이
영어 : Flower Boy 또는 Flower Knight 간지난다 현지 발음을 따서 Hwarang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
꽃미남 마린 꽃보다 남자[2]
크면 꽃아범이 된다 카더라...

이 문서에서는 창작무술인 화랑도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1 소개

고대 신라에 있었던 일종의 아이돌이자 대학생이자 지휘관격인 엘리트 집단. 신라시대의 사관학교 생도 정도의 지위이다. 시작은 진흥왕 때로 기원은 미스코리아처럼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3] 둘을 뽑아 아이돌처럼 삼아서 그들을 매개로 인재를 모으는 원화 제도였는데, 두 원화 남모준정 간에 서로 간의 시기심으로 살인이 일어나자 여자 대신 곱상한 남자들을 모집해서 화랑이라고 부르게 했다. 다만 화랑 제도를 만들었다는 576년 이전에도 사다함 같은 화랑이 존재하였으므로 이전부터 신라에 비슷한 개념의 청소년 조직이 존재는 했고, 576년의 기사는 화랑제도를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화랑들은 주로 귀족의 자제로 이뤄졌으며[4] 평민부터 하급 귀족으로 구성된 '낭도'를 거느리고 지휘했으며, 신라 땅 이곳저곳 깊은 산과 계곡을 돌아다니면서 모험수련을 하고[5] 나라가 어려울 때는 학도병마냥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기초적인 귀족교육을 수련하는 유년 사관생도 정도의 이미지를 지닌다. 무력 쪽 이미지가 강하지만 학문적인 수련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10대 소년들이 많았으며 동성애적인 코드를 지닌 전형적인 고대 청년 집단의 성향이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눈에 붉은 화장을 칠한 미소년 집단이라 생각되지만, 당시에는 남자가 화장하는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고.... 일본 일부 사학에서는 화랑도를 동성애 집단으로 간주하는 연구가 몇 차례 있었다. 우리나라 사학에서는 이를 일본의 저질 음해 및 왜곡으로 치부하는데[6], 이익성호사설에서 화랑에 대해 비난한 부분을 들어 재반박한 경우도 존재한다. 실제로 한국 사학계는 과도하리만치 성(性)과 연관되는 것을 터부시한다는 점은 지적되어 왔다. 화랑에 동성애적 사실은 없다는 입장만을 취하고 있기 때문.[7]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 선생은 화랑이 전쟁에 나타나는 사료를 바탕으로 무사집단으로 보았으며, 현대에는 귀족자제 출신인 화랑과 하층민 쪽 출신인 낭도가 모인 청년 집단으로 본다.[8], 여기에 추가로 종교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고 보는 정도이다. 주로 난랑비서문, 화랑이 신궁제사에 참여하거나, 국선(國仙)이라는 호칭이나 용화향도라는 기록 등에 근거하는 것인데, 고대사회에서 종교의례의 집전은 지배층과 관련이 깊다는 점[9]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지도.[10]

이러한 미성년 남성들의 집단생활이나 단체 활동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습속이며 남방계 원주민 아이들의 합숙이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또래집단, 독일의 부르센샤프트 즉, 소규모봉건집단에서의 우두머리(마스터)의 집에서 생활을 하는것, 그리고 일본의 와카슈 전통에서 나타난다. 특히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성도 아닌 연령의 남자, 즉 와카슈(약중)를 자연의 거친 성질로 비유한 황신荒神의 대표자로서 인식하고 이들을 이끄는 와카슈 가시라(약중두)를 정점으로하여 마을생활의 한축을 담당하게하는 일본식 와카슈 전통은 화랑의 판박이라 할수 있다.

화랑의 화장하고 산천을 떠도는 행위는 바로 이 숭신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들이 전사역할을 하는 것은 무리의 물리력의 대표로서 사역하는 일이 된다.

  •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서 임금을 섬긴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서 벗을 사귄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 죽이고 살리는 데에는 가림이 있다.

도덕 교과서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세속오계를 숭상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 이게 화랑 전체의 계율이라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에게 계율을 사사받은 건 사실이나 화랑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젊은 지식인으로서 삶의 지침을 청해 받은 것에 불과하다.[11] 헌데 신라시대 청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랑으로 치부하게 화랑 전체의 규율로 소급시켜 버린 것이다. 다만, 김원술의 예를 보면 아무 상관없는 건 아니고 꽤 널리 알려진 계율이긴 했던 듯하다.

화랑의 수장이 풍월주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삼국사기에는 화랑의 직제나 우두머리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풍월주라는 단어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삼국유사에 국선(國仙)이라 나온다. 여기에도 풍월주는 등장하지 않는다. 풍월주라는 명칭은 15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 여러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물론 화랑세기와 교차검증을 하였으나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2 의의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화랑이 삼국통일에 일조한 신라의 청소년 수련 시스템중에 하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많은 통일 공신과 장수들의 출신이 화랑이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화랑같은 청소년 수련 시스템을 도입한 걸로 보아 그 성과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랑의 동성애 관련 기록상 화랑들끼리 동성애가 그리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화랑은 화랑 무리의 지도자격으로 국선(國仙)이 있으며,[12] 그 밑에 '문호'가 존재해 여럿 화랑들을 데리고 다니며 수련을 쌓았다. 국선에 태종 무열왕 김춘추, 김유신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 국선이 되려면 무조건 진골 아니면 성골이어야만 하며 6두품 이하는 국선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위에 화랑들을 관리하는 '화주'(花主)가 있다.[1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화랑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찾기 어려우며, 현대 창작물은 대부분 화랑세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화랑의 본래 의도는 세계의 고대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청·소년층 집단교육 풍습이 국가 기관화된 것으로 삼국 말기의 전쟁에서의 활약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국왕이 신라의 전통이라고 하면서 귀족 자제 젊은이 몇을 뽑아 천지신명과 부처를 받드는 팔관회 자리에서 춤을 추게 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를 선랑이라고 한다. 무당들이 굿판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이는 고려시대 불교의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려가 신라 전통을 받아들였다는 자의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인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화랑제도가 부활하지 못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재야의 주술사나 무당들을 화랑, 화랭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그런 표현이 남아있다.[14]이 밖에 고려시대의 토속 신앙 성격의 향도 조직과 난랑비서문과 조선조 단학파의 삼교합일적 철학 사상과 연결지어서 종교적 계승성을 보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신라시대의 화랑 조직 그 자체와는 거리가 멀다. 여하튼 화랑세기를 빼더라도, 우리가 아는 화랑 이미지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일부 인터넷 상에서 화랑이 후기에 남창이나 사병 집단이 되었다는 얘기도 떠돌고 있으나 본디 진골이나 6두품 귀족 출신들이 모인 화랑이 '사병'이 되었다고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에 가깝다. 성장해서 사병들을 '지휘하는' 입장이 됐다면 몰라도... 전쟁이 끝난 후 눈에 띄는 기록이 없다고 해서 화랑이 약화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답이 없다. 당장 헌안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후에 왕이 된 신라 경문왕이나, 경순왕의 아버지인 효종도 화랑 출신인데, 화랑이 약화되었거나 또는 남창으로 전락했다면 왕좌까지 가는 루트를 타기는 어려웠을 터. 화랑에 대한 동성애적 코드를 현대적 시각 하에서 확대해석한 것에 기인한 심각한 오류이다. 당장 그런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역사서도 없다.

다만 모죽지랑가의 배경설화를 보면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화랑도 조직 자체에 상당히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삼국통일전쟁에 참전하고 국선까지 지낸 유명한 화랑의 간곡한 부탁을 일개 지방 호족이 생까다가 뇌물을 두차례나 받고서야 겨우 들어준다던지, 그 보복을 한답시고 화랑 측에서 왕을 움직여 그 호족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죽이고 연좌제를 걸어 그 호족과 동향인 인사들을 전부 공직에서 추방했다던지 등 당대 이미 만들어진지 백여년이 지났던 화랑도의 폐단의 사례가 모죽지랑가의 배경설화에 드러나 있다.

한반도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 신라의 특수 유닛 셔틀

3 유명한 화랑

신라중기~통일신라 초기까지 화랑 제도가 쇠퇴하기 이전의 대다수 귀족 남성들은 화랑에 소속되었다. 이러한 귀족 요소보다는, 화랑이라는 제도에서 파생된 전설 그 자체로서 유명한 인물들을 언급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현대에 유명한 화랑들의 이미지를 확립한 영웅들이다.

  • 김유신 - 전설적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화랑 출신의 영웅. 역사적으로는 삼국통일전쟁, 백강 전투가 유명하다.
  • 김춘추 - 무열왕. 화랑 활동이 아닌 외교관, 내정군주로서 유명하지만 김유신과의 우정을 다루는 설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 문노
  • 무관랑
  • 반굴, 관창 - 황산벌의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현대에는 가장 대표적인 화랑들처럼 알려져 있다.
  • 사다함 - 김유신과 함께 영웅 이미지를 대표하는 화랑이다.
  • 김원술 - 비극 원술랑의 주인공. 삼국 통일 전쟁 이후 최전선에서 마지막 전설을 남긴 화랑으로 유명하다.
  • 삼화랑(三花郞) - 신라의 전설속에 나오는 3명의 화랑
  • 죽지 - 삼국통일전쟁에 참전한 화랑, 향가 모죽지랑가가 헌정된 인물로 유명하다.
  • 효종 - 효녀 지은 설화에 등장.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버지. 전성기가 한참 지난 신라 말기 화랑 중에서는 그나마 존재감이 있다.
  • 신라사선 - 영랑, 술랑, 남랑, 안상. 전국 각지(주로 지금의 강원도 지역)에서 이들이 수련하면서 거쳐갔던 명승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고려, 조선시대까지 문인들에게 유명했다고 하며 예를 들어 관동별곡 등에서도 언급된다. 기록이 부족해도 일단 실존인물은 맞는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신선 비슷한 존재로 윤색이 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있다.

4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 속의 화랑

신라 말 김대문이 화랑을 다룬 화랑세기를 서술하였으나 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89년에 박창화의 유족들이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필사본이 남아있다.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를 보면 신라의 개방된 성문화를 묘사하고 있다. 그간 남자다움, 호국무사 정도로 묘사되어 왔던 화랑이었지만,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됨에 따라 논란에 불이 붙었다.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의 동성애, 파벌 다툼, 문란한 성의식 등의 기존 사학계의 관점에서 '전혀 아닌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사학계나 재야사학자들간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켜 10년 동안 논란이 지속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 사회에서 동성애는 어느 국가에서든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진솔한 사랑은 소년과의 사랑이다"라고 할 정도로 동성애가 성행했으며 오히려 고결하고 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아직 피우지 못한 꽃"에 비유되는 소년들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확인된다. 이 동성애는 유명한 소크라테스플라톤도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겼으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도 보다 예술적이고 정적인 관점에서 동성애를 즐겼다. 또한 남자다움으로 상징되는 사무라이들도 동성애를 즐긴 흔적들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구태여 화랑이 동성애를 했다해서 폄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5]

또한, 예전에는 남성들끼리 매우 친하거나 매우 존경하는 관계일 경우 '친하다' 정도가 아니라 '사랑한다' 수준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16]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작품 일부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개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친하다, 혹은 매우 존경한다는 것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랑세기에 묘사된 동성애적인 이야기가 동성애가 아닌 '매우 친하다'정도의 표현일 수 있다.

문란한 성의식 같은 경우도 화랑세기의 것은 마복자(磨腹子) 등과 같이 압권인 것도 있으나, 당시 삼국의 성의식이 오히려 현대의 대한민국보다 개방되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들이 곳곳에 퍼져있으니 굳이 신라에 국한시켜 화랑을 폄훼하는데 사용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신라시대 토우들을 보면 온갖 체위로 성행위를 즐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애초에 화랑의 기준은 남자다움이나 무예가 아니라 '용모가 수려한 귀족 청소년'인데다가 외모와 치장이 매우 중시되었기에 우리가 상상하는 화랑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화랑세기는 사료로서 가치 여부가 논란 중임을 고려해야하며, 이 내용을 실제 역사로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망상이 떠올라 동인동인(...)하게 쓴것일지 누가 알까? 화랑세기 위서론 중 박창화가 쓴 일종의 역사 동인지(...)라는 설은 상당히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선 화랑세기 문서 참조.

5 창작물에서의 화랑

미소년들이 수련하고 전쟁이 나면 실제로 달려나가 활약하는 이미지는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에 신라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서는 거의 어김없이 등장하는 편이다. 그리고 삼국시대가 배경일 경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인지 백제싸울아비, 고구려조의선인이 화랑에 대응하는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 싸울아비는 따로 기록이 없으며 조의는 이름은 전하기는 하지만 화랑과 유사한 무사집단이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 영화 황산벌에서는 반굴관창 등이 전형적인 화랑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남장여자 덕만낭도로 들어가 활약한다(...) '낭장결의'나 '할복' 같은 오리지널 설정을 많이 가져다 붙였다.
  •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도 선덕여왕의 낭장결의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분칠 화장을 한 모습으로 등장. 눈가는 붉게 칠하고 얼굴 전체에 새하얀 분칠은 닌자가 검은 흑포를 입는 것처럼 화랑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잡혀가는 듯 하기도 하다.
  • 화랑전사 마루는 화랑의 이미지를 차용한 특촬물이다.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 한국 문명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하며 궁수 계열 유닛을 대체한다. 그런데 화랑처럼 묘사되는 건 기본 단계의 화랑 뿐이고 이후엔 조선 군관 같이 생긴 디자인으로 변한다.
  1. 아래는 영화 황산벌에 등장한 반굴이다.
  2. 사실 꽃보다 남자를 꽃남이라고 줄여서 부르는데 화랑의 한자 뜻을 보면 '꽃 화' 자에 '사내 랑' 자로 진짜 말 그대로 꽃남이라는 뜻이다.
  3. 미녀라고 정사에 대놓고 써 있다!
  4. 단 고아 미시랑이 국선까지 오른 것 등, 신라의 관직 진급상한선과는 달리 반드시 골품이 있어야만 화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5. 모험이라고 하면 RPG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깊은 산 속 바위에 화랑들이 'A랑과 B랑 왔다감' 하는 식으로 새겨놓은 것이 지금도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건 임신서기석이나 울주 천전리 암각화 등. 울진군 쪽에도 있으며 대체로 경주에서 가까운 원 신라 영토에 많지만 금강산 삼일포 같은 곳에도 있다. 허구헌날 고구려, 백제와 전쟁하던 신라였고 산에 호랑이표범 같은 맹수들도 있었던 시대이니 아직 어른도 아닌 화랑들끼리 으슥한 곳을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을 감수한 일이다.
  6. 일본의 대중 매체에서는 중세 이후 조선시대의 '화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무당이나 남창들을 두고, 고대 신라의 화랑집단도 남창 집단이었다며 폄하적인 왜곡을 퍼트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전근대 일본 사회에서도 귀족들의 남색이 널리 알려지면서 점차 쇠퇴한 이야기. 그럼 사무라이도 죄다 남창이었냐
  7. 오히려 화랑에 대한 동성애적 코드해석은 문학사(文學史)측에서 더 많이 이루어져있다.
  8. 그런데 고대 시대에는 무사 집단은 사회의 높은 자리, 곧 귀족이었던 셈이다. 귀족 = (무사 + 제사장)인 셈이므로 굳이 이렇게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9. 특히 천제나 국가 수호신 제사
  10. 사실, 여자 대신 소년들을 가까이서 기르며 성적인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그리스중국 등지에서 간간히 있어왔으나, 그렇다고 남자들이 화장하고 모여있으면 다 게이라는 말은 아니다. 스파르타의 전사훈련 과정 같이 어린 소년을 나이 든 전사 한명이 맡아서 개인지도로 양성하는 과정을 동성애로 오인하고 다루던 역사학자들도 있다.
  11. 단 귀산과 추항이 세속오계를 따라 백전와의 전쟁에서 활약하여 승리하고, 죽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추정 된다. 좋은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
  12. 화랑세기에는 풍월주라 나오지만 기록(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것은 국선(國仙)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화랑의 직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 풍월주는 조선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명칭이다.
  13. 근래 '화랑세기'의 기록을 근거로 '화주'를 관리가 아닌 '풍월주'의 아내가 맡는 직책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생겼으나, 화랑세기 자체가 논란이 많은 문서이고 이 외에도 다른 반박도 많아 아직은 소수의견에 머물러 있다.
  14. 김시습이 소격서의 한 도인에게 준 시에 '현도관 안에서 화랑을 보니'라는 구절이 있기도 하다. 다만 이 구절은 '현도관 안에서 꽃구경하는 이'라는 중의적 해석도 가능. 자세한 내용은 정재서 저,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참조
  15.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우월하다는것을 아주 진지하게 써놓은 철학자도 있다.
  16. 일단 영어의 Love를 보자. 그리고 라틴어에서 친구를 의미하는 AMICUS는 사랑하다라는 뜻의 AMARE에서 온 단어. 그리고 한국어에서도 '사랑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깊게 생각하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즉, 곁에 있지 않아도 언제나 그 사람을 계속 깊게 생각하게 된다 → 사랑한다 라는 식의 의미 변화라고 하는데, 곁에 있지 않아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굳이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지극히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흔한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