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寅普
1893년 5월 6일 ~ 1950년 11월 경[1]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의 한학자,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였다. 호는 위당(爲堂). 1893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청도 일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정인보의 스승이 된 사람이 이건방인데 그의 집안은 양명학을 대대로 연구한 가문이었다. 그로부터 정인보는 한학뿐 아니라 양명학적 사상까지 함께 받아들인다. 1910년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 상하이와 한반도를 오갔다. 상하이에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교포에 대한 계몽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귀국하여 국내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경성부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한학, 역사학 등을 가르쳤다. 1930년대에는 안재홍 등과 조선학운동을 전개한다.[2] 식민사학에 맞서 조선 내에도 근대적인 흐름이 있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민족사학 운동 중에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왜곡에 대해 반박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실학 사상에서 근대적인 사고를 발견하려 했는데 1935년 정약용 사후 100주년을 맞아 펴낸 여유당전서는 그 성과였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 국사학, 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쳐 강의를 하였다. 이때 발음의 유사성을 들어 숙신이 고조선의 일부라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저서로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으며 주로 조선의 얼을 강조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국학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족들과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8.15 광복이 되자 서울특별시로 상경하여 국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946년 국학대학이 설립되자 학장에 취임한다.[3]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감찰위원장(오늘날의 감사원)에 임명된다. 그러나 이승만의 측근인 임영신이 선거 중 저지른 비리를 적발, 파면을 요구하였다가 도리어 경질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서울에 고립된 채 납북되었다.[4]
자녀들로는 정정완, 정경완, 정연모, 정양완, 정양모 등이 있다. 정정완은 침선장(전통 바느질 기법) 무형문화재였다. 정경완은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무와 결혼했으며 남북협상 때 시아버지인 홍명희와 함께 평양으로 갔다가 북한에 그대로 정착했다. 정양완과 정양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학을 공부했다. 정양완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했다. 성추행으로 문제를 일으킨 서울대 강석진 전 교수가 정양완의 아들이다. 정양모는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냈다.- ↑ 북한 내에 조성된 재북인사릉에는 1950년 9월 7일 폭격으로 인한 사망으로 된 상태이다. 다만 이 사망일은 납북자들의 죽음을 미국 탓으로 돌리려 조작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니 걸러 들을 필요는 있다.
- ↑ 안재홍 역시 6.25 전쟁 중 정인보와 함께 납북된다.
- ↑ 국학대학은 1966년 우석대학교와 합병되며 우석대학교는 1971년 고려대학교에 인수된다.
- ↑ 그의 납북에 연희전문학교 시절 친우였던 사학자 백남운이 관계되어 있다는 썰이 있다. 정인보는 순종이 죽자 그의 묘지문을 쓸 정도로 알아주는 한학자였다. 덕분에 백남운이 고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위당의 덕을 많이 보았다. 전쟁이 터지자 친구의 신변보호 겸 번밀레(...)로 쓰기 위해 납북에 관여했다는 얘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