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1 개요

李資謙(? ~ 1126년 음력 12월)

고려판 세도정치, 조선의 세도정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 하지는 않았던 인물, 그리고 김조순의 대선배.[1]

고려 중기의 권신. 대표적인 외척 세도가 집안 출신으로, 요즘 나이로 치면 초딩어린 나이부터 벼슬을 시작했다고 한다.

2 하늘을 찌르는 세도

인천 이씨(인주 이씨 혹은 경원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고손자이며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외척 중 한 명인 이자연의 손자다.

이자겸의 작위는 처음에는 한양공(漢陽公)이었는데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올렸다. 당시는 국명이 고려이고 조선은 단지 '다르게 부르는 이름 중 하나'인 데다 국공이라는 작위 자체는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 의미심장한 작위명이다.[2]

예종 사후, 자신의 외손자인 연소한 태자(훗날 고려 인종)를 즉위하게 하고, 부를 설치하여 이름을 숭덕부라 칭해 요속(僚屬,딸린 무리)을 두었다.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왕비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다.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태후는 이자겸의 둘째 딸. 즉 인종의 두 비는 인종의 이모다(…). 그야말로 개족보. 역사저널 그날 왈, 삼겹장인[3] 아무리 고려 시대가 근친혼에 덜 엄격했던 사회라고 해도 당연히 반대가 상당했지만 이자겸의 권력으로 묵살되었고, 이자겸이 몰락한 후에는 두 딸도 당연하게도 폐비되었다. 그래도 두 딸은 개념이 잡혀 있었는지 인종을 시해하려는 아버지의 계획을 방해했다. 왕에게 먹이라고 독약을 줬는데 그걸 가져가는 도중에 일부러 문지방에 걸려 쏟아버린다는 식으로. 인종도 그녀들의 도움을 알았는지 폐비한 후에도 전답과 노비를 내려 편하게 살도록 배려했고, 의종과 명종도 두 폐비의 대우에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일곱 아들들도 덕분에 높은 벼슬에 올라앉았다. 장남 이지미는 추밀원 부사, 차남 이공의와 삼남 이지언과 사남 이지보는 각각 형부, 공부, 호부의 시랑과 낭중벼슬을 맡았다. 조선으로 따지면 참판, 지금의 차관직에 오른 것이다. 오남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육남 이지원은 합문지후, 칠남 이의장은 수좌(고려의 모든 승려를 관장하는 승통 다음 가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현대 대한민국 정부 체제에 굳이 비유하면, 아들들이 대통령 비서실장, 법무부/국토교통부/기획재정부 차관, (국교의) 교구 대주교 직을 모조리 장악한 격이다.

이 외에도 세도가 어느 정도 였냐면, 왕의 생일이 아닌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려 했다. 그 이름도 국왕, 태자의 생일에만 붙이는 절(節)을 붙여 인수절(仁壽節)이라 했을 정도. 김부식이 적극적으로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자겸과 그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인수절 운운하며 위세를 과시했다.

인종이 이를 몰아내려고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지만, 적은 소드 마스터 척준경. 게다가 친위대는 진행 중에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을 죽였다가 그대로 썰려버린다. 이는 이자겸의 난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작 먼저 군사를 일으킨 건 인종이었다. 이자겸은 척준경과 손을 합쳐 이를 진압(?)한 것이고… 척준신과 척순을 죽인 이유는 하는 김에 척준경 일가를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이었다. 척준경의 위세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결과는 알다시피 패망. 그 와중에 궁궐이 불타버리자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묵게 되었다. 이자겸은 인종을 죽이려고 많은 시도를 했지만, 딸인 인종의 두 왕비가 이를 간파하고 매번마다 저지했다고 한다. 딸이 웬수. 하지만 이건 아버지가 개념없는 거고 딸들의 입장에서는 남편인 데다 조카인 왕을 죽이라는 것이니 차마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왕을 협박해서 양위 받으려는 계획도 실패한다.

3 허무한 몰락

하지만 이자겸의 몰락은 엉뚱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언의 하인이 척준경의 하인과 싸우다 이지언의 하인이 "네놈 주인은 임금 계신 곳에 화살을 쏘고, 대궐에 불을 질렀으니, 네 주인은 참형을 당하고 너는 관노로 끌려가야 한다!"고 욕한 것이 척준경에게 전해졌다. 이에 척준경은 이자겸의 집으로 찾아와 관복을 벗어던지며 다 그만두고 낙향하겠다고 펄펄 뛰었고, 이후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하였고, 척준경은 글을 올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이후 척준경은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시도하였던 이자겸의 저택으로 쳐들어갔다. 이자겸의 군사들은 고려 최고의 맹장 앞에서 벌벌 떨면서 물러났고 이자겸은 붙잡혀 오게 된다.

이자겸은 붙잡혔으나 왕의 장인에다 외조부란 이유로 죽이진 못 하고 영광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4] 이자겸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죽었다. 죽기 직전까지 계속 자신의 결백과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 이자겸의 낮은 처벌 등으로 인해 그가 진짜 반역을 꾀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시각도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이 반역의 뜻을 품은 건 인종의 친위 쿠데타를 진압한 이후인데, 항간에 십팔자위왕이라는 참설이 퍼지자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것. 근데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록은 그의 딸이자 인종비가 독이 든 떡을 까마귀에게 먹였더니 그 까마귀가 죽었다라는 기록과 독이 든 그릇을 엎질렀다는 기록밖에 없다. 근데 흉조인 까마귀라는 존재의 사용과 이와 비슷한 기록이 고려 현종과 관련된 기록에도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창작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왕이 이자겸의 집에 머무를 때 이자겸이 정말 왕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하인 한두 명만 보내도 쉽게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인 셈이다. 위에서 언급된 하인 간의 언쟁을 보더라도, 단순한 하인의 헛소리가 아니라면 이지언 하인의 발언은 기묘하다. 사서의 내용대로라면 척준경이 이자겸의 지휘 하에 왕과 싸웠고 이자겸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이자겸 아들의 하인은 척준경이 왕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대로라면 이자겸과 척준경이 사이가 나빠지는 게 아니라 이자겸쪽이 하인의 발언에 더 분노해서 아들을 불러다 족칠 일이었다. 이자겸 정도의 권세로 쿠데타 준비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의문이고 보면 왕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 정말 있었는지에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국정을 농단해 인종의 눈밖에 난 건 사실이다.

이자겸의 딸인 왕비 둘은 이자겸의 실각 이후 폐비가 되었으나, 인종을 독살하려는 시도를 막기도 한 걸 감안해서인지 그 이후로도 인종이 나름대로 챙겨줬다고 한다.

4 이야깃거리

송나라의 관리였던 서긍은 사신을 따라 고려에 방문하여 견문록인 고려도경을 남겼는데, 여기서 이자겸에 대하여 풍채가 맑고 온화한 인물이었다고 평하였다. 즉 미남에다가 겉으로 보기에는 성품도 유순하게 보였던 것 같다. 최소한 서긍의 묘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흔히 사악한 권신이라는 악명과는 다르게, 단정한 외모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외모가 그 사람의 성격이나 행적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5]

어찌 보면 이 사람과 척준경은 고려판 여포와 동탁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비스므리하다.
다만 이자겸은 권력을 독점한 것과 불확실한 국왕 시해 미수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악행에 대한 기록이 없다시피하므로 동탁 따위와 비교되는 것은 억울할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참설을 최초로 퍼트린 인물. 十八子는 이자겸의 성씨인 李의 파자이다. 훗날 본관은 다르지만 성은 같은 어떤 무장이 진짜로 왕위를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사실 이자겸을 척살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인종은 두려운 마음에 곧바로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길 생각이었지만 이자겸은 왕씨의 나라인 고려를 이씨인 본인이 받았다가는 무슨 일이 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한다. 물론 나중에는 본인이 십팔자위왕을 듣고 왕위에 집착해 인종을 독살하려 했고 (기록되었으나) 그 끝은 유배였다. 그래도 참수당하지 않고 귀양으로 끝났으니 나름 천수를 누리다 갔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자겸의 작위는 한양공→조선국공. 실로 기묘한 우연의 일치이다.

이자겸의 난으로 서경 출신 귀족과 개경 출신 귀족이 나뉘어졌으며 중앙 집권층 사이의 분열로 그 동안 고려의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의 조짐이 나타났다. 당장의 영향만 보아도 훗날 묘청의 난무신정권의 성립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의민 역시 십팔자위왕설 드립을 참 좋아했다.

또한 이 사람 때문에 인천 이씨는 그대로 몰락했다. 고려 최고의 외척 문벌귀족세력이던 인천 이씨는 조선시대때는 문과 급제자가 가문 전체를 통틀어서 아홉명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몰락 귀족의 처절한 말로. 실제로 이제는 이씨 중에서도 꽤 듣보잡 성씨에 속해서 '인천 이씨'라고 하면 다들 "그런 성씨도 있었나?" 하는 반응. 가끔 역덕들만 알아본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약 6만 8000명이 사는 것으로 보고 되었는데, 과거 화려하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적은 숫자. 김해 김씨가 그 조사에서 412만 5000명이 보고된 것과 비교한다면 더더욱 안습해진다.

하지만 그만큼 족보세탁으로 가문에 편입된 사람이 적다는 것이니 인천 이씨 위키러들은 부계만 따진 것이긴 해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자. 이자겸 시대를 기점으로 너무 몰락한 바람에 조선 후기 이후에 시작된 족보세탁 바람에서 별 관심을 못 받은 양반 가문으로 보인다. 아니 애초에 조선시대 전체에서 문과급제가 9명밖에 안된다면 양반이라고 하기도 뭣한 가문.

웅진출판사의 "한국의 역사" 만화에서는 권력을 휘어잡은 이자겸이 지나가면서 손짓 한번 하자, 날아가던 새들이 비오듯이 우수수 떨어지고, 동네 똥개들도 알아서 설설 기며 모시는 모습으로 그 하늘 높은 세도와 위력을 표현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져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칠남 이의장이 의기양양하게 수좌를 맡으면서 불교계까지 손아귀에 넣게 되자 그걸 본 스님들이 이러다가 자기 집 강아지한테도 벼슬을 내릴 판국이라고 투덜거린다.
  1. 사실 김조순은 이자겸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2. 조선은 당시엔 주로 평양 일대를 따로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했으므로 어?! 오등작 제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형식상의 봉지로 하사하는 의미의 작위.
  3. 일본 헤이안 시대 때도 이와 굉장히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권신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는데, 이자겸은 1대도 못 가 금방 몰락했지만 후지와라씨는 헤이안시대 내내 외척으로 국가를 좌지우지한다.
  4. 여담으로 귀양간 후, 비굴하지 말자는 각오로 염장한 조기에게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일화일 뿐이다. 굴비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링크해당항목을 참고.
  5. 사실 권력있는 간신은 이자겸 같은 타입, 즉 겉으로 보면 사람 좋고 호감가는 타입이 훨씬 많다. 정중부 역시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좋아 겉보기에는 존경스러워 보이는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타입이 아니면 애초에 권력을 잡는 것 조차 힘들다. 남 듣기 안좋은 소리를 해서 어그로를 끌고 다니는 비호감 파이터 타입은, 오히려 유학에서 말하는 충신의 스테레오 모습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