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勝
(? ~ B.C. 208)
1 개요
동양의 스파르타쿠스
진(秦)나라 말기 농민봉기의 주도자. 자는 섭(涉).
무능한 황제 호해와 환관 조고의 온갖 병크로 몰락해가던 진나라를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결정적 몰락의 원인을 제공한 농민 반란을 일으킨 중국의 인물. 동양 최초의 민중 혁명가[1]이자 초한전쟁의 계기가 된 인물.
2 생애
평소 호방하고 보스 기질이 충분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며, 소작농으로 전전하던 시절부터 허풍을 잘 떨어 그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연작(燕雀, 제비와 참새)이 어찌 홍곡(鴻鵠,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느냐(燕雀安知 鴻鵠之志哉)'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은 현재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 등으로 변용되어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만리장성의 건설에 동원되어 공사처로 향하던 중 큰 비 때문에 900명이 함께 고립되어 기일에 맞춰 도착할 수 없게 되자, 이대로는 엄격한 법 집행으로 목이 날아가게 된 처지라 이왕 죽을 바에 한번 뒤집어보고 죽자라는 생각으로 프로파간다를 퍼트렸다.[2] 봉기에 앞서 비단천에 '진승왕'이라고 붉은 글로 쓴후 물고기 배속에 넣었던 것. 사람들이 그 물고기를 사다가 배를 가르니 '진승왕'이란 글이 적인 비단천이 나왔다. 모두들 진승이야 말로 하늘이 돕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후 부하들의 신뢰를 얻은 진승은 동료 오광과 함께 초의 장군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남긴 말이 그 유명한 "세상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3] 이후 스스로 '초를 부흥시킨다'라는 의미로 국호를 장초(長楚)라고 짓고 왕위에 올랐으며, 친구 오광을 부왕(副王)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진시황이 쫓던 당대의 명사 장이, 진여를 포섭해 휘하에 두어 세력을 확대시켰으며 자신이 진시황의 적자이며 억울하게 죽은 부소 황태자, 또는 초의 명장이자 항우의 할아버지인 항연 장군이라고 선전해 많은 무리가 호응하였다.
진승의 반란에 편승하여 진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밀고 올라와 기세를 크게 올리고 각지에서 군세를 일으켰다. 항우나 한고제도 이 무렵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진승은 결국 일개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반군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로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다.(항우는 이 점을 보완하여 초 왕실의 후예 초회왕을 의제로 옹립하여 권위를 삼았다.)
육국의 후손들은 진승에게 굳이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하들도 점점 진승을 이탈하게 된다. 부하 무신이 조왕을 사칭하며 배반을 하고, 또 다른 부하인 주문이 함곡관에서 진의 명장 장한에 의해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몰락의 조짐이 보인다. 더욱이 친구 오광마저 부하의 배신으로 죽자 실의에 빠지게 되고, 진 정부군의 대대적인 수세에 몰린 끝에 결국 자신의 마부에게 살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자세한 전개는 진승·오광의 난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패배자가 되었지만 그의 행동이 마냥 헛되지 않았다. 진의 멸망 및 훗날 전한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초한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를 단순한 반란 주동자로 기록하지 않고 제후들을 기록하는 '세가'에 그를 당당하게 기록해 놓았다. 진승은 진에 반기를 들고 진의 타도에 실패하였지만 진승이 봉한 제후들과 장상들이 결국 진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세가 범주에 포함시킨 것 같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에서는 진승은 패배하여 사라졌기에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고 나온다. 이 책에선 진승이 호탕한 것만은 아니라 치졸한 면도 있었다고 나오는데, 그가 왕이 되자 오랜 친구가 출세하고자 찾아왔으나 당연히 병사들에게 문전박대당하던 걸 진승이 반갑게 맞아줘서 궁궐에서 살게되었지만 당연히 일자무식 농부이던 친구는 궁궐에서 무시당했고 그래서 진승의 과거를 재미삼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가 이를 알게된 진승이 분노하여 처형시켰다고 나온다. 그래서 과거 자신을 박대한 사람을 되려 벼슬을 주고 등용하게 한 한신과 대조적이라고 깐다.
진승이 왕이라 칭할 수 있었던 기간은 고작 6개월밖에 되지 않지만 후에 진승이 일으킨 반란을 시작으로 그 휘하에 있던 장졸들이 결국에는 진 제국을 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마천이 진승을 달리 보는 것이다. 한고제도 진승을 반기를 든 선배로 높이 보아 진승의 무덤에 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고 은왕(隱王)이라는 시호도 내려주엇다.- ↑ 황금가지에서 정식으로 낸 쿠보다 센타로 원작 일본만화 만화로 읽는 사기 1-항우와 유방에선 세계 최초의 민중 혁명이라고 잘못 나왔다. 이보다 200여년전 로마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세계 최초는 아니다.
- ↑ 고우영은 작품 초한지나 십팔사략에서 일부러 진나라 군인들에게 진승이 가서 욕먹을 짓(군인들에게 가서 조그맣게 욕을 한다)을 해서 실컷 두들겨 맞고 이걸 오광이 열악한 대우를 조금만 고쳐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이렇게 때린다면서 어찌 이걸 두고 보겠냐고 사람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다고 나온다.
- ↑ 이는 고려시대 만적의 난 때에도 만적이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 말의 서양 버전 명대사는 1381년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 때의 유명한 구호인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하던 시절에 귀족이 어디 있었는가?(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