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지 에드워드 포먼
George Edward Foreman (1949년 1월 10일 ~)
1 약력
미국의 권투선수, 사업가, 개신교 목사.
헤비급 역대 최강의 슬러거
현역시절 191cm 110kg의 헤비급 복서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프로로 전향한 뒤 통산 76승 5패 68KO, WBC,WBA,IBF 통합 세계 챔피언을 두번이나 차지하고 은퇴한뒤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역대 최고의 헤비급 복서중 한명이다.
현역시절 그의 복싱스타일은 핵펀치 한 방으로 정리된다. 어니 세이버즈,소니 리스턴,켄 노튼등 헤비급의 쟁쟁한 슬러거들도 많지만, 펀치의 정확도와 회수율, 타점과 파괴력 등을 전부 조합한다면 헤비급에서 최고의 핵펀치는 포먼을 넘버 원으로 놓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 거기다 우월한 신체 사이즈에 타고난 강골이라[1] 복싱 그까이거 그냥 대~충 가서 한대 맞을때 나도 한대 때리지 뭐 그렇게 주먹질 했는데 몇대 맞으면 상대 복서들이 뻗어있더라... 뭐 이런 수준이다. 얼핏 보기엔 그냥 팔힘으로 툭툭 치는 거 같은데 상대가 픽픽 쓰러지고 붕 뜨는 걸 보면 기가 찰 정도.[2] 그러다보니 특히 상성에서 밀리는 것으로 평가되는[3] 스워머 스타일, 즉 조 프레이저,마이크 타이슨 같이 맷집이나 스피드, 수비력으로 파고드는 복서들은 아예 상대가 안됐다. 프레이저는 포먼을 상대로 한 1차전에서 레프트 훅을 가드 사이로 적중시키며 경기를 스타트하고 초반에만 관자놀이에 한 방, 턱에 두 방의 레프트 훅을 먹였는데, 포먼이 그걸 다 씹고 프레이저의 가드 위나 이마쪽으로 펀치를 날려 프레이저를 다운시켰다. [4] 결국 프레이저는 2라운드 만에 6번이나 다운되어 TKO 당하는 등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다가 처절하게 발렸고, 20년 가까이 지나서 아직 살아있을때의 커스 다마토가 마이크 타이슨을 지도할때, 저 포먼 vs 프레이저 경기를 보여주면서 너 절대 포먼하곤 붙지 마라라고 조언했을 정도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그때 포먼은 40 넘어서 현역 복귀한 선수였고 타이슨은 쌩쌩한 20대였다(...).[5]
가뜩이나 한방 한방이 살인적인데, 경기운영도 무자비의 극치로 전성기였던 20대에는 가장 무식하게 상대방을 패는 선수라고 알려졌다. 포먼은 선수 시절에는 KO를 바로 앞둔 그로기 상태의 상대도 무지막지하게 패는 잔인함으로 유명했고, 대중을 기피하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여 인기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6]
그는 당대의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는 두 번 싸워 두 번 이겼으나, 무하마드 알리에게는 아래 언급된 부상이란 불운과 알리의 기가막힌 운영에 걸려들어 한 번 패했다. 알리와 재대결을 원했으나, 이후 무명인 지미 영에게 패하자 권투계를 은퇴했다.
그 이후 개신교 목사로 지내다가, 80년대 말에 다시 40대 복서로 복귀하였다. 그는 복귀하면서 마이크 타이슨과 대결 하기를 희망했으나, 마이크 타이슨이 감옥신세였기 때문에 그와 대결하지는 못했다. 타이슨과의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결국 40대에 20대의 챔피언을 꺾고 타이틀을 거머쥐는 업적을 이뤘다.
1997년을 끝으로 은퇴하여 사업가로서 면모를 과시하여 크게 돈을 벌었고, 성공학 강사로도 유명하다. 포먼의 리즈시절은 헤비급의 전성기로서 조지포먼은 이 시대를 수놓은 전설적인 복서중 하나였다. 권투 전문 잡지인 미국의 링매거진이 선정한 100대 복서중에 당당히 9위에 선정되었다.
2 어린시절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남편 포먼과 별거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포먼을 임신해서 출산했다. 그러므로 포먼이라는 성은 어머니의 남편의 성이지, 실제 아버지의 성은 아니다. 대부분의 복서들이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세월을 보냈고 (학교에 도시락도 못싸갔다고 한다.) 어린시절을 문제아로 보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191cm의 남다른 신체조건 때문에 아메리칸 풋볼 선수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복싱선수가 되었다. 아마추어로 시작하여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아마추어 전적은 22승 4패이다.
3 초기 프로 경력
3.1 초창기
1969년 프로에 데뷔하였고, 그 다음부터 무패를 자랑하였다. 이렇게 한동안 계속 무패행진을 계속했고 대부분의 승리를 KO로 장식하여, 1972년까지 32전 32승 29 KO라는 사기적인 실력을 보여주었고, 그 KO도 모두 3회 이내로 장식하는 무시무시한 복서였다.
3.2 리즈시절: 선샤인 쇼다운(Sunshine Showdown)
당시 헤비급에는 전설적인 조 프레이저와 무하마드 알리가 버티고 있었고, 프레이저는 당시 WBA, WBC 통합 챔피언이었다. 조 프레이저는 아무도 못 이긴다는 무하마드 알리를 판정으로 이겼고, 당시 무패(29전 29승)를 자랑하고 있었다. 포먼의 신체조건이 월등히 우세하였으나(프레이저는 헤비급 선수로는 작은 편인 181cm의 신장을 가졌다), 대부분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포먼과 프레이저의 대결을 선샤인 쇼다운이라고 하는데,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에서 열렸다. 포먼은 프레이저를 시작부터 무지막지하게 두들겨서 1회에 두 번, 2회에 네 번의 다운을 빼앗았고, 프레이저의 상태를 본 주심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TKO를 선언하였다[7]. 포먼은 챔피언이 되었고, 첫번째 방어전에서 호세 로만을 1회 2분만에 KO로 이기기도 했다. 이는 타이슨 때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었다.
위의 영상이 선샤인 쇼다운의 풀 경기 영상. 프레이저가 붙지 못하게 저지하며 핵펀치를 날리는 포먼. 1라운드 중반부터 이미 포먼이 여유있게 펀치를 날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번째 상대는 전해에 무하마드 알리와 1승 1패의 호각을 이뤘던 켄 노턴이었다. 이 방어전에서도 포먼은 2회 KO로 이겼다. 이때까지 전적은 40전 40승 37KO.
3.3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
당시에도 전설적이었던 무하마드 알리와 포먼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이었다. 아프리카 자이레(현재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열린 이 대결은 The Rumble in the Jungle (정글의 대소동)이라고 불린다. 이때 포먼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훈련하다가 눈위가 찢어진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경기를 한 달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부상 때문에 훈련량이 부족해졌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다시 상처가 날까봐 스파링을 중지했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알리는 예상과는 달리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포먼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고, 2회부터는 포먼이 공세를 취했다. 그래서 알리는 빠른 스피드로 파워풀하지만 느린 포먼의 펀치를 피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한 일명 rope-a-dope 수비[8]와 지능적인 클린치로 포먼의 포화를 피해갔다. 그리하여 포먼은 알리에게 특유의 살인펀치를 제대로 맞출수가 없었고, 이렇게 연장전이 되자 점점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포먼은 대부분 3회 이내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런 지구전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포먼이 힘이 빠지자 알리는 맹공격을 하다가 8회 포먼에게 결정타를 날려 KO승을 거두었다. 포먼의 첫번째 패배였다.
이후 설욕전을 바랐으나 기회가 돌아오지 않고,목표가 없어지자 1년간 쉬다가 1977년에 페드로 아고스토를 이긴후 2달[9] 만에 다시 신예인 지미 영과 맞붙지만, 포먼이 방심한건지 너무 쉽게 펀치를 허용하는 등 좋지 않은 퍼포먼스를 보이며 12라운드 경기 후 판정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경기후 탈의실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하였는데, 이것이 포먼의 인생을 크게 바꾼다.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2002년작 <Ali>는 이 조지 포먼과 알리의 대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3.4 은퇴하고 목사가 되다
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을때 포먼은 가사 상태에서 종교적 체험을 하고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저승사자에게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었는데, 하느님께 자기를 살려줄 것을 빌었고, 그때 하느님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줬다 카더라. 그전에는 종교적이 아니었는데, 그 다음부터 전도사가 되었다. 전도사에 그치지 않고 목사 자격증까지 따서 텍사스에서 목회활동을 하였고, 전국적인 기독교 관련 방송에 나와서 자주 간증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도활동에 그동안 모은 돈을 뭉텅뭉텅 써버리고, 더구나 청소년 센터를 건립하는데 남은 돈마저 다 써버리자, 포먼은 현역 복귀를 결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한국나이로 치면 거의 40이다).
4 40대에 복귀
4.1 복귀 초반
before and after.
1987년 복귀한 그는 당시 무적의 챔피언이었던 마이크 타이슨과 상대하기를 바랐으나, 타이틀 매치를 위한 지명전을 위해서는 승수를 쌓아야하는 것이 복싱계의 룰이라서 처음에는 잔챙이 복서들과 대결을 하여 승수을 쌓았다. 10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포먼의 실력은 젊은 잔챙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포먼은 또다시 연승행진을 기록하였다. 뭐지 이 개캐는 처음에는 포먼의 복귀를 코웃음치던 전문가들도 포먼의 연승이 계속되자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젊었을때 무표정했고, 대중을 기피하는 성격이 전도사로 일하는 동안 180도로 변화, 대중에 친화적인 -미국의 강호동 성격으로 바뀌어 거침없는 도전정신과 친근한 표정으로 호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다.[10] 이를 이용하여 많은 CF에 출연했고 상당한 돈을 모았다.
4.2 챔피언 재등극
포먼은 계속 승리를 거듭하여 타이틀 도전권을 땄고, 1991년 만42세의 나이로 29세의 헤비급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와 타이틀 매치를 벌였다. 물리적으로는 조지 포먼이 나이 때문에 이기기 힘든 경기였다. 그럼에도 12라운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아깝게 판정패했다.[11] 이후에도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1994년 45세의 나이로 에반더 홀리필드를 꺾고 당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마이클 무어러를 이기고[12] IBF, WBA 헤비급 챔피언을 따냈다. 이전까지만 해도 무어러는 무패의 복서였다. 이때 포먼이 입은 트렁크는 바로 20년전 알리와 싸울때 입었던 것이었다.
4.3 재은퇴
포먼은 다시 마이크 타이슨과의 대결을 원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토니터커와의 방어전과 악셀슐츠와의 재대결을 포기하면서 WBA,IBF 타이틀을 반납한다. 이후 크로포드 그림슬리, 루 새버리스등 젊은 선수들을 꺾고 ,1997년 섀논 브릭스와 대결하였으나, 12라운드까지 가는 끝에 판정패했다. 이 판정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이 많았으나, 포먼은 이 경기를 끝으로 다시 은퇴하였다. 은퇴시 나이는 48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1999년에 다시 복귀한다는 떡밥을 던지며 80년대 초반의 강펀치였던 래리 홈즈와 대결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대전료 차이로 무산되었다.
5 은퇴 이후
이후 요리기 및 주방용품을 사업을 하던 러셀 합스 사에 고용되어서 그의 이름을 붙은 브랜드가 나왔고,[13] 노익장으로 이미지가 좋아졌기 때문에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특히 이 요리 기구들을 가지고 조리하여 기름기가 빠진 음식이 건강에 좋다는 홍보가 매우 효과가 좋았다. 실제로 그와 동시대의 전설적인 복서인 알리는 펀치 드렁크 증세와 파킨슨병으로, 프레이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음을 상기한다면, 그는 멀쩡한데다가 은퇴후 돈도 복서때보다 벌었으니, 복받은 노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 포먼의 신앙심이 대단한걸 상기해본다면 정말 하느님이 존재하는지도..
특히나 위 사진에 나온 그릴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아예 명사가 되어버린 고유명사가 될 정도로 성공했다. 세로로 여러개의 홈이 파이고 위 아래 모두에 열선이 들어간 양면 그릴을 브랜드 불문하고 조지 포먼 그릴[14]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대표 MC 코난 오브라이언이 Clueless Gamer에서 아타리 2600게임을 했을때, 아타리 2600의 본체를 보고 "이거 조지 포먼 그릴 아님?"이라고 드립을 쳤을 정도.
이 사업 덕에 2억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받은 파이트 머니보다 많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이미지를 남겼기 때문에 성공학 강사로 뛰기도 하고, TV에도 자주 나온다.
12명의 자식들을 키웠다고 하는데, 한 여자가 모두 낳은게 아니라 입양한 자식과 배다른 자식들을 포함한 수라고. 재미있는 점은 아들들의 이름을 모두 조지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5명의 아들들이 순서대로 조지 Jr. 부터 조지 VI(...)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딸들의 이름도 조지로 하고 싶었지만 그건 좀 심한 것 같아서(...) 다른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조제타"라고 한다(....)) 그리고 조지 포먼 3세는 복서로 데뷔해서 16전 16승 15KO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사실상 은퇴했다.
한때는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사이가 안좋았으나 2000년대 초반의 인터뷰에서는같이 행사에도 참여한적 있다며 "알리에게 유감없다"고 밝힌바 있다.
NBC에서 제작하는 꽃보다 할배의 미국판 리메이크(2014년 9월 tvN 정식 라이선스)인 "Better Late Than Never"에 출연하게 되었다. 30일간 촬영된 총 6화 분량의 에피소드 중 1개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한국도 방문했다. 에피소드 내내 적응력이 매우 빠르고 사람 좋은 캐릭터로 나오는데, 윌리엄 섀트너가 위에 나온 조지 포먼 그릴 드립을 치는 게 깨알같다.
6 기타
권투 선수로써 전성기는 알리,프레이저등과 상대한 1970년대지만, 2차 복귀때의 대머리에 약간 배불뚝이 외형으로 바뀐 쪽이 보통 사람들에게 기억에 더 남아 있는 듯 하다. 아랑전설의 액셀 호크는 딱 조지 포먼의 외모를 본따 만든 복서 캐릭터.- ↑ 동시대 복싱계를 수놓던 알리와 프레이저는 노년기에 투병 중 사망했지만 이양반은 40대에도 복귀해서 챔피언 한번 더 먹고 은퇴한 지금도 팔팔하다.
- ↑ 사실 교과서적인 힙드라이브를 구사해 체중을 실어서 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보다 덜 회전하는 거 같은데도 맞으면 맞는대로 나가떨어지는 상대편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 ↑ 보통 복싱 스타일의 상성은 아웃복서 > 슬러거 > 스워머(인파이터) > 아웃복서 로 돌고 도는 형태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복싱이 많이 진화하여 한가지만 할 줄 아는 선수는 반쪽짜리 취급을 받지만.
- ↑ 알리와의 대결에서 알 수 있듯이 잽 정도는 몇 대 허용하면서 파고드는 게 프레이저의 스타일인데 포먼의 주먹은 맞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 ↑ 이 말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 다마토는 85년도 11월에 죽었고 포먼은 87년도 중반에 복귀했다. 다마토가 예토전생이라도 한 것인가? 그리고 애초에 포먼은 타이슨이 20대였을 때에는 NO.2 NO.3 컨텐더 축에 들지 못했고 타이슨이 복귀했을 시절에는 WBA,IBF 타이틀을 전부 다 박탈당했을 시기였다.
- ↑ 이점에 있어서는 알리와 매우 대조적인데, 알리는 링 밖에서 아무리 흥분된 설전을 벌여도 그로기 상태의 상대에게 불필요한 가격을 하지는 않았다.
- ↑ 6번이나 벌떡벌떡 일어나는 프레이저도 사람의 맷집이 아니었다. 노년의 프레이저의 코멘트를 빌리자면 "젠장,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여담이지만 이때 아나운서가 외쳤던 "Down goes Frazier! Down goes Frazier!"은 농구의 "Havelicek stole the ball"
야구의 "He dropped the ball!"등과 함께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멘트 중 하나이다. - ↑ 사각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포먼의 강펀치 충격을 교묘하게 분산시키고 포먼의 신경을 긁는데 성공했다.
- ↑ 복서의 회복기로는 매우 짧은 기간이다.
- ↑ 당장 이 위의 두 사진의 표정을 비교해보자. 같은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럽다
- ↑ 아마도 영화 록키 6의 스토리 라인은 아마 이경기를 토대로 만들어 졌을 것이다.
- ↑ 사실 경기 내용,점수면에선 무어러가 8:2:1로 크게 앞서고 있었으나, 고질적으로 턱이 약한 무어러가 평소 스타일이 아닌 파고들며 공세를 펼치는 스타일을 펼쳤기 때문에 턱이 열렸고 결국 10라운드에 포먼의 원투에 그로기가 되어 다시 투를 맞고 나가 떨어진다.
- ↑ 그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운영한다고 생각.
- ↑ 보통 줄여서 Foreman Grill. 자매품으로 밀폐형으로 된 Foreman Oven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