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매호공)

梅湖 陳澕
1181? - 1220?

고려시대 중기의 문장가 · 문신. 본관은 청주 여양현(淸州 驪陽縣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자는 대경(大景), 호는 매호(梅湖).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고 여양군(驪陽君)의 작위를 받은 진총후(陳寵厚)의 증손이자, 무신정변에 참여했으나 문신들을 보호했던 참지정사 진준(陳俊)의 손자로, 아버지는 진준의 차남인 병부상서 진광수(陳光脩)이다. 삼형제 중 둘째로, 어사대부를 지낸 진식(陳湜)이 형이며, 둘째 아들이 진화이고 동생이 예빈경을 지낸 진온(陳溫)이다. 조선시대 때 발간된 그의 유고시집 《매호유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병부상서 진광수의 아우로 진준의 다섯째 아들이며 추밀부사를 지낸 진광현(陳光賢)이라고 하며, 진화는 그의 차남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때의 기록을 참고한 것이라면 이는 여양진씨의 대파 중 하나인 매호공파의 계보를 새로 써야 할 수도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조선 숙종 때 발간된 《여양진씨대동보(기축대보)》에서는 진화의 아버지를 병부상서 진광수로 밝히고 있다. 이 족보가 어떤 문헌을 참고하여 수정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 기록의 차이는 여양 진씨 종중의 고민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그러한 나를 찾게 될 것이다.

1 약기(略記)

태어난 해는 고려사나 당대의 다른 기록에서도 쓰여져 있는 문헌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200년(신종 3년) 국자감시의 시부(詩賦) 부문에 합격하고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내시로 보직받았던 당시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20대 초반으로 상정할 경우 1181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1209년(희종 5년)에 국학 학정에 임명되었으며, 4년 뒤인 1213년(강종 2년) 직한림원이 되면서 진한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215년(고종 2년) 최충헌이 문신들을 불러 모아 40여 운(韻)을 내어 시짓기 대회를 열었는데, 진화는 이 대회에서 이규보에 이어 차석을 차지했다.

진화는 무인 가문에서 태어나 문인으로 대성한 보기 드문 관인이었으며, 이규보와 함께 빠른 속도로 시를 짓는 주필의 대가로 문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한림별곡의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는 대목에서 이정언은 이규보를 말하는 것이며, 진한림은 바로 진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당대의 문사들의 찬사를 받는 이는 드물었다.

무인 가문 출신의 문인이자 언관으로서 우사간과 지제고를 겸직하던 진화는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지공주사(知公州事)로 좌천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상경에 앞서 사패지인 구성현(駒城縣 : 현재의 경기도 용인)에 머무르다가 갑작스런 급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0여 세였다.

2 사후(死後)

살아생전 문명을 드높였던 진화의 시문은 후학들에 의해 책으로 만들어졌는데(고려본 매호집), 아쉽게도 이 책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시문은 여러 문집에 실려 조선시대까지 살아남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조선판 매호집이라고 할 수 있는 매호유고에 실린 진화의 시는 53수가 전부이다. 최자의 《보한집(補閑集)》 ·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 · 《동인시화(東人詩話)》 · 허균의 《성수시화(惺叟詩話)》 · 이수광의 《지봉유설(芝蜂類説)》 · 《호곡시화(壺谷詩話)》등에 남아 전해오던 유시를 홍만종(洪萬宗)과 남태보(南泰普)가 수집하였고, 최수옹(崔粹翁)이 편집한 원고를 진화의 15대손인 진후(陳垕)가 주도하여 시집으로 간행했는데, 이 책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매호유고(梅湖遺稿)이다.

진화가 용인에서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은 용인을 기점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고, 이후 강원도 횡성군에도 그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다. 진화의 형인 어사대부 진식의 후손들이 어사공파(御史公派)를 열고, 동생인 예빈경 진온의 후손들이 예빈경파(禮賓卿派)를 여는 등 진준의 손자들의 후손들이 대파를 이루어 갈라지자, 진화의 후손들 역시 진화의 호인 매호를 따서 매호공파(梅湖公派)를 열었다. 이로서 진화는 여양 진씨 대파 중 하나인 매호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원암리 산38번지에 있다. 오백여 년간 실전되었다가 1849년 후손 진동오(陳東五)가 땅을 다지던 도중에 묻혀있던 지석을 발견하여 봉분을 복원하였다. 1921년에는 23세손 진평호(陳平鎬)가 묘소를 단장하고 석물과 묘표를 세웠고, 1978년에는 종중에서 묘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