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적의 난

1 개요

1198년 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가 실패한 노비해방운동. 일반적으로 역사학에서는 한국사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으로 평가받는다.[1]

2 내용

만적은 당시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충헌의 노비[2]였는데, 6명의 노비와 함께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여러 명의 노비들을 모으고 난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다고 한다. 만적은 노비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정중부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는(公卿大夫) 노예계급에게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3]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 근육과 뼈, 즉 신체)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풀이: 정중부도 이의민도 다 우리 같은 천출이었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니? 우리라고 언제까지 주인 밑에서 매 맞으며 일할래? 내가 최충헌을 죽이고 각자 주인 한 명씩 죽인 다음 노비 문서 불질러 버리면 우리도 벼슬 한 자리씩 할 수 있어.)

상술한 연설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는 말은 원래 진말한초에 장초를 세운 진승의 발언이다. 만적의 이 말은 고려사 원문에는 그냥 '장상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라고 적혀 있다

고려 무인 이야기의 저자 이승한은 노비 만적이 저 말을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저 말 자체가 당시 일종의 유행어였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해석한다. 당시는 이의민 같은 천민 출신 무신이 전권을 휘두르기도 했던 시기였기에 문신들이 자조적으로 "에구.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더니 저런 무식한 칼잡이들도 정권을 잡는구나"란 식으로 되뇌이던 말이 천민들에게도 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즉, 이 말은 당시 문신들이나 선비들은 자조적인 의미로 되뇌였고 신분이 낮은 자들은 고무적인 의미에서 이 말을 되뇌인 것이 아닐까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해석은 각자 하도록 하자.

어쨌든 그 자리에 모였던 노비들은 만적의 연설에 찬성하였고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운다. 노란 종이 수천장을 '丁'자 모양으로 오려 표시를 만들어 붙이고, 날짜를 정하여 흥국사 뜰에 모여 관노(관청에 소속된 노비)들의 호응을 받는다. 그리고 관노들은 조정의 청사내에서 권신들을 죽이고, 사노(개인이 거느리는 노비)들은 개경 성내에서 먼저 최충헌을 비롯해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비문적을 불태운 뒤 자기들이 집권하자는 것.

그러나 정작 당일에는 몇백 명의 노비들밖에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날짜를 다시 정하고 이번에는 보제사에 모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당시 같이 모였던 노비 순정이 실패할 것을 겁내 자기 주인인 한충유한테 고자질해 버린다. 주인인 한충유가 후덕해 배신하길 꺼렸다는 말도 있다.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심하게 미화되어서 관군에게 잡혀 고문당하자 거사가 발각돼 버렸으니 동지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토설한다. 당연히 실제 역사에서 이랬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투항하는 동지들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자발적으로 싸우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순정의 밀고로 한충유에게 알려지고, 다시 최충헌에게 한충유가 밀고함으로써 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바람에 모인 노비들은 강에 산 채로 던져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이 음모를 밀고한 순정은 은 80냥을 받고 양인으로 면천되었다고 한다.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윤승원[4]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물에 빠져 죽은 노비들이 모두 건져져 유족들은 죽은 노비들을 보고 통곡했으며, 홍련화는 죽은 만적을 울면서 위로했다. 만적과 노비들은 관군에게 포위되어 저항하다가 참살당하는데 죽기 직전 만적이 남기는 말은 폭풍간지.

하늘이 사람을 세상에 내실 때 모두가 사람답게 살라 명하시었거늘 어찌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을 수 있겠소이까? 노비문적 하나에 귀천이 갈리는 이놈의 세상을 뒤엎지 못하고 가는 것이 원통할 뿐이오이다! 허나 먼 훗날, 천노의 자식들이 귀천의 족쇄를 깨부수려다가 죽어간 선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오니 후회는 없소이다...
이와 같이 만적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당시 신분계급이 엄격했던 시대에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려 했던 그들의 생각은 지금에 와서는 높게 평가되고 있다.
  1. 자연재해나 생활고, 탐관오리들의 수취에 의한 민란은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에도 존재했지만, 주동자가 당해보지도 않고 뚜렷하게 신분해방을 목표로 삼았던 경우는 만적의 난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2. 사실 만적이 최충헌의 사노비였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고려사에는 만적이 사동(私僮)이라고 기록되어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적이 고려사 열전 최충헌편에 있어서 최충헌의 사노비라고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3. 이 말은 만적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중국 진나라 때의 진승 오광의 난 에서 진승이 이야기한 것이 유행어처럼 민중들에게 퍼졌고, 이것이 한반도로도 흘러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4. 제5공화국에서 정호용 역, 공주의 남자에서 온녕군 역, 근초고왕에서 비류왕 역, 광개토태왕에서 하무지 역을 맡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