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우정치

1 개요

중우정치(衆愚政治, Greek: ὀχλοκρατία, okhlokratía; Latin: ochlocratia).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한 대중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치를 의미한다. 무리라는 뜻을 가진 중(衆)에 어리석다는 뜻을 가진 우(愚)의 결합어이다. 영어로 마브 룰(mob rule)이라고 경멸조로 부르기도 하는데 라틴어에도 "모빌레 불구스"(mobile vulgus)라고 "변덕스러운 군중들"이란 용례가 있다.

2 본문

이 용어가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중우정치를 주장한 이들은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대표자가 시민을 통제할 수 있는 통솔력을 상실하였을 때 통제불능이 된 국민들을 폭민(暴民), 상대적으로 이성보다 감성에 약한 (한마디로 선동되기 쉬운) 서민(민중)들에게 통제된 정보를 제공하여 일부 정치가의 의도대로 굴리는 것을 빈민(貧民)이라 하였다. 플라톤은 전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에 초점을 두었다.

민주주의의 단점에 대해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주 써먹는 떡밥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가 국개론독재, 대민영합주의 등. 다만 국개론이 플라톤의 관점에서 본 중우정치라면[1], 독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본 중우정치에 해당된다. 즉, 같은 중우정치라도 사람에 따라 서로 강조하는 면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노자가 도를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고 한건가

실제로 민주주의의 모순점에 대해 가장 큰 떡밥으로 지정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당장 그리스 중우정치의 등장은 뛰어난 지도자이던 페리클레스가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후에 그가 사망하자마자 시작되었으니까. 이는 극단적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인 리더십의 부재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을 잘 시사하며, 따라서 모두가 정치적으로 평등해야 할 민주주의 치하에서 결국 누군가는 남들을 이끌어야 하게 되며,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권위를 가진 리더 계층이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게 된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가 껍데기만 민주주의인 참주정, 귀족정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근대 민주주의 국가들은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지만 실질적인 정치는 선출된 대표들에 의해 행해지는 간접적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간접적 민주주의 체제 역시 대표들이 선출되기 위해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하므로 중우정치의 폐단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 힘들다. 그 예로 많은 나라에서 연금 정책이나 담배의 해악 등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원인을 뻔히 알면서도 제 살 깎아먹는 것이 대표적으로 간접민주정 치하에서 나타나는 중우정치의 폐단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는 정책이 무조건 장기적으로 공공의 이익이 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

다만 중우정치에 대한 대응이 결국 플라톤 시절부터 엘리트주의였다는 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일 수 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조화시킨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 관료제처럼 안팎으로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로베르트 미헬스가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을 설파했듯이, 반드시 부유층의 정치를 의미하지 않더라도 (또 민주적 조직이라 하더라도) 모든 정부의 형태는 궁극적으로 과두정일 수 있다.[2] 사실 넓은 의미에서 대의 민주주의 역시 과두정의 형태를 띄고 있으니까.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가 혼재된 형태가 대의 민주주의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두고 봉건사회 국왕의 신민 지배와 대비되는 엘리트의 대중 지배 형태라 논한 바 있다.

물론 슘페터와 같은 엘리트 민주주의론에 대항하여 다원주의 이론과 시민사회론 등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이 다양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반론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리더십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 역시 반대편 극단이긴 하지만.

알렉시스 드 토크빌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2권에서 인민재판의 사례를 소개하며 평등이 자유를 위협하는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토크빌이 아직 공업화되지 않은 미국의 소규모 농촌 마을 공동체만 본 결과이며, 산업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평등이 자유를 위협하는 중우정치보다 법인기업의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평등을 위협하는 엘리트주의의 위험성이 훨씬 커졌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대중의 변덕스러운 의사에 따른 재산권 침해를 막기 위해 헌법을 통해 대중의 결정권을 제약하는 헌정 민주주의를 제시하였다. 하이에크가 피노체트를 옹호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헌법의 수호자가 누구냐는 골치아픈 문제부터 시작해서(헌법이란건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 이들은 대중보다 현명하다고 보증할 수 있는가?), 사르토리가 지적하다시피 헌법이 구체적일수록 민주주의는 압살된다는 문제 역시 있다. 과도한 민주주의를 견제할라고 헌법을 만든게 아니던가? 헌법의 수호자는 보통 그 나라의 우두머리다. 한국의 헌법 같은 경우 대통령이 한국 헌법의 수호자로 명시가 되어 있다. 근데, 역대 대통령 중 헌법을 지킨 분이 몇이나... 군사 쿠테타나 안 일으키면 다행 대통령이 혼자 폭주할 시에 대한 견제장치로 헌법재판소, 국회가 있다. 헌재는 해당 법의 헌법적 적법성을 가려주는 곳이고[3], 국회에서는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여겨질 시에 탄핵할 권리가 있다.[4] 3권 분립이 그냥 있는게 아니다.

요약하자면 중우정치에 대한 공포는 플라톤 이래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지만, 이에 맞선 민주주의 이론가들의 반론 역시 치열하다고 할 수 있겠다.

  • 속류적 형태의 중우정치론의 가장 큰 문제는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과장된 귀족주의-낭만주의적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우정치론은 '대중' 을 단일한 존재로 가정한 채 그들의 몰취향과 비이성을 경계하고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 '대중' 은 다양하게 분할되어있다. 즉, 집단 내에서 중우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의사결정 실패가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대중' 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이 곧바로 한 사회의 전 대중이 광기에 빠진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비약인 것이다.
  • 반대로 중우정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대중'의 다양성이 정치의 다양성으로 직결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정치는 사실상 양당제 혹은 3~4개의 당이 정치판을 독점하여 나눠먹는 구조로 흘러가고 있다. 때문에 사실상 이 정치세력이 한 계층을 형성하여 민주주의를 통해서 자신들을 뽑아준 대중을 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들을 위한 정치를 계속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걱정한 귀족정, 참주정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관심 혹은 비이성적인 대중들은 새로운 정당에 관심을 가지거나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각자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이길 것 같은 후보, 잘 아는 우리가 남이가 지역정당을 뽑는 행위가 반복됨으로써 중우정치의 우려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3 관련 항목

  1. 기본적으로 플라톤은 절대진리(이데아)가 있다고 믿었고, 이때문인지 피터 드러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에게 전체주의적 사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어떤 이(통치자 또는 통치집단)가 생각하는 절대진리(기준)에 반하는 사상은 틀린거고, 거기서 한발짝만 더나아가면 다양성은 사회적으로 해악이 되니 없애야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으니깐.
  2. 이는 현대 정치학에서 많은 부분 반론이 이루어졌다. 조직 내의 민주주의와 조직 간의 민주주의는 분석레벨 자체가 다른 문제이다. 게다가 미헬스 본인도 민주주의에 대한 노력 자체를 폄하하지는 않았으며, 많은 부분에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3. 다만 헌법재판소 역시 헌법에 따른 판결을 내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4. 국회의 최종오의다. 그러나 잘못 썼다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처럼 탄핵을 한 측에서 쪽빡을 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