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중화민국 총통 | |||||||
10대,11대 | ← | 12,13대 | → | 14대 | |||
천수이볜 | ← | 마잉주 | → | 차이잉원 | |||
중화민국 타이베이 시장 | |||||||
10대 | → | 11대, 12대 | → | 13대, 14대 | |||
천수이볜 | → | 마잉주 | → | 하오룽빈 |
馬英九(마영구) / Ma Ying-jeou [1]
총통 재임 시절의 공식 프로필 사진
강만후라고 숨겨진 동생이 있다.마이쮸가 아니다! 영구 없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목차
1 개요
중화민국(대만)의 정치인. 전임(제12, 13대) 총통. 당적은 중국 국민당.
가톨릭 신자인 한족 기독교인으로 역대 중화민국, 특히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국민당 자체가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서 대만 외성인은 대게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본성인들은 기독교를 기득권 종교라며 외면하고 전통 도교에 대한 신심을 더 강하게 해서 기독교인이 적다. 상대적으로 비한족인 원주민은 많다. 중화민국 건국자인 쑨원이나 국부천대의 1세대 지도자인 장제스 등도 기독교인이었다. [2]
1950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특이하게 출생지가 홍콩이다. 부모 모두 국민당원으로 후난 성 출신이다. 부모가 고향을 떠나 타이베이로 옮기는 과정에서 임시로 머물렀던 홍콩에서 태어났던 것[3]아버지는 2차대전 직후, 국부천대 전에 근무지가 잠시 대만였던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국적은 당연히 태어났을 때부터 중화민국이다. 현재 그의 자매는 모두 중화민국과 미국 이중국적자다. 자신만 유일하게 미국 국적이 없다. 본인은 미국 영주권이 있었으나 포기했다. 한편 출생지가 영국령 홍콩이라는 점 때문에 선거 당시에는 반대파들의 공세에 시달렸다. 영국 국적이 있는지 확인을 요청받기도 하였고, 잉주라는 이름이 영국(英國) 카우룬(주룽, 九龍)에서 태어나서 지어진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마잉주는 아기 때인 1952년에 가족과 함께 타이베이에 와서 성장하였다. 한족의 한 갈래인 하카(객가인) 출신이다. 후난 성에 외가 쪽 친척이 아직도 살고 있다.
국립대만대학 법학과[4]를 졸업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학부과정을 마치고 소위로 중화민국 해군으로 입대해 육전대 병참기지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소교 계급으로 전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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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중화민국 해군 군관 복무시절. 사진 3번에서 마잉주와 악수하는 중화민국 육군 장성은 이후 중화민국군 참모총장, 국방부장, 행정원장 등을 역임한 하오보춘이다. 하오보춘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고.
제대 후 뉴욕대학교 법학석사, 하버드대 법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80년대에 정치에 입문하기 시작해서 총통부 제1부국장으로 있었고, 중국 국민당 중앙위원회 부비서로 있었으며 법무부 부장으로도 있었다. 영어를 매우 잘해서 장징궈의 통역 비서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생김새도 잘생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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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의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과 인터뷰하는 장징궈 당시 총통. 가운데 통역하는 이가 마잉주다.이 자리에서 장징궈는 "조만간 계엄령 해제를 포함하여 헌정질서 복귀를 단행할 것"이라고 밝혔고, 마잉주는 당시의 심정을 "전율적이었다"고 회고했다.[5] 대만 현대사에서 꽤 의미있는 순간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치 경력을 부각시키기에도 유리한 사진이어서 마잉주가 홍보용으로 자주 활용하기도 했다.
2015년 취임 7주년 연설.
중화민국 역대 총통 중에서 표준중국어 발음과 문법구조를 제일 유창하게 잘 하는 사람이다. 마잉주는 객가인으로, 후난 성 출신 부모에게서 광동어 쓰는 지역에서 태어났고 대만어 쓰는 지역에서 자라났다. 즉, 관화권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표준중국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잘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제스, 장징궈, 리덩후이, 천수이볜, 차이잉원 모두 중국어(...)를 마잉주만큼 유창하게 하지 못한다.
다만 마잉주는 후난 방언은 못 하는 모양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범람은 '차이잉원은 객가인이라고 하는데 객가어도 못한다.'고 그랬고 범록은 '중화민국 교육 정책 때문에 배울 기회가 제대로 없었다'고 하면서 '그러는 마잉주는 후난 말도 못한다.'고 맞받아쳤다. 다만 그의 큰누나는 할 줄 아는 모양이다. 마잉주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큰누나가 제문을 후난 방언으로 읽었다.
2011년 경선 홍보영상. 객가어와 대만어로 되어있다. 노래는 환취가(歡聚歌)라는 노래로 1995년에 나온 대중가요이며, 마잉주는 타이베이 시장으로 출마하던 1998년부터 이 노래를 사용한 광고를 하나씩 만들고 있다. 참고로 1998년부터 2008년 까지의 원주민 대상 광고는 계속 같았다.(...) 대만 정치인들은 꼭 유세할때만 대만어 객가어 드립치지...
2 정치 경력
2.1 2008년 이전
1994년 당선되어 현직이던 천수이볜을 1998년 선거에서 이기고 타이베이 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천수이볜은 총통으로 2002년에 한번 더 재선되어 2006년까지 타이베이 시장직에 있었다.
마잉주 - 셰창팅 TV토론.
천수이볜의 삽질에 힘입어 2008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에서 전직 가오슝 시장인 민주진보당 셰창팅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7,658,724 대 5,445,239로 당선되었다. 공교롭게도 셰창팅도 1998년과 2002년에 가오슝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08년의 첫 총통 당선 직후, 환호하는 모습
2.2 2008년~2012년 제 12대 총통 재임
선거 4개월 전에 대한민국에서 이명박이 당선되자 마잉주는 이명박의 747 공약을 벤치마킹하여 633정책(연 경제성장률 6%,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실업률 3%이하 달성)을 내세워서 인기를 얻었다. 이에 질세라 셰창팅은 가오슝시장 시절 환경오염이 극심하던 아이허(愛河)를 환경친화적인 관광명소로 만든 것을 주지시키며 선거운동에 이명박의 청계천을 적극 활용하며 서로 자신이 바로 대만의 이명박이라며 선거운동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2008년 촛불시위등 정부정책의 반작용과 지지율 폭락이 일어나고 대만에서도 마잉주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하자 갑자기 이명박 정부와의 선긋기에 들어갔으며 참고자료 감탄고토, 2008년 9월에 마잉주정부는 633정책을 포기했다. 참고자료
총통에 당선되고 나서 중화대륙과의 양안관계를 개선시키고 있다. 중국과의 양안경제협력구조협의(ECFA)를 발효시키고, 중국과의 평화협정도 검토하는 등 여러가지 양안 개선책을 내놓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와중에서 타이완 경제가 중국 경제에 의존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 이런 상황을 해소해 보고자 일본과 자유무역협정을 시도하고 TPP가입도 시도하려 하고 있지만.. 대륙이 가만 있을까
마잉주 1기에는 천수이볜 정부에서 시행된 소삼통(小三通)[6]을 확대하여 대삼통(大三通) 시대[7]가 열렸다. 양안간에 아예 이민을 가서 살 수 있게 됨에 따라 대만 기업가들이 중국으로 더 많이 뛰어들고 중국 노동자와 중산층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만에 유입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대만 부동산 가격이 이전에도 상당히 오르고 있었지만(연 7~8% 수준), 갑자기 폭등(연 20% 이상)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대만의 폭등하는 부동산으로 2010년 대만 경제성장률이 10.6%를 찍기도 하고 대만의 정부와 지자체들의 세수가 급증하여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2010년 ECFA 토론회 영상. 마잉주 총통과 차이잉원 민진당 주석의 1:1 TV토론이다. 토론이 길어져서 14개로 나누어져 있는 버전이 있다. 이 링크로 가면 1~14번 전부 다 볼 수 있다. 중국 국민당은 ECFA를 당론으로 찬성했고 민주진보당은 ECFA를 당론으로 반대하다보니 이런 토론회를 개최한 것.
하지만 중화민국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천수이볜과 마잉주는 이런 면에서 대조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통치는 못하고 있다. 천수이볜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없고 오로지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반대로 마잉주는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하지만 대만 독립 찬성파와 반대파의 눈치를 보느라 서로 자신의 정체성을 통치 중 대놓고 언급은 못하는 것. 천수이볜은 집권기에 독립을 선언하거나 타이완 섬과 관련 없는 중화민국의 공휴일을 평일로 바꿔놓지도 못했다. 마잉주 역시 지금은 '중국'이 아닌 '대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한창 대만 독립론 때문에 양안간 긴장이 심했던 2006년 국민당 주석이었던 마잉주는 "하나의 중국이란 바로 중화민국이다. (대륙 정부는) 중화민국이 필요한가, 아니면 대만 공화국이 필요한가?"라는 발언을 하면서, 그나마 하나의 중국 정책을 놓고 국민당과 협력을 강화하려던 중국 정부의 뒤통수를 제대로 쳤다.
2.3 2012년~2016년 제 13대 총통 재임
2012년 선거에서 재선된 후, 환호하는 모습
이래저래 실정도 있고 해서 2012년 1월 14일에 실시된 총통 선거에서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후보와 친민당 쑹추위 후보가 급속도로 쫓아오면서 재선여부가 불투명해 진 상황이었으나 선거 막판 양안관계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상당한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고. 동시에 의석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입법의원 선거에서도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누가 이기든 미래는 불안하다 더 웃기는 건 부총통 후보 이름도 우둔이(오돈의)다. 원래 현직인 샤오완창 부총통이었으나 후보등록 직전 부총통 후보를 우둔이 행정원장(총리)으로 교체했다.
총통선거 이후에는 대한민국에 별로 보도되지 않다가, 일본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며 날뛰자 느닷없이 그럼 댜오위다오 문제도 같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게 어때?라고 일본에 역습을 날려버린 사실이 보도된 바 있다! 진짜 제소하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럴수도 있다는 식의 발언이었지만. 애시당초 대만은 국제적으로 그렇게 인정받는 축이 못되니...
마잉주 2기는 마잉주 1기 때 시행한 대삼통의 후폭풍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안간 이민이 무제한 허용[8]되어버림으로써 대만의 부동산 가격이 버티기 힘든 수준으로 뛰어버린 것. 중국인들의 급속한 대만 부동산 잠식으로 대만의 부동산 가격(아파트 평당가)은 한국의 그것보다 30% 넘게 비싸져버렸다. 이에 대만 국민소득 대비 집값이 15배 이상으로 뛰면서(홍콩은 18배 수준(!))[9] 대만인들 사이에서는 마잉주 총통의 지나친 양안 친화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강해지기 시작한다. 중국과의 관계만 신경쓰다가 대만 내부의 경제, 그것도 부동산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대만의 부동산 가격을 띄워주는 중국인들로 인해 정부랑 지자체는 여전히 늘어나는 세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이 즐거운 비명 뒤에는 바로 대만인들의 좌절의 비명이 있던 것. 그래서 이 부동산 문제가 이슈가 된 2013년부터 마잉주 총통의 지지율은 수직낙하하기 시작한다.
2014년 들어서 대만 검찰의 국회 도청 파문으로 지지율이 하락했다. 특히 마잉주의 친중(親中)정책에 반발하는 대학생들이 입법원을 점거하는 해바라기 운동도 벌어졌다. 3월에는 야당인 민진당에서 탄핵을 거론하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5월에 정작 민진당 천어우포(陳歐珀) 입법위원이 이를 기회랍시고 마잉주 상중(2014년 초반 마잉주의 모친이 세상을 뜸)에 깽판을 치는 바람에(...) 오히려 민진당이 역풍을 맞아버렸다. 기회를 줬는데 왜 쓰지를 못해
2014년 6월 무렵부터는 미국을 비롯해서 엘살바도르 등의 중남미 국가를 순방하면서 외교에 집중하는 중.
한편으로는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서로 정상회담을 할 의향이 있어보이지만, 실제 이행될 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하여 마잉주와 시진핑이 각각 국민당 주석, 공산당 총서기 자격으로 회담할 것을 제안했지만, 마잉주는 중화민국 총통 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간의 회담을 원하고 있기 때문. 앞서 언급했다시피 야당 주석 시절에도 중화민국이 독립된 주권 국가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국쪽에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
2014년 11월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한 직후, 국민당 주석에서 물러났다. 후임 주석에는 신베이(新北) 시장인 주리룬이 당선되었다. 이로써 국민당 주석 자격으로라도 시진핑 중국 주석과 양안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2015년 2월에는 대륙위원회(한국의 통일부에 해당) 전임 부주임위원이 "2014년에 마잉주 총통과 시진핑이 진먼다오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거의 합의할 뻔 했다"고 주장했는데, 대만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홍콩에서 센트럴 점령 시위가 발생하자 홍콩 시민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 이 부분에서는 정적 민진당과도 의견을 같이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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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28 유혈사태 추모식에 참석하여 커원저(柯文哲) 타이베이 시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 사람은 유명 외과의사 출신 시민운동가로 지난해 11월의 전국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을 포함한 야권의 단일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롄성원(국민당 명예주석 롄잔의 아들)을 이기고 당선된 인물이다. 그런데 커원저는 마잉주의 악수 요청을 대놓고 거절했다. 커 시장도 자신의 조부가 2.28 사건 당시 체포당해 국민당군에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3년만에 별세하여 국민당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다는 것으로 전해진다.
2014년 말 지방선거 패배 이후부터 임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른 현재에는 지지율이 10%~20%로 난맥을 보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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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현재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으며, 경제악화로 지지율은 9%까지 떨어져서 이름 끝자(九)를 이용한 " 9총통"이라고 불리는 굴욕을 당하고 있다.
2014년 3~4월의 해바라기 운동에도 등장한 "9총통" 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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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와 땡칠이[10]
역사적인 양안 정상회담의 현장을 담은 동영상.
2015년 11월 7일 싱가포르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역사적인 양안 정상회담을 가졌다. 국공내전으로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 대만의 중화민국이 서로 분단된 지 66년 만에 "중화민국 총통"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 한자리에서 회동한 것이어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기사
이 자리에서 마잉주와 시진핑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는 다음 집권이 유력한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쉽게 대만독립을 선언하지 못하도록 국공합작으로 마련한 일종의 안전판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중국측은 대만측의 여러 요구에도 양국 지도자 자격으로 만나는 것을 거부해왔으나, 결국에는 대만의 요구를 전격 수용해서 만날 수 있었는데 이로써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다시금 인정받는 대신 대만의 지위를 중국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려주는 양보를 하게 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중국-대만 정상회담을 부적절하다고 논평했으며, 일각에서는 매국노라고 비난하기도 하는 모양. 馬: 니네가 원하는대로 국가원수 대 국가원수 자격으로 만났는데도 그러냐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이 대만을 국가로 인정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하며, "대만 총통"이 아니라 "중화민국 총통" 자격으로 참석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해서 그렇다. 강대국 정상에 대한 호칭을 '선생'으로 할 정도로 깡도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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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7일 기준 마잉주 총통 지지율은 19.9%로 나타났다. 레임덕이 심각한 걸로 보이지만 그래도 2014년 말의 9총통 소리 듣던 시절보다는 나아졌다. 지금은 19총통 링크
2016년 1월 16일 치러진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의 승리로 인해 정권이 교체되었다. 어차피 마잉주 총통은 3선이 불가능하기도 하고. 2016년 5월 12일, 마잉주 총통 내각이 총 사퇴했다. 기사 총사퇴의 발효일은 차이잉원이 취임하는 5월 20일이다. 정권 인수인계도 거의 끝난 셈이다.
('중화민국 총통'으로서의 마지막 퇴근 모습)
임기 마지막날인 5월 19일, 페이스북을 통해 "약 30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매일 대만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국민들의 생활을 더욱 좋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했다. 내가 총통이라는 직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대만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 토지(대만), 이 국가에 대해 복무를 하는 마음은 영원히 은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퇴임 소감을 밝혔다. 이보다 앞선 5월 16일에는 언론과의 마지막 회견에서 자신의 8년 재임기간 동안 거둔 실적들(예: 중국과의 관계 개선, 무비자 입국 증가를 통한 실질적 외교활로 확대)을 강조하며 "과거의 어느 총통들도 거두지 못했던 일들"이라고 역설했다. 정권교체로 떠나면서도 자신에 대한 낮은 지지도, 정책 실패를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못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2.4 퇴임 이후
2016년 5월 20일, 후임 총통 차이잉원의 취임식에 전직 총통 자격으로 참석했다.
임기 막판 횡령 의혹이 불거졌다. 타이베이 시정부 측에서 참고로 시장은 위에서 언급한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을 역임할 때부터 총통 재임 시까지 여러번 횡령을 한 혐의가 있으며 검찰이 이를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만 언론 보도 한국 외교부 보도자료 하지만 총통에서 퇴임하자마자 출국 금지가 걸려서 곧바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천수이볜과 달리 마잉주는 퇴임한지 1주일이 되었는데도 출국 금지는 커녕 검찰 용의선상에 올랐다는 보도조차도 없다.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의 블러핑(뻥카)으로 보는 듯하다. 사실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은 대만 내에서 여론이 좋지 않다. 타이베이 시장 재선은 가능하겠지만(국민당에 타이베이 시장으로 나올 재목이 없다), 그렇다고 커원저가 타이베이 시장직을 잘한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논란만 일으켜서(19금 교통카드 파동 등) 지지율이 대만 지자체장 중에서 제일 낮다. 30%를 간신히 넘는 수준.
퇴임하자마자 급격하게 대만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한국의 이명박 전 대통령 같다. 일단 퇴임하면 자택에서 안정을 취한 뒤에 강연, 저술 등으로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한다. 이제 정계은퇴도 했겠다, 아쉬움은 있어도 마음은 홀가분한 모양.
6월 15일 홍콩 아시아출판업협회(SOPA)의 개회식에서 동영상을 통한 대리 기조연설을 했다. 본래는 직접 참석하여 연설할 계획이었지만, 차이잉원 정부의 총통부에서 <국가기밀보호법>에 의거하여 "퇴임 1개월만에 출국은 부적절하다"며 거부된 것. 대만의 현행 <국가기밀보호법>은 전임 총통에 대해, 퇴임 후 3년 동안의 출국은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에 마잉주 측은 "리덩후이 전 총통도 퇴임 후 1개월만에 일본에 잘만 다녀왔는데,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했다. 이에 대만 정부는 "현행 규정이 2003년에 정해졌으며, 때문에 리덩후이 전 총통이 퇴임한 2000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영상을 들어보면 영어 문법이나 단어 선택 등이 굉장히 좋은 편임을 알 수 있다. 후임 총통인 차이잉원도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
퇴임 이후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현안에 대한 제한적인 입장만 전달하며 언론 노출은 극히 삼가고 있다. 2015년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중화민국(대만) 여러 곳을 자유롭게 여행했다고 한다.
9월부터 타이베이 동오대학에서 법학과 교수로 활동할 예정이다. 분야는 주전공인 국제법이며 1주에 2시간, 형식은 따지지 않는 파격적인 조건이라고 한다. 동오대학의 관련 발표
3 저서
- <치국: 대만의 번영을 위한 새로운 책략>(治國:台灣贏的新策略): 총통 선거를 앞둔 2007년, 러닝메이트로 1기 정부의 부총통을 지내게 되는 샤오완창과의 공저 형식으로 발간한 정책 대담집.
4 기타
아내 저우메이칭(周美青. 영어이름 Christine Chow Ma) 여사도 같은 홍콩 태생의 외성인으로 마잉주의 여동생과 중학교 동창이었고, 둘 다 미국 유학생활을 하던 중에 뉴욕에서 결혼했다. 서민적 이미지가 강한 덕분에 남편의 정치 활동에도 제법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슬하에는 두명의 딸이 있다.
2011년 10월 10일 생방송으로 진행된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식에서 마잉주가 미모의 여성 행사요원에게 미묘한 눈길을 준 것이 저우메이칭에게 딱 걸렸고, 이후 두 사람의 불편한 모습이 방송에 그대로 노출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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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원하고 닮았다는 중화권의 의견이 있다. 시진핑은 김수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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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만화 5도쟁패에서는 마앵구로 모에화당했다.
- ↑ 마잉주 본인은 자기 이름을 로마자 사용 언어로 표기할 때 한어병음식인 "Mǎ Yīngjiǔ"나 웨이드 자일스 표기법식인 "Ma Ying-chiu"가 아닌 위의 표기대로 쓰는데, 여기서 "Ying-jeou"는 국어 로마자에 의한 표기이다. 다만 Ma는 아니다. (국어 로마자로 馬는 "Maa"이다.)
- ↑ 외성인 중 대표적인 대만인 그리스도인이 등려군으로 산둥 성이 본적이다.
- ↑ 2차대전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까지 이 집안은 자주 옮겨다녔다. 그래서 마잉주와 그의 자매 출생지는 다 다르다. 큰누나는 충칭, 둘째 누나는 타이완 섬(자세한 지명은 불명), 셋째 누나는 창사. 넷째인 본인은 홍콩, 막내인 여동생은 타이베이 출생. 형제자매 중 후난 성에서 태어난 건 하나다.
- ↑ 대한민국 내에서의 위상을 따지자면 서울대학교 법대와 비슷하다.
- ↑ 이듬해인 1987년 7월에 실제로 대만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국공내전 직후인 1949년 이후 무려 38년만의 일이었다.
- ↑ 중화민국의 푸젠 성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푸젠 성 간에 항공, 우편, 해운 자유화. 이 소삼통을 성사시킨 사람이 바로 차이잉원이다.
- ↑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전체의 항공, 우편, 해운 자유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양안간에 이사가서 살 수도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인이 대만에 부동산을 구매하면 대만으로 이사가서 살 수 있게 된 것.
- ↑ 중국-대만은 형식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이 적용되고 있기에 이에 따라 대만인이 중국에 가서 살든, 중국인이 대만에 와서 살든 서로 원 국적이 박탈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 국적만 취득하게 되는 이중국적이 범람하고 있다.
- ↑ 2014년 기준 타이베이의 주거지 지가는 ㎡당 14000미국 달러 수준으로, 서울특별시의 주거지 지가인 ㎡당 10500달러 수준보다 30% 이상 비싸다.
- ↑ 시진핑은 중화인민공화국 제07대 국가주석이다.
- ↑ 사실 이상한 건 아니다. 이카통이 민진당 세력이 강한 가오슝 지역의 카드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