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 ? ~ BC 202 |
이름 | 장이(張耳) |
직위 | 상산왕(常山王), 조왕(趙王) |
시호 | 경왕(景王) |
출생지 | 위나라 대량(大梁) |
1 개요
초한쟁패기에 활약했던 중국의 인물.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는 본래 위(魏) 출신이었다.
위나라가 멸망 당하기 전에는 그 유명한 전국사군자의 한 명,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의 문객으로 지내던 적도 있었다.
2 위나라 시기
장이의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기서 나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위무기는 BC 243년에 사망했다. 사마천(司馬遷)이 명성이 제후들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사실은 허전(虛傳)이 아니다라고 까지 표현한 신릉군의 문객이었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당시에 이십대 중반에서 삼십대는 되었을텐데, 게다가 신릉군은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조(趙)에 망명하여 보냈다.
BC 253년 이전에 스무살에서 서른살 정도의 나이였다면, 초한전쟁 기간 중에는 70세에서 80세 무렵이 된다. 그야말로 노익장 그 자체. 거창한 빈객이 아니라 대충 10대 무렵에 신릉군을 추종하여 쫄래쫄래 따라다닌 수준이었다고 해도, 초한쟁패기에는 상당한 나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나이와는 달리 상당히 분주하게 활약했다.
젊은 시절에는 어떤 일로 죄를 지었는지, 현재 하남성(河南省) 지역인 외황(外黃)으로 숨어들어와 떠돌이처럼 살았는데, 그 곳에서 어떤 부자의 빈객이 되는 사람과 친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인맥으로 인해 팔자를 바꾸게 되었는데…….
그 빈객이 모시는 부자의 딸은 미모가 상당했는데, 어떤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무슨 문제가 생겨서 도망쳐 나온 상태였다. 이에 장이와 친분이 있는 빈객은 "괜찮은 남자 찾는다면, 장이만 한 사람도 없다." 라고 설득해서 결국 본래 남편하고는 아예 이혼을 해버리고 장이에게 시집을 왔다.
떠돌이 신세에서 미모의 아내도 얻고, 또 부잣집 처가로 인해 생활도 여유로워진 장이는 덕분에 가까운 곳, 먼 곳 할 것 없이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두루 얻을 수 있었고, 인맥이 또 인맥을 불러 장이는 벼슬까지 얻어 외황의 수령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 만나고 교류하는 일을 좋아한 탓에 장이의 이름도 꽤 유명해졌고 여기저기서 사람들도 찾아와 장이를 만났는데, 그런데 심지어 그런 사람 중에는 유방(劉邦)까지 있었다! 유방이 아직 시골 말단 공무원 자리도 얻지 못한 말 그대로 백수 시절의 일이었는데, 유방도 사람 만나고 교류하는걸 좋아하는 인물이라 몇 번 찾아와서 몇 달을 묵고 가기도 했을 정도다.
장이는 그런 많은 사람 중에서도 진여(陳餘)와 아주 사이가 좋았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역시 장이의 나이가 많아 진여는 장이를 아버지처럼 모시다가 나중에는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3 진나라 시기
그렇게 무탈하게 살기만 할 것 같았는데…… 위나라가 망해버렸다.
처음 몇년 동안은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후 진나라는 장이와 진여가 이름 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잡으려고 했는데, 장이에게는 천금의 현상금을 걸었고 진여에게는 오백금의 현상금을 걸었다. 장이와 진여는 성까지 갈아버리고 진성(陳城)으로 숨어 들어가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먹고 살았다.
진나라의 천하가 계속될때는 철저하게 숨을 죽이고 살았는데, 하루는 마을의 관리가 진여에게 매질을 가하려고 하자 진여가 화를 내면서 대들려고 했는데, 장이가 진여의 발뒤꿈치를 밞아 그냥 얻어터지게 한 적이 있었다. 관리가 신나게 진여를 두들겨 패고 떠나자 장이는 즉시 진여를 이렇게 꾸짖었다.
"내가 처음 그대와 무슨 말을 했던가? 오늘 보니 조그만 치욕을 못 참고 한낱 시골의 일개 관리 손에 죽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장이의 신중한 말에 진여도 수긍을 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다 보니, 진나라는 두 사람에게 수배령을 내렸지만 두 명은 오히려 문지기 신분으로 마을에 "장이, 진여라는 놈 찾습니다." 라는 령을 전할 정도였다(……)
이후 진승 · 오광의 난이 발생하면서 드디어 두 사람에게도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진승(陳勝)은 세력을 키워 장이와 진여가 있는 진성도 장악했는데, 이때 두 사람은 다시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서 진승을 섬기기로 했는데, 이름 높은 명사를 얻은 진승의 측근들도 두 사람을 매우 반겼다.
그런데 진승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고, 장이와 진여는 여기에 대해 전략적으로 좋지 않다며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진승은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여기에 실망한 진여의 제안으로 하북을 평정하는 무신(武臣)의 별동대가 편성되었고, 장이와 진여는 좌우 교위(校尉)가 되어 무신을 따라 나섰다. 3천의 별동대를 이끈 무신은 괴철(蒯徹) 등의 도움으로 상당한 세력을 만들었다.
일이 이쯤 되자 무신도 나름대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장이와 진여도 진승이 마음에 들지도 않는데다 자신들의 계책을 무시했던 것도 괘씸하여 무신에게 독립을 권하게 되었다. 이에 무신은 장이를 우승상에, 진여를 대장군에 임명하여 마침내 스스로 조왕(趙王)이 되어 장초로부터 독립하고 말았다.
당연히 진승은 분노해서 무신의 가족들을 잡아서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진승의 측근이었던 채사는 "지금 가장 큰 적이 진나라인데, 무신도 적으로 만들어서 좋을게 없음" 이라고 주장하자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해 무신을 인정해주고 진나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무신이 이런 명령을 들을 이유도 없었고, 장이와 진여 역시 "차라리 연나라 땅을 먹자" 고 권해 휘하 장수인 한광(韓廣)을 파견하여 세력 확대만을 노렸는데, 한광은 연나라 지역을 평정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인이 무신을 따라해서 스스로 연왕의 자리에 오르고 만다. 무신은 이에 격분하여 진승의 심정을 이제 알았겠지. 연나라와 전쟁을 치루었으나 그다지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이후 이량(李良)의 배신으로 인해 무신은 죽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은 쑥대밭이 되었다. 장이와 진여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했고, 조헐(趙歇)이라는 인물을 왕으로 세워 세력을 수습했다. 진여는 군사를 이끌고 이량의 습격을 물리쳤으나, 문제는 이제 이량 따위가 아니었다. 당대 최강의 세력인 장한이 북상했던 것이다.
장이와 진여 등은 거록으로 우선 도주했는데, 장한은 수하인 왕리(王離)[1] 를 보내 거록을 포위하도록 했다. 진여는 성이 포위가 되기 전에 북쪽으로 달아나서 수만의 군세를 얻은 후 다시 남하했지만, 거록을 포위하고 있는 진나라 병사들이 워낙 가공스러워서 함부로 싸움을 걸기도 힘들었다.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군은 그 군세도 강력할 뿐만 아니라, 거록의 남쪽인 극원(棘原)에 주둔한 장한이 용도(甬道)라는 양식 운반로를 건설하여 꾸준히 군량을 안정적으로 보급하고 있었기에 사기도 왕성하여 거록을 매우 세차게 공격했다. 이에 반해 거록 내부에서는 양식이 바닥나고 있었고, 병사들의 숫자도 많지 못했기에 대단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워낙 성 내부에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장이 등은 성 밖의 진여에게 수차례 사람을 보내 SOS 사인을 보냈지만, 답이 없기는 진여도 마찬가지였기에 뭘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몇개월이 지나자 악이 바친 장이는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이라는 인물을 보내 진여를 꾸짖었다.
"옛날 나와 장군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어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소. 오늘 조왕과 이 장이의 즉음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는데 장군은 수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끼고 있으면서 우리를 구원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디에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자고 맹세한 의가 있단 말이오? 그래도 장군에게 얼마간의 신의가 남아있다면 어찌하여 진나라 진영으로 달려가 함께 죽으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오? 설사 그렇다 해도 십에 한 둘은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소?"
즉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는 것. 진여는 자신을 찾아온 장염과 진택에게 5천명을 주어 한번 돌격하게 해보았지만, 5천 명은 진나라 군에 접근하기가 무섭게 녹아내리고,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때 성 밖에는 장이의 아들이었던 장오(張敖)도 만 명의 병사를 북쪽에서 조직하여 내려와 있던 상황이었으나, 사태가 이런 마당이니 손을 쓸 방도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거록대전 자체는 항우(項羽)의 활약으로 제후군이 승리할 수 있었고, 장이와 조헐도 성 밖으로 나와 여러 제후들에게 감사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진여를 본 장이는 "임마, 너 왜 나 안구해줬어?" 하고 꾸짖고는, "장염과 진택은 어디갔냐" 하고 물었다. 진여는 이렇게 대답했다.
"장염과 진택이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조왕과 장군을 구해야한다고 나를 책망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먼저 시험 삼아 진군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그들은 모두 복멸되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소."
그런데 장이는 진여가 두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해서 몇 번이나 "정말이냐" 고 물었고, 이에 진여는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 장군의 인수를 장이에게 줘버렸다.
"장군께서 나에 대한 원망이 이리 깊은 줄은 정말로 몰랐소. 내가 이따위 장군의 직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막상 장군의 인을 받은 장이도 놀라서 받지 못하고 있는데, 진여는 우선 인수를 주고 뒷일은 보지 않고 본인은 똥 싸러 화장실로 가버렸다. 그때, 장이의 빈객 중에 한명이 말했다.
"제가 듣기에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후에 그것이 화가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진여장군이 장군의 인수를 장군에게 주었는데 장군께서 받지 않으신다며 그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어 상서롭지 못합니다. 빨리 취하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이는 인수를 자기가 챙기고 주위 사람들을 수습했는데, 화장실에서 돌아온 진여는 장이가 진짜로 인수를 거두어버린 것을 보고는 경악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장이는 진여가 거느렸던 군사들도 모두 거두어버렸는데, 진여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하상(河上)으로 가서 낚시나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이때부터 둘의 사이는 완전히 멀어져 버렸다.
4 초한전쟁 시기
이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때 장이는 조나라 땅을 나누어 따로 상산왕(常山王)이 되었지만, 진여는 항우가 공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남피 주변의 3개 현을 조금 떼어주는 정도에서 끝나게 되었다. 이때문에 열이 받은 진여는 전영(田榮)이 항우에게 대항할때, 그 군사를 빌려 장이를 날려버렸다.
이 때문에 도망치게 된 장이는 당초에 항우에게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듣고 당시 상산의 상국이자 항우의 심복이었던 항영(項嬰)을 죽이고, 삼진을 평정 중이었던 유방에게 합류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유방과 보조를 맞추었다.
유방은 팽성대전에 앞서 진여의 도움을 구하려고 했지만, 진여는 장이를 죽이면 군사를 보내주겠다며 강짜를 부렸다. 자기에게 의탁한 사람을 죽일 수 없었던 유방은 장이와 비슷하게 생긴 죄수의 목을 보내 진여의 군사를 빌리는데 성공했는데, 팽성대전에서 대패하면서 이 사실이 진여에게 알려졌고, 진여는 유방을 적대하게 되었다.
이후 한신의 북벌에 조참(曹參) 등과 함께 같이 나서 대나라와 조나라 평정에 도움을 주었다. 결국 한신이 정형 전투에서 배수진을 이용해 진여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서, 진여는 참살되었고 장이는 원수를 갚게 되었다. 이후에는 한신이 유방에게 부탁하여 조나라 왕에 임명되었다.
2년 뒤에 장이는 사망했는데, 유방은 장이에게 경왕(景王)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이의 아들인 장오가 조왕을 이어받을 수 있게 하고는, 장녀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장오에게 시집 보냈다.
5 평가
진여를 참살하는 장이의 그림[2] |
행적을 보면 사실상 초한전쟁 시기 활약한 주요 인물들 중에는 역이기와 함께 가장 노익장이 되는 인물. 다만 정사 삼국지와는 다르게 초한전쟁에 대해서는 보통 소설 초한지만 보는 경우가 많고, 이런 경우에 이야기의 중심을 위해 항우 vs 유방에만 큰 비중을 주는게 대부분이기에 약간 사이드 스토리인 장이와 진여는 주목을 받지 못해, 노장이라는 사실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당대에 대표적인 명사(名士)로서 상당한 명성을 날렸고, 이후 한신의 북벌 등에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며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진여와의 우정과 이후 대립 때문에 우스운 꼴이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우정의 덧없음의 사례가 되어, 괴철이 한신을 설득할때도 언급되었다. 당시 괴철의 언급에 따르면,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임은 장이가 먼저 있는게, 진여는 거록대전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여를 비난하고, 또 진여의 군사들까지 거두어버린 것이다. 즉 분쟁의 씨앗은 장이가 먼저 뿌렸다. 다만 그렇다고 대놓고 군사를 빌려 장이를 쫒아내고, 이후 목까지 요구한 진여도 나을 게 없다. 여하간, 괴철의 말대로 쓴웃음만 나오는 상황.
그래도 한신에게 패배하고 목이 달아난 진여에 비해서는 이후 조왕이 되었으니 훨씬 나은 편. 아들인 장오는 이후 관고(貫高)의 유방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조왕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다른 공신들이 토사구팽 당한 것을 보면, 유방 암살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연루되고도 무사하는 행운을 누렸다.
사마천은 장이와 진여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남겼다.
장이와 진여는 현자라고 세상에 전해져 칭송받고 있다. 그의 빈객들과 심지어는 잡역부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호걸이 아닌 자가 없었고 머물렀던 나라에 경상의 자리에 앉지 못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뜻을 얻지 못하고 빈천할 때 서로 동생동사하자며 신의로써 결의를 맹세한 일은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 의로운 행위였다고 할 수 있었다.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선 진여와의 허무한 우정은 그대로 나오지만 허수아비 의제를 대할때 예를 잃지 않으며 (대가를 요구하긴 했지만)의제의 항우 제거계획에 동참하는 등 의제를 막대하다 항우한테 붙어버리는 진여보다는 인간성이 나은 사람으로 나온다. 팽성전투 직후 항우에게 투항할것을 권하는 부하를 직접 참하면서 끝까지 유방옆에 남았고 이후론 감군이 되어 한신군에 종군한다. 정형 전투를 앞두곤 한신의 배수진을 못미더워하는 조참, 번쾌, 관영을 한의 장수로서 대장군을 믿어야 한다며 달랜다. 유방도 형님이라 부르며 잘 대해준 편.이윽고 그들이 나라를 차지하고 권력을 다투자 결국은 서로 공격하여 멸망하고 말았으니 어찌하여 처음에는 서로 사모하기를 지성으로 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신하기를 그리 심하게 했는가? 그들은 결국 권세와 이로써 서로 교제했음이 아니었는가? 명예가 비록 높고 찾아오는 문객들이 비록 성시를 이루었을지라도, 그들이 걸었던 길은 아마도 오나라의 태백(太白)이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행한 의와는 다르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