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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7월 3일, 중화민국 타이베이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 대만판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1 의문의 죽음을 당한 교수
(천원청의 생전 모습)
천원청(陳文成)은 대만에서 태어나 197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카네기 멜론 대학의 조교수가 되었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후 국립타이완대학의 통계학과 교수가 되어 대만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천원청의 운명을 바꾸게 된것은 잡지 "메이리다오"(美麗島). 이 잡지는 대만의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반체제 성향의 잡지였고 천원청은 이 잡지를 지지했다.
이런 이유로 1981년 7월 2일, 천원청은 정보기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날 천원청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날인 7월 3일 이른 아침에 대만대학교 도서관의 잔디밭에서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2 죽음의 원인?
천원청의 죽음에 의혹은 중국 국민당 독재정권을 향해 쏠렸다.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대만 내의 민주화 인사들이 잇달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메이리다오 관계자들이 있었다. 천원청은 메이리다오에 기부를 한 이유로 정보기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던 것이다.
의혹이 제기되자 국민당 정부는 천원청이 해외의 스파이였고 이를 들킬까봐 무서워서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족과 여론의 거센 항의에 타살로 정정하고 사건 수사를 진행했다. 천원청이 미국 시민권자였던 탓에 미국 정부도 의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리며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많은 이들은 천원청이 메이리다오를 지지한 이유로 가오슝 사건의 연루자들과의 관계를 캐묻는 정보기관에 의해 고문을 당하다가 쇼크로 숨졌고 정보기관이 대만대학교 도서관 잔디밭에 천원청의 시신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3 사건 이후
천원청의 죽음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세계의 여론악화에 어쩔 수 없이 해외에서 대만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을 취소하고 정보기관의 취조도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천원청의 의문사는 민주진보당 집권 이후 천수이볜 총통에 의해 재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정보기관들의 반발로 진상을 밝혀내는데는 실패했다. 이후 마잉주 총통이 집권하면서 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과 더불어 이 사건의 재조사가 진행되고는 있으나 너무 느린 속도 탓에 천원청의 유족은 대만정부가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의지가 없어보인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012년에 국립대만대학교에 천원청의 기념비가 세워졌고, 천원청 기금회가 조성되어 민주인권운동을 펼치고 있다. 아울러 천원청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교내 장소(사진 위의 자리)를 추모광장으로 지정하라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2009년 제작된 미국영화 <배반당한 포모사>(Formosa Betrayed: 被出賣的台灣)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포모사(Formosa)는 과거 포르투갈에서 대만을 '아름다운 섬'(Ilha Formosa)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양에서 대만을 부르는 별칭이기도 하다. 제목 자체는 1965년에 전직 미국 외교관 조지 케르가 국민당의 대만 통치를 비판하고, 대만의 자주성과 분리독립을 옹호하며 쓴 책의 제목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