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퍼거슨

이름알렉산더 채프먼 "알렉스" 퍼거슨 경
(Sir Alexander Chapman "Alex" Ferguson, CBE)[1]
생년월일1941년 12월 31일
국적스코틀랜드
출생지글래스고
신체 조건178cm
포지션스트라이커
소속 클럽퀸즈 파크 FC (1957-1960)
세인트 존스턴 FC (1960-1964)
던펌린 애슬레틱 FC (1964-1967)
레인저스 FC (1967-1969)
폴커크 FC (1969-1973)
에어 유나이티드 FC (1973-1974)
지도자 경력이스트 스털링셔 FC 감독 (1974)
세인트 미렌 FC 감독 (1974-1978)
애버딘 FC 감독 (1978-1986)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5-198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감독 (1986-2013)
2011 FIFA 올해의 감독상
수상
펩 과르디올라
2위
주제 무리뉴
3위
알렉스 퍼거슨
2013 FIFA 올해의 감독상
수상
유프 하인케스
2위
알렉스 퍼거슨
3위
위르겐 클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감독
론 앳킨슨
(1981~1986)
알렉스 퍼거슨
(1986~2013)
데이비드 모예스
(2013~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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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can be another Cantona, Scholes, Giggs or Ronaldo but there can never ever be another Sir Alex Ferguson.

제2의 칸토나, 스콜스, 긱스, 호날두는 나올 수 있지만, 제2의 퍼거슨은 나올 수 없다. - 에릭 칸토나

1 개요

150년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이자 최고의 매니저[2][3]

클럽을 넘어서 영국 축구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인 인물[4]

SNS 관련 사고나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1승을 추가하시는 불패의 명장

전 축구 감독. 1986년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을 맡고 있다가, 2012-13 시즌 끝까지 감독직을 수행하고 2013년 6월 30일 계약 종료일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수행하는 동안 들어올린 트로피는 총 38개이고, 감독 커리어 전체로 본다면 50개가 된다. 1999년 트레블을 이룬 업적으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5]를 받아 알렉스 퍼거슨 경이 되었다.

파일:퍼거슨경.png
위쪽 사진은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을 때이며, 아래쪽 사진이 기사작위를 받는 장면.

2 프로필

1941년 12월 31일, 스코틀랜드글래스고의 고반에서 출생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3세까지 클라이드 지역 조선소의 숙련공으로 일했고, 그 기간에 퀸즈 파크와 세인트 존스톤에서 파트 타임 선수로 뛰기도 하였다. 하여튼 초창기에는 선수로서 잘 안풀려서 캐나다로 이민가려고까지 했으나 동생의 여자친구와 감독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경기에 출장하게 되어 이민은 그만두었다.

1964년 덤퍼린에 중앙 공격수로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 1974년에 은퇴하고 이스트 스털링(East Stirling)에 감독으로 취임. 1년 후 세인트 미렌(St. Mirren)으로 옮겨 3년간 지휘봉을 잡은 후 구단주와의 마찰로 경질, 1978년 애버딘 FC의 감독을 맡으며 그의 전설을 시작했다.

애버딘 FC에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스코틀랜드 리그를 양분하던 레인저스와 셀틱을 누르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스코틀랜드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1983년에는 레알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하며 그 이름을 유럽 전역에 떨쳤다. 당시 나이가 43세로 유럽에서도 인정 받는 젊은 명장이었다.[6]

이후 198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으로 취임, 구단을 세계 정상급의 클럽으로 키워내고 2013년, 20번째 리그 우승을 팀에 안겨준 채 은퇴하였다.

3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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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부임 시절 총 38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이견이 없는 구단 역대 최고의 감독

맨유 감독으로서의 승률이 거의 60%이고, 통산 승률도 57%대다. [7] 승률 이전에 일단 맨유 재임기간 동안 리그 우승률이 50%다. (26시즌 동안 13회 우승)
그리고 처음 알렉스 퍼거슨이 맨유 감독직을 수행했을때의 금고가 바닥났던 맨유의 상태를 고려하면 저 60%도 어마어마한거다.

4 전술 스타일

파일:맨유2001.jpg

한 컷 요약[8]

스타일은 없다. 단지 흐름에 맞춰서 유동적인 축구를 할 뿐.[9]

경기의 흐름을 읽어내어 용병술을 사용하는 것에 능하고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그 외의 감독이 갖춰야 할 경기 외적인 능력 또한 역대급으로 손꼽힌다. 또한 선수 스쿼드가 조금 갖춰지지 않더라도 감독 역량으로 그것을 채워내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감독빨' 단어가 어울리는 명장이다.

팀의 조직을 다지는 능력이 너무나 탁월한데다가 육각형 감독이었기 때문에, 전술가로서의 역량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전술가로서의 퍼거슨 역시 그리 만만한 감독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전술에 유연했고, 자연스러운 변화를 주는 등의 능력에서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감독이다. 선수들의 분업화를 지양하는 편이었고,[10] 공수 전환의 신속성을 강조하는 등 사키이즘의 그것에 가까운 팀을 기반으로 두려는 모습을 많이 보인 편이다.

90년대 맨유처럼 비교적 긴 패스로 쭉쭉 역습해나가는 스타일을 보이는가 하면 2000년대 중후반에는 선수들의 빠른 스위칭과 짧은 패스를 통해 상대를 현란하게 교란하는 기동전 축구의 정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시기의 맨유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라이언 긱스베컴, 그 후로는 호날두. 그렇기에 2명의 윙을 통해 측면 플레이에 능한 442가 가장 유명한 포메이션이지만 때에 따라 451등의 포메이션도 활용하는 등 포메이션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예를 들면, 호날두를 제로톱으로 활용한 경기도 있었고 경기 중에는 퍼디난드와 비디치를 포워드로 기용한 적도 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무리뉴로부터 선도된 선수 전원의 수비 가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헐거운 중원을 커버하는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맨유가 더블한 시기에는 화려하고 다이나믹한 축구로 팬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어떻게든 이기는 축구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10-11 이후로는 꾸역승의 맨유라는 유머가 있었다. 분명 경기력에서도 별로고 라인업도 별로인데 어떻게든 골을 넣어 이기는 축구를 구사했다. [11] 감독으로써 퍼거슨의 역량이 잘 드러나는 부분. 각 포지션의 있는 선수의 장점을 극대화 시키는 것.누구랑 너무 다르다...[12]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골치아픈 성향의 감독인데, 부상이나 대표팀 차출 같은 선수단 변동이 있을 경우, 아니면 퍼거슨이 정말 주전멤버들을 기용해야 한다 판단하지 않으면 스쿼드조차 변화무쌍한데다가[13]
전술에 있어서도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전술을 예측해 대응전술을 짜는것도 용이치 않다.[14]

퍼거슨 맨유의 전술 훈련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얘기가 알아서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플레이를 무척 강조한다. 네빌이 축구분석방송에서 스콜스를 평하며 말하길 퍼거슨이 중요시한건 점유율이였다고. 맨유가 경기 후반에 양상을 뒤집는 과정에서 점유율을 높여 경기를 주도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의 핵심적인 멤버가 스콜스였다고 밝혔다.

불같은 성격으로 선수들을 휘어잡는데도 능했다. 아버지 같은 리더십을 보여주었지만, 데이비드 베컴이나 뤼트 판 니스텔로이 야프 스탐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당장 눈 앞의 승리 대신 리빌딩을 단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칸토나같은 경우 칸토나가 사고를 쳐도 직접 나가서 칸토나를 최대한 보호하려 하는 등 회유책을 사용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굉장히 드문 경우.

아무튼 현역 당시에도 엄청났지만 은퇴한 후 후임자들의 부진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또 감독의 능력이 축구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 확실히 보여준 감독이다. 지금의 맨유와 불과 2-3년 전의 맨유를 비교해보라. 퍼거슨 시절의 맨유는 분명 스쿼드도 별로이고 그다지 특출나게 사기적인 선수가 없었음에도 끝판왕의 향기를 풍겼고 지금의 맨유는 공격진이 훨씬 화려해지고 수많은 영입을 했음에도 퍼거슨 때랑 비교하면 확실히 포스가 밀린다.

2015년 연말 그의 뒤를 잇는, 어쩌면 그를 능가하게 될지도 모르는 세계 최고의 명장이라고 세계 축구팬들이 인정하던 무리뉴가 선수단 장악 실패 및 팀 성적 부진으로 첼시 감독에서 물러나자 퍼거슨 감독의 능력과 카리스마가 다시 한번 재조명되고 있다.

4.1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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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0 위건 애슬레틱 FC (공격수 2명 미드필더 6명 수비수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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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fL 볼프스부르크 1-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격수 2명 미드필더 7명 수비수 1명)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볼프스부르크(전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팀)와 2009-2010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6차전 경기. 당시 맨유는 핵심 자원들의 부상, 징계 등의 이유로 인해 사면초가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퍼거슨 경은 남아있는 자원들을 활용하여 원정 경기에서 3:1 대승을 거두었다. 수비진들이 부상을 당해서 미드필드 자원으로 백 4 수비 라인을 구성했음에도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주었다. 마이클 캐릭과 대런 플레쳐는 자신들의 성향을 바탕으로 새로운 색깔을 뽐내며 수비진을 지휘했다. 마이클 오웬은 오프 사이드 트랩을 뚫고 수비 뒷공간을 파고 드는 영리한 움직임과 순도 높은 골 결정력(5개의 슛팅 중 3개의 골)으로 해드트릭을 기록했다. 교체 투입된 가브리엘 오베르탕은 오웬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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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즈 유나이티드 0-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격수 4명 미드필더 4명 수비수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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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0 토트넘 핫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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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1 레알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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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 아스날 (공격수 2명 미드필더 1명 수비수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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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스쿼드로 승점 11점차 EPL 우승

미드필더였던 선수들을 다 수비에 몰아넣어도 아스날 등을 상대로 승리하거나 지금 보면 어떻게 저런 멤버들로 우승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나 떠올리게 하시는 거 보면 정말 천재. 퍼거슨한테 4500억 줬으면 이미 끝났지.[15]

5 어린 시절, 축구선수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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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고반이라는 곳에서 알렉산더 비튼 퍼거슨(Alexander Beaton Ferguson)과 엘리자베스 하디(Elizabeth Hardie)의 아들로 태어났다. 둘은 퍼거슨의 고모, 알렉산더 비튼 퍼거슨의 동생의 소개로 만났다고 하는데 속도위반 결혼을 했기에 어린 퍼거슨에겐 어떻게 결혼하게 된건지 자세한 사정은 말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항구 노동자로 가난했고 주변 환경의 치안이 딱히 좋은건 아니었지만 노동자촌 특유의 끈끈한 의리는 마음껏 만끽하며 지낼 수 있었고, 그것이 자기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는 자기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실제 4살, 5살 때 사귄 친구들과 환갑을 넘어 7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친하게 지낼 정도로 그때의 인간관계가 그에 미친 영향이 컸으며 고집스런 성격도 그때부터 변함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보통 그러하듯 축구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유소년 축구 클럽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다니곤 했다. 고반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축구부로 활동했으며 그렇게 축구에 미친 결과 학업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아 교장선생에게 학업보다는 기술을 배우는게 좋겠다는 충고를 받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그는 조선소의 연습공으로 취직했으며 동시에 파트타임으로 당시 유명한 아마추어 클럽이었던 퀸스 파크, 세인트 존스턴 등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평생의 반려이자 세아들의 엄마가 되는 캐시 홀딩을 만나기도 하였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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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과 캐시 홀딩

이후 그는 덤퍼린으로 이적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다. 비록 감독과 마찰이 있어 컵대회 결승전에 나가지 못하는 등의 일이 있긴 했지만 그는 그때 열심히 뛰었고 1965-66시즌엔 51경기 출장 45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스코틀랜드 리그 공동 득점왕도 차지했다.초특급 선수는 아니었어도 충분히 일급 선수였다.

또한 덤퍼린에 있었던 1966년 5월 12일 캐시 홀딩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그 후로 현재까지 행복한 부부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퍼거슨은 덤퍼린에서의 활약으로 당시, 그리고 지금도 셀틱과 더불어 스코틀랜드 최고의 클럽인 레인저스로 이적했으나 레인저스에서 그는 의외의 암초를 만나게 되는데 그건 다름아닌 종교 갈등이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가톨릭개신교 간의 종교 갈등이 매우 극심했고 셀틱은 가톨릭을, 레인저스는 개신교를 대표하는 클럽이었다. 퍼거슨의 경우 본인도, 아버지도, 동생도 모두 개신교도였으나 퍼거슨의 아내인 캐시가 가톨릭교도였고, 레인저스의 몇몇 사람은 그것 때문에 노골적으로 퍼거슨을 적대했다.

1968년 9월 18일 퍼거슨은 첫 아이 마크[17]를 얻었는데 그 일마저 퍼거슨이 자기 아들에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느니 어쩌니 하는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구단 보드진의 어이없는 감독 경질과 그로 인한 마찰 등으로 퍼거슨은 어린 시절 꿈의 클럽이었던 레인저스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폴커크로 떠나게 된다.

폴커크에 머무를 때부터 퍼거슨은 본격적으로 감독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코치 자격증을 취득한 후 사실상의 플레잉 코치(선수 겸 코치)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덤퍼린 시절의 감독을 다시 만난 그는 덤퍼린 시절처럼 서로 존중하고 때로는 싸우고(...)하면서 첫번째 코치직을 경험했고 이후 에어 유나이티드에서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보낸 후 선수로써 은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감독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술집도 했고 꽤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집 손님등을 대상으로 사채놀이도 했으나 이러한 부업이 시간과 정신력 소모가 크다고 느끼게 되었고 또 술집 장사도 조금씩 기울자 모두 그만두고 감독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6 감독 시절의 퍼거슨

6.1 이스트 스털링, 세인트 미렌 시절

32세의 젊은 나이에 이스트 스털링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정규계약이 아닌 파트타임 계약으로 시작하였고, 클럽은 그때 골키퍼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었다. 그는 시작부터 선수단을 확실히 장악했고, 클럽의 성적은 즉시 나아지기 시작했다. 1년 후인 1975년, 세인트 미렌이 그를 감독으로 원했다. 이스트 스털링의 태도에 불만이 있던 퍼거슨은 그들의 제의를 수락했고 3년간 감독을 맡으며 스코틀랜드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한정된 자원으로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구단주와의 마찰로 급작스레 경질, 이후 애버딘으로 옮겨간다.

6.2 애버딘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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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딘은 나름대로 스코틀랜드의 유명구단이긴 했으나 1955년 이래 우승을 한 적이 없었다. 당시 스코틀랜드 리그는 레인저스와 셀틱의 양강 체제로 둘이 우승컵을 나눠갖는 형국이었기 때문.[18] 1978년에 부임한 퍼거슨도 당장에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것에는 실패했다. 늘상 셀틱과 레인저스가 다 해먹던 스코틀랜드 축구판에 혁명과도 같은 강세를 보여줬기에, '퍼거슨의 진정한 진가가 드러난 시기는 (앞으로 설명할)맨유 시절이 아닌 에버딘 시절'이라고 평가하는 축구팬들도 많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78/79 시즌에는 아쉽게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실패했으나 퍼거슨 감독은 팀을 잘 정비했고 결국 79/80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5-0의 승리를 거두며 드라마틱한 우승에 성공한다. 셀틱이나 레인저스가 아닌 구단이 리그 우승을 한 것은 15년만이었다.

셀틱 FC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으로 수십년간 이어진 셀틱 FC, 레인저스 FC 양강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후 에버딘은 승승장구하며 스코틀랜드의 지배자로 떠올랐고 82/83시즌 컵 위너스 컵에서 루메네게의 바이에른 뮌헨과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 를 꺾고 우승한다. 이 업적으로 인해 퍼거슨 감독의 이름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연히 애버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유럽 대회 우승이다.

● (디 스테파노는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자기 팀인 레알 마드리드가 퍼거슨의 에버딘에게 패배한 직후에 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난 것은 축구 팀이 아니었다. 그건 불굴의 투혼이었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당시 퍼거슨은 UEFA 클럽랭킹 100위 대의 클럽이었던 애버딘 FC를 UEFA 클럽랭킹 6위로 올렸다.

(애버딘 FC의 UEFA 클럽 랭킹)

1978년 - 106위 ← 에버딘 감독 취임
1979년 - 116위
1980년 - 97위
1981년 - 78위
1982년 - 45위
1983년 - 20위
1984년 - 16위
1985년 - 13위
1986년 - 6위 ← 86년을 끝으로 맨유 감독 부임

정말 믿기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모든 스코틀랜드 시민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지 않았냐구요? 그가 사람일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내 수사국에 마법사라는 고소가 수십건 들어왔고, 실제로 그를 체포해 조사하기도 했답니다. 감독계의 마법사 시초. 퍼법사 -애버딘 FC 박물관-

이렇게 있을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여긴 사람들 때문에 마법사라고 경찰에 고발당하는 희극까지 빚기도 했다. 실제로 애버딘은 퍼거슨이 떠나자 바로 다음해부터 급전직락하여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만년 삼류팀을 순식간에 일류팀으로 일구어냈던 것은 선수빨같은 게 아닌 순전히 퍼거슨의 능력덕이라 봐야 옳다.

그 다음해인 83/84 시즌 퍼거슨 감독은 팀을 리그와 컵 더블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공적으로 OBE 수훈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퍼거슨이 떠난 뒤 애버딘 FC는 리그 15위, 다음해 강등되었다.

이후 알렉스 퍼거슨은 FC 바르셀로나, 레인저스 FC, 아스날 FC, 토트넘 핫스퍼[19] 등에서 구애를 받았다. 1986년 11월, 당시 맨유의 구단주였던 마틴 에드워즈[20]의 권유를 받은 퍼거슨은 곧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이 시절 퍼거슨 감독은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직도 수행하고 있었는데, 호주와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예선 도중 조크 스틴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21]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스승의 죽음과 갑작스런 부임이었는지, 본선에 팀을 올려놓고도 1무 2패 조 최하위로 광탈... 화려한 그의 감독커리어에 비하면 흑역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종의 임시 땜빵 감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흑역사라고 하는 건 좀 가혹한 평이다. 같은 조에 속했던 팀이 준우승팀 서독, 그 서독도 바르고 조 1위로 16강에 간 덴마크였으니. 덴마크한테 탈탈 털린 우루과이는 좀 그렇지만, 우루과이도 서독한테는 비겼을 정도라.. 그렇게 조국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사임하고 그의 커리어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수행하는데...

6.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절

6.3.1 전설의 시작

맨유 부임 직후, 마틴 에드워즈 회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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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왼쪽이 각 클럽의 감독들 수. 오른쪽이 트로피 수.)

나는 너무 쉽게 도전하지도, 너무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

어려운 조건에서 승리를 즐기는 퍼거슨은 후에 자서전에서 '내 규율 때문에 맨유가 몇 번의 우승을 놓쳤을지도 모른다'(퍼거슨의 리빌딩 선수 리스트를 의미)라고 회고 했다. 영감님에게 우승이 최우선이었다면 트로피를 몇개나 더 먹었을 것이란 말인가

더 적은 돈 받고 맨유 감독으로. 퍼거슨 감독은 스코틀랜드 리그의 애버딘 구단에서 맨유 구단으로 옮길 때, 이전 보다 열악한 대우를 수용했다. 눈 앞의 이익보다 먼 장래를 생각한 때문이다. 맨유 감독으로 가기 전 구단 측을 만나 선수 영입에 쓸 수 있는 자금을 요구했지만 맨유의 금고는 거의 바닥이 드러난 상태였다. 연봉 또한 실망스러웠다. 직전 팀인 애버딘과 비교할 때도 훨씬 적은 대우였다. 애버딘에서 살고 있던 주택도 구입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맨유 구단의 금고 사정상 힘들었다. 퍼거슨이 맨유 감독으로 가게 된 동기는 금전적인 것과 무관했던 것이다. 퍼거슨 감독은 맨유에 마음을 빼앗겼었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이자 셀틱을 이끌고 세계 최초 트레블을 달성했던 조크 스타인 감독의 영향도 있었다.

● 언젠가 조크 스타인 감독이 내게 맨유 감독직을 거절한 것을 평생 후회했다고 말 한 적이 있다. 맨유에게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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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버스비와 함께한 퍼거슨)

맷 버스비를 위해 맨유로 간다.[22]

● 나는 내가 10대였던 1953년 유나이티드와 레인저스, 그리고 셀틱과의 경기를 보러 갔었다. 하지만 내 주 관심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유나이티드는 맷 버스비가 쌓은 근본 위에 서 있다. 특히 어린 선수들에 관련된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던컨 에드워즈나 에디 콜먼, 대니 페그 그리고 막 선수생활을 시작한 선수들이 정말 축구 선수 생활을 즐기기도 전에 목숨을 잃은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고 커다란 비극이었다. 나는 던컨이 잉글랜드 23세이하 대표팀 소속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를 볼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았다. 나는 보비 찰튼이 21세때 던컨에 대해 함께 경기해 본 그 어떤 선수보다 최고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고, 그것이 모든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버스비가 뮌헨 비행기 사고 이후 선수들을 다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던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그가 이끌고 있던 어린 선수들을 모두 잃게 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살아남은 선수들에게 돌아가야만했다. 그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고 그것은 그가 팀을 재건하려는 데 목표이자 원동력이되었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로 인해 팀의 특별한 주축 선수들이 세상을 떠났고 그것을 극복해나가야만 했다. 나는 그가 만약 그 때 감독직을 사임하고 은퇴하더라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것은 맷 버스비의 성격과 그가 가지고 있었던 강인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무언가가 있는가에 관한 문제였고 내 생각에 버스비는 충성에 대한 개념, 일에 대한 윤리,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 등 그러한 기반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스포츠, 비즈니스 등 무엇이든지간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것들은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언가 이것은 하고자 시도할 때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맷 버스비는 멋지게 다시 한번 지역에서 태어난 선수들을 많이 발굴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팀을 리빌딩하였고 1968년에 챔스에서 우승을 거뒀다. 이것은 놀라운 성과였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의 유나이티드에 관련된 로맨스같은 것들을 만들어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재미있고 공격적인 축구선수들과 함께 올바른 방법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것이 흔치 않은 오늘날 유나이티드는 그런 부분에서 큰 효과를 주고 있다.

맨유에 입성한 퍼거슨에게 가장 시급한 임무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철저한 리빌딩 작업이었다. 퍼거슨이 부임할 무렵 맨유는 리그3~4위 정도의 성적을 거두며, 당시로서 상당히 권위있던 FA컵도 자주 우승하던 나름대로 성적을 거두던 팀이었다. 하지만, 맷 버스비 시절 데니스 로, 바비 찰튼 경, 조지 베스트 등 3명의 발롱도르를 배출하고 잉글랜드 클럽 사상 처음으로 유로피언컵을 들기도 했던 과거의 영광과 비교하면 침체기라고 할수 있었다 '술주정뱅이 구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팀 멘탈도 형편 없었다. 오죽하면 퍼거슨이 "난 축구감독이지 술집을 차린게 아니야."라고 했을까.[23]

맨유의 감독이 된 퍼거슨은 헤이젤 참사로 잉글랜드 리그 전체를 침체에 빠뜨린 리버풀을 끌어내리겠다고 약속했고, 팬들은 그를 맨유에 영광을 다시 가져다 줄 분으로 반겼었다. 퍼거슨 감독은 팀 전체적인 부분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가 가장 열성적으로 신경 썼던 것은 유소년 시스템이었다.

그는 그후 3시즌에 걸쳐 스티브 브루스, 게리 팔리스터, 폴 인스, 마크 휴즈, 마이크 펠란 등을 영입했으며 이후 이들은 퍼거슨의 1기 맨유 멤버의 핵심이 된다[24]

또한 그는 팀 분위기와 훈련체계를 바꾸며 당시 맨유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술주정뱅이 구단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던 노먼 화이트사이드와 폴 맥그래스를 방출했다.[25]당시 에이스면서 알콜 중독수준이었던 선수 중에서 퍼거슨 체제에서 살아남았던 사람은 브라이언 롭슨 하나였다. 브라이언 롭슨은 맨유가 침체에 빠졌을 때도 발롱도르 순위권에 들었고 많은 명문구단의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맨유에 남았을 정도로 헌신했다. 큰 부상을 많이 겪으면서도 클래스를 유지했으며 캡틴 마블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맨유 7번 라인 중 한 명으로, 맨유가 26년만에 프리미어리그 원년 우승할 당시 주장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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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퍼거슨 감독이 시작부터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퍼거슨 부임 이전 4위였던 맨유는 퍼거슨 부임 이후 11위, 2위, 11위, 13위, 6위, 2위를 기록한다.[26]. 노먼 화이트사이드, 폴 맥그래스, 고든 스트라칸 등 팬들의 사랑을 받던 선수들을 내보낸 후 성적이 좋지 못했고 그 다음해인 1990년 1월 까지 성적이 하위권에 맴돌자 '퍼기 나가!(Fergie Out!)'이라는 구호가 관중석에 늘상 울려퍼지곤 했다. 아무리 퍼거슨이라지만 구단의 전격적 리빌딩 작업을 하던 과정에서는 성적이 들쑥날쭉할수 밖에 없었다.

이후 퍼거슨 스스로 '당시의 나는 지나치게 서둘렀고, 너무 야심적이었다. 다시는 한꺼번에 선수들을 사오지 않겠다.'라고 말했을 정도. 구단주는 부정했지만 퍼거슨의 경질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게 당시의 의견이었다. 그런 퍼거슨에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 FA컵. 퍼거슨의 맨유는 결국 89/90 시즌 FA컵에서 우승을 하게 되고 이는 오랜기간 우승에 목말랐던 팬들의 갈증을 일시적이나마 달래주게 되었다.[27]

물론 그동안에도 퍼거슨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유스팀의 경우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고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에 당장의 성적이 아닌 그러한 클럽의 발전을 놓고 퍼거슨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그리 적지 않았었다.[28]

그리고 90/91시즌.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UEFA 컵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마크 휴즈(현 스토크 시티 감독)의 두 골에 힘입어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FC 바르셀로나를 꺾고 팀에게 우승컵을 안겼다. 이는 리버풀 FC의 서포터(훌리건)들이 일으킨 헤이젤 참사 로 인해 5년간 유럽무대에 나가지 못했던 잉글랜드가 5년의 징계가 끝난 직후 도전한 유럽무대에서 얻은 쾌거였고, 그런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하나의 클럽이라기보단 잉글랜드 전체를 대표하는 클럽으로서 얻은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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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의 암흑기를 도래시킨 헤이젤 참사의 여파를 보여주는 리그 그래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일개 클럽이 아니라 리그를 세계 정상에 다시 올려 놓겠다"

※ 퍼거슨 감독은 맨유에 1986년에 부임했는데, 이는 1985년 5월 29일 헤이젤 참사가 일어난 후 였다. 유럽 리그 랭킹 3위안에 들었던 최상위 리그가 한순간에 UEFA리그 29위로 추락했기 때문. 5년간 잉글랜드 리그 유럽무대 출전 금지를 UEFA가 때렸는데, 10년도 고려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 10년 금지를 받았다면 얼마나 더 잉글랜드 리그가 추락했을 것이란 말인가. 5년에 29위면 10년엔?

축구계가 퍼거슨 감독을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가 축구팀의 감독에게 요구되는 여러가지 중 하나만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의 모든 측면에서 최고였기 때문이다. 감독계의 육각형. 슈퍼만능

그는 쇠락해가던 맨유 유소년팀을 다시 한 번 천재들의 양성소로 바꿔놓은 동시에 마크 휴즈(현 스토크 시티 감독), 스티브 브루스(현 아스톤 빌라 감독), 피터 슈마이켈 (현 맨유 앰배서더), 데니스 어윈 등 최고 수준의 성인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능력을 인정 받은 스타선수였고 일부는 잉글랜드에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선수였다. 그런 선수들의 조합속에 퍼거슨 감독은 맨유 감독 부임 5년 만에 팀을 리그는 물론 유럽 대회에서 정상에 도전하는 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맞이한 1992년, 퍼거슨 감독이 6년간 만들어온 1군 팀과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유소년 선수들 위에 화룡점정이 될 한 명의 스타가 맨유 유니폼을 입는다. 맨유의 '킹' 에릭 칸토나다.

위너스 컵에서 우승한 다음 시즌인 92/93, 그는 단돈 1M 파운드에 에릭 칸토나리즈 유나이티드에게서 영입하였고, 이는 퍼거슨 감독 스스로 말하는 최고의 영입이 되었다. 맨유에 오기 전에도 프랑스 무대에서 이미 많은 사건에 연루됐고, 리즈에서 뛴 짧은 기간에도 이미 팀내 선수들과 불화를 낳고 있던 칸토나는 분명 천재적인 선수였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그 폭탄을 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스리며 칸토나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현시킨다. 결국 칸토나의 합류로 자신이 구상했던 맨유의 마지막 퍼즐을 맞춘 퍼거슨 감독은 EPL 출범 첫 해였던 1992/93시즌 자신이 맨유 감독에 부임하며 팬들에게 다짐했던 그 약속을 현실로 이뤄낸다. 맨유의 26시즌 만의 리그 우승이었다. 이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가 헤이젤 참사, 힐스버러 참사 이후 리그 환경을 개편하고 새로 출범한 EPL,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출범 원년 우승이기도 하다.

6.3.2 CLASS OF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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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92 황금 유스, 퍼기의 아이들)[29]

1995/96 시즌.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칸토나가 쿵푸킥으로 출전정지 먹은 상태. 팀의 추축이었던 폴 인스, 마크 휴즈, 칸첼스키스는 이적.
그래서 퍼거슨은 어린 유스 선수들을 중심으로 시즌을 치루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개막전에서 아스톤 빌라에게 3-1로 패배.
그리고 그날 저녁에 한 BBC MOTD 하이라이트에서 고정 패널인 앨런 한센은 "꼬맹이들 갖고 우승할 수 없다" 라며 엄청난 혹평을 내렸다.


You can't win anything with kids '꼬맹이들 갖고 우승할 수 없어' 역레발 시전
(최근 MOTD 50주년 다큐멘터리에서 한센왈 '그 애들이 저렇게 클 줄 몰랐다')

그리고 그 시즌에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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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8시즌, 그 시기에 맨유는 퍼거슨 감독이 이끈 맨유의 전성기 중 1기에 해당하는 팀이 리빌딩을 거쳤다. 맨유의 공격의 핵심이었던 에릭 칸토나가 은퇴를 선언했고 브라이언 롭슨, 마크 휴즈, 스티브 브루스 등 1990년대 초기의 스타들도 이미 팀을 떠난 후였다. 에릭 칸토나와 마크 휴즈 브라이언 맥클레어의 공격진은 앤디 콜, 드와이트 요크, 테디 셰링엄, 솔샤르가 대체했고 스티브 브루스가 떠난 수비에는 야프 스탐이 들어왔다. 좀 더 이른 시기에 팀을 떠난 브라이언 롭슨을 대체했던 로이 킨은 이미 팀의 중심선수였고, 긱스, 베컴, 스콜스, 네빌 형제, 니키 버트로 대표되는 '퍼거슨의 아이들'은 이제 어느덧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맞이한 98/99 시즌. 이때 맨유데이비드 베컴 - 로이 킨 - 폴 스콜스 - 라이언 긱스로 이어지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드 진영과 그 당시 최고의 수비수 중 한명이었던 야프 스탐이 이끄는 수비진, 또한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명이었던 피터 슈마이켈[30]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림팀이었다. 이때 유스 출신으로 7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팀의 핵심으로 뛰고 있었고, 맨유는 트레블을 달성했다. 이 공적으로 퍼거슨 감독은 기사 작위를 받는다.

파일:퍼거슨1000.jpg

특히 이 시즌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캄프 누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꼽히는데, 바이에른에게 0-1로 뒤지고 있어 패색이 짙었던 맨유는 후반 인저리 타임에 두 골을 몰아넣으며 극적인 역전승에 성공하였다.

맨유트레블에 대해 당시 모든 언론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는 말로 되풀이했다. 도대체 5년간 유럽대회를 모두 정지 당한 리그에서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에 트레블을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지... 한 클럽이 5년간 유럽대회 못나가도 망하는데,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전체 클럽들이 유럽대회를 못나갔던 영국 리그 상황으로 인해 더 큰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헤이젤 참사 여파로 용병은 모두 영국 리그를 떠났고, UEFA 리그 랭킹 3위였던 잉글랜드 리그는 한순간에 29위까지 밀려났었기 때문.

그러나 퍼거슨 감독은 약속대로 잉글랜드 리그를 다시 구해냈고, 그로 인해 잉글랜드 국민들은 다시 한번 감동받게 된다. 엘리자베스 2세는 당시 우승한 직후 "그가 들어올린 것은 트로피가 아니라 영국의 자존심이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음날 영국은 초중고 학교에 하루 휴교령을 내렸다. 조지 베스트가 축구계를 떠난 이후 두번째로 일어난 휴교령이었다. 그리고 퍼거슨은 곧바로 기사직위를 수여받는다.

퍼거슨 커리어의 최고 전성기, 1998/99시즌 트레블

6.3.3 계속되는 리빌딩

많은 축구관계자와 팬들이 1998/99시즌 트레블을 퍼거슨 감독의 최고 업적으로 꼽지만, 그의 또 다른 진가는 바로 그 직후에 나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정점'에 오른 후에도 계속 잘했다. 그는 1998/99시즌 트레블 직후 유럽 유수의 클럽들의 러브콜을 받은 주장 로이 킨을 잔류시키는 등 팀의 중심을 잡는 데 성공하며 두 시즌 연속해서 더 리그 우승을 차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최초로 한 팀을 이끌고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기록한 감독이 된다.

퍼거슨 감독만큼 축구를 이해하는 감독도 흔하지 않다. 이 말은 시즌 중이거나 경기 중이라도 축구와 관련된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는 최고의 조건이 아니더라도, 또 어떤 말을 듣게 되어도, 자신이 상황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을 한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베컴-

퍼거슨은 커다란 변화(리빌딩)을 위해 과감한 도전을 시도할 줄 아는 배짱 큰 명장(名將)이다. 리빌딩, 즉 세대 교체라는 것은 단순히 영입과 유망주 기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어느 정도 클럽의 과도기가 될 것을 감안하면서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과감한 도전을 해야만 성공을 이룰 수 있는 매우 예민하고 어려운 것이다. 리빌딩 과정에서 올 수 있는 '과도기'는 팀의 전력이 전과 같지 않게 급격히 약화 되어 오는 경우를 말할 수 있다.

퍼거슨은 트레블 직후 '4-4-2의 시대는 끝났다'며 팀의 전술적인 개편과 리빌딩을 예고했다. 하지만 큰 기대를 하며 영입했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에릭 젬바젬바 등은 먹튀가 되어 맨유 팬들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들은 딱히 개인기량이 떨어졌다기보단 너무도 강한 맨유의 색에 전혀 녹아들지 못했다.

2003년~2006년까지(03/04, 04/05, 05/06) 총 3년 간의 시즌. 세 시즌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과감한 리빌딩이 진행 되었다.

맨유 암흑기 → 그러나, 이것이 암흑기이라면 모예스와 반할은? 더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2003~2004시즌 맨유 EPL 3위 ← 호날두 입단
2004~2005시즌 맨유 EPL 3위 ← 18세 웨인 루니 입단
2005~2006시즌 맨유 EPL 2위

그 당시엔 너무 어린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맨유는 팀의 EPL리그 성적을 희생해야만 했다.
리빌딩이 진행했던 3년동안 피크는 05/06시즌,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으로 인해 맨유는 10년만에 챔스 예선탈락이라는 대가를 치뤄야만 했던 것이다. 맨유가 리그 우승을 2년 연속 놓친 것도 EPL 출범 이후로 처음이었다.

(05/06 시즌 10년만에 챔스 예선 탈락에 대해) 어떤 선수들(=콩나물들)은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망가졌다. 나는 그들이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선수들은 탑 레벨이 아니었고 루니는 맨유가 전성기가 아닐 때 들어왔다. 어린 루니에 의존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부합되는 수준에서 경기를 하지도 않았고, UEFA컵 본선에 못나게 됐다. -루드 굴리트-
(맨유 소속으로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경기를 치뤘던 챔스 벤피카전) 호날두는 자신이 왜 프리미어 리그의 선수인지를 증명하려 했지만 좋지 못한 활약을 했고, 팀은 졌다. 당시 호날두가 패스를 꺼려했고. 이 때문에 하프 타임때 드레싱 룸에서 영감님께 헤어드라이어를 당함. 10대의 막내 호날두는 울기 시작했다고. 퍼거슨경 왈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독단적으로 플레이 하는 선수? 만약 계속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넌 절대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없어!" (이에 대해 리오 퍼디난드는) "호날두는 늘 배우고자 했어요, 이는 단지 감독님으로부터 나온 메시지가 아닌 전체 팀으로부터 나온 메시지였죠. 동료들 모두 그가 좀 더 배워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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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충격을 생생히 알 수 있다. 영감님의 우승에 길들어진 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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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표시가 리빌딩 세 시즌. 그리고 다음시즌 06/07 시즌 맨유는 리그우승을 했고, 07/08시즌엔 리그우승 챔스우승 '더블'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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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감독이 쉬운게 아닐텐데요 실제로 다음 감독들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퍼거슨은 결코 EPL 리그 3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과감한 리빌딩을 단행하며 찾아온 과도기 속에서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고 상위권을 유지하며 클럽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선수단을 확실하게 장악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휘력을 발휘하며 빛을 낸 퍼거슨이 있기에 가능했다.

라이벌 아르센 벵거 이끄는 아스날은 03/04시즌 프레스턴 노스엔드 FC 이후 114년만에 무패우승을 차지하고, 러시아 석유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31]에게 인수된 첼시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현질영입하고 FC 포르투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주제 무리뉴를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갑자기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맨유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맨유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었던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퍼거슨 감독은 무리뉴 감독에게 (그리고 벵거 감독에게) 번번히 발목을 잡히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퍼거슨은 결국 05/06 시즌에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희대의 꿀영입을 하게되는데, 향후 몇년간 확고한 주전으로 온갖 영광을 안겨다준 네마냐 비디치, 파트리스 에브라, 박지성, 에드윈 반 데사르 4명을 고작 2천6백만유로라는 초 헐값[32]에 영입했다.

이때부터 슬슬 부활의 조짐이 보이더니 06/07 시즌 리그 우승을 이끌며 부활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고, 07/08 시즌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앞세워 챔피언스리그와 EPL 우승의 더블을 이뤄내며 자신의 건재를 알렸다. 이날 결승전에서 선발출전한 선수 중에 1999년 트레블 당시 맨유에서 뛴 선수는 단 두 명, 폴 스콜스와 웨스 브라운 뿐이었다.

퍼거슨 감독이 9년 만에 완전히 다른 팀으로 또 한 번 맨유를 유럽 정상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08/09 시즌에도 좋은 기세를 이어가 시즌 중반까지는 쿼트러플을 노렸으나, 선수들의 체력 소모 등의 문제로 인하여 리그 우승과 칼링컵 우승,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달성했다. 이 우승으로 인해 라이벌 리버풀의 리그 우승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20년전 맨유 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현실로 이룬 셈이다.

09/10 시즌에는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등 '퍼거슨의 아이들'의 노쇠화와 함께 먹튀가 된 베르바토프의 부진, 무엇보다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이적 공백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칼링컵 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퍼거슨 감독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심장이 나빠지는 등 건강에 문제를 보였고, 10/11 시즌까지만 감독직을 수행하고 그 이후에는 은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기도 했다. 맨유의 데이비드 길 단장은 퍼거슨 감독이 후임자를 정하고 물러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일단 10/11시즌에도 계속 감독직을 수행했다. 그가 야심차게 영입한 치차리토가 대박을 터뜨리며 순항. 그러나 점점 무재배를 거두는 경우가 많아지고[33] 그러면서 잃는 승점이 늘어나며, 한번도 패를 기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패가 있는 첼시 FC, 아스날 FC, 맨체스터 시티와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웨인 루니이적 선언을 하면서 팀 분위기에 악영향이 미쳤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 한 팀에서 20년 넘게 감독직을 수행[34]하고 있고,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훅 날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팀을 꾸준히 상위권도 모자라 유럽최강의 반열을 지키고있는것을 보면 대단한 영감님이라고밖에 생각이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느새 1위를 꿰찼고, 팬들은 저 스쿼드 가지고 리그 무패 행진을 계속하는것만해도 정말 신기하다고 이야기. 혹자는 퍼거슨이 로드신공을 쓰는것 같다고 하기도 한다.현실에서 FM 로드신공 10/11시즌 25R까지 리그 31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퍼디난드의 부상에 의한 수비불안으로 25R 꼴찌팀 울브스에게 1-2 역전패하면서 무패 행진이 마감됐다. 첫 패배를 했음에도 2위 아스날이 뉴캐슬 극장의 희생양이 되면서 4-4로 비겨 아스날과의 승점 차이는 4점이 되었다. 26라운드에서 맨씨티를 2-1로 잡아내면서 여전히 순항중. 결국 10-11시즌 EPL 우승에 성공했다. 맨유는 이로서 리버풀의 최다 우승 기록을 갱신하였다. 퍼거슨 감독은 부임 당시의 약속, (헤이젤 참사로 리그 전체에 민폐를 끼친) 리버풀을 끌어내겠다는 것을 훌륭하게 지킨 셈이 되었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FM 로드신공의 한계를 보였고, 바르셀로나가 3-1로 이겼다.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능력에 의문을 가지는 자는 거의 없다. 현재 현지 언론등에서 뽑는 축구역사상 최고의 감독에 못해도 3위는 하고 있으며 향후 활약 여부에 따라 1위를 차지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야말로 현존 최고의 감독으로 구단주 글레이저 일가는 물론 팬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지지와 신임은 절대적이다. 현지 언론이 매달 뽑는 '경질가능성이 높은 감독' 예상도에서 항상 20위를 차지하곤 한다.[35] 경기 운영 및 선수 영입 등의 문제를 포함해 거의 전권을 가진 감독으로 정확히는 감독이라기 보단 매니저로 봐야한다는 말도 많다. 아마 프리미어 팀 감독 중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감독일 것이다.

11-12시즌 맨체스터 더비후. 퍼거슨은 경기에서 진 선수들에게 헤어드라이기 모드로 변신(...). 경기 종료 후 선수들에게 "빌어먹을 멍청이들아"를 부터 시작으로 갖은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누가 축구화는 안맞았으려나... 칼링컵 16강전인 3부리그 소속인 올더숏전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맨시티전 출전 선수를 한명도 안쓰는 배짱을 보여주었다. 결과는 3:0으로 맨유 승리. 11월 6일 선더랜드와 경기가 있던 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취임 25주년을 맞아 구단주로부터 올드 트래포드의 가장 큰 스탠드인 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로 명명하는것을 선물받았다. 스탠드가 개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것은 올드 트래포드의 101년 역사상 처음이다. 스탠드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경기장에 세워질 알렉스 퍼거슨 경의 동상도 만들었다. 12월 31일 퍼거슨 감독의 70번째 생일. 이럴때는 잔칫집 분위기가 제맛인데 그 반대로 생일빵을 맞았다. 블랙번에 2:3으로 역전패한 것이다. 리그 우승 가능성이 낮아 보였으나 2012년 들어 자신의 로드신공능력을 100% 발휘하며 맨체스터 시티를 제치고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대부분의 축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맨유의 상승세의 이유를 감독이라고 하고 동의했다.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막판에 팀이 삽질하고 반대로 맨시티가 연승행진을 달리면서 유력시되던 리그 우승이 멀어져가버렸고 기어코 36차전 막판 맨체스터 더비에서 맨시티전 2패를 당하면서 맨시티에게 다시 리그 1위를 빼앗겼다. 이제 38차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강등권 탈출을 위하여 퀸스파크 레인저스가 맨시티를 원정에서 이겨주고 맨유가 선더랜드를 이기면 우승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맨시티가 퀸스파크를 상대로 마지막에 삑살내나 싶더니 믿기지 않는 대역전극을 펼치며 맨유는 졸지에 이겼어도 2위를 해버리고 말았다...
모든걸 말해주는 이후 맨유 벤치상황

2012-13 시즌에는 아스날 주장까지 한 맨유유스(?)카가와 신지 등을 영입했으나 부실하다고 평가받던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는 별 손을 대지 않아 우승은 힘들지 않을까...했으나 그냥 무난하게 시즌 초반부터 독주하며 34라운드 아스톤 빌라전에서 우승을 확정. 맨유의 20번째 리그 우승이자 알렉스 퍼거슨 감독 개인적으로는 맨유에서의 13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참고로 퍼거슨의 13번 리그 우승은 3위인 아스날의 통산 우승횟수와 같은 수치.

다음 시즌 초반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 이유는 엉덩이 수술 때문으로 그리 심한것은 아니라하고 병명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일부 팬들 반응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팬들은 올드 트래포드에 도넛방석을 보내자며 쾌유를 빌고있고 경기중에 빡쳐서 일어나는게 아니었구나(?)라며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다 카더라...사실은 고관절일거라는 의견도 많다. 실제로 과거 몇 년간의 영상을 보면 걸음이 불편한 몇몇 장면이 보이긴 한다. 그래도 시즌 투어까지 다 소화하고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한다.

6.3.4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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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5월 7일) 퍼거슨의 은퇴 계획이 알려진 날. 팀 스태프와 선수들이 함께 골프를 치러갔다. 게임을 마치고 라운지로 올라갔더니, 따로 나뒀던 모두의 휴대전화가 테이블 위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스콜스, 캐릭, 긱스가 올려둔 휴대전화가 동시에 울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퍼거슨경의 은퇴 계획이 알려진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데이비드 길 사장은 당시 골프를 치던 중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라면서 말이다. 퍼거슨경은 다음 날 아침에야 나타나서는 '나 은퇴해'라고 말했다. 그제야 확실해졌다. 퍼거슨경은 아침 7시에 나를 비롯해 마이크 펠란 수석코치, 르네 뮬레스틴 1군 코치를 자신의 사무실로 호출했다. 정말 감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다른 스태프에게도 은퇴 계획을 밝혔다. 이후로는 선수들에게도 알렸고 말이다.

● (퍼거슨이 은퇴한 12/13 시즌에 리그 우승을 확정 한 뒤) 기념 버스 퍼레이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퍼거슨경이 트레블을 달성했을 때보다 더 대단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공사를 위해 설치한 비계에까지 매달려 있었다. -에릭 스틸 (당시 맨유 골키퍼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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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8일, 한국시각으로 이른 아침부터 현지에서 은퇴기사가 일제히 보도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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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십수년전부터 은퇴기사가 연례행사처럼 떴었기에 지나가는 소문으로 보는 팬들도 있는 한편 분위기가 심상치않다며 걱정하는 팬들도 있다. BBC빼고 어지간한 매체에서는 다 이 주장을 보도하는 상태. 구단측에서는 현지에서 오전 10시쯤에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2~2013시즌을 끝으로 맨유 감독에서 은퇴함을 공식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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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헤어드라이어 드립날리며 케이크를 선물한 더 선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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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의 EPL 우승 리그컵을 들어올리며, 은퇴식을 거행했다)


(▲은퇴식에서 팬들에게 전하는 퍼거슨의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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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 2012/13(은퇴) 시즌,이적료 지출 순위)
추가적으로 총 수익 대비 스펜딩을 감안하면, 긴축재정 퍼거슨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이기간동안 리그우승 못해본 팀은 리버풀과 토트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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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 출범 후, 퍼거슨의 맨유는 3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이것으로 맨유 감독으로서 13번의 리그 우승, 2번의 챔스 우승을 포함한 27년간의 화려한 장기집권이 마무리되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그 끝은 창대하였다.

7 퍼거슨 리더십

● 퍼거슨은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거기서 더 분발할 수 있다.

● 퍼거슨은 편안하고 여유있는 사람이고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2명이 공을 쫓아다니고 8명이 공을 돌리는 식의 몸풀기 게임에도 참가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축구 외에도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곤 했다. 훈련은 힘들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전력을 쏟아야 하는 것인게 맞다. 그러나 훈련 분위기는 항상 즐거웠는데, 이는 그가 선수들이 분위기에 눌려있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보이면 족했다.퍼거슨은 보수적인 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경기 중에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장 위에서 누굴 상대할 지에 대한 자유를 부여했고, 진심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운 방식으로 움직이길 바랬다.
● 우리가 3:0으로 앞설지라도 퍼거슨은 그 안에서 고쳐야 할 점을 찾아냈고 이는 그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그가 원하는 대로 우리의 태도, 정신력, 재능, 기술 등을 개발시키길 원했다.
● 그는 우리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항상 지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믿었고, 그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게리 네빌-

반할은 변함없이 딱딱한 성격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강하다. 안첼로티는 퍼거슨 같이 좀 더 자유롭다 -치차리토-
(12/13시즌 30골을 넣었지만, 10경기 정도 무득점 했던 시기에 대해)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퍼거슨 감독님이 드디어 나한테도 헤어드라이기를 시전하실 때가 온건가!' 하지만 그는 '괜찮다 로빈, 넌 골을 넣을거야. 만약 득점하지 못하더라도 넌 항상 팀을 돕고 있단다'라고 저를 독려했습니다. 맨유는 12/13시즌 26라운드에서 결국 역전 우승을 이뤄냈어요.(최종결과, 2위팀과 11점차 우승) 정신적인 동기부여의 힘이 팀에 끼친 영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퍼거슨경은 언제나 선수들이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때때로 그는 말합니다. "얘들아, 내가 어디부터 시작해야겠니? 지루하다고! 내 생각 좀 해주렴, 얘들아. 72살이나 나이를 먹은 내가 이런 경기를 보고만 있어야하니? 나를 좀 재밌게 해주길 바란다. 40미터 이상 패스를 시도하라고. 실패해도 상관없으니까 드리블도 해보렴. 막 두근거리고 싶다고. 나를 좀 흥분시켜줘. 경기를 더 빠르게 더! 더! 제발!" 퍼거슨경은 천재였습니다. -로빈 반 페르시-

맨유 유스 출신 라이언 맥코넬에 의하면 퍼거슨은 "모두 함께하고 소통하는" 맨유 문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반할체제에서 팀 분위기가 급격히 나빠졌어요. 주된 이유는 소통이에요. 반할 체제에서 맨유 유스팀은 1군 선수를 만나는 것 조차 어려웠습니다. 모든 것이 단절됐고 분리됐어요. 가족같은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죠. 퍼거슨체제에서는 맨유 유스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모두가 함께하고 소통했어요. 당시 1군 선수들도 우리에게 다가와 안부를 묻기도 했었습니다. 반면, 반할은 근엄한 행동만을 요구할 뿐이었어요. - 맨유 유스출신 라이언 맥코넬-

7.1 포용력

퍼거슨은 편견이 없이 선수들을 감싸는 포용력이 있었다. 몇몇 선수들이 사고를 쳐도 그 사고를 치는 것만으로 선수를 평가하지 않는다.

베컴은 어린시절부터 퍼거슨을 존경했고 아버지처럼 믿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 그에 따르면 퍼거슨은 선수들과 농담도 잘하고 경기에 승리하면 입이 귀에 닿을 정도로 큰웃음도 짓는 등 선수들과 가까이 하면서도 요령껏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오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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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네빌과 나는 오랫동안 퍼거슨 감독 밑에서 축구를 해왔기 때문에 그가 선수들을 기용하는 교묘한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퍼거슨 감독은 주전에서 제외할 선수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잘해 주었다. 영감님께 사랑받으면 불안해지는거야 그래서 우리는 이제 퍼거슨 감독의 태도만 가지고도 경기 출전 여부를 알았고, 그것 가지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이를테면 그주에 감독이 유난히 신경을 써주면.. "개리, 감독이 무척 신경 써주는데, 이번 경기는 분명히 못 나갈것 같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 -데이비드 베컴-
퍼거슨 감독은 내가 할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선을 확실하게 정해준다. 꼭 우리 엄마 아빠같다. -호날두-
내가 퍼거슨 감독을 처음으로 본 건 내가 13세 때 14세 이하 경기를 뛰고 있을 때다. 경기 후 퍼거슨 감독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했다. 꼬마야.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면 나중에 큰 선수가 될 수 있을거야' 나에게 그 말은 엄청난 말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그렇게 유소년 선수들이 뛰는 곳에 자주 나타나 그들을 격려해주곤 했다. - 맨유 유스출신 웨스 브라운-

퍼거슨 감독은 그의 제자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심지어 그가 내보내야 했던 선수들도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한번은 그가 다음 시즌에도 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던 어린 선수가 있었다. 그는 슬프게도 맨유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퍼거슨은 말했다. '내가 다른 클럽을 구해주겠다.' 10분 동안 그는 전화를 몇 번 걸더니 그 선수의 계약을 따냈다. 그가 그 선수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 선수의 다음 팀이 결정된 것이다.

● (FA 유스 규정에 대해) 프레이저 캠벨, 키에런 리차드슨, 필립 바슬리, 라이언 쇼크로스 등 EPL에서 활약하는 맨유 유스 출신은 상당수지만, 맨유 눈높이에 맞는 선수들은 아니었다. 빛을 본 선수는 이들보다 훨씬 선배인 대런 플레쳐 이후 조니 에반스, 최근엔 대니 웰벡, 톰 클레버리 정도다. FA의 유스 규정은 최악이었다. '90분 룰(90-minute rule)'은 유스 시스템을 옭아맸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찾기란 어려웠다.

※‘90분 룰’이란 각 클럽 유스 아카데미에서 1시간 30분 이내에 거주하고 있는 유스 선수들과만 계약할 수 있다는 조항. 이 룰로 인해 프리미어리그 클럽들은 유망주 영입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이 규정은 많은 클럽들로부터 반발을 샀고, 결국 2011년경 폐지되면서 종전의 유스 계약 방식으로 회귀했다. 출처

또 한번은 레딩의 호텔에서 게리 네빌은 퍼거슨이 몇 명의 선수들과 맨유의 유스 팀에 있다가 지금은 다른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쭉 적어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 명단은 굉장히 길었는데 무려 60명에 달했다. 퍼거슨은 이들을 모두 기억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어린 선수들을 퍼스트 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비록 맨유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 선수들이 축구 선수로서 성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퍼거슨의 아래에서 맨유 선수로 뛰고 나면 클럽을 떠나게 되더라도 맨유 선수로 남게 되는 것이다.

7.1.1 칸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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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MLS 뉴욕 코스모스의 구단주로 재임하고 있는 에릭 칸토나는 그간 이곳저곳에서 말썽을 일으켰던 트러블메이커였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감당할 수 있는 구단이 없었다. 충성심은 애초에 바랄 수도 없었다. 마르세유와 계약 시, 칸토나는 베르나르 타피 회장(국회의원)에게 대들었으며, 후에 이렇게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토나가 제어가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프랑스 내에서 원하는 클럽은 없었다. 전력 증대가 급했던 리즈 유나이티드는 칸토나를 영입했고, 칸토나는 팀에 18년 만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또다시 리즈의 감독이었던 하워드 윌킨스와의 불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 윌킨스는 칸토나를 120만 파운드에 시원하게 넘겼다.

칸토나는 ‘프랑스 축구계의 앙팡테리블’이라고 불리던 존재였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골에 대한 집중력, 공간 창출 능력을 겸비한 공격수였지만 프랑스 대표팀 감독의 전술을 공개석상에서 비난하거나 심판에게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팀 훈련 외에도 개인 훈련을 거르지 않는 성실파였는데, 수위가 워낙 혹독한 게 아니었다. 그의 장기는 절묘한 볼 컨트롤과 페인팅, 그리고 페널티 박스외곽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중거리포였다. 칸토나는 출중한 기량으로 찬사를 많이 받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벌이며 신문 기사 1면에 단골로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사고들 가운데 가장 큰 대형 사고는 1995년 1월에 터졌다. 크리스털 팰리스와의 경기 도중 상대 선수를 향해 킥을 날린 칸토나는 퇴장 명령을 받아 필드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가는 도중, 상대 서포터로부터 심한 야유를 들은 칸토나는 관중석으로 돌진해 쿵푸를 연상하게 하는 이단 옆차기를 날리는 놀라운 행동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칸토나는 2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고, 결국 ‘쿵푸의 제왕’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과 함께, 9개월간의 출장 정지와 120시간의 봉사 시간을 채워야했다. 당시 모두가 그를 비난했고, 필드를 평생 밟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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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토나가 있으면 우승했고 칸토나가 없으면 눈 앞에서 트로피를 놓쳤던 맨유)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칸토나의 편에 서있었다. 바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었다. 퍼거슨, 팬들의 지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던 칸토나가 달라졌다. 이 시기쯤 유나이티드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징계 기간 동안 인터 밀란의 러브콜에 칸토나가 해준 말이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였다. 1995-96 시즌, 9개월간 필드를 떠나있었던 칸토나가 합류했다. 당시 유나이티드에는 팀의 주축이었던 폴 인스가 팀을 떠났고, 주전이었던 마크 휴즈와 칸첼스키스도 타팀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퍼거슨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라이언 긱스와 네빌 형제, 폴 스콜스, 니키 버트, 베컴 등의 유망주를 기용했을 때였다. 재능은 뛰어나나 어린 선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필요했고, 칸토나가 적임자였다. 승부역과 근성, 특유의 카리스마로 상대를 압도하고 동료들을 이끌었다. 슈마이켈과 로이킨도 칸토나의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결국 칸토나는 퍼거슨의 아이들과 함께 1996-97 시즌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로이 킨 자서전에서 칸토나에 대해) 1995년 어느 날 아침, 주장인 스티브 브루스가 15,000파운드짜리 수표를 들고 드레싱룸에 나타났다. 맨유 퍼스트팀 선수들이 축구 비디오에 다 같이 출연했는데, 이게 그 출연료였고 이 돈은 18명이 나눠 가져야만 하는 돈이었다. 똑같이 나눌지 출연 비중으로 각자 나줄지. 대체 어떤 방법으로 18명이서 이 돈을 나눠 가질지에 대해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다수결 투표 끝에 Winner takes all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로 결론이 났다. 물론 여기에 응하기 싫은 사람도 선택권을 줬는데, 800파운드(약 150만원)를 자기 몫으로 챙기고 내기에서 빠질 수 있었다. 당시 800파운드라는 돈은 어린 선수들(베컴, 게리 네빌, 필립 네빌 등)에게는 월급의 반에 해당되는 엄청 큰 돈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내기 대신 800파운드를 선택했다. 어린 선수들 중에는 오직 폴 스콜스와 니키 버트. 이 두 사람만이 내기에 참가해 잿팟을 노려보기로 결정했다. 12,000파운드, 과연 이 돈은 누구에게로 갈 것인가. 마침내 내기에 참가한 각 선수들의 이름이 적혀있던 쪽지를 모자에 넣어 섞고 그 중 하나를 뽑았을 때, 모자 속에서 나온 쪽지에는 칸토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승자 칸토나는 그 12,000파운드 수표를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칸토나는 수표 두 장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거기에는 폴 스콜스와 니키 버트, 이 두 선수들의 이름이 각각 적혀져 있었다. 칸토나가 말하길 "이 돈은 자칫하면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위험한 내기에 용기내어 참가한 두 어린 선수들에게 내가 주는 상이다" 이게 바로 진짜 칸토나의 모습이다. 무슨 행동을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특별한 클래스가 있으며 그 자신보다 훨씬 더 간절히 그 돈이 필요할 두 어린 선수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

칸토나가 맨유에 있던 기간 동안, 그가 없던 시즌은 정말 너무도 아쉽게 승점 1점차로 트로피를 눈 앞에서 놓쳤다. 올드 트래포드의 팬들은 칸토나가 있고 없고가 얼마나 다른지 경험 했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을 온몸으로 느꼈기에, 그를 더 사랑할 수 밖에 없고 추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컴도 말하길 FA컵 우승을 하고 다함께 축하파티를 했는데, 베컴 아버지가 칸토나랑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칸토나와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우리 아버지가 바로 저 순간을 위해서 자신을 그렇게 미친듯이 연습시켜서 맨유 선수를 만든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칸토나는 정상에서 떠났다. 1997년 5월 11일 웨스트햄과의 경기가 칸토나의 은퇴 경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이가 많았거나,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당시 만 31세에 불과했다. 단지 그는 정상에서 멈추고 싶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은퇴에 대해) “나는 팬들이 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노랫소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일 그 소리가 멈출까봐 두려웠다.” -에릭 칸토나-
(칸토나 은퇴시 퍼거슨이 쓴 편지) 우리가 마지막 대화를 나눈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네. 그리고 난 늘 내가 너에 대해 품고 있는 존경의 표시로 이 편지를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우리가 훈련을 다시 시작했을때, 난 다시 너의 몸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다려왔어. 그런데 그건 단지 나의 희망이었고 현실이 아니었지. 우리가 Mottram에서 만났을때, 난 너의 눈의 눈을 보고 알 수가 있었어. 맨유에서의 너의 시간이 끝났음을 말이야. 그래도, 난 여전히 네가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너의 아버지와 나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해,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말이지. 한가지 네게 바라는 건 늘 활동적이고 몸 상태를 최고로 유지해야한다는 사실이야. 나는 내가 32살의 나이에 스털링샤이어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어. 그땐 난 늘 훈련과 선수에 대한 코치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 나 자신의 몸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말이야. 그리고 6년 후, 어떤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을때, 난 다시 나의 예전의 몸상태를 되찾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어. 끔찍한 시간이었지. 그러니까 너도 너의 몸 상태를 늘 최고조로 유지시켜야 할거야. 난 당연히 네가 우리의 매 경기 결과들을 지켜볼 것이라는 걸 확신해. 그리고 너를 대체하기 위한 선수로 쉐링햄을 데리고 온 것 또한 알거야. 우리가 꽤 잘하고 있다는 거 알 수가 있겠지? 그런데 테디 셰링엄 (전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코치)은 그가 토트넘에서 뛰었던 자리를 찾는데 힘겨워하고 있고, 가끔 너무 깊숙한 위치에서 뛰려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우린 뭔가 수정을 가해야할 것 같아. 새로운 선수들은 가끔 우리의 레벨에서 뛰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해. 매경기가 마치 대회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들과도 같잖아. 그래서 난 테디 셰링엄이 우리 팀을 위해 해내길 기대하고 있어. 난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시즌 말에 고민했던 거 있잖아. 맨유에겐 분명 탑클래스의 공격수가 필요하고 그러한 공격수의 부재는 분명 문제로 남을거라고. 맨유의 재정 규제가 앞으로도 늘 우리가 최고의 선수를 OT에 데리고 오는데에 있어 늘 걸림돌이 될거니까. 바로 그 급여 체계때문에. 그런데 생각해보면 또 웃긴거지. 왜냐하면 네가 바로 그 탑클래스의 선수인데. 그럼 너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또 다른 선수를 사야한다고 말하는 게 되니까. 내가 만약 젊었다면, 분명 좀 다르게 바라봤을 수도 있어. 어찌됐든, 난 팀을 짊어 지고 나아가야하고. 어떠한 마음의 장벽도 담아두지 않을거야. 그리고 난 항상 내 선수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계속 그러길 희망해. 그리고 늘 어린 칸토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야. 정말 꿈같은 일이 되겠지! 편지를 마치면서, 앞으로도 우리가 담소도 나누고, 한잔도 하고, 아님 뭐 식사라도 하고..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고 싶어. 안그래도 클럽이 다가오는 만찬에 널 초대했다는 얘길 들었어. 난 그 날 만남에 대해 네가 이것저것 신경을 써줬음 싶어. 근데 뭐, 그런것보다 여전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맨유에게 얼마나 훌륭한 선수였고. 그리고 선수로써 네가 나를 위해 행했던 모든 노고에 대해 얼마나 감사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거야. 네가 그냥 차 한잔을 하러 오든, 성대한 행사같은 거 말고 그냥 친구로 대화를 하러오든, 넌 언제든지 OT에서 환영 받을거야. 사실 그러한 단순한 것들이 내겐 가장 의미깊은 일이 될거고. 에릭, 넌 네가 날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날 찾을 수 있어.그리고 이젠 넌 더 이상 나의 선수가 아니지만, 너에게 소중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7.1.2 웨인 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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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동 루니 시절) 이랬던 루니가 이젠 계륵이 됐다. 세월의 무상함
과거 '퇴장머신'이라고 불리던 악동 루니. 루니의 잦은 성질 폭발에 화가 난 퍼거슨은 당근과 채찍을 내리며 공을 들였고, 결국 루니는 퍼거슨의 의도대로 맨유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잡아 팀을 이끄는 기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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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님 루니 쓰담쓰담) 출처

(루니 이적설 있었을 때) 오늘 루니가 좀 주위를 둘러보길 바랍니다.여기말고는 갈곳이 없다는걸 깨달았으면 좋겠군요 여기 말고는 갈곳이 없어요. 유럽의 다른 클럽으로 떠난 선수들을 본적이 있죠. 그리고 그들은 항상 모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돌아오고 싶어 하더군요. -게리 네빌- 출처

7.1.3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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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날두는 스포트링에서의 같은 번호인 28번을 원했지만, 퍼거슨에게 받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7번은 그로서는 큰 부담감이었다

2003~2004시즌 리그 29경기 4골 / 맨유 EPL 3위

2004~2005시즌 33경기 5골 / 맨유 EPL 3위
2005~2006시즌 33경기 9골 / 맨유 EPL 2위 (초기 스탯)

호날두는 프리미어리그의 특유의 거친무대에서 다소 고전하는모습을 면치못하면서 언론은 퍼거슨에게 오류였다고 보도를 쏟아낸다. 하지만 퍼거슨은 언론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호날두는 세계최고가 될테니 지켜봐달라. 그는 잠재력이 있는 선수이며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것을 증명할것이다" 이렇듯 퍼거슨은 호날두에게 무한한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며 언젠가는 최고가 될 것임을 자부했다.

호날두가 선수생활 최대 위기를 맞았을 때 끝까지 그의 옆에 있었던 것도 퍼거슨 감독이었다. 그는 2006 독일월드컵 당시 루니 퇴장 때에 심판에게 가서 열심히?! 루니의 퇴장을 유도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 언론과 국민들의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홈에서도 관중의 야유가 쏟아졌다. 거기다 그는 이전부터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 수준의 시뮬레이션 액션 메이커, 일명 'Diver'라고 불리며 맨유를 제외한 타팀의 수많은 팬들에게 집중포화를 받고 있었던 상황이어서, 그는 순간적으로 돌출발언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뛰기 힘들다. 맨체스터를 떠나야 할 것 같다.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는데 (잉글랜드 팬들과 언론이) 나에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2, 3일 안에 어디로 떠날지 결정하겠다" 엄마 당분간 잉글랜드에 오지마세요.
이에 퍼거슨 왈 "잔말 말고 공이나 차라. 공을 차다 보면 가만 있을 때 나던 온갖 생각이 다 사그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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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윙크를 다트판으로 만든 더 선(The Sun) 클래스;;)

그때 호날두를 감싸고 나선 이가 퍼거슨 감독이었다. 퍼거슨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루니의 퇴장은 호날두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잉글랜드 팬들의 홀대를 감수하며 호날두는 “맨유는 항상 나를 지지했고 나를 위해 존재했다”면서 “나는 맨유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퍼거슨 감독에게서 어릴 때 받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호날두는 맨유에 잔류했고, 퀘이로스 코치의 말마따나 훈련 종료 후에도 한두시간 더 개인기연습을 하는 열성을 보인 끝에 현재 최고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출처5 출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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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기타임. 각도까지 제대로 배운 애제자)

퍼거슨은 호날두를 얼마나 데리고 있을지 퀘이로스 코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퀘이로치 코치는 '알렉스, 당신이 쟤한테서 5년간 뽕을 뽑는다면, 대박입니다. 포르투갈 선수들이 타국(예외: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같은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으로 17살에 진출해서 5년동안 머물렀던 전례가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영감님은 회고하건데 상당히 괜찮은 결과물이었다고 평했다.

퍼거슨은 내게 정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정말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엄청 자주 대화해요. 서로 문자도 보내구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대해 얘기해요. 예를들어 최근에 UEFA 수퍼컵에서 우승했을때 퍼거슨이 제게 'Man of the Match'를 시상했죠. 리스본에서 챔스 우승을 했을땐 내가 도핑테스트를 받으러 갈때 그가 동행했어요.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고 친한 친구예요. 함께 한 모든 감독님들 중 우정을 나눈 사람은 퍼거슨이 유일해요. 페예그리니와 함께 일하는것을 좋아했고 안첼로티와도 좋은 관계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관계를 맺고 주기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은 퍼거슨 뿐이에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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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리빌딩

퍼거슨은 클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맨유라는 클럽은 항상 감독이 가장 중요한 인물인 곳이라는 신념을 항상 유지해왔다.

● 내가 더이상 맨유의 억만장자 축구선수들을 통제할 수 없으면, 난 끝난 목숨이다. 그래서 난 절대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 (리빌딩에 대해) 열심히 뛰었던 선수를 내보내는게 나에겐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증거는 필드에 있다. 선수기량이 저하되고 있는걸 본다면, 2년 뒤에 어떨지도 생각해봐야한다.
● 축구 매니지먼트는 결국 선수에 관한 모든 일이다. 감독은 내가 선수들보다 잘 뛸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선수들도 내가 감독하면 더 잘하겠다고 생각한다.

(리빌딩 때문에 퍼거슨이 반니를 쫓겨내듯 이적시켜 버린 것에 대해) 퍼거슨이 새로운 팀을 리빌딩 하고 있을 때, 그는 기꺼이 그와 같은 일을 하죠. 그에겐 팀이 최우선이에요. 그는 항상 그 말을 했고 그가 제일 많이 반복한 말이죠. 그가 한 일은 충분히 납득할 만 했어요. 저도 받아들였구요. 저는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 그곳에서 훌륭한 4년을 보냈고, 그도 그의 클럽을 더 성장시켰죠. 유나이티드에 대한 내 종합적인 느낌은 이거에요. 그곳에서 훌륭한 5년을 보냈고, 감독님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오늘(퍼거슨경 동상 오픈 행사) 돌아오길 원했다는 거죠. 그가 제게 줬던 기회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거든요. 물론 결별할 때의 방식에 대한 감정들이 있지만, 그는 선수들에게서 최고를 이끌어 내는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마찬가지 일을 했구요. -뤼트 판 니스텔로이-

퍼거슨 감독은 선수들을 다룰 때 어느 정도 관용의 모습을 보인다. 한번씩 선수들끼리 펍에 가서 술을 마셔도, 나이트클럽에 가서 놀더라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한번씩 팀플레이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두세번의 질책 이외의 별다른 반응이 없다. 어쩌다 그런 플레이가 비난받을 때면 한번씩 앞장서서 선수의 플레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준다. 어쩌다 경쟁에서 밀려서 팀을 떠나게 되더라도 그는 최대한 곱게 보내주는 쪽을 택한다.

(루니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게리 네빌은 벤치에 있을때 마치 감독처럼 행동했다고. 경기의 진행 양상과 상대팀의 전술도 공부했다고 한다. 한번은 재미로 퍼거슨 모르게 유스 선수를 웜업하라고 터치라인에 내보내기도 했다고.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버지같이 인자했던 퍼거슨 영감도 선수단의 위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터질 때 만큼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7.2.1 로이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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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가 MUTV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팀원들을 디스했던 로이 킨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아스톤 빌라 FC 수석코치). 아무리 주장이었지만 특정선수들에게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대놓고 X을 하는 데 있어서 이는 감독의 위치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겼고, 결국 키노게이트가 터진 지 일주일만에 킨은 맨유와의 계약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 (유벤투스전 경기를 보고) 그 날 로이 킨의 경기력은 내가 지금까지 본, 한 선수로부터 나온 가장 강인하고 인상적인 플레이였다. 그는 마치 '경기에서 지느니 탈진해서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한 선수처럼 경기장의 모든 잔디를 밟고 다녔고, 바로 그의 그런 모습이 우리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줬다. 그런 선수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로이 킨은 1인 엔진룸이며, 다른 선수들 2명이 할일을 혼자서 하는데다, 경기가 가라앉았을때 그는 혼자서 스타디움의 관중을 기립시키는 선수다. 내가 지도한 최고의 선수.
로이 킨은 내가 EPL에서 겪어본 미드필더 중에서 가장 터프했다. 우린 서로 자주 투닥거렸지만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수로 남아있다. 로이 킨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싸울 줄을 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그는 승리자로 남아있다. -파트리크 비에이라-

로이 킨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짬밥이 커지면서 점점 락커룸의 실권을 장악하려했고. 그날 그의 기분에 따라 락커룸의 분위기가 좌지우지되었다고 한다. 결국 키노게이트[36]가 터진 것. 키노게이트 후, 케링턴에 모여있는 선수들은 로이 킨을 보고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듯, "헤이," "와썹" 이러면서 몸을 풀었고, 일부러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걸 보곤 로이 킨이 드디어 폭발. "니들도 남자들이믄 나한테 화났을꺼 아냐, 그럼 나한테 한놈이라도 먼저 와서 말을 하든가, 여태 가만히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고 있냐! 뭐라고 말들을 좀 해봐!"
이때 퍼거슨이 나타나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로이킨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은 합의 후에 전 선수단이 모인 자리에서 MUTV 비디오 인터뷰 테이프를 틀었고, 킨은 팔짱을 낀채 그 자리에 산 처럼 서서 '함께' 비디오를 지켜봄. 퍼거슨은 주장으로써 팀의 사기를 저하 시켰으니 사과하라고 했고, 이에 킨은 "나는 사과할 게 없다, 승리의 의지를 잃고 자신과 팀메이트들을 실망시킨 선수들은 스스로에게 사과해라"라고 대꾸. 퍼거슨은 약 15일 동안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고 고심 끝에 로이 킨을 팀에서 떠나보낸다.

● 맨유를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축구에 대한 사랑을 잃었다. -로이 킨-


▲ 맨유를 떠난 로이 킨을 영입한 셀틱 F.C.의 감독은 퍼거슨의 제자인 고든 스트라칸이었다. [37] 후에 로이 킨선덜랜드 AFC감독으로 부임하자 영감님은 맨유산 선수들을 보내주기도 한다.

7.2.2 야프 스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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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발표하며 팀원들을 디스했던 야프 스탐 (현 레딩 FC 감독)도 있다. 수비진의 핵이었던 스탐은 1999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UEFA 챔피언스리그,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3관왕’에 오르는 등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2001년 ‘자서전 파문’으로 인해 세리에 A 라치오로 쫓겨나듯 이적했다. [38][39] 스탐은 집을 고치며 맨유 생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이적에 힘들었다고. [40] 당시 스탐의 아킬레스건 부상도 이적에 영향을 끼쳤다. 첫 두 시즌에 51경기씩을 소화하다 바로 다음 시즌인 2000-2001시즌에 평시즌의 절반도 못 미치는 23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다. 이적 시즌인 2001-2002시즌엔 2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하며 퍼거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스탐) 지도를 하다보면 왜 감독이 어떤 특정 시기에 확고한 결정을 내리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령 선수가 부상을 달고 있으면 수개월 정도는 경기에 나설 수 없죠. 그리고 선수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의 기량을 찾을 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선수는 거절하기 힘든 또 다른 클럽의 제안에 받아들일지도 모르죠.

● (레딩의 공식 웹사이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선수 시절 함께 일했던 감독들 중 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 알렉스 경은 이미 세계적으로 축구계에서 이름을 떨친 분이죠. 제가 맨유에 합류한 1998시즌이에요. 하지만 그는 감독으로서도 계속 성장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일하면 감독으로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죠. -야프 스탐-

어렸을 때 부터 맨유 팬이었던 야프 스탐은 선수 은퇴한 지금도 맨유 경기를 즐겨본다. 맨유에서 스카우트직으로 일한 적 있으며, 16/17시즌에 레딩 FC 감독으로 부임함으로써 임시직 혹은 영구직으로 프로 구단에서 감독직 자리를 얻은 알렉스 퍼거슨의 여러 선수진들 중 '31번째 선수'가 되었다. 언젠가 맨유 감독이 되는 게 그의 꿈이라고 한다.

7.2.3 폴 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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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 감독 배짱은 정말 대단하다. 초창기 시절에는 맨유의 레전드 중 한명인 폴 인스 (전 블랙풀 FC 감독)가 자신이 출전에서 밀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퍼거슨 감독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폴 인스는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한편 팬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폴 인스의 이적 때문에 팬들이 퍼거슨을 비난했는데도 그는 폴 인스가 총으로 협박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당시 서포터스 협회가 ‘폴 인스 되찾기 캠페인’까지 벌였으나 퍼거슨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포터스들을 차분하게 설득, 그의 뜻을 받아들이게 했다. 후에 맨유의 다른 레전드 스티브 브루스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폴 인스를 비판하며 이 사실을 폭로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퍼거슨 은퇴를 듣고 완전 충격받았다. 그가 이루어낸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당신은 그와 같은 사람은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다. 2주전까지만 해도 2년 더 감독직을 맡을거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의 은퇴발표는 정말 엄청난 충격이다. 그의 기준은 매우 높았다. 그는 많은것을 요구했다. 우리 사이는 부침이 많긴했지만, 그는 날 아들처럼 대해줬다. -폴 인스-

7.2.4 뤼트 판 니스텔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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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니 (PSV 아인트호벤 유소년 팀 감독)가 출장시간에 불만을 가지고, 더욱이 칼링컵 결승전에서 벤치에조차 앉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는 더없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반니의 반응은 훈련에 불참하고 감독의 허락 없이 경기장을 이탈하는 등의 것이었으며 퍼거슨은 이 득점머신의 분위기 흐리는 모습을 더는 지켜보지 못했다. 도화선은 2006 칼링컵 결승전. 선발에서 제외되자 반니는 퍼거슨에게 X을 했다.

You XXXX. 반니가 말했다. 난 항상 그것을 기억할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퀘이로즈 코치가 그에게로 달려들었고 덕아웃은 다루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다른 선수들은 그에게 '얌전히 굴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끝이었다. 나는 절대 그를 (예전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 사건 후, 그의 행동은 점점 더 악화됐다.

퍼거슨에 따르면 반니는 맨유가 호날두, 루니 같은 어린 선수들을 데리고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출처 그리고 2년만에 퍼거슨은 그 어린애들 데리고 우승 2010년, 반니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했고,이를 사과하기 위해 퍼거슨에게 연락을 했다고. 이후 올드 트래포드 퍼거슨 동상 오픈행사에도 참석하는 등 화기애애.

2001-2006, 219경기, 150골을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 밑에서 달성했어. 유니크한 특권이었어 -뤼트 판 니스텔로이-

7.2.5 데이비드 베컴

그 어떤 선수도 퍼거슨에게 대체불가능한 선수는 없다. 그건 '퍼거슨의 아이들'로 유명했던 애제자 베컴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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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열흘 먼저 은퇴를 발표한 퍼거슨 감독과의 첫 사진을 찾은 베컴. "지금 방금 이걸 찾았다. 참으로 오래 전 사진...믿을 수 없이 뿌듯한 날이었다")

퍼거슨은 테드(베컴의 아버지), 그리고 산드라(베컴의 어머니)와의 전화를 통해 베컴의 맨유행을 꾸준히 권했다. 베컴이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런던에서 맨유 경기가 있었을 때는 경기 전에 베컴을 드레싱룸으로 초대까지 했다. 베컴의 아버지는 맨유의 팬이었고 특히 보비 찰튼을 좋아했다. 베컴의 미들네임이 로버트 조셉인데, 로버트는 보비 찰튼 조셉은 조부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조부는 토트넘팬이셨다고.

● 토트넘의 초대로 테리 베너블스(당시 토트넘 감독)를 만나러 갔었지만, 그 사람은 베컴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테이블에 발을 올려둔 상태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고, 계약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퍼거슨과는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퍼거슨을 만나기 위해 맨체스터로 갔을 때, 그는 이미 베컴에 대한 모든 서류를 가지고 있었고, 그 날이 베컴의 생일이라고 케이크까지 준비해뒀었습니다. 우리가 감독 자신과 맨유에게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대했었죠. 열정이 넘쳤고, 우리에겐 미래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준 일이었습니다. 계약에 대해서는 두 번 생각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토트넘에게 베컴은 그냥 서류상의 숫자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맨유에게는 한 명의 사람이었지요. - 테드(베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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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거슨영감의 아버지 모드 우쭈쭈쭈 우리 아이)

● 베컴의 재능은 신이 주신 재능이다. 베컴은 영국 최고의 슈퍼스타이다

● (은퇴 경기 앞 둔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베컴은 놀라운 선수였다. 자신을 재창조하는 능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어느날 베컴은 휴가를 떠났는데, 퍼거슨이 전화와서 자기가 달던 등번호 10번을 뺏았고. 즉시 열받아서(?) 영감님한테 여러번 전화를 때렸는데도 안받고 해서 마음이 상해 있었다고. 당시에도 맨유의 등번호 10번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시무룩해서 다시 팀에 돌아갔는데...영감님이 갑자기 "7번 달아라" 그 때 베컴은 너무 기뻤고 영광스러웠다고한다....맨유 7번은 에이스를 의미하기 때문
그 당시 칸토나가 은퇴하고 난후 7번이 비워져 있었고...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베컴에게 7번이 어울린다고 영감님이 생각했던 것. [41]


(▲ 베컴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하프라인 골)

이렇게 예뻐하던 베컴도 퍼거슨의 통제력을 벗어난 순간 맨유를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가정적인 남자였던 베컴은 빅토리아와 아들 브루클린 등 가족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컴은 이것을 보통사람이 누리는 평범한 행복이며 축구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퍼거슨의 생각은 달랐다. 2002월드컵을 마치고 02-03시즌이 시작되면서 베컴과 퍼거슨의 갈등이 더 심해졌다. 갈비뼈 부상을 입고 여름휴가를 떠난 베컴은 휴가지로 바로 가지고 않고 잉글랜드 대표팀과 함께 버킹검 궁전으로 가서 영국여왕을 알현했다. 대표팀 일정이기 때문에 공적인 일로 여왕을 만났지만 퍼거슨은 이것을 혼냈다. 부상선수가 대외활동은 자제하고 부상치료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휴가중 다른 일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어 경기를 앞두고 아들 브루클린의 유치원 연극공연에 참석하다 훈련에 늦자 또 혼이 났다. 그러던 중 베컴은 퍼거슨과 긴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었고 서로간 오해를 풀고 일시적으로 관계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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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알 수 있는 치명적인 삼각관계) 영감바라기였던 베컴이 달라졌어요

내게 큰 문제는...그가 빅토리아와 사랑에 빠졌고 그게 모든것을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나야? 빅토리아야? He was never a problem until he got married. He used to go into work with the academy coaches at night time, he was a fantastic young lad. Getting married into that entertainment scene was a difficult thing - from that moment, his life was never going to be the same. He is such a big celebrity, football is only a small part.

그리고 2월16일 바로 그 유명한 '라커룸 사건'이 터졌다. 경기에서 패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퍼거슨은 경기후 라커룸에서 2번째 골을 허용한 것에 대해 화를 냈고, 베컴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그 골이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한 베컴은 '그것은 상대선수가 미드필드에서 돌파해 넣은 골 아닙니까?'라고 말했고 퍼거슨은 '경기 전 그것에 대해서도 너에게 말했다. 너의 가장 큰 문제는 남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베컴은 계속해서 말다툼을 벌이다 그만 퍼거슨에게 X을 했다. 감독이 왕인 맨유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가 난 퍼거슨은 앞에 놓인 축구화를 걷어찼고, 의자에 앉아있던 베컴은 날아오는 축구화에 눈부위를 맞아 피가 났습니다. 이 때 베컴은 이성을 잃고 퍼거슨에게 달려들었으나 팀동료들이 제지해 약 1분간의 소동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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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실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온 베컴에게 퍼거슨은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하다.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게 아니었다'며 사과를 했으나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베컴은 이를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됐으나 언론들의 보도경쟁으로 둘의 사이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베컴은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앞두고 팀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감독에게 이번 사건은 잊어버렸다고 밝히고 경기에 전념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경기에서 맨체스터는 승리했고 둘은 화해를 해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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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컴의 이적에 대해) 또한, 전에는 맨유를 위해 전력을 다하던 베컴의 폼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베컴은 내게서 4미터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그와 나 사이 바닥위에는 축구화가 놓여 있었다.
베컴이 X을 했고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다가 축구화를 걷어차 버렸다.
그 축구화는 베컴의 눈 바로 위에 맞았고 그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모두 그를 말리고 나섰고 나는 그에게 '너는 네 팀과 동료들을 실망시켰다. 할 말이 있으면 맘대로 해봐' 라고 말했다.
● 그가 어떤 선수이든, 자신이 맨유라는 팀보다 더 큰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팀을 떠나야만 한다. 감독이 권위를 잃는 그 순간, 그는 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팀은 선수들에 의해 돌아가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자제력을 잃은 순간은 처음이었다.내가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을때 나는 그들을 떠나고 싶었던적이 한번도 없었다. 클럽이 나를 팔거라고 내게 말했을때 나는 처음으로 레알 마드리드와 대화했다. 나는 내 꿈이 끝났다는것을 알게됐고, 다른 팀과 대화를 해야만 했다. 그 후 2년 동안 맨유 경기를 볼 수 없었다. 처참했다. 맨유를 떠나는것은 그렇게나 힘들었다

난 단한번도 맨유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러나 클럽은 나를 팔려고 했고 때문에 떠날수 밖에 없었어. 다만 난 맨유 아카데미로 들어온 이후로 단 한번도 맨유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거지.
맨유에서 보낸 7년의 하루하루를 매일마다 그리워하고 있다. 맨유의 선수였던 시절과 팬들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그립다. 맨유는 항상 내 가슴에 있다.

베컴은 맨유를 떠나면서 EPL에 맨유 외에 다른 클럽은 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이후, 둘은 화해했고 PSG경기 관람도 같이 하는 등 화기애애.

파일:퍼거슨베컴.jpg

●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꼭 꼽아야 한다면 처음으로 맨유와의 입단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입니다. 사실 그날이 내 생일이었고 퍼거슨 감독은 나를 위해 생일 케잌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위해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 (유니세프 자선경기에 퍼거슨이 감독을 하는것에 대해) 제가 영감님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어요. 그는 제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지요.
● 절반은 내 부모님의 덕이고, 절반은 퍼거슨 감독의 덕입니다. 그 만큼 그를 존경해요. 부모님은 나를 기르시고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퍼거슨 감독은 나를 완전히 다른 레벨의 선수로 성장해 맨유를 위해 그리고 잉글랜드를 위해 뛸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세요. 그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어리고 젊은 맨유의 선수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그는 나에게 있어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런던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맨체스터로 올라왔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그는 나에게 아버지와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때로는 그는 매우 엄격하게 나를 교육시켰고 나는 그의 교육에 잘 따랐죠. 그는 나를 비롯하여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방문은 열려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말하며 용기를 주었죠. 그는 단순히 감독을 떠나 아버지였어요.
퍼거슨 감독님은 아직도 항상 그래오셨던 것처럼 저희를 잘 챙겨주십니다. 몇 주전에도 뵈었고, 항상 저희를 아이들 보듯, 케어해주십니다. 감독님 앞에서는 절대 술도 마시지 않고, 밤에 나가서 놀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근데 어느샌가 제가 와인잔을 들고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제가 그러고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얼른 잔을 등 뒤로 숨겼어요! 저와 니키 버트, 폴 스콜스 모두 같았지요. 우리는 모두 등 뒤로 와인을 숨겼어요. 나이가 들어도 영감님 앞에서는 와인 잔도 못드는 베컴
● 퍼거슨 감독은 제게 꿈을 실현시킬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그는 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우리와 함께 했던 어린 선수들 또한 신뢰했었죠. 12년 동안 그와 함께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그는 진정 최고입니다." -데이비드 베컴-

7.3 헤어드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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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은 선수들 사이에서는 헤어 드라이어라는 별명도 있다. 이유는 그가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졸전을 펼치면 라커룸에서 선수들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불같이 분노하기 때문이라고. 처음 그에게 '헤어 드라이어'라고 부른 제자는 마크 휴즈 (스토크 시티 FC 감독)다. 2015년 6월 25일, 솔즈베리 경마장에서 열린 경마대회에 퍼거슨 경의 소유의 말 ' 헤어 드라이어(Hairdryer)'가 데뷔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 항상 소리치고 괴성을 지를 순 없다. 비난을 받고 싶은 선수는 누구도 없다. 그렇게 해서는 먹혀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라커룸에서 상황은 다르다. 실수에 대해서는 지적해야 한다. 난 경기 직후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월요일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다음 경기를 향해 전진한다. 30명의 백만장자 선수들과 호흡하면서 통제력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벌금을 부과한다.

● 터널로 들어가고 레프리가 다시 피치로 부를 때 까지(하프타임) 8분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을 잘 써야하는건 필수다. 이기고 있을 땐 모든 것이 쉽다. 만족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이야기하고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지고 있을 땐 임팩트(충격이라고 쓰고 헤어드라이어라고 읽는다)를 줘야한다. 전반이 끝나기 몇 분전에 나는 항상 가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 생각한다. 거의 무아지경이다. 정신을 집중한다. 나는 노트에 적는걸 믿지 않는다. 다른 코치들이 수행하는걸 본다. 하지만 난 게임의 어떤 부분에서도 실수하는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드레싱룸으로 가면서 내 노트를 보면서 , '오 30분에 이렇게 했으니까 됐어.'라고 말하는걸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그 방식이 선수들에게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나는 개개인이 잘못한 경우에도 퍼거슨 감독님이 당사자를 나무라기보다 우리 전체를 나무랐던 여러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왜 네 동료가 곤경에 처하도록 놔둔 것이냐? 왜 그를 보호하지 않았던 것이냐? 너희들 모두가 그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에 책임이 있다. 너희의 동료가 곤경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선수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는 그가 벌금이 효과적인 지도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그가 벌금을 부과했을 때 이는 항상 팀 단위였다. 그는 우리가 연대 책임에 대한 그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명이 실패하면 우리 모두가 고통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연대에 대한 의식을 우리에게 심어주고자 했다. -게리 네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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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중에 실시간으로 헤어드라이기 맞은 에반스와 긱스)

실제로 목격하면 감독이 미친게 아닐까싶을 만큼 화를 내는데[42] 그러고나서 다른 사람들을 보고 씨익 웃는다고 한다. 계산된 행동이란 소리.[43]


(▲ 베컴 사건과 헤어드라이어를 설명하는 루니)
루니에게 따르면 헤어드라이어를 제일 많이 당한 선수는 게리 네빌이었다고. 그건 네빌이 그걸 견딜수 있을만큼 정신력이 강하기 때문.

(한 경기로 주급이 날라갔던 루니의 생생한 증언) '06-07시즌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셀틱전'이 제가 본 최악의 헤어드라이어 였어요. 그는 루이 사하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어요. 호되게 당한 사람은 루이 사하뿐만이 아니었죠. 제가 클럽과 새로운 계약을 협상중이라는걸 감독님은 알고있었어요. 그는 제게 들어갈 돈을 절약하게 되었죠. 선수들은 재계약을 할때 더 많은 돈을 원해요. 하지만 그런 형편없는 경기를 한 후에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죠. 그 시합후에 전 상향된 계약을 할 자격이 없었어요. 이 세상에서 알렉스경의 헤어드라이기를 당하는것보다 더 나쁜것은 없어요. 그는 제 얼굴 바로 앞에 서서 소리치죠. 마치 제 머리를 BaByliss Turbo Power 2000 앞에 놓은거랑 같은 느낌이예요. 그건 끔찍해요. 저는 누구에게서도 그런 고함을 받는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고함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때때로 저도 되받아쳐서 소리질러요. 저는 그에게 당신이 틀렸고 내가 옳다고 말하죠. 하지만 진정이 되고 난 후에는 대개 그 반대라는 것을 깨닫죠. (자기가 틀렸고 퍼거슨이 옳았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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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liss Turbo Power 2000)

천재다. 그냥 천재였다. 일단 선수의 심리를 가장 적절하게 자극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박살(=헤어드라이어) 나는 날들이 있었다. 영감의 수준에 맞지 않는 경기를 하면 하프타임때 문을 부숴져라 닫고 나서 ,"2-0? 2-0? 야 이 X같은 XX들아. 지금 솔직히 양심적으로 6-0 7-0은 나와야 하는거 아니야? 니네 그따위 공 찰래? 장난하냐? 그 따위로 할꺼면 때려쳐!" 시합이 잘 풀리는 날도 영감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건 완벽 그자체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완벽한 게임을 위해 그리고 영감을 위해 달렸다. -리오 퍼디난드-
(호날두 10대시절 맨유 첫 시즌) 호날두가 패스하는 법을 배우고 있던 시기에, 가장 힘들었던 선수들은 유나이티드의 공격수들이었다. "얘랑 못 뛰겠어. 크로스를 아예 안하잖아." 반니는 훈련 중 종종 소리치곤 했다. "백날 달려봤자 저 자식은 패스도 안할 텐데 뭐" (반데사르 왈) "베컴은 볼을 잡으면 반니에게 항상 크로스를 올려줬으니까요. 퍼거슨은 채찍질 후에는 당근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릭 와일리 코치 왈) "가끔씩 감독님은 모든 선수들 앞에서 호날두를 혼내곤 했습니다. '왜 크로스를 안하고 드리블을 한 거냐?!!!!' 라는 식으로요. 그런 식으로 호통을 친 후, 그는 슬그머니 호날두의 옆에 가서 앉아 왜 그가 그렇게 혼내야만 했는 지를 설명해줍니다." 선수들은 둘의 스페셜한 관계를 질투하면서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퍼거슨 니 아빠잖아, 니 아빠!!" 출처

하지만 오직 칸토나만은 헤어드라이어에서 예외였다고 한다.

퍼거슨 감독은 피터 슈마이켈, 나, 폴 인스, 팰리스터를 비롯해서 모든 선수들의 영혼을 쏙 빼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앞에서 '도대체 누가 사우스게이트를 맡기로 되어있었나?' '칸토나요' 내가 대답했다. 퍼거슨 감독은 칸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칸토나, 너에게 실망했다. 경기장에서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돼'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다야? 정말 그게 다야? 다른 선수였다면 헤어드라이어를 정통으로 맞고도 남았을텐데' -데이비드 메이-

7.4 지략가

퍼거슨은 언론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며 자기 팀 선수를 보호할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하는 감독이었다. [44] 맨유를 10년 동안 담당했던 출입기자에 의하면 퍼거슨에게 '너 오지마' 라는 소리를 듣는 신문/타블로이드/방송국의 담당자가 속한 부서는 그날 뒤집어 졌다고. 맨유가 기사에 실려야 인기가 있기 때문 기자들에게 퍼거슨은 "당신들은 멍청이들, 아, 아니다 진정 축구전문가들이지? 왜 4-3-3이 어쩌고, 4-4-2가 어쩌고 해봐. 다시는 캐링턴에 못들어오게 할줄 알어." 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한 번은 '더 선'이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의 명칭을 스폰서의 이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도한 적이 있는데, 퍼거슨경이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지사. 그는 그 기사를 직접 작성한 기자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디스.

하지만 가장 웃긴것은, 기자들이 이런 퍼거슨을 '이해'하며 일부 기자들을 제외하면 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보였다고. 퍼거슨이 질문하는 사람을 이름으로 부른다거나 하면 그 기자들은 화색이 돌고, 자신을 놀리거나 하는 발언 "이봐 , 자네는 그걸 양복이라고 입었나?" 를 들으면 그 어떤 기자 (자신도 포함) 들도 무슨 대단한 영광인듯 행동했다고.
퍼거슨이 말하길 "내가 맨날 성질만 내면 이미 죽었겠다.난 부드러운 사람이야. 대신에 니(기자)들이 날 화나게 하는 경우, 내 선수들이 날 화나게 하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지. 그리고 난 화가 나면 바로 나오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어." 그러나 자신이 많은 수의 선수들을 헤어드라이어로 불어버린것은 인정.

8 감독들 세계에서 위상

"퍼거슨은 전 세계 모든 감독들의 보스입니다." -주제 무리뉴 -

퍼거슨 왈 "감독은 내가 선수들보다 잘 뛸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선수들도 내가 감독하면 더 잘하겠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감독 중에 퍼거슨 감독이 키워낸 선수출신이 많아서 그를 통한 영향력도 상당하다.

(2008년경) 잉글랜드 전체 92클럽 중에 12%의 감독 자리를 퍼거슨경의 제자들이 지휘했었다.

Premiership: Birmingham - Steve Bruce / Reading - Steve Coppell / Sunderland - Roy Keane / Blackburn Rovers - Paul Ince
League One: Huddersfield Town - Andy Ritchie / Rotherham United - Mark Robins / Sheffield United - Bryan Robson
League Two: Bury - Chris Casper / Morecambe - Sammy McIlroy / Peterborough - Darren Ferguson / Wrexham - Brian Carey
"요즘 나의 예전 선수들은 나에 대항하기위해(타 클럽 감독을 의미) 단체로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이 클럽에 있었던 것이 그들의 향후 커리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전염과 같다.그들은 경기장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을 것. 그들은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경기를 계속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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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의 제자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알렉스 퍼거슨 경이 감독이던 시절 함께 했던 맨유의 선수들 중 감독이 된 사람들 명단- 31명)

Viv Anderson, Michael Appleton, Henning Berg, Clayton Blackmore, Laurent Blanc, Steve Bruce, Chris Casper, Peter Davenport, Simon Davies, Darren Ferguson, Ryan Giggs, David Healy, Gabriel Heinze, Mark Hughes, Paul Ince, Andrei Kanchelskis, Roy Keane, Henrik Larsson, Pat McGibbon, Gary Neville, Paul Parker, Mike Phelan, Bryan Robson, Mark Robins, Teddy Sheringham, Ole Gunnar Solskjaer, Jaap Stam, Frank Stapleton, Gordon Strachan, Chris Turner, Neil Webb. 본 명단은 퍼스트 팀의 감독들만 포함한 것이며 코치나 부감독은 제외되었다.

상대팀 감독들도 퍼거슨이 감독 모임 자리에 가거나, 만찬장에 들어서면 모두가 하던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고 인사한다고. 무리뉴는 퍼거슨을 존경하며 실제로 자기도 그를 맨유의 구단원들이 하듯이 "BOSS" 라는 표현으로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심지어 위건의 마르티네즈 감독이 퍼거슨이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국 축구계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신랄하게 깐 적이 있는데 얼마 안 있어 자기가 한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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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EFA 앰버서더 및 엘리트 감독 포럼 회장을 맡게된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 은퇴 후, 퍼거슨 영감님은 UEFA(유럽축구연맹) 엘리트 감독 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다. UEFA에게 유럽의 각국 축구협회가 '감독들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기 때문. 심지어, 영감은 유럽 각국의 클럽 감독들 업그레이드 패치중 ㄷㄷㄷ. 아이고 영감...ㅠㅠ매해 9월 개최되는 UEFA 엘리트 감독 포럼은 유럽 구단 감독 중 초청받은 감독들만 참석해 전략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이 포럼에서는 퍼거슨 영감은 젊은 감독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있으며, 축구 스포츠의 변화를 논하고 있다. 축구 발전에 있어 좋은 여러 아이디어가 감독들로부터 나오고있다고. 벵거, 무리뉴, 안첼로티 등 여러 경험 많은 감독들이랑 젊은 새로운 감독들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출처5

9 퍼거슨 어록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

팬이 루니를 자극. 루니가 왈 '훈련장으로 와라 10초안에 때려눕혀줄께' 시전하고 FA에 경고를 받음.
이에 퍼거슨이 루니에게 트위터를 할 시간에 책을 읽어라고 인생 조언.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일개 클럽이 아니라 리그를 세계 정상에 다시 올려 놓겠다" [45]

1999년 맨유의 트레블은 맨유 우승만이 아니라 잉글랜드 리그를 침몰에서 다시 구해놓은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46]

나는 항상 클럽과 팬들 사이의 다리가 되려고 노력한다. 나는 팬들이 행복한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답은 우승 트로피
가장 중요한 점은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정답은 우승 트로피
팀보다 훌륭한 선수는 없다.
상대 진영으로의 침투가 되지 않은 채 점유율만 높은 것은 시간 낭비다.
(2002년 당시 한국 국대에 대해) 월드컵에서 한국의 경기는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이 함께 훈련하면서 열정적이고 힘이 넘치는 경기를 펼쳤죠. 그러나 이것이 K리그를 희생하면서 얻은 결과라는 측면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루니에게) 난 감독이고 넌 선수야

2010년에 루니가 나한테 외질 사달라고 했는데 루니한테 '선수의 역할은 경기를 뛰는 것이고 감독의 역할은 적절하게 팀을 짜는 것이다.
넌 니 할일이나 해라' 라고 했어. 출처

10 에피소드

10.1 축구종주국의 본좌

스타크래프트의 '본좌론'에서 어떤 선수들은 전술/전략적인 면에서 종족의 패러다임, 시합의 패러다임까지 바꿔버리는 혁신적인 선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타 라는 종목의 구도' 자체를 바꿔놓지는 못했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 맥락에서, 퍼거슨은 프리미어 리그와 타 리그의 '인기와 머니 게임' 구도 자체를 바꿔놓은 인물로 축구종주국의 '본좌' 라고 말할 수 있다. 프리미어리그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리그에 등극했고, 리그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는 TV 시청자의 반은 맨유팬, 그로인한 TV중계권료는 공동분배해 리그 강등권 클럽까지 머니맛을 보고있기 때문. 근데 스타판에는 이사람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 스타크래프트만이 아니라 현재의 e스포츠가 그 사람 한명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퍼거슨의 '본좌' 클리어 미션 리스트 클럽 축구계의 최고의 육각형 감독. 슈퍼만능

1) 약팀을 강팀만들기. UEFA 클럽 랭킹 106위 ->6위 캐리 (애버딘 FC)
2) 리그 우승팀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으로 수십년간 이어진 리그 양강 체제를 무너뜨리기 (애버딘 FC)
3) 변방리그 클럽으로 루메네게의 바이에른 뭰헨과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 꺾기. (애버딘 FC)
※ 퍼거슨이 에버딘 막 부임할당시 스코티쉬리그가 유럽리그랭킹 15위(변방리그)였다.
4) 최상위로 리그랭킹 3위안에 들었던 잉글랜드 리그가 헤이젤 참사로 한순간에 UEFA 리그 순위 29위 수직하강. 망했어요. 변방리그에서 왔더니 헤이젤 참사로 더 변방리그로 추락. 해당클럽만 금지해서 망하면 될 것을 UEFA는 덩달아 상관없는 다른 클럽들을 모두 포함에 잉글랜드 리그 전체를 유럽 대회 5년 출입 금지를 때렸다. 유럽대항전에 나가지 못하니 상금 수입도 제한적이고, 매력도 없어서 잉글랜드 리그가 경쟁력을 잃고 29위까지 수직하강. 축구종주국 리그 전체가 다함께 망해봐라는 UEFA의 첫번째 모래주머니를 차고, 초 멘붕상태 리그의 클럽으로 크루이프의 바르샤 꺾기 (맨유)
※ 퍼거슨 감독은 맨유에 1986년에 부임했는데, 이는 1985년 5월 29일 헤이젤 참사가 일어난 후 였다.
헤이젤 참사로 직격탄을 맞은건 당시 리그 우승팀 에버튼 FC머지사이드 더비
영감이 머리 번뜩이는 절정기에 도리어 클럽 재정은 더 힘들어져서 지원 더 못해준 것이 안타깝다
5) 헤이젤 참사로 망한 리그를 '인기'만은 세계에서 원탑 리그로 만들기. 리그 먹살잡고 캐리 놀이.
6) 최고의 시한폭탄을 클럽에서 가장 충성심 넘치는 레전드로 길들이기. 덕장 만렙 달성 (칸토나)
7) 선수가 공기총으로 협박하는데 눈 하나 깜짝안하기. 베짱 만렙 달성 그 대상은 '총독'이라고 선수들 사이에 불릴 정도로 락커룸 장악력이 크고, 팬들에게 인기 있던 선수라 (이적시 아무것도 몰랐던) 팬들에게 원망도 받지만, 절대로 그 선수 미래를 위해서 이야기 안함. (폴 인스) 후에 이는 또다른 맨유 레전드 스티브 브루스에 의해 밝혀진다.
8) 전통적 '더비'관계의 팀 에이스를 그의 전성기에 "120만 파운드"라는 껌 값(…)에 사보기 (칸토나)
9) 13살 소년을 스카웃.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로 만들어 보기. 프린스 메이커 만렙 달성 (데이비드 베컴)
10) 10대 초반 소년들 중 옥석을 '직접' 가려 유스로 찜해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오랫동안 '직접' 키움. 6명 유스 출신을 1군 주요 멤버로해 트레블 해보기.
※ '맷 버스비 아이들' 고전 신화의 현대판 재해석. (퍼기의 아이들)
11) 트레블하는 과정에서, 챔스 결승에 미드필더 핵심 전력(로이킨과 스콜스가 빠져서 베컴으로 중미 땜방)이 빠진 상태로 인저리 2골의 투혼을 불사르며 기적을 일으킴. 캄프 누의 기적을 목격한 상대팀은 멘붕으로 한동안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그러나, 정작 결승전을 주최한 캄프 누의 주인(바르샤)은 정작 조별리그에서 맨유와 뮌헨를 만나 이 둘에게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탈락. (환상의 죽음의 조 추첨) 기적을 목격한 캄푸 누 주인은 남미에서 유망주를 공수해오지만, 정작 잉글축협 FA는 1) 각 클럽 유스 아카데미에서 1시간 30분 이내에 거주하고 있는 유스 선수들과만 계약할 수 있다는 90분룰 조항과 2) 유스들의 훈련시간을 8년동안 2천시간으로 제한. 1년동안 250분?! 동네 아이들 놀이 축구?! 리그를 살려놨더니 도리어 잉글 축협 FA가 두번째 모래주머니를 차게 해주었다.
※본좌가 하니, 자기들도 할 수 있을 거라고 꿈을 꿔보았던 것인지. 제2의 퍼기 아이들 못나오게 잉글 축협 FA가 영감에게 역대급 모래주머니 선사했다. 영감에게 모래주머니를 채웠지만 정작 타팀에서 제 2의 베컴은 나오지도 못한 것이 팩트. 하지도 못할거면서 왜 채웠니 모래주머니.
12) 금고 바닥난 클럽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클럽으로 만들기. 구단주빨?! 그런거 없다. 구단주가 맨유빨 받았다. (맨유)
13) 부유한 클럽으로 만들었지만, 쓸 수 있는 금액 제한에 걸려 (글레이저 구단주 빚=선수빨제한이라는 세번째 모래주머니차고) 이번엔 유망주를 스스로 육성해서 '더블' 먹어보기. (맨유)
※ 한명은 퇴장머신. 한명은 혼자놀이. 둘은 월드컵에서 만나서 아웅다웅. 잉글랜드 전체를 시끄럽게해서 이제는 나이드셔서 건강이 중요한 영감 머리를 뽀게지게 해주기. 둘 중 한명을 이적시킬 수 있었지만 화해시키고, 이 둘은 영감의 헤어드라이어를 받아 각성. 각각 잉글/클럽 주장과 월클 선수로 성장한다.
14) 클럽을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로 인한 부(TV중계권료)를 독식하지않고 오랫동안 공동분배하여 하위 구단까지 고루 머니를 나눈상태에서 리그 우승 트로피 수집. 재정 페어플레이 놀이 (맨유)
15) 이적시장 끝나고 서로 타팀이 우승권이라고 '추켜세워서' 이야기(서로 약한척 시늉)하는 특수한 국내 이피엘 팬덤 분위기에서, 타팀팬들에게 '우승권 스쿼드 아니야'(속마음:우린 약한척 시늉했는데, 너넨 정말 약해보이네)라는 진심어린 걱정을 듣는, 바로 그 스쿼드로 '감독빨' 리그 우승이 뭔지 보여주기. 타팀들은 MMORPG 스타일(선수 스쿼드 강화)게임하는데 전략시뮬레이선 스타일 게임하며 리그우승
16) 타팀팬들이 걱정스럽다는 그 스쿼드로 리그 우승은 기본. 보너스로 자팀팬들에게는 스쿼드 로또 맞추기 재미 선사. FM놀이.
17) 20년간 한 팀으로 감독하면서 리그성적 망해야 3위. 리그 맹주 놀이.
18) 구단주를 아침 6시에 불러내 경기장 눈을 치우게 하기. 상왕놀이.
19) 선수 제자들 중 30명이 클럽의 퍼스트 감독으로 데뷔하기. (퍼거슨 제자들)
위 리스트 중, 그대는 몇개나 클리어 할 수 있겠는가?

UEFA, 잉글축협 FA, 클럽 구단주까지ㅡ 차례대로 역대급 모래주머니를 영감에게 채웠지만 이를 보란듯이 극복하고 대업을 이뤄 본좌의 반열에 올랐다.

본좌의 축복으로 맨유엔 황금 시대가 도래. 화끈하게 돈 잘쓰는 에드워드 꿀단장을 만난 후임감독은 영감이 7년동안 쓴 이적료를 2시즌에 쏟아붇고도 챔스권을 간당간당. 열정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벤치에 앉아서 노트만 적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후임은 젊었을 땐 자기도 킥을 날릴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고 멘트. 후임보다 더 나이많으신 어르신 영감이 70대에도 헤어드라이어를 날리는 뜨거운 열정을 보았던 팬들은, 영감이 축구열정에 있어서도 '본좌'임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10.2 올드 트래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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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

재임 시절, 2011년 11월 5일,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맨유 부임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 (Old Trafford Manchester)에서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 (Sir Alex Ferguson Stand)로 개명했다. 기존의 명칭은 남쪽 스탠드로 옮겨놓았다가 보비 찰튼 경 스탠드로 개명 이후 철거했다.

(▲ 퍼거슨경 동상 오픈 행사 )

맨유에서의 이룬 그의 업적을 기리기위해 올드 트래포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12년 11월 23일 공개되었다. 이 행사에 그의 제자들인 에릭 칸토나, 피터 슈마이켈, 에드윈 반 데 사르, 솔샤르. 뤼트 판 니스텔로이, 드와이트 요크, 앤드루 콜, 라이언 긱스, 게리 네빌, 필립 네빌이 참석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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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자랑스러운 순간이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죽은후에야 동상이 세워지잖아. 근데 난 살아있네

● 와이프는 날 컨트롤할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약속했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동상에 절을 한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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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엔 퍼거슨의 공헌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딴 길도 생겼다. 원래 이름은 워터스리치(Waters Reach Road)로 트래포드시에서 자치구 의회의 승인을 얻어 길의 이름을 바꿨다. 알렉스 퍼거슨 경 길 (Sir Alex Ferguson Way)는 맷 버스비 경 길(Sir Matt Busby Way)과 연결되어 있다. 맨유의 감독, 스탭들, 선수들은 OT에 출근 할때마다 이 두 길을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1986년에 올드 트래포트에 도착했을 때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여정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명예훈장을 받고 내 이름을 딴 도로가 생긴다고 하니 영광스러울 따름이다. 지난 27년 동안 위대한 클럽에서 역사를 만들었고 믿을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10.3 장수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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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존 홀린스가 첼시 FC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2013년 라파엘 베니테즈까지 총 18명의 감독이 다녀갔다. 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알렉스 퍼거슨, 단 한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EPL에서 축구 감독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짧다는 얘기가 있다. 2006년 영국 워릭 경영대학원(Warwick Business School)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잉글랜드 감독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2년이었다. 허나 퍼거슨 감독은 무려 27년간 재임하고, 성공신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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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이 재임했던 27년 시절 중 25년만 보더라도 레알 마드리드는 24명, 인테르는 19명, 첼시는 15명, 유벤투스 뮌헨 맨시티는 14명, AC밀란은 13명, 바르샤는 11명이 감독으로 거쳐갔다.

그리고 은퇴 후, 후임 감독들의 행보로 인해 그 존재감이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는 명장이다.

10.4 자서전 발간

에브라가 전화로 알려줬는데, 브라질 월드컵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프랑스 국가대표팀 데샹 감독이 선수단 전원한테 내 자서전을 읽도록 했다고 했다더라. 선수들이 책을 편 지 5분 만에 숙면을 취했다고 숙면에 효과가 좋았데 -퍼거슨이 자서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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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전을 인증한 제자 피케)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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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서 퍼거슨과 사진찍었던 소년은 훗날 장성하여 자서전을 사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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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월클 판독기

(기자)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이 여태 봐온 최고의 선수들은 누구죠?

(퍼거슨) 펠레, 디 스테파노, 마라도나, 크루이프
(기자) 순서대로입니까?
(퍼거슨)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언론을 보면 '월드 클래스'라는 수식어가 너무 남발되고 있어.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지도 했던 선수들 중 '월드 클래스'선수는 4명 뿐이야.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에릭 칸토나, 크리스티아노 호날두지. 그들은 차이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그 증거지. 칸토나는 프리미어리그 첫 우승의 기폭제가 되었지.스콜스와 긱스는 어릴때부터 환상적인 선수였으며 두 선수 모두 오랫동안 활약했지. 프리미어리그 전체를 통틀어 그들만큼의 레벨에서 계속 활약한 선수가 있을까? 없다, 절대로 없지.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는 완벽한 천재 플레이어지. 가장 재능있었던 제자는 호날두야. 또한 현재 월드클래스라고 칭할만한 선수는 오직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뿐이야.

하지만 말은 저렇게 했어도 다른 유명한 수준급 선수들도 한가닥했다고 칭찬해줬다.

● 은퇴 후에도 영감님의 판독기는 여전히 가동중이다. 프리미어리그는 이달의 감독상, 선수상, 그리고 이달의 골 수상자를 매달 발표하는데, 수상자 선정에 참여하는 전문가 패널 구성단에 알렉스 퍼거슨경과 리오 퍼디난드가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사상 처음으로 16/17시즌에는 일반 팬들의 투표도 반영되고 있다. 팬 투표는 전체 결과에 10%로 반영. 또한 이달의 선수상에 한해서는 프리미어리그 20개 클럽의 주장들 역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10.6 감독빨 (감독이 퍼거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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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스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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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만 몇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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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은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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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는 감독놀음. 감독이 퍼거슨이야

재정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감독빨로 우승시켜주신 퍼거슨 영감님 덕분에 맨유는 PIK부채를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글레이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하는데 사용한 대부분의 자본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빌린 차입금으로부터 나왔고, 이것은 연간 6천만 파운드의 이자를 발생시켰다. 나머지 금액은 PIK 대출로 부터 나왔는데, PIK에 대해서는 맨유 구단은 이에 대해서는 갚을 책임이 없고, 이 대출은 모기업 Red Football이 가진 맨유 구단의 지분을 담보로 잡고 빌린 것이다. 이 PIK 대출의 이자율은 연간 14.25%이다. 글레이저 가문은 PIK 대출을 맨유를 인수한 첫 5년 동안 원금을 상환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1월 맨유는 5억 파운드(7,500억원)에 달하는 채권 발행에 성공하였으며, 2010년 4월까지 PIK 대출은 2억 파운드 (3,400억원) 가량 남았고, 이것은 2010년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모두 상환되었다. 글레이저 구단주의 태생상 '맨유는 현지팬들이 갑' OT에서 레드 데블스가 들고 일어나면 후임 감독의 경질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그리고 도래한 황금빛 엘도라도 맨유 시대

10.7 마인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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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경이 갱신해왔던 신화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으며, 그는 유럽 축구에서 나타난 전술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잘 취합하여 완성된 형태로 선보이곤 해 마인 부우 같은 감독이었다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셀틱 FC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으로 수십년간 이어진 셀틱 FC레인저스 FC양강 체제를 무너뜨렸다

UEFA 클럽랭킹 106위였던 애버딘 FC을 6위로 올렸다.
● 13살에 데이비드 베컴을 스카우팅. 이후 베컴은 맨유를 넘어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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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런던 올림픽 홍보대사, 베컴
헤이젤 참사UEFA 리그 랭킽 3위였던 영국리그가 한 순간에 29위까지 밀려나며 추락. 헤이젤 참사로 잉글랜드 전체 클럽들이 5년간 유럽무대를 금지당했고 우수한 용병도 떠났다. 캄프 누의 기적을 일으키며 트레블을 달성, 박살나버린 영국리그를 캐리했다. 팀의 핵심으로는 7명이나 되는 유스출신이 뛰고 있었다.
캄프 누의 기적으로 가장 극적인 트레블을 달성했다. 경기 종료 직전 3분안에 그것도 교체선수들이 들어와서 2골이나 넣으며 역전하는 드라마틱한 경기 스토리를 만들었다.
● 슈퍼스타 베컴 탄생으로 명문 클럽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거부들이 영국리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글레이저가[48]맨유를 2005년에 인수했다.[49] 그러나 대부분 인수자금은 구단자산을 담보로 빌린 것으로 부채가 없었던 맨유의 재정이 단기적으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재정적인 상황 속에도 '로테이션' 신공과 감독빨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지금 맨유재정은 안정된 상태로 최근 포그바로 월드레코드, 리그레코드, 클럽레코드를 동시에 갱신해 화제를 모았다. 퍼거슨의 황금수저 유산

퍼거슨이 26년간 만들어낸 브랜드 이미지는 오늘날 몬스터 클럽 맨유를 있게했다. 맨유는 미국 자동차 회사 GM의 쉐보레와 유럽축구 스폰서십 역사상 최대 금액의 스포서십 계약을 체결했는데 2014-15 시즌부터 7년간 무려 5억 5천 9백만달러(한화 약 9000억원)에 달하는 대형 딜이다.

10.8 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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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든 경기장 스텝, 연습생, 어린이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코칭 스텝, 심지어 구단주까지도 아침 6시에 불러내 경기장 눈을 치웠습니다.

● I am comfortable with the Glazers. They have been great. They have always backed me whenever I have asked them. I have never faced any opposition. 글레이저는 내 요구에 반대한 적이 한번도 없어.
● 2010년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길(전 맨유단장)이 루니의 급여를 엄청 올리기로 결정하면서, 내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했어. 난 솔직히 루니가 내가 받는 돈의 2배를 거머쥐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 암튼 그걸 그대로 말하니까 조엘 글레이저가 바로 말하더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쩔수 있나요' 간단했어. 나보다 더 많은 선수가 있으면 안될거라고 합의를 봤지. 간단하잖아? 나도 올려. (말아먹은 모예스 연봉 86억(위약금 85억원), 반할은 130억원(위약금 86억원)이었는데. 우리 영감님이 그동안 너무 박봉이었어ㅠㅠㅠ) 참고1 참고2

퍼거슨 감독은 재임시절, 구단주와 단장 위의 존재로 상왕과 마찬가지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2011년경) 맨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식되는 브랜드에 Google, Apple, BBC, Dyson, Facebook에 이어 6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 조사를 한 Brand Finance의 스포츠 브랜드 평가팀장인 David Chattaway는 글레이저의 이 같은 성공 비결의 핵심요인 중 하나는 클럽의 궁극적인 브랜드 매니저(the club's ultimate brand manager)인 퍼거슨 감독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EPL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되기도 한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뒤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된 맨유의 주가가 꾸준히 하락세이자, 영국 경영컨설팅 회사 A.T.커니의 이매뉴얼 험버트 스포츠 담당 전문가는 "애플이 스티브 잡스를 잃었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평했다.

10.9 퍼기타임

퍼기 타임 (Fergie Time)
이기고 있는 경기 혹은 뒤지고 있는 경기에서 추가 시간에 심판에게 자신의 시계를 가리키는데, 이는 주심 및 심판진들에게 쉽사리 경기 종료를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와 추격하는 상대팀에게 부담과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퍼거슨 맨유시절 후반 추가시간에 역전골 혹은 동점골이 유독 많이 나오기도 했으며 과거 2009-10 시즌 OT에서 열린 맨체스터 더비에서 마이클 오언의 역전골로 4-3으로 승리한 경기 또한 후반 추가 시간의 추가에서 나온 골이다. 이 행동은 이른바 "퍼기 타임"이라고 불린다. 훗날 은퇴 후 인터뷰에서 실제로는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심판과 상대팀에게 압박을 가하는 심리적인 트릭이다고 한다. 실제로 퍼기타임이라고 언급된 많은 추가시간들을 종합해보면 실질적으로 주지않아야할 추가시간을 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심리적인 부분을 이용한 것.그리고 호날두가 2016유로 결승전에서 그대로 써먹었다

10.10 껌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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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억원에 달하는 영감님의 껌값,

거슨이란 별명이 있는데, 경기 중에 보면 항상 껌을 씹고 있기 때문이다. 껌 씹는 속도는 그 날 경기력에 따라 다르다.(...) '껌영감' 대신 '껌거슨'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10.11 퍼거슨과 박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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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2-3년 내로 맨유맨이 될 것이다. 그를 믿기에 데리고 왔고 또 그만큼의 활약을 할 수 있는 선수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생각에 의아해했지만, 2-3년 내로 분명히 사람들은 나의 결정에 동의할 것이다.

(2009/2010 AC밀란과 챔스 16강에서) 박지성은 피를로에게 공을 찰 기회를 주지 않았다.

피를로의 경기당 평균 패스는 75회다. 박지성이 막아서자 피를로는 25회 밖에 패스를 하지 못했다.
박지성의 능력은 맨유에게 대단한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 유럽 축구의 표본이다.

(박지성 QPR 이적시, 퍼거슨경 편지) 지성이에게. 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네 충성심에 감사하고 새로운 구단에서의 행운을 빌어주며, 널 보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일찌감치 네게 보내지 못했던 걸 부디 용서해라.[50] 네가 원했고, 필요했던 출전 수를 제공하지 못했던 게 안타깝다. 내가 널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야. 프로 정신, 충성심, 그리고 결단력 같은 면에서 너만큼 신뢰를 할 수 있었던 선수는 없었단다. 난 네 무릎 수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건강한 모습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말도 네게는 부당했을 테고, 아마 그 결정이 달갑지 않았을 게다. 특히 내 손자는 가장 좋아했던 선수인 널 다른 팀으로 보낸 이후로 아직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마음에 걸리고 있지만, 너를 보낸 결정이 얼마나 어려웠던 건지 네가 이해해주길 바란다. 유나이티드 소속이던 시절 네 돋보이는 능력을 신뢰했고, 내 코치진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넌 내가 보유한 선수들 중 가장 충성심있고 정직한 선수 중 하나였고, 우리 팀에 너처럼 예의가 바른 선수가 있어 자랑스러웠다. 의심의 여지 없이, 넌 축구계의 환상적인 대표 인사이며, 영어에 그렇게 빨리 적응하며 안착하는 걸 보면, 네 결의력과 열정이 축구 뿐 아니라 삶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구단의 모든 이들을 대표해 새로운 구단에서의 성공을 빈다.지성아. 난 언제까지나 너를 내 선수 중 하나로 여길 것이고, 언제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날 찾아와라. 마지막으로 너와 네 가족이 언제나 행복하고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 박지성 때문에 혼났던 맨유 레전드 라이언 긱스)

박지성어느 특정 강등 예정팀으로 이적할때 박지성은 아주 소중한 선수고 그가 그리울것이라며 립서비스 꽤나 좋은 매너를 보여주어 박지성이 맨유를 나올때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51]


거기다 QPR과의 경기에서 손수 벤치까지 행차하여 박지성을 찾아가 악수[52]하여 그의 위신을 세워줌으로써 해축팬과 박빠들내에서 완벽한 개념캐...아니 개념 영감님으로 등극하여 칭찬을 받았다.

이후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앰버서더 위촉식에 퍼거슨경이 함께했다. 퍼거슨 경이 은퇴이후 관중석에는 참여했지만, 올드 트래포드 그라운드에 공식 행사로 입장한 것은 처음 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구단 관계자들과 팬들이 많이 흥분했다고 한다.

11 은퇴시

알렉스 퍼거슨의 은퇴에 대한 축구계 인사와 유명인들의 코멘트

알렉스 퍼거슨경, 당신은 감독계에서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또 앞으로의 모든 세대들에게 귀감이고요

알렉스 경, 그대는 전설이며 그 위업은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네요. -펠레-

축구계 최고의 우상 -우사인 볼트-
팀을 위해 싸운 위대한 커리어! 위대한 퍼거슨 경. 당신의 새로운 길에 행운을 -테니스 황제 라파엘 나달-
퍼거슨이 이룬 성취만 봐도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위대한 감독 -제프 블래터-
그는 축구계에 엄청난 헌신을 했다. 스코틀랜드에서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유럽, 그이상으로 퍼거슨 감독의 영향력은 컸다. 그의 헌신, 세세한 부분까지의 관심, 재능있는 선수들을 향한 안목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애버딘 FC의 감독으로서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대단한 업적을 달성하게 만든 힘이었다. 결과만으로도 놓고 봐도 그의 이력서는 독보적이다. 통상적으로 관심갖는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봤을 때만 우수한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비전의 측면에서도 퍼거슨 감독의 업적은 대단하다 -미셸 플라티니-
프리미어리그는 많은 위대한 선수들과, 감독들 그리고 팀들을 보는 특권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누구도 알렉스 퍼거슨경보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진 못했어요. 알렉스 퍼거슨 경을 빼놓고는 프리미어리그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그가 있었기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프리미어리그가 진화하여, EPL은 환상적인 무대가 되었습니다. -프리미어리그 협회장, 리차드 스쿠다모어-
그는 완벽하다. 그의 은퇴로 인해 나의 팀(아스톤빌라)이 조금은 편해지길 바란다 -데이비드 캐머런-
거의 4번의, 전혀 다른 스쿼드들로 개편해가며, 성공을 이뤄낸 것이 믿을수가 없다. 아마 역대 최고의 클럽 감독일 것이다. -브라이언 롭슨-
축구계 가장 위대한 감독의 지도를 받은 일이 진심으로 영광스러웠습니다. -데이비드 베컴-
구성과 꾸준함을 볼 때 그의 위업은 기본적으로 오점 하나 없죠. 당연히, 독보적일 정도고요. 알렉스 없는 잉글랜드 축구계를 상상하기가 힘들군요. 하지만 이제 현실이고, 사실이겠죠. 물론 그 자리를 맡는 후임은 그만한 역량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새로 부임하는 인물에게는 큰 도전이 될 거예요. 아직도 할 수 있는 말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상업적, 재정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두세 클럽 중 하나라는 겁니다. 또 새로 부임하는 인물이 좋은 시작을 끊을 수 있는 준수한 기반도 있고요. 선수들, 팀, 잠재성은 그대로일 테니까요. 유나이티드는 아주 잘 성장했고,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말로 강력한 위치에 올랐죠.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어쩔 수 없이 큰 공허감을 느낄 겁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클럽을 지배했던 카리스마와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는 거니까요. 그런 사람을 대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르센 벵거-
내 남은 감독 생활에서 큰 후회는 알렉스 경 반대편 덕아웃에 설 수가 없게 됐다는 겁니다.축구의 신(football god) 옆에 서 있는 건 대단한 일이었을 텐데. 알렉스 경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싹 다 봤고, 하나는 왜 모든 걸 차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영상이었습니다.1983년 5월 11일, 컵 위너스 컵 우승을 달성하고 10일 뒤에는 스코티쉬 컵을 들었는데, 마지막엔 굉장히 씩씩거리면서 '쓰레기 같은 경기력이었다(rubbish performance)'고 하더라고요. 모든 걸 이룬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10일 만에 2개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선수들한테 화를 냈어요. -파올로 디 카니오-
퍼거슨은 맨유의 상징이자 전설, 영웅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하고 아이와 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카를로 안첼로티-
영국 축구의 슬픈 날이다 -로이 호지슨-
퍼거슨은 위대한 감독이기 이전에 위대한 인간이었다. -해리 레드냅-
우리 모두 그를 그리워할 겁니다. 그리고 제겐 올드 트래포드에 가는 게 힘든 일이 되겠죠. 특히 그런 인물 없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처음 상대하러 가게 된다면요, (왜 퍼거슨이 그렇게 그리울 것 같냐는 질문에 대해) 독보적이고, 아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독보적인 클럽일 테니까요. 감독에게 퍼거슨이 가졌던 그런 조건을 부여하는 클럽입니다. 모두들 퍼거슨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겠죠. 첫 우승을 맛볼 때까지 3~4년이 걸렸고, 맨 유나이티드는 퍼거슨이 믿기지 않는 업적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줬어요. 그 이후론 독보적인, 유일무이한 인물이 됐죠.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고 쌓은 트로피 수는 정말 놀라울 따름이고 20년 이상 감독직을 유지한 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퍼거슨과의 만남 중 가장 좋아하는 기억은 뭐냐는 질문에 대해) 하나 골라야 한다면, 첫 만남으로 하겠습니다. 2004년이었죠. 사실 감독으로 잉글랜드 땅을 밟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게 챔피언스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포르투 경기였고요. 우리가 막판에 골을 넣고 진출했습니다. 근데 그런 상황에서 경기 끝나고 상대방 감독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는, 축하한다며 자기 사무실에서 와인이나 한잔 하자고 초대한다는 건 나와, 내가 알던 문화에서는 평범한 일이 아니었어요. 분명 엄청, 굉장히 실망하고 있을 순간이었을 테니까요. 거기서 우리의 관계는 꽃을 피운 겁니다. 그 이후 우린 서로 여러 차례 경기에서 만났고, 그 다음 해 전 잉글랜드의 첼시로 가게 됐죠. 그 다음부터 우리 관계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누가 승장이고 패장인지는 무관했어요. 언제나 서로를 존중했죠. -주제 무리뉴-
그는 맨유에서 참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우린 그의 뒤를 이을 감독이 누구인지 모른다. 우승을 한 다음이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이상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그는 분명 맨체스터시와 맨체스터유나이티드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오트마르 히츠펠트-
전설이라는 단어가 요즘에는 지나치게 자주 사용된다는게 불행이다. 그러나 퍼거슨 감독에게는 진정 축구계의 전설이라고 말할수 있다. 내가 (스완지의 감독으로서) 올드 트레포드에서 퍼거슨 감독이 지휘하는 마지막 홈경기에서 상대편 감독으로 나서게 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미카엘 라우드럽-
퍼거슨 감독을 아는것은 특권이다. 감독으로서 내게 준 모든 조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퍼거슨 감독보다 더 좋은 도움과 조언의 원천은 없다.그는 감독으로서 수십년간의 경험을 갖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맨유팬들에게 영광의 시대를 선사하며 올드 트레포드로 거듭 트로피를 갖고 왔고, 팀을 세계에서 가장 큰 클럽 중 하나로 만들었다.감독 재임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저력과 헌신은 과소평가 될수 없다.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강한 성품과 열정, 단호한 정신자세로 그토록 위대한 성과를 이룩했다. -닐 레논-
이번 결정을 예상하지 못했다. 퍼거슨 감독과 최근까지도 여러번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보스, 즉 부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계속했다.그런 교양과 지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걸 할수 있다. 이제는 그가 맨유뿐 아니라 축구계 전체의 사절이 되었다고 말하는게 타당하다. 난 영어를 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내게 그의 영어가 이상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어로 의사소통하기 시작해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 또한 우리는 술을 교환하는 것도 시작했다. 그는 내게 위스키를 보내곤 했고 난 그에게 이탈리아 와인을 보내곤 했다. 우린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계속해서 팀을 변화 시킨것과 승리를 이어가는 와중에서도 팀을 현대화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마르첼로 리피-
본인의 결정이니까요, 제게 있어, 3년 동안 알렉스 경과 맞서 싸운 건 엄청난 영광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그를 꺾은 것도 무한한 영광이었고, 그 앞날에 행운을 비는 바입니다. (은퇴)이유는 모르겠지만요. 지금도 최고의 감독이지만, 이 결정은 직접 내린 거고 우린 그걸 존중해야 합니다. (누가 최고의 감독인지 말하는 건)어려운 일이에요. 모두가 각자의 의견이 있는 법이지만 27년간 같은 클럽에서 트로피를 휩쓴 감독이 있다면, 그건 믿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그와 같은 감독이 다시 나오지 않을 거라 봅니다. -로베르토 만치니-
실망스럽다. 충격적이다. 슬프다.오늘이 그날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20년 넘게 알았지만 그가 항상 말했던 것처럼, 그가 지금 은퇴한다는 사실은 전혀 납득 할 수 없다. -피터 슈마이켈-
언젠가 올일이었지만 여전히 충격적이고 가라앉질 않는다!! 위대한 감독이며 훌륭한 사람! -에드윈 반 데 사르-
Thanks for everything, Boss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퍼거슨 감독이 없는 맨유는 맞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위대한 인물이 그의 경력을 마감한다.

단연코 세계가 목격한 최고의 감독 밑에서 플레이 했던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다. 그의 기록은 좀처럼 넘어설수 없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그가 감독으로서 이룬 업적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것이다. -마이클 오언-

일어서서, 손을 들고, 다함께 그에게 큰 박수를 보내자! 알렉스 퍼거슨 경이 은퇴한다. 놀라운 커리어에 축하를! -라다멜 팔카오-
내가 은퇴할때 퍼거슨의 아이들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에 만족할겁니다. 이건 나에게 더 특별한 일이에요. 이건 대단한 업적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최고 감독의 선수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감독님은 모든사람들을 동등하게 취급하세요. 언제나 다른이들을 도우시죠. 감독님은 모든 승리에도 불구하고 항상 계속해서 굶주려 하셨고 언제나 경쟁심을 잃으신적이 없는데 이건 저에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감동님은 진정한 '위너' 이세요. -치차리토-
와우 알렉스 퍼거슨 경이 떠난다. 건강이 괜찮길 빌어.

그는 내 아버지 이후 내 인생에서 가장 파워풀한 사람이었어.축구의 신에게 거대한 경의를! -루이 사하-

엄청난 커리어! 알렉스 퍼거슨 경에게 코치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명예로웠다. -주세페 로시-
Only one BOSS -로니 욘센-
처음 부임하면서 리버풀을 제치고 정점에 오르고 싶다고 했고, 그걸 실천했습니다.먼저 하고 나서 '아, 사실 속으로 다짐하긴 했었지'라고 말한 게 아니죠. 약속을 하고, 그걸 달성한 거예요. 걸출한 경력을 쌓으셨죠. 모두가 퍼기를 잃어 슬퍼하고 있겠죠. 위대한 보스고, 위대한 전설입니다. -티에리 앙리-
퍼거슨 감독에 대해서는 감탄사밖에 나오질 않네요. 그 오랜 집권기를 생각하면, 제 기준에서는 역대 최고셨던 것 같습니다, 많은 감독들 - 무리뉴 같은 감독들이죠 - 이 그 (역대 최고의) 자리를 위해 노력하지만, 퍼기(Fergie)만큼 오랫동안 해야겠죠. 믿기 힘든 분이십니다. 클럽을 지휘하는 사람이, 그처럼 선수들을 최고로 만들고 계속해서 팀을 진화시킬 열망이 있었다는 걸 보면, 완전히 유일무이한 분이죠. -프랭크 램파드
축구계의 전설이 떠났다. 의미있는 일이다, Gracias Sr ALEX FERGUSON -다니 아우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놀라운 커리어에 감사를. 축구의 전설, 놀라운 퍼거슨 경 -세르히오 라모스-
Sir.알렉스.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명. 당신의 은퇴에 행운을 빕니다. -마이클 에시엔-
위대한 남자의 은퇴. 축구에 있어서 슬픈날이야. 그는 최고의 감독중 한명이자 내가 만나본 사람들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어.-팀 케이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입니다.26년동안 성공적인 게임을 마친 그에게 우리 모두 존경을 표합니다. -빈센트 콩파니-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 큰 충격이었고, 우리한테도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나이티드가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계속 남을 거라고 보기 때문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진 않네요.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

우리가 그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나오는 말은 그는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가 그의 선수단을 잘 파악하고 그들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이렇게 오랜 기간 정상에 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맨유의 선수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그는 그 누구보다도 승리에 배고파하며, 늙은 나이에 그렇게 많은 것들을 성취한 후에도 여전히 승리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의 선수단으로부터 최고의 성과를 얻어내는 비결입니다. 맨유 선수들은 퍼거슨경은 감독으로서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그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퍼거슨 감독의 축구 감독으로서의 업적을 알기 때문에, 그의 은퇴는 아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휴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시간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 알렉스 옥슬레이드-체임벌린-
그는 맨유의 통산 20번째 리그 우승을 막 이끌었다. 그래서 아마 지금을 적당한 시기로 본듯 하다. 그와 함께 했던 것이 굉장히 자랑스럽다. 그는 내 선수시절과 지도력의 관점에서 모두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다. 향후에도 그가 상당히 큰 역할을 하게 될것으로 확신한다.다음에 맨유를 맡을 인물은 엄청난 공백을 채워야 한다. -알렉스 맥리쉬-

12 은퇴 후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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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은퇴 후, 경기를 즐기고 싶었던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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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은퇴 후, 3년째 못 즐기고 있다)

26년동안 키워온 게임 세이브데이터를 잃어버린 표정[53] 퍼거슨경: 헤어드라이기 한번 날리고 싶은데... 날려? 말어?
  • 모예스 감독이 초반에 부진하자 벌써부터 퍼거슨 복귀설이 나오지만 그는 9월 들어서 인터뷰로 절대 재복귀는 없다고 못박았다. 자신도 맨유감독이 돼서 몇 해동안 부진했음에도 계속 감독을 맡아서 전설이 된 것이라며 모예스 감독도 몇 해는 더 두고 봐달라고 했다. 위에 나온대로 그의 맨유 초창기 시절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말이다.
  • 2013년 10월 국대감독이 비어있는 호주 측에서 거스 히딩크와 더불어 감독직 제의가 왔다고 한다. 하지만 잉글랜드도 영국 올림픽 대표팀 감독도 모두 거절하고 국대감독직은 어디라도 맡지않겠다고 말하던 점이나 이제 은퇴하고 노후를 즐기고 싶다는 그가 맡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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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한 맨유팬, 후임 감독이 선더랜드에 패한뒤 긴급전화에 전화해 퍼거슨 바꿔달라 요청. 물론 허락될리 없었다.)

그러나 13-14 시즌에서 맨유의 상태가 영 메롱이라 빡친 나머지 선수단 정리를 암시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예스의 경우에는 자신의 맨유 감독 초창기를 언급하며 감독 자리를 계속 맡길 것이라고 한다.##[54]

하지만 모예스는 결국 안습한 기록을 남기고 짤렸고, 후임으로 반 할 감독이 맨유를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수천억을 들이고도 4위로 끝내는 아쉬움과, 무언가 확립되지 않은 전술 등 아쉬움이 많아 진터라 맨유팬들은 이 돈 영감님께 드렸으면 트레블(...)이라며 아쉬워 하는 중. 사실 이건 비단 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맨유의 전설적인 수비수인 리오 퍼디난드네마냐 비디치도 둘이서 우리가 있을 때 저 돈을 썼으면 얼마나 많은 트로피를 더 들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 유로 2016 결승전 때 경기장을 찾아 우승을 차지한 옛 제자들인 나니와 호날두를 축하해주기도 했다.

(▲ 리더십 강연: Practice, Practice, Practice)

  • 은퇴 후,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경영대학원에서 최고경영자 코스 강의를 하는 등 리더십 강연으로 바쁘시다.

13 그외

  • 주방 아주머니의 남편이 뭘하는지, 건강은 어떤지 다 알고 있으며 무슨일이 나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지갑을 열었다. 청소 및 주방 아주머니들이 정리해고의 일환으로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자신이 앞장서서, 그들은 클럽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라며 절대 자르지 말라며 길길이 날뛰어서 막았다고.
  • 승부의 신이란 서적에 보면 애버딘 FC 구단에 부상당한 선수를 의한 다용도 운동기구와 함께 당구대를 같이 놔뒀는데 선수들은 한 명이 운동하면 나머지는 당구를 치는 식으로 기구를 돌아가며 썼다고 한다. 복도에 발소리가 들려 걸릴 일이 없었다고... 그런데 어느날 퍼거슨이 용무가 있어 퇴근을 늦게 하면서 기구가 있는 곳에 들렸다. 애버딘 선수들 중 한명이 기지를 발휘해 큐대를 등에 지고 운동을 했다고... 퍼거슨은 그냥 웃고 갔다고 한다.당구공은 남아있을텐데?
  • 83년 유러피안 컵 위너스컵 결승전 당시 실수한 알렉스 매클리시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자 그에게 그 유명한 헤어드라이어를 날렸다고 한다. 이후 애버딘은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대회 우승을 했다. 매클리시가 경기 후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면서 실수를 곱씹는데 퍼거슨 감독이 들어왔다. 옷을 입고 있어서 물이 바지에 튀었고 매클리시는 그게 웃겼다고 한다. 들어온 퍼거슨은 매클리시를 칭찬하고 나갔다.
  • 언론을 자유자재로 할 줄 알며 자기팀 선수를 보호할때는 무슨 수를 써서도 보호하는 감독. 이게 가끔 지나치면 사단이 나는데 대표적인게 독일인드립. 이 사건으로 바이에른 뮌헨이나 분데스리가 팬덤에서는 심심찮게 까인다. 독일인드립이 무엇인지 덧붙이자면, 09-10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 3-1로 앞서다가 후반전 하파엘의 퇴장으로 경기력이 밀려 추격골을 먹혀 원정 다득점으로 패한 후, 전형적인 독일인 방식이라고 판정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발 역풍을 강하게 맞았다.
  • 영국 축구계에서 그 위상이 대단한데 역대 감독 순위에서 최소라도 3위를 차지하는 명장일 뿐만 아니라 감독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한 것도 있고 그 연륜과 영향력도 발군이다. 심지어는 퍼거슨 감독의 아들과 관련된 정확하지 않은 고발 프로를 내보낸 BBC와 수년에 걸친 신경전 끝에 2011년 8월, BBC의 사장과 북부지역 총괄 디렉터 등이 나서고야 용서해주는 위엄을 보였다. 이때, BBC는 퍼거슨과 화해한 사실을 속보로 내보내기까지 ㄷㄷㄷ.
  • 또한 그 위상을 적극 이용해 심판들에게도 강한 압력을 행사했다. 만약 마음에 안 드는 판정이 나온다면 하프타임이나 경기 종료 후에 심판 대기실에 들어가서 심판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도 징계는 커녕 기사화도 은퇴하고 나서야 되었다. 현역일때는 한줄도 기사화되지 않다가 모예스 부임 후에야 모예스는 퍼거슨과 달리 심판대기실에 들이닥쳐서 난리를 피우지는 못한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드러내는 식으로.
  •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터뷰 원칙에 어긋나거나 신경에 거슬리는 기자는 가차없이 인터뷰에서 배제해버리는데 맨유 기사를 싣지못해서는 스포츠지로 살 길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인터뷰 금지를 당하는 기자는 스포츠 기자로서 치명타를 입는셈인데 이러한 기자 중 한명이 나중에 투병생활을 하게되자 이 사실을 알고 위문 화환을 보내면서 다시 인터뷰해도 좋다고 허가해준 적도 있다. 다른 기자는 인터뷰 금지령을 풀기위해 몇달동안 열심히 퍼거슨을 찾아다니며 해명하려다가 번번히 기회를 놓치자 열받은 나머지 크리스마스 무렵에 퍼거슨에게 들이닥쳤는데 거기서 퍼거슨이 의외로 관대하게 대해주는 바람에 감격(?!)해서 문제가 된 기사를 편집한 담당 에디터에게 닥돌해서 퍼거슨 대변인 노릇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래저래 무서운 영감님.
  • 선수 시절 골 넣는 스트라이커임에도 불구하고 감독한테 수비 안 한다고 늘 혼났다고 한다. 이 때의 흑백사진을 보면 준수한 외모의 선수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 남자답고 터프한 성격에 언플의 달인. 한창 주제 무리뉴가 리그에서 날아달니땐 불꽃터지는 설전이 오고 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서로를 높이 평가하는 사이여서 주제 무리뉴도 2010-2011 시즌에서 맨유의 우승이 확정되었을때 여러차례 퍼거슨을 띄워주는 인터뷰를 했고 퍼거슨도 주제 무리뉴가 엘 클라시코에서 물의를 빚으며 언론과 팬의 공격을 받자 이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다. 퍼거슨 감독의 말로는 무리뉴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고. 그래서인지 주제 무리뉴가 프리미어 리그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한다.[55] 아, 물론 벵거 감독과도 아스날이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신나게 서로 갈구며 싸웠지만 아스날이 요즘 5시즌째 무관인 상태라서 그런지 요즘은 조용하다. 심지어 벵거 감독이 2011년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집중공격당할 때 그를 두둔하면서 쉴드를 쳐주기까지 했다.[56] 싸우면서 든 정이 무서운 듯.그래놓고 2011-2012시즌 개막하니까 아스날을 가차없이 8:2로 발라버렸지.[57] 08/09 시즌에 리버풀이 한창 잘 나갈때 언플로 리버풀과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을 뒤흔들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95-96 뉴캐슬의 케빈 키건도 언플로 바르면서 우승을 낚은 적도 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선수의 경기 출장에 관하여 팬과 언론에게 떡밥을 던지고 낚는 것은 다반사.[58] 지금은 사이가 나쁜 라파엘 베니테스와도 처음에는 사이가 괜찮았다. 특히 베니테스는 프리미어 리그로 진출하기 전에 영국에 왔을 때 퍼거슨 감독의 안내로 올드 트래포드를 둘러보기도 했고 자신이 젊었을 때 롤 모델이 퍼거슨 감독이라고 인터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리버풀 FC의 감독을 맡으면서 서로 충돌하다보니 지금은 사이가 많이 안 좋은 듯하다.
  • 가족 관계는 언급된 대로 아내 캐시, 세 아들과 그들의 가족이 있으며 동생 마크 퍼거슨도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터로 재직중이다. 아내 캐시 여사와의 사이는 아주 좋은 편이며 소문난 애처가로 알려져있다.[59] 은퇴를 결심하게된 최초의 계기 역시 처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가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자신이 아내 옆에 있어줘야겠다 생각해서라고..
  • 장남 마크는 재무회계 쪽 일을 하면서 아버지의 재정관리를 담당하며 둘째 대런은 축구 선수를 거쳐 감독일을 하고 있다. 셋째 아들은 축구 에이전트 쪽 일을 한다고. 가족을 끔찍히 생각하며 아들들도 모두 아버지 집 근처에 산다고. 특히나 손주들에게 푹 빠져 산다고 한다. 손주중에서 제이크 퍼거슨이 축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리뉴의 딸 마틸다가 반해서 종이루비(종이학이라고도)를 접어서 선물했다는 그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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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제이크 퍼거슨
  • 정치적으로는 열렬한 노동당 지지자이며 노동당에서 리더십 관련 조언을 하는 고문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60][61] 한번은 맨유 구단에서 식당 아주머니와 청소부 등을 해고하려고 하자 감독직을 걸고 막았으며 감독 초창기 시절 데모하는 노동자들의 모금함을 그냥 지나쳤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고.[62] 또한 감독 노조 위원장을 한 적도 있고 타 팀의 감독들이 연락해오면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언론과 팬들의 공격을 받는 감독들의 쉴드도 잘 쳐준다.[63]베니테스 감독한텐 아닌 거 같지만. 천하의 호지슨도 쉴드쳐주면서 베니테스는 무시. 그외에도 구단의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할머니가 정년 퇴직을 하게 되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될 위기에 처했을때도 그녀가 계속 근무할 수 있게 도와주고 출퇴근을 위해 택시를 수배해주기도 했다.
  • 퍼거슨 경은 확고한 스코틀랜드 독립 반대론자이다. 때문에 2014년 주민투표를 앞두고 독립 반대 진영의 단체인 베터 투게더(Better Together)를 열심히 지지하였고 직접 기부금을 냈다. 그는 주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에 거주하지 않는 스코틀랜드인의 투표권이 없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64]
  • 퍼거슨 경이 맨유 감독을 은퇴한 뒤 현지에서 영국 국회의 상원인 귀족원(House of Lords) 의원으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이 나왔다. 오늘날 정치적 실권은 하원인 평민원(House of Commons)로 넘어가 귀족원 의원직은 거의 명예직화된 상황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원 의원들은 국가에 대한 공로와 전문성을 인정 받은 인물들이 추천을 받아 남작 작위를 받아(세습 불가. 즉 본인만 귀족 신분) 종신직으로 의원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퍼거슨 경은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긴 했으나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CBE)이라← 대영제국 훈장 중 3등급의 이름이 CBE, 이걸 단순 직역하면 사령관이긴 하다. 그러나 이는 군대 사령관과는 무관하고, 귀족원에 들어가려면 CBE는 물론 그보다 위인 기사작위로도 안 된다. 최소한 남작작위는 갖고 있어야 한다.[65] 다만 그가 정말로 남작으로 서훈이 될지는 미지수.[66]

14 기록

14.1 선수

연도클럽출장수 (골)
1957-1960퀸즈 파크[67]32 (11)
1960-1964세인트 존스턴37 (19)
1964-1967던펌린 애슬레틱88 (66)
1967-1969레인저스41 (25)
1969-1973폴커크106 (37)
1973-1974에어 유나이티드24 (9)
17시즌통산327 (167)

14.2 감독

  • 세인트 미렌 (1974-1978)
    • 스코티시 퍼스트 디비전 : 1976-77

14.3 개인수상

  • Football Writers' Association Tribute Award: 1996
  • Mussabini Medal: 1999
  • UEFA Champions League Manager of the Year: 1998-99
  • BBC Sports Personality of the Year Coach Award: 1999
  • BBC Sports Personality of the Year Team Award: 1999
  • IFFHS Club Coach of the Year: 1999
  • LMA Manager of the Decade: 1990s
  • Laureus World Sports Award for Team of the Year: 2000
  • BBC Sports Personality of the Year Lifetime Achievement Award: 2001
  • English Football Hall of Fame: 2002
  • Onze d'Or Coach of the Year: 1999, 2007
  • Professional Footballers' Association Merit Award: 2007
  • UEFA Team of the Year: 2007, 2008
  • FA Premier League Manager of the Year: 1993-94, 1995-96, 1996-97, 1998-99, 1999-00, 2002-03, 2006-07, 2007-08
  • FA Premier League Manager of the Month: August 1993, October 1994, February 1996, March 1996, February 1997, October 1997, January 1999, April 1999, August 1999, March 2000, April 2000, February 2001, April 2003, December 2003, February 2005, March 2006, August 2006, October 2006, February 2007, January 2008, March 2008, January 2009, April 2009
  • LMA Manager of the Year: 1998-99, 2007-08
  • World Soccer Magazine World Manager of the Year: 1993, 1999, 2007, 2008
  • 1985년 OBE(대영제국 훈장 4등급) 수훈.
  • 1995년 CBE(대영제국 훈장 3등급)로 훈위 승급.
  • 1999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 서임.

우승컵 수집이 취미죠

파일:맨유.jpg

  1. 1985년에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은 이후 1995년에 3등급(CBE)으로 승급되었고, 1999년 Knight Bachelor에 서임되어 Sir이 되었다. 은퇴를 계기로 맨체스터 지역 하원의원들이 퍼거슨을 종신귀족(비세습 남작)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다면 호칭이 Sir에서 Lord로 바뀌게 된다.
  2. 퍼거슨보다 전술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감독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팀을 운영하는 능력만큼은 퍼거슨을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퍼거슨 정도로 한 클럽 자체를 개조한 인물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그 사례를 찾기 힘들다.
  3. 전문가들의 평가에서는 토탈 사커로 현대축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리누스 미헬스, 카테나치오를 만든 엘레니오 에레라, 압박 축구의 창시자이자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끈 아리고 사키와 함께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일례로, 각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2013년 월드사커의 역대 베스트 선정에서는 49표를 얻어 46표의 미헬스 감독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뽑힌 바 있다. 혁신가는 늘 존재해왔고, 그들은 30대후반에서 40대에 커리어를 시작해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과거의 나이가 든 혁신가는 또다른 새로운 젊은 혁신가로 대체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미 정점을 찍고 70대까지 번뜩임을 유지한 명장은 퍼거슨이 이례적인 케이스이다.
  4.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EPL의 유럽 경쟁력 약화가 퍼거슨 은퇴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5. Knight Bachelor는 '최하위 훈작사'로 번역되고는 하지만, 3등급 CBE나 4등급 OBE 등 기사작위급보다 아래인 훈장'만' 받은 사람을 '훈작사'로 칭하는 경우도 또 많기 때문에 이는 혼란을 부르는 번역이다. OBE가 훈작사인데 Knight Bachelor가 최하위 훈작사라는 그 말대로라면 CBE > OBE >>> Knight Bachelor 라는 말도 안 되는 꼴이 만들어 진다. '훈작사'로 구글링을 해서 조금만 살펴보면 그때그때 다른 개족보를 확인할 수 있다. 훈작사라는 단어 자체도 영국 정부로부터 공인된 것인지 출처가 불분명한 단어이고, 훈장의 훈(勳)과 작위의 작(爵), 기사의 사(士) 세 단어를 짬뽕시켜 만들어진 한자어다. 제도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이 훈장과 작위를 아예 뭉뚱-그려서 하나로 퉁쳐버리게 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기사작위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냐는 잘못된 인식에 이런 혼란스런 번역이 상당한 공헌을 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원어 'Knight Bachelor'를 그대로 밝혀 적는다.
  6. 퍼거슨의 진정한 역량은 애버딘 시절에 드러났다고 보는 시각도 상당히 많은 편.
  7. 한때 퍼거슨과 비슷한 반열에서 언급되던 조반니 트라파토니, 파비오 카펠로, 오트마르 히츠펠트, 유프 하인케스 같은 명장들 모두 퍼거슨보다 적은 경기를 감독하고도 승률이 낮다.
  8. 사실 꼭 그렇지는 않은 게, 퍼거슨은 공격수만큼은 항상 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를 고집했다. 한창 뛰어나던 마크 휴즈부터 해서 드와이트 요크-앤디 콜의 투톱과 테디 셰링엄, 올레 군나르 솔샤르(비록 처음은 무명의 선수였지만)로 이어지다 그 뤼트 반 니스텔루이가 활약하고 웨인 루니카를로스 테베즈, 그리고 호날두'와 말년의 로빈 반 페르시까지. 공격진은 항상 어마어마했다.하지만 호날두와 반페르시 사이 2010년 대는 이런 탑클래스 없이도 루니한명만 기용하면서 꾸역꾸역 우승을....치차리토:나는?
  9. 그와 비견되었던 파비오 카펠로, 오트마르 히츠펠트나 그의 뒤를 이을만한 인재로 평가받던 주제 무리뉴가 모두 자신의 고정된 스타일을 못버리다 현대 축구의 흐름속에 무너져간 것과는 정반대다.
  10. 물론 필요할 경우 스페셜리스트로 쓰지 않았던 선수라도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임무를 부여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활용된 선수가 중요 경기에서 에이스 스토퍼로 활용된 박지성.
  11. 비슷하게 어떻게든 승리를 갈구하는 무리뉴의 선 수비 후 역습의 축구와는 또 달랐다.
  12. 무리뉴식 꾸역승 경기는 대체로 무리뉴 스스로도 말했듯이 버스 주차 단단한 수비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득점을 얻어 승리하는 방식이다. 반면 퍼거슨은 수비고 공격이고 라인업이고 다 별론데 일단 이기긴 한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저 감독의 능력이라 평할 수 밖에. 간단히 얘기하면 팀 전술 차원에서의 적절한 포지셔닝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포지셔닝이 적절하고, 이것이 팀 전술로도 잘 갖춰져 있다면 청소부가 그라운드에 서 있어도 상대를 막을 수 있다고 아리고 사키가 말했던 것의 실제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3. 나름 최고 라이벌이라는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컵대회에서 주전 2명에 유소년 4명, 그 외 나머지 서브멤버들로 베스트 일레븐 기용, 아스날과의 FA컵 경기에서는 풀백만 4명(...) 기용, 볼프스부르크와의 챔피언스 리그 원정 경기에서는 미드필더인 캐릭과 플레처를 센터백으로 두고, 마이클 오웬을 원톱으로 출전. 그리고 상술한 저 경기들을 모두 이겼고, 아스날은 당시 가용 가능한 선수들 중에서 최대한 고른 주전으로 출전하고 경기력 면에서는 더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2:0 패배를 당했으며, 그 중에서도 전년도 분데스리가 우승팀 볼프스부르크는 부상으로 여러물 갔다는 평가를 받는데다가 당시 맨유에서도 3번째 공격수 옵션이었던 오웬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며 침몰했다.
  14. 하지만 전술적으로도 밀리던 경우가 없던것은 아닌데, 퍼거슨의 건강문제, 스쿼드의 노쇠화, 테베즈, 호날두의 이적으로 생긴 공격력 하락 등.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꾸역승으로 계속 승리해나가며 로드신공 쓴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10/11시즌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바르셀로나에게 전술적으로도 밀리며 완패했다.
  15. 사실 퍼거슨 감독은 돈을 함부로 쓰는 편이 아니다. 오버페이 한 정도가 리오 퍼디난드 정도로 손 꼽히는 편.
  16. 부부간의 사이는 대단히 좋은 듯. 천하의 퍼거슨 감독도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수그린다고. 한번은 먼 거리로 친선경기를 가야했는데 아내가 집안청소하고 가라는 한 마디에 대청소를 거드느라 정작 감독인 본인이 그 경기에 가지 못했다고. 2000년대 초반에 은퇴를 고려할 때도 낮잠 자다가 아내 캐시에게 발로 걷어차이고 '남편 은퇴는 내가 결정하는거임.' 말을 듣고 은퇴를 포기했다. ㄷㄷㄷ
  17. 당시 퍼기경은 "퍼거슨 집안의 장남은 모두 알렉스(Alex)란 이름이라며 첫아이 이름을 알렉스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퍼기경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존이라는 걸 아내에게 들키는 바람에 거짓말이 들통나 마크가 되었다고 한다.
  18. 퍼기의 에버딘 시절을 제외하면 사실상 늘 그래왔다. 지금도 그렇다.
  19. 토트넘의 제의를 받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20. 이 마틴 에드워즈는 1986년 이후로 맨유의 감독을 선임한 최후의 맨유 경영진으로 남아있다.
  21. 조크 스틴은 셀틱 FC에서 큰 실적을 남긴 감독으로 축구 전문지에서 매기는 명장 순위에서도 높은 편에 드는 뛰어난 인물이다. 퍼거슨 감독도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평소 스승으로 모시던 스테인 감독의 죽음은 퍼거슨 감독으로서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22. 맷 버스비감독이 떠난 후, 맨유의 후임감독들은 줄줄이 실패하거나 평범한 수준에 그쳤다. 때문에 감독 은퇴후 맨유 경영진에 들어 있던 맷 버스비와 레전드 보비 찰튼 경이 후임 감독을 물색한 결과 찾아낸 것이 퍼거슨 감독이라고. 이후 보비 찰튼경은 퍼거슨이 맨유에서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그를 적극 지지하며 힘을 실어 주었다.
  23. 사실 이는 비단 맨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의 맨유가 특히 심하긴 했으나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 감독도 제일 처음 잉글랜드에 와서 한 일이 음주를 통제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는 술에 지나치게 관대했었다.
  24. 이들 중 상당수가 선수 은퇴후에 지도자 길을 걷게 되었으며 특히 마이크 펠란의 경우는 2013년 6월까지 맨유의 수석 코치직을 수행했다.하지만 스승인 퍼거슨이 은퇴하자 후임 감독인 모예스에 의해 해고되었다.
  25. 하지만 퍼거슨은 노먼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었고, 노먼 또한 방출된 후에도 퍼기를 존경하고 거액을 약속하며 퍼기의 뒷담화를 원했던 언론의 제의도 뿌리쳤다.
  26. 그 이후에는 3위 아래로 떨어진적이 없다.
  27. 당시 FA컵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28. 특히 맨유의 레전드 중에서도 손꼽히는 보비 찰튼이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29. 왼쪽부터 알렉스 퍼거슨,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 네빌, 폴 스콜스생각하니 이 라인업, 무섭다.
  30. 레스터 시티의 골키퍼 카스퍼 슈마이켈의 아버지이다
  31. 2003/04시즌 라니에리 감독(현 레스터 시티 감독) 체제하에 자신의 인수이래 첫 시즌을 시작한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는 곧 라니에리 감독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감독에게 첼시 감독직을 제안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 첫 타겟이 됐던 것이 다름 아닌 맨유의 수장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었다. 그가 퍼거슨 감독에게 감독직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첼시를 인수했던 배경을 살펴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가 잉글랜드 축구에 매료됐던 경기가 다름 아닌 2002/03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였다. 그에게 퍼거슨 감독은 그 맨유를 이끌었던 감독이자 이미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이미 들어올린 남자였다. 그러나 첼시 감독직 제안을 받은 퍼거슨 감독은 "맨유를 떠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로 그 제안을 거절하고 맨유에 남는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첼시는 결국 라니에리 감독을 경질하고 새로운 감독을 영입한다. 바로 무리뉴.
  32.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면 옆동네 첼시는 같은시즌 숀 라이트 필립스 한명 사는데 2700만 유로를 넘게 썼다...
  33. 리그 13라운드까지 진행되었을 때 6승 7무였다.
  34. 현재 EPL에서 퍼거슨보다 한팀 감독을 오래한 감독은 없다. 2위는 벵거, 3위는 모예스
  35. 알겠지만 프리미어 리그는 20개 팀이 있어 감독도 20명. 따라서 경질가능성이 가장 낮다는 말이다. 참고로 19위는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이었는데 서서히 벵거의 입지도 위험해지고 있다.
  36.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4-1로 대패한 직후 5명의 동료 선수를 실명을 인용해가며 비판했고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당시 로이 킨에게 비판을 받았던 선수들은 대런 플레처, 키어런 리차드슨, 앨런 스미스, 리오 퍼디난드, 존 오셔이다.
  37. 고든 스트라칸은 선수 시절 공격적이며 기술이 뛰어난 측면 미드필더였다. 그는 에버딘 시절 퍼거슨 감독의 휘하 아래 유럽컵을 거머쥔 핵심 멤버로 후에 맨유 선수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38. 퍼거슨 본인도 스탐을 쫓아낸 것은 큰 실수라고 인정했을정도. 이후 웨스 브라운, 로니 욘센 등으로 버티는데 한계를 느낀 퍼거슨은 리오 퍼디난드에 3500만 달러를 지르게 된다.
  39. 스탐의 나이가 이제 곧 서른인데다가 주식상장을 해 돈지랄을 하던 라치오에서 1500만 파운드 딜을 제시하자 승낙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40. (야프 스탐을 판 것에 대해) .● 퍼거슨 왈 "라치오에게 내가 먼저 18.5m 오퍼를 넣었지. 그들은 18.5m?NO, 16m? YES 라고 했었고, 나는 거절할 수 없었어. 스탐의 나이가 벌써 30세의 나이였거든. 나는 만약 우리가 1년정도 로랑 블랑을 얻을수 있었다면...이라고 생각했어. 스탐이 이적한 뒤, 웨스브라운과 존 오셔 같은 젊은 선수들을 데려왔었지만, 그것은 완전히 실패였어. 야프와 나는 같이 잘 지내. 네덜란드의 아약스 토터먼트에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에도 통화를 했어. 스탐과 나는 오랫동안 이야기했어.괜찮았어." ●스탐 왈 "나는 클럽이 나를 이적시키기를 원하는다는 걸 알았어요 너무 빠른 이적 때문에 퍼거슨이랑 갈등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죠. 퍼거슨의 비서였어요. 그녀는 퍼거슨을 바꿔줬고, 영감은 '어디있니'라고 물었어. 내가 '집 근처 주유소'라고 말하니 그는 '거기서 기다려'라고 말한 뒤 곧장 차를 타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왔었죠. 집 근처 주유소까지 온 퍼거슨은 내게 '빨리 라치오로 이적해줄 수 없을까'라고 물어보았어요...." 출처
  41. 베컴 자서전 원문 "When I first got into United's first team as a regular, my squad number was 24 (he had worn 28 before that, too). The following season I was given the number 10 shirt. The meant a great deal to me: Denis Law and Mark Hughes had both worn it before me. Maybe the history that went with the number was why I scored so many goals wearing it. I remember, though, the summer we signed Teddy Sheringham, the boss actually took the trouble to phone me when I was away on holiday in Malta to tell me he was taking that squad number off me. No explanation, NO alternative and no argument. I remember saying to Gary Neville at the time: 'What's he done that for? Whay would he phone to tell me that? Did he just want to make sure he ruined my holiday? I was devastated, trying to work out what I'd done wrong. Then, a month later when we turned up for pre-season training, he had a new shirt ready: the number 7. The boss handed me Eric Cantona's squad number. The surprise of that honour stopped me in my tacks." 출처
  42. 카가와 신지는 '퍼거슨 처럼 무서운 감독은 난생 처음'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고, 리오 퍼디난드는 그렇게 라커룸이 터지는데 밖으로 이야기가 새나가지 않는 것도 참 대단한 거라고 회고하기까지 했다.
  43. 빅매치인 경우에는 오히려 짧고 굵게 말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드록바 마크 제대로 못 잡는 새X는 끝나고 죽을 줄 알아라", "지금 저 리버풀이 리버풀이냐? 제라드? 걔 공 좀 차지, 근데 너그들에게 비할 바냐?"
  44. 이게 가끔 지나치면 사단이 나는데 대표적인 게 독일인드립이다. 이 사건으로 바이에른 뮌헨이나 분데스리가 팬덤에서는 심심찮게 까인다. 독일인드립이 무엇인지 덧붙이자면, 09-10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 3-1로 앞서다가 후반전 하파엘의 퇴장으로 경기력이 밀려 추격골을 먹혀 원정 다득점으로 패한 후, 전형적인 독일인 방식이라고 판정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발 역풍을 강하게 맞았다.
  45. 알렉스 퍼거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축구 위상 자체를 세계 최고로 끌어올렸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더 나아가 EPL, 리그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수 있다. 알렉스 퍼거슨경이 끌어올린 EPL의 전세계적 인기와 그로 인해 얻게된 엄청난 TV 중계권료는 결론적으로 리그의 중위권팀에게도 기회를 주게 되었다. 중계권료 (재정적 윤택)를 바탕으로 리그 중위권 클럽들이 더욱 두터워진 것이다. EPL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리그다. 세리에A가 몰락한 것은 돈 때문이었다. 선수영입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었지만 세리에A의 재정상태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파르마 FC, 피오렌티나는 파산했다.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거듭되며 전체적인 수준이 하락했다. EPL은 다르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라면 EPL 리그 20위가 라리가 양대산맥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의 중계권으로 받는 돈을 넘는 건 시간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46. 그로 인해 프리어미리그는 그 해 다시 UEFA 리그 랭킹 3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33년만에 잉글랜드 리그는 퍼거슨이 말한대로 UEFA 리그 포인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47. 사라고사에서 잘해서 퍼거슨이 리턴 시켰는데 볼튼전에 이후로도 폼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후, 바르샤로 컴백
  48. 자수성가해 부호가 된 글레이저는 1995년 미국프로풋볼(NFL) 팀인 플로리다주 탐파베이의 미식축구팀 뷰캐니어즈(Buccaneers) 인수해 스포츠 사업을 시작했다. 글레이저는 인수전에 뛰어들기 전만 해도 뷰캐니어즈는 만년 꼴찌 팀이어서 비용이 적게 들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착수한 것이다. 하지만 인수전 막판에 경쟁자가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2억달러 가까운 자금이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이 거래는 풋볼팀 인수 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글레이저는 인수 후 꾸준히 좋은 선수와 코치를 영입해 팀의 성적을 호전시켰다. 마침내 2003년 시즌 슈퍼볼(미식축구 결승전)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고 이후 뷰캐니어즈의 가치는 8억달러로 치솟았다. 1억9200만달러에 인수한 팀이 10년도 되기 전에 7배 가까이 몸값이 뛴 것이다. 그는 꼴찌였던 팀을 2003년 슈퍼볼 우승팀으로 키우는 능력을 보여줬다. 글레이저는 검소했지만 돈을 쓸 때는 화끈하게 쓰는 사람이었다. 전용기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출장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했고 대부분 저가항공사만 찾았다. 그는 아들 브라이언을 가리키며 "저 아이가 입고 있는 바지가 보이죠? 저게 200달러(20만원)짜리 휴고 보스 바지야. 난 겨우 20달러(2만원)짜리 바지를 입는데 말이야"라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뷰캐니어즈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조나단 그루든(당시 오레곤팀 코치)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2002년 1750만달러를 쾌척했다. 그루든은 글레이저 회장의 기대에 부응, 2003년 시즌 우승을 이끌었고 그 자신은 최연소 슈퍼볼 우승감독이란 영예를 안았다. 글레이저는 뷰캐니어즈를 인수한 뒤 탐파베이시의 팬들을 위한 행사를 많이 열었다. 팀의 선수들이나 코치가 지역사회 이벤트에 나타난 횟수의 연간 합계가 700회를 넘을 정도이니 글레이저가 얼마나 밀어붙였는지 짐작이 간다. 거의 하루에 두 건씩 누군가는 행사장에 나선 것이다. 글레이저는 이와 관련, 2003년 슈퍼볼 우승 뒤 인터뷰에서 "우리가 경기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며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도 우리를 역할모델로 여기고 있는 만큼 건전한 팀과 바람직한 모습의 선수들을 자주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팀 선수들과 지역 팬들이 혼연일체가 되면서 슈퍼볼 우승의 터를 닦았다는 게 팀 안팎의 평가다.
  49. 맨유 인수에 관심있던 거부들 리스트
    루퍼드 머독 (전 LA다저스 구단주)
    ●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
    ●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맨시티 구단주)
    하마드 알 타니 카타르 국왕 (PSG 구단주)
    ●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AS 모나코 구단주)
    맨유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기록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다 보니 맨유를 인수하기 위해 눈독을 들이는 거부들이 적지 않았다. 2000년대 초 LA다저스 등 다른 프로 스포츠팀을 사들이려고 했던 글레이저는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눈을 돌렸다. 글레이저가 영국 축구의 자존심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하려고 했을 때 영국축구팬들이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90년대 후반에도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이 맨유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루퍼트 머독맨유의 지분을 매입해 인수하려다 소액주주와 서포터 연합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간 숱한 비난과 공격에도 개의치 않고 난관을 뚫고 나와 한번 목표를 삼으면 결코 그냥 물러서지 않는 스타일의 글레이저가 여론이 악화됐다고 포기할 리가 없었다. 맨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팀인 데다 입장권은 항상 매진이었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 가치를 지닌 구단이었다. 그래서 2003년부터 조금씩 맨유의 주식을 사 들이기 시작해 28.1%의 지분을 확보한 뒤 2, 3대 주주에게 공식적으로 매수를 신청, 이를 성사시켰다. 결국, 2005년 글레이저는 맨유의 주식 75%를 인수해 구단주가 되었다. 인수금액은 7억9000만 파운드(약 1조3900억원). 하지만 이 중 2억7500만 파운드(약 4850억원)만이 글레이저 가문의 돈이었고 나머지 인수금액 중 2억7500만 파운드는 IB(투자은행)에서 나머지 2억4000만 파운드는 이자율이 높은 헤지펀드를 통한 현물출자대출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JP모건 투자은행과 리파이낸싱 과정을 거치며 5억 파운드의 우선순위부채를 가져왔다. 글레이저 가문으로서는 75%의 주식을 보유했을 무렵부터 상장폐지가 가능했지만 소액주주들과 서포터스의 반발로 강제매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 97.5%가 될 때까지 주식을 매입해야 했다. 결국 2005년 6월 22일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맨유 주식은 사라졌다.
  50. 박지성이 QPR 이적 전 팀내 연봉 순위 3위 였다. (루니, 퍼디난드 바로 다음 순위/연봉 81억) 루니가 그때 당시 154억. 박지성이 맨유를 떠나 새로운 팀 알아보던 와중에 맨유가 인상된 연봉 재계약 제시 했으나 박지성이 거절까지 할 정도로 퍼거슨과 맨유는 박지성 잡고 싶어했었다.
  51. 퍼거슨은 빅클럽 맨유에 한국인 선수 박지성을 데리고 옴으로써, 한국에 유럽 축구의 대중화의 계기를 마련해줘 해외축구 팬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이다. 과연 박지성이 맨유가 아니라 다른 빅클럽으로 갔다면 해외축구가 당시 그런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한때 '제한맨'이라 할정도의 맨유공화국이었던 축구팬들 사이에서 퍼거슨은 맨유 클럽감독인지 한국 감독인지 헷갈릴 정도로 최고의 지분을 자랑한 적 있기도 하다. 한국인 선수를 데리고 있는 빅클럽 감독의 고충을 겪게된 원조로, (한국인들에겐 최고의 선수인) 박지성에게 죄다 궂은 일을 전담시키기에 허구한 날 영감탱이라 불리기도 했다. 박지성과 같은 윙 포지션였던 동료 호날두, 나니, 긱스도 마찬가지. 2010년-2011년 한국 국대를 맡았던 조광래와 관심도를 나란히 했으니, 퍼거슨은 '해외축구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전설의 9분 출전 박주영이 이적한 아스날의 감독 벵거와 홍명보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박지성이 QPR로 이적하며, 누가봐도 실력도 딸리면서 입만 산 레드냅 QPR 감독이 해축팬 내 까임의 왕좌에 2013년에 등극. 레드냅은 'QPR 빅네임들 실망스러워' 인터뷰를 시전. "QPR은 5경기 무패를 달렸던 팀이다. 첼시전을 이기고, 토트넘과 웨스트햄을 상대로 무승부를 거뒀던 팀이란 말이다. 당시 출전 명단에 비해 변화를 많이 주긴 했지만, 그래도 MK Dons를 이기기는 충분하다고 믿었다. 물론 이길 작정이었다. 오해는 말아달라. 내가 선발로 내보낸 선수들을 봐라. 맨유와 레알에서 데려온 박지성, 파비우, 그라네로 같은 선수들 말이다. 이번 경기의 결과나 경기력이 그동안 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되었을 거다. 물론 난 아니지. 난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특정 선수들이 선발 출전하는 걸 원했던 사람들에게 해답이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번주에 몇몇 선수들을 클럽에서 내보내고, 몇명을 새로 영입할 계획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할 거다. 난 이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거다" 이런 레드냅을 겪고나니, 한국 해외축구팬들은 은혜로운 퍼거슨 영감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52. 그 당시 영상을 보면 퍼거슨이 상당한 용기를 냈다고 할 수 있다. 박지성이 QPR로 이적한 첫 시즌에 맨유와의 QPR 홈 경기에서의 일이다. 경기 시작 전, 퍼거슨이 QPR쪽 벤치에 직접 걸어가서 벤치 앞을 소심하게(...) 서성였는데(이적하게 만든 상황이 미안했는지, 퍼거슨답지 않게 박지성에게 먼저 말을 못 걸고 쭈뼛쭈뼛 서성였다! 진짜다!), 벤치에서 서브멤버로 대기하던 박지성 선수는 이를 퍼거슨 감독이 자신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는 제스처라고 간파하고 벤치에서 일어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퍼거슨 감독에게 악수를 청했다. 퍼거슨도 흡족한 미소를 띄며 박지성과 악수 및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고 바로 맨유 쪽 벤치로 돌아갔으며, 상당히 훈훈한 장면이기도 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멀뚱멀뚱 퍼거슨을 쳐다보던 레드냅 감독은 덤(...)
  53. 자기가 스스로 날린게 아니라 딴 인간이 날린거라 그 마음은 설명이.....
  54. 일부 축구팬 사이에서도 알렉스 퍼거슨이 마지막 임기까지 선수단의 세대 교체를 실패한 것을 부진의 원인 중 하나로 꼽고 있기는 하다.
  55. 무리뉴 감독은 자신이 첼시에 부임한 초기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이긴 후, 퍼거슨 감독이 포도주를 같이 마시자며 상대팀 감독인 자신을 감독실로 초청해서 환대해 준 것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2007년에도 비슷한 사례로 같이 식사도 했었는데, 무리뉴 본인이 회상하길 혹시 이것이 자신을 후계자로 데려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퍼거슨 은퇴 후 그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이냐는 의문에 무리뉴 감독의 이름이 많이 올라왔지만, 결국 데이비드 모예스로 결정났다. 그리고 모예스는 경질되고, 후임은 루이 반 할이 되었다. 반 할은 2년간 맨유감독을 하다 경질되고 2016-17 시즌부터 맨유 감독은 무리뉴가 맡게 되었다!
  56. 영감은 치열하게 싸우던 적을 두둔하던 사례가 없던 건 아니고, 보통 그럴 경우 영감이 판단하기에는 그 적수는 이미 같이 정상에서 경쟁할 힘이 떨어진 상태다. 벵거와 든 정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57. 하지만 이 때도 대승에 기뻐하긴 커녕 상당히 씁쓸해하는 표정을 보였다.
  58.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자기 떡밥에 낚이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59. 프리시즌 경기가 있다고 말했음에도 아내가 어차피 친선경기아님?? 하면서 이삿짐 나르라고 해서 결국 경기장이 아닌 집에서 이삿짐 날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애초에 퍼거슨도 젊었을 때 한 성질머리 했기 때문에 그 성질머리와 함께한 아내의 내공도 만만찮다고 볼 수 밖에 없겠지만...
  60.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는 할당된 영국의회 의석 총 57석 중 무려 41석을 노동당에 몰아준 노동당 텃밭이다.(2010년 총선 기준) 나머지 의석도 11석은 중도정당인 자유민주당(영국), 6석은 스코틀랜드 국민당이고 보수당은 단 1석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2010년 총선 때 아무리 보수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수당이 집권여당이 된 선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코틀랜드인들의 정치성향이 상당히 뚜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2015년 총선에서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주장하는 SNP가 대박을 터뜨려서 59석 중 56석을 차지하고 노동당 등 영국 주요 3당은 1석씩만 나눠 갖는 대격변이 일어나긴 했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노동당 출신 영국 총리였었던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은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블레어는 그나마 집안은 잉글랜드쪽이지만, 고든 브라운은 집안도 대대로 스코틀랜드계라고.
  61. 맨체스터가 속한 북부 잉글랜드 지역도 스코틀랜드와 비슷하게 노동당 지지자가 많다. 결국 그가 태어난 곳이나 오래 생활한 곳이나 노동당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고 볼 수 있다.
  62. 이 때 퍼거슨이 데모행렬을 그냥 지나쳤는데 같이 있던 조크 스테인 감독이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그들의 모금함에 돈을 기부한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63. 앙숙처럼 보이지만 언론을 통해 무리뉴도 변호한 적이 있다.
  64. 스코틀랜드가 독립국이 아닌 탓에 법적으로 '스코틀랜드인'의 범위를 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영국 국적자+기타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잉글랜드에서 거주한 퍼거슨 경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독립 반대를 주장하면서 기부금을 내는 정도였고, 실제 주민투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잉글랜드인들은 투표권을 얻었다. 예를 들어 작가 J. K. 롤링은 잉글랜드 출신이지만 오래 전에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에 이주했기 때문에(그 유명한 해리 포터 시리즈도 에든버러에서 집필함) 주민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참고로 롤링 역시 퍼거슨 경처럼 스코틀랜드 독립에 반대해 베터 투게더를 후원했다.
  65. 퍼거슨이 쓰고 있는 Sir는 준남작 이하 Knight Bachelor 이상에게 부여되는 경칭이다. 남작 이상의 작위를 받으면 그보다 격이 높은 Lord로 불리게 되며 귀족원의 일원이 된다. 상원의 이름이 괜히 House of Lords가 아니다.
  66. 참고로 지금 귀족원이 너무 비대해진데다가(하원인 평민원보다 의원이 많은데 상원이 하원보다 큰 나라는 전세계에서 영국 뿐이다) 이런저런 논란이 많아 의원 정수 축소·제한 주장이나 아예 다른 나라처럼 선출직으로 변경하자는 주장까지 나와 있는 상태이다. 만약 100% 직선제로 바꾸게 되면 퍼거슨 경이 의원이 될 순 없을 듯. 본인이 몸소 선거에 출마한다면 또 모를까
  67. 퀸즈 파크 레인저스와는 전혀 다른 스코틀랜드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