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슘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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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Alois Schumpeter (1883년 2월 8일 ~ 1950년 1월 8일)
끝말잇기 할 때 이 사람의 이름을 알아두면 좋다

1 소개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동시대에 살았던 케인즈와 함께 경제학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기

1883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트리시(현 체코) 에서 출생. 아버지는 의류제조업체의 경영자 였으며, 어머니는 유명한 의사의 딸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슘페터의 아버지는 슘페터가 네 살이던 해에 사고로 목숨을 잃고 어머니와 이글라우(현 루마니아)를 거쳐 1888년에 그라츠(현 오스트리아)로 이사를 간다. 여기서 슘페터는 훗날 자신의 의붓아버지가 되는 지기스문트 폰 켈러를 만나게 된다. 슘페터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슘페터와 새로운 가족은 비엔나로 거처를 옮기고 여기서 슘페터의 어머니는 폰 켈러와 재혼 한다.[1] 폰 켈러는 귀족집안 출신에다가 장교출신으로, 폰 켈러의 사회적 지위는 슘페터 모자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데, 시골 부르주아가문에서 단숨에 수도 황실귀족가문의 자제로 신분이 올라간(?) 슘페터는 귀족자제들만 들어갈수 있는 테레지아눔[2]에 입학할수 있었다.

테레지아눔을 졸업한 후 슘페터는 빈 대학 법정학부에 입학한다.

2.2 빈 대학

2.3 오스트리아 공화국

슘페터는 1927년 ~ 1928년, 그리고 1930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강의를 했다.

2.4 미국 망명

1932년 선거를 통해 나치당이 집권하자, 슘페터는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1939년 미국국적을 획득했다.

3 주요 저서 및 업적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창조경제라는 단어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원제는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1942)에서 정립된 개념. 창조적 파괴란 마르크스 경제학을 재해석한 것으로, 기술의 발전이 끝없이 기존의 기술체계를 부수고 새로운 체계를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LP판에서 카세트 테이프, CD-ROM을 이어 멜론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로 이어지는 역사, 공중전화에서 삐삐로 그리고 PCS를 넘어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역사 등을 살펴보면 새로운 기술은 옛날의 기술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창조적 파괴의 예이다. 옛날통닭이 치느님으로!

슘페터는 경제학자이면서 정치학자이기도 했는데, 저서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를 통해 그는 "민주주의란 인민이 단지 자신을 통치할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란 어떤 숭고한 이상도, 정치사상도 아니고, 단지 정치적인 수단 내지는 기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슘페터가 바라본 민주주의는 곧 '선거'이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이란 보다 완전하고 안정적인 선거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슘페터는 기본적으론 오스트리아 학파 출신이지만, 상당히 이단아적인 존재이다.

4 여담

하버드대학교 재직 시절 제자 중 한 명이 폴 사무엘슨이었다.

재밌게도 1883년, 카를 마르크스가 죽은 해에 케인즈와 동갑으로 태어났다. 경제학의 거두가 죽자 2명의 또다른 거두가 탄생한 셈.[3]

국내에선 5공정권 당시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불온서적으로 분류해서 민주화운동가들을 체포해서 좌경용공으로 몰아갈때 재판에서 흔히 증거자료로 사용했다.

끝말잇기에서 슘으로 끝나는 단어들에 대응할 수 있는 단어. 하지만 터븀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븀페터

  1. 하지만 이마저도 나중에 이혼했다.
  2.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마리아 테레지아(1번 항목) 가 세운 귀족전용 명문 사립학교
  3. 비슷한 케이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죽은 해에 아이작 뉴턴이 태어난 사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