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 진씨

驪陽陳氏

1 개요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진씨(陳氏) 중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본관. 2000년 통계청의 인구집계조사에서는 97,372명으로 나타났다.
본관인 여양(驪陽)은 고려 시대에 있었던 여양현(驪陽縣)을 말하며, 여양현은 현재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일대에 걸쳐있었던 지역이다.

2 시조와 연원

시조는 고려 예종(1106년 - 1122년) 때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중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진총후(陳寵厚)다. 송나라 복주 사람이며 우윤을 지냈던 진수(陳琇)라는 사람이 외침을 피해 고려로 망명하여 여양현 덕양산 아래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런데 송나라에는 우윤이라는 관직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진총후의 선계가 중국에서 건너왔을 확률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거기에다 송나라가 외침을 받고 나라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때는 1125년 전반이었고, 진총후가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고 여양군에 봉작받았을 때가 1127년인데, 불과 2년 밖에 지나지 않는 시간 동안 중국에서 온 가문이 고려의 한 고을에 세력을 이루고 뿌리를 내린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데다, 진수의 후손이라면 잘해봐야 어린 손자 정도의 나이여야 말이 맞게 되는데, 그런 어린 아이가 한 나라의 상장군을 지낼 정도로 건장한 무인이라는 것 역시 상식적으로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또한 고려 초기에 이미 진(陳)이라는 성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기록에 몇 명 있었기에 현재 한국의 진씨는 그 고려 초의 진씨의 후손들이 가문의 역사를 높이기 위해 중국 도래설을 주장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를 찾아보면 태조 때 청주수(靑州帥)를 지내고 있다가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는 진선(陳瑄)이 등장하며, 현종 때인 1014년에는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뒤에 겨우 돌아온 진적(陳頔)의 관작을 올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여양진씨의 등장 이전에 고려에도 진을 성으로 쓰는 가문과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진총후의 생존 당시에도 또다른 진씨 인물들이 나오는데, 1140년에는 진경보(陳景甫)를 상서우복야 겸 상장군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1151년에는 참지정사를 지냈던 진숙(陳淑)이라는 인물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여양진씨의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로, 역시 진(陳)을 성으로 쓰는 한국의 다른 집안의 족보에도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다. 거기에다 여양진씨가 당초에 청주진씨(淸州陳氏)로 불렸던 것을 감안하면, 이들도 진총후와는 다른 계통이지만 같은 청주진씨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짙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여양 진씨 대종회에서 발행한 여양진씨사적(驪陽陳氏史蹟)에는 진수가 송나라 휘종(서기 1100~1125년)대의 사람이고, 그 후손인 진총후는 서기 1100~1122년에 벼슬이 신호위 상장군 겸 대장군에 이르렀다고 쓰여 있으며, 여양 진씨 대종회 홈페이지의 진씨 유래에는 진총후가 진수의 후손이라는 확증이 없으므로 후인들의 넓은 고찰을 바란다고 쓰여있다. 남아 있는 기록이니 그대로 전하는 것이고 판단은 후인이 할 것으로 놓아둔 모양이다. 애초에 소개에만 나올 뿐, 족보에는 진총후가 시조이며 진수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전승이라고는 해도 잘못된 지식을 후손에게 알려줄 개연성이 있다면 애초에 알리지 않거나 제대로 된 고증을 달아두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어쨌든 진총후는 인종 4년(1126년)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여양현을 식읍으로 받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인 진준(陳俊)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칭송받던 무신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의종이 폐위되는 와중에 무신들이 문신들을 모두 죽이려 하자, "우리가 원한을 가진 자는 이복기, 한뢰 등 4, 5인에 불과한데, 이 많은 무고한 사람을 이같이 살해하고 가산을 몰수함은 부당한 일이므로 중지하라."고 하였다. 진준 덕분에 적지 않은 문신과 그들의 가족이 화를 피했는데, 이에 사람들이 "음덕(陰德)이 있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창성한다."라 하였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그 말처럼 진준의 다섯 아들과 다섯 손자가 모두 요직에 올라 가문의 토대를 다졌고, 이에 자손들이 진총후를 시조로 하고 봉작을 받았던 여양현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 여양 진씨의 시초이다.
진준의 다섯 아들과 다섯 손자 당대에는 이 가문을 청주진씨(淸州陳氏)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은 여양현이 청주의 관할행정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아주 소수이지만 청주진씨라는 진씨가 한국에 존재하는데, 이들이 여양진씨의 뿌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청주진씨 문중에 이렇다 할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3 주요 분파

시중공파, 어사공파, 예빈경파, 매호공파, 전농공파의 대파 5파를 기점으로 하는 상계(上系)를 시작으로, 이들에서 갈라져 나온 중계(中系), 다시 여기서 분파된 하계(下系)로 나누어진다.

  • 시중공파(侍中公派) : 진총후의 증손자로 문하시중을 지낸 진담(陳湛)을 파조로 한다.
  • 어사공파(御史公派) : 시중 진담의 사촌 아우로 어사대부를 지낸 진식(陳湜)을 파조로 한다.
  • 예빈경파(禮賓卿派) : 어사대부 진식의 아우로 예빈경을 지낸 진온(陳溫)을 파조로 한다.
  • 매호공파(梅湖公派) : 어사대부 진식과 예빈경 진온의 아우인 지공주사(知公州事) 진화(陳澕)를 파조로 한다. 매호(梅湖)는 진화의 호이다.
  • 전농공파(典農公派) : 시중 진담과 어사대부 진식의 사촌 아우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낸 진택(陳澤)을 파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