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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존 윌리엄 올드리지 (John William Aldridge) |
생년월일 | 1959년 9월 18일 |
국적 | 아일랜드 (Ireland) |
출신지 | 리버풀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유스 클럽 | 사우스 리버풀 (1978–1979) |
소속 클럽 | 뉴포트 카운티 (1979–1984) 옥스포드 유나이티드 (1984–1987) 리버풀 FC (1987–1989) 레알 소시에다드 (1989–1991) 트란미어 로버스 (1991–1998) |
스태프 | 트란미어 로버스 감독 (1996–2001) |
국가 대표: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86–1996) | 69경기 19골 |
목차
1 소개
가는 팀마다 레전드로 대접받은 축구계의 대부
존 윌리엄 올드리지는 아일랜드의 前 축구 선수이다. 그는 1980년대 축구 세계에서 맹활약한 레전드 스트라이커다. 영국인으로서는 드물게도 해외 진출을 과감하게 시도했고 영국 선수로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라 리가에서 보란듯이 성공했다. 또한 그는 가는 팀마다 대단한 활약을 선보였고 그 팀들의 팬과 구단이 입을 모아 레전드로 추앙하는 보기드문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니 축구계의 대부라 칭하는 것이 과하지 않으리라.
2 선수 경력
2.1 뉴포트 카운티 시절
올드리지는 1958년 9월 18일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잉글랜드에 속한 리버풀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의 부모가 아일랜드 사람이라서 자연히 국적을 아일랜드로 정했다. 그는 1978년 20세의 나이에 논리그 팀인 사우스 리버풀에 입단해 한 시즌을 소화했고 1979년 5월 2일 3500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뉴포트 카운티에 이적했다. 그는 곧 뉴포트 팬들로부터 "Aldo"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올드리지는 뉴포트 카운티에서 198경기에 출전해 87골을 기록하며 2경기 당 1골 가량을 넣는, 공격수로서 탁월한 득점 감각을 뽐냈다. 특히 FA컵 대회에서 12경기에 7골을 몰아은 것이 그의 활약상 중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뉴포트를 4부리그에서 2부리그까지 승격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했으며 이내 유로피언 위너스컵에서 4강까지 진출시키는 등 훌륭한 활약상을 선보였다. 그러던 1984년 3월 21일, 올드리지는 1983-84 시즌에 26골을 기록하던 중 옥스포드 유나이티드로 7만 8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이적했다. 올드리지가 이탈한 뒤 뉴포트의 전력은 급속도로 떨어졌고 결국 뉴포트는 1983-84 시즌에 3부리그로 강등되고 말았다.
2.2 옥스포드 유나이티드 시절
당시 3부리그 소속 클럽인 옥스포드로 이적한 올드리지는 1984년 4월 7일 월솔과의 경기에서 교체로 데뷔전을 치뤘고 그해 4월 20일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데뷔골을 기록해 팀의 5:0 대승에 한 몫을 했다. 이후 그는 빌리 해밀턴과 훌륭한 파트너십을 맺고 1984-85 시즌 34골을 몰아넣으며 옥스포드를 1부리그로 승격시켰다.
이후 올드리지는 1985-86 시즌에 리그에서 39경기 23골을 거두어 득점 랭킹 3위를 기록했고 리그 컵에서 8경기 5골을 몰아넣으며 옥스포드가 리그 컵을 우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리그컵 우승은 옥스퍼드 역사상 유일한 수상 기록이다. 이후 올드리지는 1986년 9월 24일 리그컵 질링엄 전에서 4골을 몰아넣었고 1984년 11월 26일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해 팀의 5:2 승리를 이끌었으며 1986년 11월 8일엔 알렉스 퍼거슨이 이끄는 맨유를 상대로 골을 기록해 패배의 쓴맛을 안겨줬다.
이렇듯 올드리지는 1984년부터 1987년까지 3년간 옥스포드에서 총합 142경기 98골을 기록하며 옥스퍼드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2.3 리버풀 시절
이무렵, 리버풀은 이안 러쉬가 1986-87시즌 중반기에 유벤투스로 이적한 후 그의 빈자리를 대체할 선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에 리버풀은 1987년 1월 27일 7만 5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올드리지를 전격 영입했다. 올드리지는 1987년 2월 21일에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2월 28일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데뷔골을 기록해 팀의 1:0 승리에 공헌했다.
이후 알드리지는 선수 겸 감독으로서 리버풀 최고의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던 케니 달글리시와 훌륭한 파트너십을 맺고 리버풀의 승승장구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당시 리버풀은 그와 달글리시 외에도 존 반스, 피터 브래드슬리 같은 레전드급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1987-88 시즌 개막 이래 2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기록하며 1988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올드리지는 컵대회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4강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전으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FA컵 결승전에서 페널티킥을 얻어냈지만 윔블던 골키퍼 데이브 비산트가 올드리지가 왼쪽으로 찰 것을 예측하고 이를 막아내고 말았다. 결국 리버풀은 결승전에서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다음 시즌인 1988-89 시즌은 그에게 있어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당시 이안 러쉬가 이탈리아에서 적응에 실패하자, 리버풀은 그를 전격 복귀시켰다. 이렇게 되자 올드리지는 한순간에 주전 자리에서 밀려날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케니 달글리시 선수 겸 감독은 경기 스타일이 비슷해서 투톱으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을 주전 투톱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 도박은 올드리지에겐 대성공으로 작용했다. 그는 지난 시즌보다 더욱 향상된 성적을 기록하며 자신이 명실상부한 리버풀의 핵심 공격수임을 입증했다. 반면 러쉬는 올드리지와 비슷한 경기 스타일로 인해 활동반경이 겹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올드리지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올드리지는 리그에서만 22골을 기록했고 FA컵에서 6골, 리그컵에서 2골, 커뮤니티 실드에서 2골을 기록해 전체 대회에서 47경기 31골을 기록하는 무시무시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런데 1989년 4월 15일, 리버풀은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노팅엄 포레스트와 FA컵 경기를 치루던 와중에 힐스버러 참사를 목도하고 말았다. 올드리지는 이 엄청난 비극에 큰 충격을 받았고 모든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개인적으로 축구에 대해 회의를 품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아예 FA컵 경기에 나오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지만 팀동료와 달글리쉬 감독의 설득에 마음을 돌려 FA컵 재경기에 출전해 리버풀의 3:1 승리에 공헌했다. 그리고 FA컵 결승전 에버튼과의 경기에서는 첫 골을 기록하였고 뒤이어 러시가 2골을 기록해 3:2 승리를 기록해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로서 리버풀은 힐스버러 참사로 세상을 떠난 팬들의 넋을 우승으로 달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 달글리쉬는 4-4-2 포메이션을 도입하고 폼이 완전히 돌아온 러시와 브래드슬리를 주전 투톱으로 삼고 올드리지를 벤치에 앉혔다. 이에 올드리지는 이적을 결심하고 9월 초순 레알 소시에다드로 전격 이적했다. 그는 리버풀에서 2년간 104경기 63골을 기록했는데 그 중 50골은 리그에서 기록한 것이었다.
2.4 레알 소시에다드 시절
레알 소시에다드는 이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바스크 출신 선수들만을 스쿼드에 기용했다. 올드리지는 이런 소시에다드가 첫번째로 영입한 비 바스크 출신 선수였다. 그는 레알 소시에다드의 최초의 외국인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1989년부터 1991년까지 2년간 활동하며 75경기에 출전해 40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은 스페인에서 색다른 삶을 사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알드리지는 가족을 위해 1991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2.5 트란미어 로버스 시절
1991년 7월 11일, 올드리지는 25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트랜미어 로버스에 입단했다. 그는 1991년 8월 17일 32세의 나이에 브라이튼과의 경기에 데뷔전을 가져 2골을 몰아넣으며 2:0 승리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이후 그는 트란미어에서 1991년부터 1998년까지 7년간 294경기에 출전해 174골을 기록했다. 트란미어는 그의 눈부신 활약을 앞세워 1993년, 1994년, 1995년에 EPL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올드리지는 1997-98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739경기에 출전해 411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1.8경기 당 1골씩을 기록했음을 의미한다.
2.6 국가대표 경력
올드리지는 1987년 리버풀에 입단한 이후 처음으로 아일랜드 국가대표에 뽑혀 1986년 3월 26일 웨일스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그는 유로 1988에 선발되었다. 이 시기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를 1:0으로 격파하고 소련을 상대로 1:1 무승부를 거뒀으나 네덜란드에게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이때 올드리지는 이 세경기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잭 찰튼은 그가 리버풀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국가대표로서 재현하지 못했다며 실망감을 토로했다.
이후에도 대표팀에 자주 뽑혔던 올드리지는 1989년 4월 26일 스폐인과의 월드컵 지역예썬 경기에 결장했다. 이는 그가 힐스버러 참사를 목도하여 심적으로 큰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일랜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었고 이내 마음을 굳게 먹은 올드리지가 돌아와서 몰타를 상대로 2골을 몰아넣어 2:0 승리를 이끈 덕분에 월드컵 진출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올드리지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선발 출전해 아일랜드의 주포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월드컵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 단 한골도 넣지 못했다. 그나마 다른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며 조예선에서 3무를 기록해 간신히 16강에 진출한 후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둬 8강까지 진출했지만 결국 이탈리아에게 패해 탈락했다.
이후 올드리지는 명예회복을 위해 유로 1992 지역 예선에서 분전해 터키를 상대로 5:0 승리를 거둘 때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아일랜드는 유로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에 방향을 다음 월드컵으로 돌린 올드리지는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6골을 기록하며 아일랜드를 1994 월드컵에 진출시켰다.
이윽고 찾아온 1994 월드컵. 올드리지 본인은 이번에야말로 월드컵에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첫 경기부터 문제가 터졌다.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2:0으로 끌려가고 있던 도중, 잭 찰튼 감독은 올드리지를 교체로 투입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선수 교체를 알려야 할 담당관이 제때에 교체를 실시하지 않고 미루는 바람에 교체가 이뤄지질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교체가 이뤄지지 않자 격노한 올드리지와 찰튼 감독은 TV 시청자들이 보는 앞에서 욕설을 잔뜩 퍼부었다. 게다가 올드리지는 흥분한 나머지 대기심과 FIFA 관리인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 상황을 담은 영상
이후 올드리지는 간신히 경기에 출전해 한 골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아일랜드는 2:1로 패배했다. 그후 올드리지는 월드컵에서 남은 경기에 출전이 금지되는 징계를 받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 아일랜드는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해 올드리지의 씁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줬다.(아일랜드는 16강전에서 네덜란드에 패했다.)
올드리지는 유로 96 지역예선에서도 출전했다. 그는 라트비아를 상대로 2골을 몰아넣으며 3:0 승리를 이끌어냈으며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한골을 기록해 4:0 우너정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일랜드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해 유로 96 본선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올드리지는 1996년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3 감독 경력
1996년 3월 12일, 올드리지는 트란미어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1998년에 선수 인생을 끝내고 감독에 전념하기로 했다. 올드리지는 주로 컵대회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2000년 리그컵 결승전에 진출시키는 성과를 달성했으며(결승전에선 레스터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FA컵에선 2000년과 2001년에 4강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그는 2000 리그컵 결승전에서 레스터 측 미드필더 테오 자고라키스의 따귀를 때렸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자고라키스가 트란미어의 센터백 클린트 힐에게 퇴장을 명령한 심판에게 박수를 보내자 올드리지가 열받아 그의 따귀를 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따귀를 때린 장면은 TV에 나오지 않았고 심판 또한 못봤기에 징계는 내려지지 않았다. 훗날 올드리지는 따귀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자고라키스가 클린트 힐이 그의 커리에서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른 것에 대해 조롱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난 그의 따귀를 때렸다.
아무튼 트란미어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던 올드리지는 2001년 3월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임을 선언했다. 갑작스런 감독의 사임에 흔들린 트란미어는 그해 3부리그로 강등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더 이상 감독 생활을 하지 않고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4 은퇴 후의 삶
올드리지는 축구계를 떠난 뒤 방송국에 몸을 담았다. 그는 Radio City 96.7에 출연해 리버풀 경기의 해설자로 활동했다. 이후 2006년엔 아일랜드의 유명 인사로서 RTÉ's Charity You're A Star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후에도 방송에 종종 출연해 패널로서 축구 관련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설명해주곤 한다.
2008년 3월 올드리지는 '존 올드리지와 함께하는 60분'이란 제목의 오디오 CD 제작을 담당했다. 그는 그의 커리어를 60분 동안 설명하고 이를 CD에 담아 2000 카피를 복사해 팬들에게 나눠줬다.
2011년 3월, 올드리지는 트위터 활동을 개시했다. 그런데 그는 트위터 활동 도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을 향해 "인간쓰레기"라고 칭했다가 맨유 팬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고 말았다. 결국 그는 트위터 계정을 삭제했다가 1년 후에 다시 트위터 활동을 재개했다. 역시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가 맞다
5 수상
5.1 선수 시절
5.1.1 뉴포트 카운티 시절
웨일스 컵 우승 : 1980년
5.1.2 옥스포드 유나이티드 시절
3부리그 우승 : 1984년
2부리그 우승 : 1985년
리그컵 우승 : 1986년
5.1.3 리버풀 시절
1부리그 우승 : 1988년
FA컵 우승 : 1989년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 1988년, 1989년
5.2 감독 시절
리그컵 준우승 :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