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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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노년기의 사진과 자화상.

高羽榮
1938년 9월 27일 ~ 2005년 4월 25일

1 개요

한국 만화계의 본좌

한국의 만화가, 겸 영화감독.

2 상세

1938년 중국 랴오닝 성(당시는 만주국 괴뢰정부) 센양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인 일제강점기 당시, 아버지가 경찰 간부였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라다가 8.15 광복 후 구사일생으로 월남했다. 월남 당시,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 아버지를 크게 반겼지만 양심 때문인지 경찰 간부직을 포기하고 낚시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고 화백이 중국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 고향이었던 동네를 겨우 찾아가 봤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옛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은 생전에 작업을 할때 빼면 딱히 그림 연습도 안했고 오히려 술마시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데 시간을 더 썼다고 한다. 한마디로 천재[1]. 딴지일보에서 삼국지 복간할때 작업영상을 보면 그냥 쓱쓱 그린다. 참고로 고우영 삼국지는 고우영 화백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그림체를 자랑하는 작품(...)[2]

젊을 때는 사냥을 무척 즐겼던 탓에 김왕석[3]의 <맹수와 사냥꾼>이 재간되었을 때 삽화 및 특전엽서를 그리기도 했다.

1955년,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추동성" 이라는 필명으로 만화계에 데뷔. 필명은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인 동성고등학교에서 따왔다. 가끔 드물게 '추동성'이 본명이며 '고우영'이 필명이라는 식으로 서술이 된 자료가 있는데 틀린 서술이다.

당시 대본소가 주류가 되었던 만화 시장에서 "쥐돌이"[4], "공주 애찌루" 등을 그렸고, 후에 전업 만화가로 데뷔하면서 심장마비로 일찍 요절한 형 고일영이 그리던 "짱구박사" 를 이어받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합동출판사의 독점체제가 구축되고, "교과서같은 만화"나 그린다는 이유로 업계에서 쫏겨난 뒤에 약동이 시리즈의 그림작가를 맡다가 스토리 작가인 방영진의 건강이 악화되어 작품이 연중되어 연재처를 찾아 나서는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1972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임꺽정[5]연재되었는데 이 작품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본격적인 만화가로서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수호지, 삼국지, 열국지, 초한지 등의 고전 중국 관련 역사물과 가루지기전, 일지매 등 한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재정립한 만화 등을 그리며 연거푸 히트를 쳤고,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한국 전통 설화와 이야기 문학의 토대를 흡수했으며 초창기엔 자신의 만화를 "만화소설"이라 명명했을 정도로 문학적 토양이 튼튼한 작가였다. 고우영 특유의 필력과 시나리오 감각은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물론 이것을 만화로써 구현하는 화력 또한 일품으로, 붓의 특징을 능수능란하게 써서 만화로 승화시킨 시대를 앞서간 화백이었다. 일견 거칠어 보이나 정확하고도 만화적으로 희화화된 선과 다른 만화가들이 따를 수 없었던 풍부한 동작과 표정이 고우영의 간판. 정형화된 현대식 일본만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작가들은 맨발로 뛰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이러한 필체가 일본의 시라토 산페이 같은 작가의 시대극에서 볼 수 있는 극화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을 전개하거나 표현하는 방식 등 고우영 화백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이 극화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 있다. 특히 재발간을 몇 번(...)한 수호지의 경우는 이런 그림체가 달라지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초기의 극화체의 그림체를 더 선호하기도 하지만 여백의 미와 없는 듯하면서 있는 듯한 화면구성을 자랑하는 후기 작품도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는 바.

텍스트의 해석에서도 그의 만화는 자신만의 독특한 재해석이 풍부하게 반영되어 극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았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는 "초선과 왕윤은 그렇고 그런 사이", "아두가 그 모양인 것은 유비가 집어던져서 그렇다.", "관우와 제갈량이 서로 경계했다." 등등 거의 정설처럼 통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고우영이 재해석한 픽션이다. (단, 이 중 일부는 원본인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에서 그대로 따온 경우도 많다.)

태생적인 센스가 뛰어난 것인지, 작가 특유의 시대를 초월한 유머[6]섹드립이 억지스러움 없이 작품들 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는 것도 특징. 특히 은근슬쩍 시사나 역사, 정치 풍자도 배어나온다. 삼국지의 계륵의 일화에서 조조베트남 전쟁헨리 키신저가 이랬을 것이라며 고민하는 장면이 나오고 수레바퀴에서는 정도전의 죽음에 관해 논하면서 실록에는 비굴하게 죽었다 나오지만 실제론 이렇지 않았을까 하며 당당하게 서서 '옥좌에 현혹되어 국사를 망치는가' 하며 꾸짖는 장면을 넣었는데 이 때 반란군을 12.12란 숫자가 적힌 탱크로 표현했다. 심지어 열국지의 마지막 장면에서 천하통일을 마무리한 진시황이 좀 쉬겠다며 모자를 벗고 수염을 떼자 고화백 본인이 나타나며 작품을 마무리짓는다. 삼국지에서 심심하면 자신을 유비에 비유해댄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 외에도 전개 과정에서 은근슬쩍 본인 자랑을 집어넣는 개그가 많다. 가령 등장인물에 대해 '우영이 닮은 애'라고 표현하거나 "저어기 멀리 동방 바다건너 반도국에 매우 잘나신 만화가 한 분이 계신다" 같은 식. 그런데 이게 어색하거나 튀질 않고 내용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1970년대에 미국을 여행하고 쓴 미국만유기, 84년도에 유럽을 여행하고 쓴 유럽만유기, 1995년도에 중국을 여행하고 쓴 중국만유기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07년 추모 2주기를 맞아 세 권 모두 재출간 되었다. 다만 이 때 연재중이던 초한지는 작가가 미리 완결까지 그리고 떠나는 바람에 그림이 초기에 비해서는 퀄리티가 떨어진다. 이메일이 없던 시절이니 어쩔수 없어도 본인도 무척 아쉬워하던 이야기.

90년대 들어서 눈이 나뻐지더니만 한 쪽 눈을 볼 수 없는 상태까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상태로도 안경을 쓰고 작품을 연재했고 1994년에 펴낸 십팔사략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청소년 추천 도서가 되기도 했다. 물론 내용은 준 18금이지만 십팔사략 이후 대장암 진단을 받아서 건강사의 문제로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못하다, 2001년 딴지일보 너부리 기자의 주도로 삼국지의 무삭제 복간판을 내놓는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잊혀져가던 그의 작품들이 재발행되었고, 그의 이름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참고로 미국으로 이민가 살던 딸이 미국 유명 안과 병원에서 진료하길 요청해 미국가서 수술을 받고나서야 2000년 초반에 10년만에 한쪽눈 실명상태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이 일은 고우영 본인이 알리길 싫어해 그가 별세한 다음에서야 공개된 일이다.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2015년 그의 사망 10주기를 기념하여 이벤트를 열 당시, 10년넘게 쓰던 안경을 전시했고 수술받아 회복되자 기뻐하던 이야기라든지 유족들의 간략한 회고를 적은 글도 전시되었었다.

이후에 굿데이에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야사를 담은 수레바퀴를 연재하다 건강상의 사정으로 중단하기도 했다. 작가 본인은 조선 왕도 500년을 자신만의 색으로 담아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시작하였으나 실제로는 음담패설을 뒤적거리는 데에 그쳐 팬에게 안타까움을 샀다.

내용 자체는 용두사미에 그쳤을지언정, 그가 여태껏 만화를 그려오면서 쌓은 내공만큼은 이 만화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순정만화 시리즈와 미심썰 시리즈를 그린 강풀은 이 작품의 한컷 한컷을 볼때마다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고.

50대 중반부터 아내 박인화(세례명은 마리아)여사와 같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세례명요셉이였다. 불교신자가 아니었어??? 고우영은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를 만화로 각색했고, 천주교 신문인 평화신문돈키호테를 신부로 각색한 만화 <몬시뇰키호테>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가톨릭출판사에서 1998년에 편찬한 아동용 교리 공부책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홍문택 신부 저)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말년에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만화로 옮길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일을 시작도 하지 못하고 2005년 4월 25일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하여 타계했다.

타계 후 수많은 만화가들과 만화가 지망생들이 고 화백을 추모하며 추모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문화부에서 표창도 받았다.

허영만 화백의 에 나온 관상 분석에 따르면 얼굴 전체가 짧고 눈빛이 약했지만 눈썹이 나아서 그나마 오래 사신거라고 나온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 대대로 유전병이 있어서 오래 산 이가 없다는 점 때문에[7] 자신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전부터 느꼈다고 한다.

후배인 이정문[8]의 회고를 봐도 고우영은 오래 전(80년대)부터 "우리집 남정네들은 유달리 일찍 갔어. 내가 장수하는 건지." 라고 말했으며, 죽기 한달 전 여러 만화가들이랑 같이 간 마지막 여행에서는 사진을 찍으면서 "정문아.. 영정 사진이니까 잘 찍어줘."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오래 못가 자신이 죽을 걸 각오한 모양. 그래도 이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산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더니만 "산은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인데......"이란 말도 하며 아쉬워했다. (2005년 월간 계간만화라는 잡지에서 이정문이 그린 고우영 추모 만화에서 발췌)

더불어 2005년 4월 25일, 이정문은 그 날 고우영 선배가 돌아가신 날, 오래전 선배가 그려준 관우 그림을 액자에 담아 내 화실 벽에 걸어뒀는데 바로 그 날, 선배가 돌아가신 그 날, 그 액자가 갑자기 떨어졌다. 30년이 넘도록 한번도 떨어지지 않던 그 액자가 떨어진 날이 공교롭게도 그 날에...떨어져서 어? 이상하다...혹시 선배님에게 뭔 일이 있으시나? 불안해했고 그리고 얼마안가 작고한 소식을 전화로 듣고 그 액자를 안으며 선배님 가시는 걸 알린 건가요! 라며 엉엉 울었다고 회고했다.

10주기 추모 이벤트에서 아내가 회고하길 "살아생전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욕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물론 아이들이 잘못하면 꾸짖고 매질이야 했지만 정해진 수만 종아리를 몇 대치고 잘못을 깨우치게 했을뿐. 에 된통 취해도 절대로 나에게도 아이들에게 구타나, 욕설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공부해라느니 강요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더불어 술, 담배 말고도 낚시와 여행이나 운동에서 야구나 축구같은 스포츠를 좋아하고 직접 즐기며, 낙천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다고 지인들은 회고한다. 심지어 후배 만화가 이홍우[9]와 술자리에서 젊은 시절 사냥이나 권투도 해봤다고 자랑하다가 이홍우가 에이 설마.. 못 믿어하자 "내 말 못 믿겠다는 거냐? 좋아.. 그럼 나랑 권투 대결이라도 벌여보면 될 거 아니냐?" 큰 소리쳤더니만...

1977년 실제로 어느 권투도장을 잠깐 빌려서 글러브와 권투 차림하고 둘이 실제로 권투대결을 벌였었다. 시종일관 서로 난투전을 벌이다가 둘 다 지쳐서 쓰러지는 통에 무승부로 끝났고 둘은 껄껄 웃으며 다시 술판을 벌였다고 한다. 정확히는 이홍우의 판정승인데, 고우영 화백이 제법 얻어맞았고 갈비뼈에 실금이 갔다고... 고우영 화백도 이 사건이 웃긴지 이홍우 화백에게 얻어맞고 헤롱헤롱하는 자신을 그린 적도 있고, 고 화백과 친한 화백들도 이 사건을 그림으로 그려 고우영 화백을 놀렸다는 후문이 있다.

생전에는 굉장한 동안으로 유명했다. 40대의 나이에도 술집에서 받아주지 않았을 정도. 주변의 증언이나 여행기 시리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외도(?)도 꽤 많이 한 편인데, 80년대만 해도 자주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등에 게스트로 나오기도 했다. 라면과 맥주 광고 등의 TV 광고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동안이다.

가루지기 시리즈 중 하나의 감독(...)을 하기도 했다. 주연은 이대근.[10]

이쯤되면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생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으니 그에 대한 평가는 '본좌'. 이 한마디면 족할듯 싶다.

다만 역사물의 경우, 자신만의 해석이 강한 편이어서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거부감이 느껴질수 있고 애초에 성인 스타일의 만화를 표방한 만큼 관점에 따라서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저질스럽게 보이는 단어와 작가의 나레이션이 들어가기 때문에 취향에 적합하지 않으면 작품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여담으로 삼국지에서 여포를 너무 심하게 싫어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부정적으로 묘사하긴 했는데 애시당초 기타가타 삼국지를 필두로 한 일본 쪽 삼국지 작품들부터 최근의 삼국같은 중국쪽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여포를 뛰어난 무예를 갖춘 로맨티스트란 식으로 너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탓이다. 여포는 정사는 말할것도 없고 그를 삼국지 최강의 장수로 격상시킨 연의에서도 표리부동하고 어리석은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이걸 감안하면 고우영 화백의 묘사가 오히려 실제 여포의 모습에 가깝다. 그리고 여포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9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했다는 걸 고려하면 고화백의 묘사는 특유의 수위 때문에 껄끄러울 순 있어도 시류에서 벗어난 해석도 아니다.

또 성인 대상의 작품이 많아서인진 몰라도 작품의 수위가 굉장히 높은 편인데, 성적인 묘사는 다른 극화물 작가들과 비슷한 데 비해 잔혹 묘사가 유달리 강하게 나온다. 대체로 힘을 뺀 그림체로 많이 나와서 그렇지 거의 역대 한국 만화가중에 최고(...)라고 할 정도. 직접적으로 묘사된 장면도 참수[11]나 거열형은 기본이요, 심하면 거시기가 잘리거나 온몸이 뭉게져 죽은 시체나 말 그대로 시체의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과정이 꽤 리얼하게 나올 정도. 단, 고우영 수호지는 예외, 원작에 워낙 잔혹한 묘사가 많다보니 오히려 훨씬 순화시켰다.[12]

화백의 차남 고성언 씨가 선친의 유작들을 차례차례 컬러로 복원하는 중이다. (뭔가 톨킨家와 닮은 듯한...)

만화 외에는 미국 중국 만유기가 일반 서적으로 출판되었었다. 그리고 사후에 유럽편까지 포함해서 '고우영의 좌충우돌 세계여행기'라는 제목으로 복간되었다. 어투는 만화에서 나레이션으로 보이던 어투와 거의 같다.

고우영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 중에서는 고우영이 서양에 대해 다뤘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고우영 나폴레옹이라든지 고우영 로마 제국이라든지 이런 만화를 기대했던 팬들은 고우영이 세상을 떠난 것을 특히 아쉬워하고 있다. 고우영이 서양에 다룬 만화는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사실상 유일하다.

3 작품리스트

복간판 기준 가나다순

  • 고우영 가루지기 직접 영화제작도 했다 총감독,연출
  • 고우영 금병매
  • 고우영 거북바위
  • 고우영 삼국지[13]
  • 고우영 서유기 : 고우영이 사망한 뒤에 나온 복간 작품. 고우영이 사망한 이후에 출판된 거라 열국지에 이어 작가의 말이 비어있다.
  • 고우영 수레바퀴
  • 고우영 수호지
  • 고우영 新고전열전
  • 고우영 뭉게구름
  • 고우영 십팔사략
  • 고우영 연산군
  • 고우영 열국지 : 고우영이 사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복간한 작품. 복간을 완료하여 출판 직전 '작가의 말'만을 남겨두고 고우영이 사망하였다. 작가의 말 부분을 보면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 고우영 오백년
  • 고우영 일지매
  • 고우영 임꺽정
  • 고우영 초한지
  • 내일은 아침
  • 달마의 제자들 : 달마 이래의 선불교 종주(宗主) 및 역대 고승들을 다룬 만화.
  • 대야망
  • 아짱에
  • 약동이 시리즈
  • 이심초
  • 야한여인 장녹수
  • 장녹수의 여인천하
  • 을지문덕
  • 공주 애찌루
  • 쥐돌이
  • 잡초와 갈대
  • 짱구박사
  • 천국의 열쇠 : 동명의 소설(A.J.크로닌 저)을 바탕으로 한 만화로 1992년 11월 1일부터 1995년 3월까지 평화신문에 '둥근 찌그렁'이라는 제목으로 연재.
  • 한국만평
  • 환란
  • 황진이
  • 해동일룡
  • 상용한자 1800 중 1,2,6권 담당 - 한자 교육 만화이나 고우영 삼국지, 서유기 뿐만 아니라 가루지기, 짱구박사등등이 등장하는 고우영 만화 올스타전이다. 고우영 팬 이라면 이 만화에서 "그리고 암을 이겨낸 본인!" 이라는 컷에 짠해질 것이다.
  • 소설이 아닌 삼국지 - 삽화 담당
  • 고우영 요절복통 배비장전
  • 고우영 80일간의 세계일주
  • 구름속의 아이 : 고우영 화백의 유년시절을 담은 자전 에세이.
  • 고우영의 맛있는 골프 : 맛집 소개를 곁들인 골프 관련 실용서로, 전국 131개 골프장 찾아가는 길과 그 길목의 맛있는 집까지 소개하였다. 경기북부권, 경기남부권, 강원권, 충청권, 호남권, 영남권, 제주권 등 7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각에 해당하는 골프장과 맛집 185곳을 자세히 안내한다.골프장 상호, 대표전화번호, 예약전화번호, 주소, 홈페이지, 회사명, 개장일, 총면적, 부대시설, 찾아가는 길과 이에 대한 지도를 하나씩 소개하였다. 또한 찾아가는 길 도중에 만날 수 있는 맛집을 메뉴가격, 주소, 전화번호, 영업시간, 휴무날짜, 관련사진 등과 함께 소개하였다.
  1. 그러나 고우영 화백 본인은 자신은 천재가 아니고, 요절한 형 고일영이야말로 진짜 천재였다고 하였다. 자신은 돌아가신 형에 비하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2.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삼국지에서는 신문 연재를 위한 컷을 사용하고 마감 때문에 속필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전체적인 퀄리티가 반드시 최고라고 보기는 힘들다. 십팔사략의 초반 몇 권을 보면 컷 사이즈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뿜어대는 고우영 화백의 진짜 공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단 여러 사정이 겹쳐서 십팔사략의 중후반부 그림체는 초반에 미치지 못했다...
  3. 수렵소설을 주로 쓴 작가로 유명하다. 2016년 89세 고령(!)임에도 대전일보수렵야화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4. 다만 쥐돌이는 딱지만화로 만화방이 생기기전에 그린 만화다.
  5. 이 작품 연재에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의 결정이 주효했었다. 당시 신문에서는 단컷만화나 네컷만화가 주로 연재되었고 그 때문에 신문만화는 무조건 단컷 아니면 네컷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장기영 사장이 일본이나 구미 신문에서 연재되던 극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간 스포츠에 이와 비슷한 형식의 만화를 연재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당시 일간 스포츠 편집부에선 이에 대해 매우 반발했고, 이에 장기영 회장이 그 편집진을 해고한다고 엄포를 놓고, 김수남 당시 소년 한국 주간이 편집진을 다독여 결국 만화를 연재함으로써 수습이 되었다. 그 인연 덕분이었는지 나중에 고우영은 한국일보에서 시사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뭐,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6. 예를 들어 돼지고기 장수였던 장비가 자신의 것은 사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열나 일성대갈하는 장면 옆 컷에서 "애 떨어지겠다. 어머 떨어졌다!" 라고 하고는 "아, 또 감질나는 이 만화 읽어야 하나? 읽지 말까부다."라고 개그드립을 넣은 장면이 있다.
  7. 아버지는 쉰살을, 두 형은 마흔도 넘기지 못하고 별세했다.
  8. '심술 1000단 심똘이'와 한국 로봇 만화 명작인 '철인 캉타우'를 그렸다.
  9. 동아일보에서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을 그렸다. 나중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치인으로 나서려다가 공천 탈락. 나대로가 간다라는 책자에서 선배인 고우영과 권투를 한 것을 회고했다.
  10. 초기 설정은 만화 캐릭터대로 남근형 인간을 캐스팅하려고 했는데 어른의 사정으로 이대근이 캐스팅되었다.
  11. 전반적으로 엑스트라의 목이 유달리 가볍게 툭툭 잘린다
  12. 특히 자음과모음판 신판의 경우 이규가 가짜 이규를 잡아먹는 장면을 그냥 상상만 하고 마는걸로 바꿨고 무송자기 형의 복수를 위해 반금련을 끔살하거나 송강이 사형을 선고받게 한 황문병을 양산박 두령들이 육체를 산 체로 잘게 썰어 술안주로 구워먹는 장면은 아예 글로만 묘사한다! 다만 그 직전에, 죽을 사람들의 알몸은 잘 묘사했다(...).
  13. 이 작품 발표전에 성인물이 아닌 소년판으로 삼국지가 발간되기도 했다. 김청기의 애니는 소년 삼국지를 원작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