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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John Charles Bryan Barnes MBE |
생년월일 | 1963년 11월 7일 |
국적 | 잉글랜드 |
출신지 | 자메이카 킹스턴 |
신장 | 182cm |
포지션 | 레프트 윙어 |
등번호 | 10번 |
소속팀 | 서버리 코트 (1980 - 1981) 왓포드 FC (1981 - 1987) 리버풀 FC (1987 - 1997) 뉴캐슬 유나이티드 (1997 - 1999) 찰튼 애슬레틱 (1999) |
국가대표 | 79경기 / 11골 |
감독 경력 | 셀틱 FC (1999 - 2000) 자메이카 축구 국가대표팀 (2008 - 2009) 트란미어 로버스 (2009) |
리버풀 FC 역대 주장 | |||||||||||
이안 러쉬 (1993~1996) | → | 존 반스 (1996~1997) | → | 폴 인스 (1997~1999) |
1 경력
존 반스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비디오 (1990)
2015년에 ITV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1.1 데뷔 이전
유년 시절 모습. 맨 오른쪽이 존이다.
유소년 시절 모습.
1963년 11월 7일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자메이카군 장교인 켄 반스[1]와 트리니다드계인 어머니 진 힐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일하는 기지 내에서 축구를 즐겼으며, 스포츠에 관심을 가진 아버지는 스쿼시와 축구를 가르쳐주며 그를 격려해주었고, 1976년에 가족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뒤 반즈는 학창시절에 럭비를 즐기다가 청소년 시절에는 스토 보이즈 클럽이란 유소년 축구팀에서 4년간 뛰었다고 한다.
이후 1980년부터 아마추어 팀인 서버리 코트 팀에서 뛰다가 이를 눈여겨 본 왓포드의 감독 그레이엄 테일러의 눈에 들어 왓포드로 소개받아 2군에서 연습 시합을 하여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왓포드와 계약을 하게 된다.
1.2 왓포드 시절
팀 선배인 루더 블리슬렛과 함께.
그는 데뷔 첫 경기인 1981년 9월 5일에 있었던 올덤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만들어 첫 신호를 알린 반스는 같은 흑인 선수인 루더 블리슬렛과 호흡을 맞추어 1981/82 시즌에 당시 2부 리그로 승격한 지 3시즌 만에 팀을 2부 리그 준우승으로[2] 1부 리그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이후에도 기세를 이어가서 1982/83 시즌 리그 준우승, 1984년 FA컵 결승 진출 등을 이루며 리그에서 중상위권을 수성했다.
이후 전성기가 저물어 가던 시절인 1986/87 시즌에 FA컵 준결승에서 토트넘 핫스퍼에게 패배한 것을 끝으로 그는 1987년에 당시 최강팀인 리버풀로 이적을 하게 된다.
1.3 붉은 군단의 일원으로
그가 리버풀로 오기 전인 1986년 12월 초에 리버풀은 왓포드와의 경기를 치루러 비커리지 로드로 원정을 갔는데, 1위 수성을 위해서는 승점 3점을 기대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왓포드는 1980년대 초반처럼 예전의 기세를 보이지 못했지만, 당시 반스는 잉글랜드에서 제일가는 포워드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당시 왓포드가 이미 1골을 올린 경기의 후반전에서 반스는 센터서클 근처에서 공을 잡아 득점을 위해 이리저리 질주하여 앨런 핸슨과 게리 길레스피를 젖히고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를 지나치는 절묘한 슛을 보내며 리버풀에 타격을 입혔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리버풀에 반스의 멋진 모습을 각인시켜 주기도 했다.
그런 반스를 1987/88 시즌을 앞두고 케니 달글리시 감독이 90만 파운드로 구매하여 그는 팀에 합류했고, 존 올드리지의 득점력, 피터 비어즐리의 날카로움, 그리고 상대를 교란시키는 반스의 활약이 시너지를 일으켜 1987/88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게 되었다. 이 공로로 반스는 PFA와 축구기자협회 두 곳에서 올해의 선수상을 들어올렸다. 다만 FA컵에서 1부 리그 약체인 윔블던 FC에게 패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즌은 기념비적인 시즌으로 남았다.
전성기 시절에 반스는 '검은 스티브 하이웨이[3]'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팬들에게 승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주었는데, 처음에는 그를 데려오려는 구단의 결정에 몇몇 사람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반스가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한 데다 흑인이 한 명도 주전으로 뛰지 않던 머지사이드에 흑인이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스는 잔디 위를 내딛자 자연스럽게 녹아내렸으며, 구디슨 원정에서도 누군가가 바나나를 던지자 시크하게 차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뛰어난 실력과 태도는 어떠한 핸디캡도 무너뜨린 셈이다.
그는 힐즈브러 참사 때도 비탄에 빠진 이들을 도왔던 1989년에도 팀의 일원으로써 FA컵 우승을 하여 웃음을 가져다 주었고, 1989/90 시즌에는 또 한번 리그 우승을 하여 축구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 역동적이고 폭발적인 윙어로써의 전성기는 끝을 고하기 시작했는데, 1991년에 부임한 그레이엄 수네스 시절에 아킬레스건 부상이 심해져 점점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1994년에 대신 부임한 로이 에반스 감독이 그를 딥라잉 미드필더로 바꾸어 탁월한 패스 실력을 선보이며 다시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에반스가 지휘하는 젊은 군단들의 슬기로운 리더로써 1995년에 리그 컵을 우승시켜 자신의 컬렉션에 넣었고, 이후 1996/97 시즌을 끝으로 정든 리버풀을 떠났다.
1.4 리버풀 이후
이후 뉴캐슬로 이적하여 1시즌을 뛰다가 1998/99 시즌 도중에 찰튼으로 이적했으나, 그 시즌에 팀이 강등되자 은퇴했다.
1.5 감독 시절
셀틱 시절의 모습.
자메이카 국대 감독 시절의 모습.
은퇴 이후 1999년에 케니 달글리시 단장의 부름을 받고 셀틱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에 쫓겨났고,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 2008년에 자메이카 국대 감독을 1년간 맡다가 2009년에 트란미어 로버스 감독을 끝으로 더 이상 감독 생활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