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중화민국 총통 | |||||||
8대, 9대 | ← | 10대, 11대 | → | 12대, 13대 | |||
리덩후이 | ← | 천수이볜 | → | 마잉주 | |||
중화민국 타이베이 시장 | |||||||
9대 | → | 10대 | → | 11대, 12대 | |||
황다저우 | → | 천수이볜 | → | 마잉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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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水扁(진수편) / Chen Shui-bian / Tân Chúi-píⁿ
- 생몰년 : 1950년 10월 12일[1] ~ 현재
- 재임기간
- 10대 : 2000년 5월 20일 ~ 2004년 5월 20일 (4년)
- 11대 : 2004년 5월 20일 ~ 2008년 5월 20일 (4년)
이천수볜
1 개요
대만 역사상 최초의 민주진보당(민진당) 출신 총통이자, 최초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한 주인공이며 태어난 곳이 당시 중화민국 땅이었으면서, 그 땅이 현재도 중화민국 땅인 최초의 총통이다.
한글 표기로는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천수이볜이 일반적이지만, 총통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한 1999년 이전에는 천쉐비안이나 천쉬비엔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으며 현재도 가끔 이런 표기가 발견된다.
2 초기이력
대만 본성인 출신으로 타이난시 관톈 구(官田區, 관전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국민당이 본토에서 쫓겨온 이래로 대만의 기득권층은 대부분 대륙출신의 피난민(외성인)들이었다. 즉 천수이볜은 뿌리부터가 대만 사회의 비주류이다보니 어렸을 때부터 매우 가난했으나 머리는 있어서 국립대만대학 법학과에 수석입학한 후[2] 3학년 때 사법시험에 최연소 수석합격하여 변호사 신분으로 졸업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대 법대 수석입학 후 졸업하기도 전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과 같다. 후임 시장이자 총통 마잉주 역시 동문이다. 이후 보험 변호사로 잘 나가다가 1980년에 메이리다오 사건 변론을 하면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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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시절의 천수이볜. 정치 입문 초기에 쓰인 포스터 속의 모습)
당시의 중화민국은 이른바 '3당 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아주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과 실질적인 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다.
게다가 1940년대에 중국대륙에서 유권자들이 직선제로 선출한 국민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국회의원들은 종신직이었다. 중화민국의 중앙정부를 타이완 섬으로 모두 옮긴 장제스 총통은 가장 먼저 '중공의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발효했으며, 그 다음에 중화민국 사법원의 대법관들을 움직여서 헌법 재판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국민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총선거를 중지했으니, 중앙정부의 선거제도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보궐'선거였다.
천수이볜 변호사는 1946년 체제의 해체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여 여러 번 투옥되었으나, 1986년 민진당이 결셩된 이후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1994년 최초의 성급 행정구역 단체장 선거에서 당당히 타이베이 시장에 4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3]
1994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 후보 토론회에서의 천수이볜 연설. 표준중국어 발음은 썩 괜찮은 편이다. 대만어 어투가 한번씩 들어가는게 옥의 티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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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시장 시절의 모습)
그의 재임기간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부패 척결. 현재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의 천수이볜은 부패와의 전쟁을 치렀는데, 심지어는 조폭들이 연관되어 있는 불법 도박장 및 퇴폐 업소 등을 말 그대로 싹쓸어버렸다. 당연히 그 뒷골목 세력들이 뇌물 제의도 해오고 나중에는 대놓고 협박까지 했지만 민주화 운동 때 산전수전 다 겪은 천수이볜한테 통할 리가 없었다. 너네 민주화 운동하다가 감방가고 주변 사람이 테러당하는거 경험해봤어? 안해봤음 깝치지 말어!
그러나 1998년 선거 때는 51대45로 패하면서 재선을 놓치는데, 사실 1994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게 당시 현직이었던 국민당 후보가 워낙 지지율이 낮았던데다 국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신당 후보까지 가세하면서 표를 갈라먹는 등의 운이 좋았던거고, 1998년에는 표가 갈리지 않아서 6%P차로 패배했던 것. 애초에 타이베이 등의 북부지역은 국민당의 지지세가 강한편이기도 했다.[4]다만 일각에서는 천수이볜에게 앙심을 품은 뒷골목 일당이 국민당과 내통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묘하게도 후임 시장이 마잉주. 총통도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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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기간 중, 천적 당시 국민당 후보였던 마잉주와 함께)
타이페이 시장에서 물러난 뒤 민주진보당의 2000년 총통 선거 후보로 거론되다가 마침내 출마했으나 당초에는 당선권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이 때의 판세를 보면 전무후무한 민선 타이완 성장을 지낸 무소속 쑹추위가 독주했다. 쑹추위는 원래 중국 국민당 소속이었으나 총통 후보를 놓고 갈등을 벌인 끝에 제명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 밑으로 현직 부총통이자 국민당 후보였던 롄잔과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2위를 두고 경합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국민당의 이런저런 부패 스캔들을 놓고 롄잔과 쑹추위간에 병림픽이 벌어지면서 쑹추위의 지지도가 하락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당시 총통이자 중국 국민당 주석이었던 리덩후이의 치밀한 각본이라는 설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리덩후이는 1994년 타이페이 시장 선거 때 국민당 출신 자오샤오캉(趙少康)이 신당 후보로 출마한 상황에서 국민당 소속 현직 시장 황다주(黃大洲)가 이런저런 실책으로 당선권에서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없이 수수방관한 끝에 기어이 천수이볜이 당선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산데다, 알고보니 천수이볜과 마찬가지로 대만 독립론자였고 이 문제로 국민당에서 제명된 뒤에는 아예 대만단결연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천수이볜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위 쑹추위의 지지도 하락이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렴한 이미지를 내세워 몇몇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하는 상승세를 타게 된다. 결국 천수이볜 4,977,737표, 쑹추위 4,664,932표, 롄잔 2,925,513표로 최초의 민주진보당 출신 총통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대만 정치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다.
3 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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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거행된 총통 취임식 모습. 오른쪽은 러닝메이트이자 대만 최초의 여성 부총통인 뤼슈렌)
천수이볜은 기존의 국민당이 주창했던 국민당판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반대하였고, '타이완 독립'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중국 본토와 국민당 정치인들과 대립하였다. 사실 천슈이벤 총통은 초기에는 중국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반대하는 천수이볜 총통이 눈엣가시이니 대륙과의 사이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천수이볜 - 롄잔 2004년 총통 선거 TV토론. PTS에서 진행되었다.
2004년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결과 | ||||||
기호 | 후보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여부 |
총통후보 | ||||||
부총통후보 | ||||||
1 | 천수이볜 | 민주진보당 | 6,471,970 | 50.11% | 1 | 당선 |
뤼슈렌 | 민주진보당 | |||||
2 | 롄잔 | 중국 국민당 | 6,442,452 | 49.89% | 2 | 낙선 |
쑹추위 | 친민당 | |||||
선거인수 | 16,507,179 | 투표수 | 13,251,719 | |||
무효표수 | 337,297 | 투표율 | 80.28% |
총통 재임기간 동안 경력이 화려했다. 암살, 저격 미수 위기도 겪었다. 2004년 총통 직전 유세 도중 당했는데 그 직후에 치러진 총통 선거 결과, 0.2%p 남짓한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표차로는 겨우 29,518표차)로 재선되었기 때문에(사실 대만 주요방송국들이 개표방송에서 무리한 경쟁 때문에 삽질한 것도 한몫했다) 롄잔과 중국 국민당 쪽에서는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대만 대법원에서 재검표까지 갔는데, 25,563표차로 표차가 줄어들기는 했는데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타이완 독립!' 선언으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전면전까지 갈 기세였지만 당시 중국의 군사력이나 국력이 아직 완성된 시기가 아니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단 천수이볜이 집권하면서 2001년에 IT버블 붕괴의 여파로 인한 전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사상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한차례 몸살을 앓았던바 있고 2002년과 2003년에는 IT버블의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다시 경제가 성장하나 싶었지만 얼마안가서 (대만입장에서는) 운 안좋게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LG전자 LG디스플레이 등 대한민국 대기업들의 치킨게임 공세에 대만 IT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간다. 중소기업은 경쟁 대기업들이 경쟁상품 가격을 내려버리는 치킨게임을 시작해버리면 자본력이 딸리기 때문에 버틸 수가 없다얼마 버티지 못한다. 이때 일본의 반도체 기업(엘피다 등)도 줄줄이 쓸려나갔다. 자연히 대만 경제는 침체했고,[5] 그 와중인 2004년 대한민국한테 1인당 국내총생산이 역전당하게 되어 보수언론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중화민국보다 국민총생산이야 당연히 컸지만, 인구가 많아서 1인당 GDP는 2005년에 와서야 역전하게 된다.
대만 기업들이 싼 노동력을 찾아 본토로 옮겨가는 동안, 천수이벤 정권은 이런 변화에 대해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한국에 뒤쳐지는 계기가 되긴 했다. 싸구려 노동력만 쫓는 대만 기업의 속성과 무모한 중국과의 적대정책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에 대만을 동조시키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다. 그렇다고 반중을 명분으로 삼고 있는 천수이볜 정권으로써 중국 경제에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므로 천수이볜으로써는 어찌 해야될지 모를 노릇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처럼 중국을 일종의 공장으로만 보고 투자하면 또 모르겠는데 천수이볜은 중국을 시장으로 봐야 하는 입장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부터 천수이볜 본인과 뤼슈렌 부총통, 천수이볜의 부인인 우수전 여사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되면서 지지율을 까먹었고 천수이볜 버전 중화민국송 같은 조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천수이볜의 부패 의혹은 2000년 총통 선거 직후부터 계속되었다. 2000년 총통 선거가 끝나고 선거비용을 정산하기 위해 대만의 선관위에 제출한 자료에서 선거비용이 지나치게 적었던 것(2위였던 쑹추위 선거비용의 1/4 수준밖에 안 됐다. 심지어 1998년의 천수이볜 타이베이 시장 재선 선거비용보다도 작았다!)[6]. 2004년 총통 선거에서도 경쟁자였던 롄잔의 선거비용에 비해 천수이볜의 선거비용은 절반 정도로 제출되었고, 계속해서 선거비용을 유용한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이게 2006년 천수이볜 아들(천즈중 말고 한명 더 있는데 이쪽이다)과 처가쪽의 주가조작 사건과 더불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2008년 퇴임하자마자 구속을 당하게 된 것. 결국 2008년 재판을 앞두고 "2000년과 2004년 선거자금을 모금하여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나(천수이볜)의 부귀를 위해 사용하지는 않았다"라며 공금유용을 인정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민진당은 대충격에 빠졌고(천수이볜의 저 발표가 나오고 민진당 지지율이 한자리수로 떨어졌다!) 차이잉원이 구원투수로 당 대표에 오르는 계기가 된다.(출처 : 차이잉원 자서전 '보통사람의 특별한 인생')
2008년 2월에는 중화민국 정부에서 코소보를 독립국가로 공식 승인했다. 유럽에서 중화민국을 국가로 인정하는 곳은 바티칸 뿐이다(정확하게는 바티칸이 직접 외교를 안 하고 교황청(Holy See)이 외교를 처리하지만... 바티칸 문서 참고). 중화민국/외교 참조. 물론 많은 유럽 국가들이 대한민국처럼 대표부를 두거나 해서 비공식적으로 대만과 교류하고 있지만 포르투갈, 노르웨이처럼 대표부도 두지 않는 국가들도 꽤 있다. 여기 지도에서 푸른색 말고 회색으로 표시된 국가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중화민국 정부가 코소보를 공식 승인한 것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논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 마잉주 정권도 코소보의 승인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천수이볜 정권은 실패한 정권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권위주의와 비민주적 헌법 조항을 폐기하는 등 나름대로 의미있는 개혁도 있었고 대만 본성인들 입장에서 눈엣가시였던 장제스를 기리는 중정기념당의 이름을 대만 민주 기념관으로 바꾸고 대만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를 전시하기도 했다. 다만 마잉주가 집권하고 바로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바꿔버렸다.
당연하겠지만 중국 대륙에서는 천수이볜을 매우 싫어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역린이라 할 수 있는 대만 독립을 대놓고 추진했기 때문이다. '한간'(漢奸)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데 이건 한국에서 이완용에게 붙는 매국노라는 표현과 동급이다.
4 감옥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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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퇴임 총통 자격으로, 후임자인 마잉주와 함께)
陳: 후배님. 앞으로 잘 좀 봐주슈
馬: 선배님. 감방에 자리 마련해 두겠습니다
2008년 중국 국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총통직 퇴임 후 불기소 특권이 사라지자마자 출국 제한 조치가 취해지고 공금 유용과 돈세탁 혐의로 검찰에 체포되었다. 2009년 9월 11일, 천수이볜은 무기징역과 2억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으며, 3심에서는 징역 19년이 선고되었다.
천수이볜 총통의 부정부패 의혹은 집권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었고, 돈세탁 액수도 엄청나다. 재판 시 밝혀진 것만 10억 타이완 달러(약 330억원)에 달한다. 아울러 중화민국은 부정부패에 관한 처벌의 강도가 높은 편인데, 장제스는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퇴한 원인 중 하나가 부패에 있었다고 보아 부패를 엄벌에 처하도록 했던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부정부패와 관련된 범죄는 형량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천수이볜은 이 의혹에 대해 마잉주의 정치적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 때 부인과 함께 민진당을 탈당했다.
이 판결에 대해 이 사람은 "대만은 미국 영토이기 때문에 대만 법원 판결은 불법"이라는 말을 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내용인즉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대만의 점령권이 승전국이자 일본을 점령한 미국에게 넘어갔고, 전후에도 미국이 이를 명시적으로 포기한 바 없다'는 논리.
이 주장은 넓은 의미에서 '대만은 중국에 귀속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대만 독립 진영의 시각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입장을 대만 주권 미정론이라고 한다. 물론 이건 어떻게든 자신에 대한 법적 조치가 부당하다고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었겠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총통까지 역임했던 인물이 할 소리는 결코 아니다. 어쨌든 현행 중화민국 법 체계 하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총통까지 한 사람이라면 중화민국을 대만 공화국으로 바꾸는 절차를 밟기 전까지는 중화민국의 시스템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부정부패까지 일으키고 뻔뻔하다. 문제의 발언 직후, 천수이볜의 출신 정당이었던 민진당조차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을 정도다.
그리고 저 주장은 사실관계에서부터 틀렸다. 미국은 이미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군대와 그 관할 지역을 다 정해놨다. 대만은 일관되게 중국에 '원속'시킨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고, 당연히 중화민국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저 말대로라면 대만에 미 군정부터 들어섰어야 했다. 전직 총통이 본드라도 흡입했나?
아무튼 그의 부패와 온갖 헛소리 때문에 대만 독립파들이 큰 타격을 입었기에 독립파들은 그를 명예 중국인 중국 국민당이나 대륙과 거의 동급으로 취급한다.
5 옥중행보
감옥에서 <대만의 십자가(臺灣的十字架)>, <막을 수 없는 목소리(關不住的聲音)>, <1.86평의 총통부(1.86坪的總統府)>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한국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투신자살로 사망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천수이볜은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며 꼭 살아서 교도소를 나가겠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수갑을 찬 모습이 언론에 자주 공개되면서 인격적 모욕감을 느끼고 그런데 옥중에서 쓴 책들 표지로 수갑을 찬 모습을 스스로 썼는데? 셀프디스 가족들도 수모를 겪은 데서 정신질환이 비롯돼 자살을 3차례나 시도했다고. 참고기사
사실 노무현과 천수이볜은 닮은 꼴로 자주 언급되곤 했다. 일단 동년배인데다가[7] 출신 성분이 그야말로 깡촌에서 나고 자란 비주류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해 대권까지 거머쥔 모습이 죄다 판박이었던데다, 심지어는 퇴임 후 새 집권세력과 갈등을 빚은 모양새까지 일치했던 것. 그렇다보니 천수이볜을 이해해줄 사람은 한국의 노무현밖에 없다는 중화권 언론의 촌평이 있었을 정도였다만, 결과적으로 노무현은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받던 중에 자살하여 수사가 불가피하게 전적으로 중단된 반면, 천수이볜에 대한 수사가 이미 종결되어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차이가 있다. 게다가 두 사람 중 한쪽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고.....
후임자인 마잉주와의 관계를 대입하면, 한국의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점이 많다. 첫째, 마잉주와 천수이볜은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경쟁한 적이 있었고, 노무현과 이명박은 1996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를 놓고 경쟁했다. 둘째, 마잉주는 이명박의 7-4-7 공약을 흉내낸 6-3-3(경제성장 6%, 실업율 3%, 국민소득 3만달러) 공약을 내세워 총통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셋째, 후임자의 집권 후 전임자가 부패, 비리 혐의로 사법수사 대상이 되고, 전임 측은 이를 정치적 박해라고 반발했다.
대만대나체예술부에서도 골 D 수이볜으로 패러디되었다. 어쨌든 이 양반은 수갑을 찬 모양으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듯하다.
2013년 5월에는 민진당 가입을 신청했고 민진당은 이를 찬성 다수로 승인하여 다시 민진당에 입당했다.
2015년 1월 5일 타이중 교도소에서 복역 중, 치료 차원에서 1개월 간 일시 출소하였다. 그러나 장기치료가 필요하다는 의료진의 의견에 다음해 5월까지 치료가 연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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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천수이볜 총통의 모습. 이런저런 잔병치레와 정신질환, 자살 시도 때문인지 총통 재직 당시에 비해 상당히 쇠약해졌다. 다 죽어가다가 특별사면되면 멀쩡해지는 출소의 기적을 보여주겠지
2016년 차이잉원 총통과 민진당 정부가 수립되자 특별사면 논의가 여러차례 나왔다. 하지만 그 때마다 흐지부지되고 천수이볜이 사면되지 못하는 중이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천수이볜 본인의 범죄가 너무 확실해서라고 한다. 돈세탁 및 공금유용, 선거비용 착복 등을 저질렀다고 본인 입으로 말을 했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차이잉원이 특별사면을 못 하는 이유도 천수이볜 사면 했다고 얻을 게 없을 정도로 천수이볜이 저지른 범죄의 죄질이 안 좋아서다.
차이잉원 정부의 출범 후 처음 개최된 2016년 10월 10일의 쌍십절에서는 초청장까지 받아 놓고서도, 막판에 참석이 불허되었다. 현재 건강 쇠약 명목으로 가석방 상태에 있는데, 공개적인 국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러한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
6 저서
- <대만의 아들>(臺灣之子). 총통선거 출마를 앞둔 1999년에 출간한 자서전이며 본성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동명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 대만을 믿습니다:아볜 총통의 대국민 보고(相信台灣:阿扁總統向人民報告)[8] : 총통 재임 중에 쓴 책.
- 대만의 십자가(臺灣的十字架) :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끌려가는 천수이볜 본인의 모습을 표지로 갖다썼다.
셀프디스
- 막을 수 없는 목소리(關不住的聲音) : 셀프디스는 여기도 마찬가지
- 1.86평의 총통부(1.86坪的總統府) : 1.86평은 그가 구금돼 있는 타이베이 교도소 감방의 크기를 말한다. 부패사범이지만 그래도 전직 총통이라 해서 독방에서 생활하도록 했다고 한다.
옥중 저서가 세 권이나 되는데, 중국 국민당 등 범람연맹 측에서는 천수이볜 아들인 천즈중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쓴 게 아니냐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왜냐하면 대만의 십자가, 막을 수 없는 목소리, 1.86평의 총통부 전부 2009년 ~ 2010년 사이에 출판되었고 천즈중은 2011년에 입법의원(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 게다가 2012년 이후로는 옥중저서가 없다. 다만 건강 문제가 이 무렵부터 급격하게 악화된 걸 보면 섣부른 판단은 위험하다.
7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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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이볜 아들 천즈중(陳致中, 진치중). 확실히 아버지 천수이볜과 꽤 닮은 모습이다.
2000년 총통 선거 때 직접 아버지의 광고에 출연해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내용은 "저는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총통 후보의 아들 천즈중입니다. 내년에 대학을 졸업하면 입대하겠습니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지면 광고에 불과했지만 쑹추위와 롄잔의 아들 및 손자들이 죄다 병역면제였던지라 정권 교체 열풍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천즈중은 2001년 해군 소위로 임관한 후 2003년 만기 전역해 자신의 공언을 그대로 실천했으며 이 점은 확실하게 까방권을 얻은 듯.
2011년 12월, 위의 천즈중이 2012년 1월에 총통 선거와 같이 열릴 입법의원(대한민국의 국회의원에 해당) 선거에 가오슝 지역에서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참고기사 민주진보당에서는 펄펄 뛰며 반대했고. 가오슝 9선거구 결과는...
가오슝 9선거구(중국어 표기 수정바람) | ||||||
기호 | 후보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여부 |
1 | 천즈중(陳致中) | 무소속 | 48,941 | 26.64% | 3 | 낙선 |
2 | 차이마푸(蔡媽福) | 무소속 | 2,779 | 1.51% | 4 | 낙선 |
3 | 궈원창(郭玟成) | 민주진보당 | 59,258 | 32.25% | 2 | 낙선 |
4 | 린궈정(林國正) | 중국 국민당 | 70,600 | 38.43% | 1 | 당선 |
5 | 린지에정(林杰正) | 대만국민회의 | 2,142 | 1.17% | 5 | 낙선 |
선거인수 | 245,843 | 투표수 | 186,569 | |||
무효표수 | 2,849 | 투표율 | 75.89% |
...팀킬을 해버렸다. 민주진보당 후보와 천수이볜 아들인 천즈중 후보의 표가 갈려서 중국 국민당 후보 당선.
한국을 예시로 들어서 아주 쉽게 설명을 하면, 국회의원 총선의 광주광역시 지역구에서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등 여러 정당의 후보들과 무소속 후보들이 출마하는데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공천이 쪼개져서 한 후보가 탈당해 무소속으로 나왔고, 사이 좋게 팀킬해서 광주광역시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천즈중의 저런 무소속 출마 감행은 민진당에 천즈중 본인과 그의 부친 천수이볜을 버리지 말라며 위협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후보 본인이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민진당이 공천한 후보의 지분을 빼앗아 낙선시킬 정도의 득표력은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부모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호적을 늦게 올렸기 때문에 호적에는 1951년 2월 18일생으로 되어 있다.
- ↑ 원래는 같은 대학 경영학과(상학부)에 입학했으나, 민주화 운동가인 황신제(黃信介)의 연설을 듣고 정치에 관심이 생겨 학교를 휴학한 후 반수해서 법학과에 수석입학했다. 황신제는 1979년 12월 메이리다오 사건의 1급 주동자로 투옥되면서 천수이볜의 변호를 받았고, 대만의 민주화가 본격화된 1988~1992년에 민주진보당의 주석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에 타계하여 천수이볜의 총통 당선, 민진당의 첫 집권을 지켜보지는 못했다.
- ↑ 본래 대만에서는 기초자치단체장 선거는 계속 하고 있었지만 직할시와 성 등 성급 행정구역의 수장은 중앙정부에서 임명했다. 1994년부터 헌법이 개정되어 성급 행정구역 수장도 선거로 뽑게 되었다. 그러나 푸젠 성은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중앙정부에서 수장을 임명하였고 1998년부터는 타이완 성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타이완 성장도
의미가 없으니다시 임명제로 바뀌었다. - ↑ 다만 19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시기까지는 지역구도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던 때는 아니었다. 1994년 지방선거에서 타이베이 시장 선거와 같이 치러진 가오슝 시장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가 아닌 국민당 후보 우둔이 후보가 근소하게 앞섰을 정도고 1989년 지방선거때부터 2005년 지방선거때까지는 타이베이 현장을 민진당이 차지했을 정도니...
- ↑ 다만 2004년부터 2007년까지의 경제성장률로만 본다면 이 당시 대만의 경제상태는 의외로 나쁘지는 않았다. 2004년에 6.5%, 2005년에 5.4%, 2006년에 5.6%, 2007년에 6.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문제는 그것이 임금상승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거고 화폐가치도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
- ↑ 대한민국에서도 선거가 끝난 이후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비용을 정산해서 영수증과 사용내역을 제출해야 하는데, 예측된 선거비용(중앙선관위에 가면 볼 수 있다. 각 선거구 별로 선거비용 최대 상한선이 있고, 지금까지 해온 선거들을 평균내서 만든 평균 선거비용도 있다)보다 지나치게 선거비용이 적게 제출되면(당연히 상한선을 초과한 선거비용이면 당선무효) 선관위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한다.
- ↑ 정확히는 노무현이 1946년생으로 4살 위.
- ↑ 아볜(阿扁)은 이름 마지막 자인 볜(扁) 앞에 아(阿)를 붙인 애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