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리다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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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麗島事件(미려도 사건) / Formosa Magazine incident(Kaohsiung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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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9년 12월 10일, 중화민국 가오슝 시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당시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가오슝 폭력사건 반란안'(高雄暴力事件叛亂案)이라고 불렀다. 민주진보당이 이 사건의 주동자와 변호사들이 모여서 세운 정당이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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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다오 지의 발간판들)

1979년 12월 10일, 중화민국의 급진 성향 민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잡지 메이리다오(美麗島)를 창간한다. 잡지명 메이리다오는 타이완 섬의 포르투갈어 별칭인 Ihla Formosa(아름다운 섬)의 중국어 번역어이로 대만을 가리키는 미칭이다. 이 메이리다오 잡지 주최의 민주화 시위중화민국 경찰과 충돌하고 주최자가 투옥된 사건이다.

시기적으로는 장제스의 사망 후 3년만인 1978년에 그의 아들 장징궈가 후임 총통으로 취임한 지 1년만이고, 미국이 중국과의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따라 대만과는 단교하면서 대만이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정치-사회적인 불안, 긴장이 조성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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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다오 잡지사를 위시한 집회 주최측은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맞춰 야간 집회 허가를 신청했지만, 국민당 당국은 이를 불허했다. 당시 대만은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정부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던 1949년부터 계엄령이 지속되고 있던 기간이었다. 외견상으로는 특정지역 내부의 일회성 집회 사건 정도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수십년 동안 계엄 체제가 계속되고 있던 당시 대만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이 정도의 집회, 시위도 꽤 충격적이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당시 가오슝의 분위기는 시위대 발포, 유혈진압만 없었다 뿐이지, 1980년 5월의 광주에 가까웠던 셈이다. 당국의 불허 방침에도 집회는 실행되었고, 결국 국민당 당국이 헌병을 포함한 물리력을 대거 동원하여 강제 해산에 나서면서 집회는 시위측과 진압 병력 사이의 물리적 충돌로 악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측인 메이리다오 잡지사의 핵심 인사 다수가 투옥되어 군법 재판에 회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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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다오 사건 당시 변호인단의 모습. 아랫줄 맨오른쪽의 인물이 훗날 민진당 최초의 총통으로 당선되는 천수이볜이다. 천수이볜은 이 사건의 변호인으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했다.

3 주요 투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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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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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사건의 주동 인사들이 수감, 군법재판을 받았던 군 형무소는 현재 대만의 민주화를 기리는 문화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징메이 인권문화공원'(景美人權文化園區)이며, 위치는 신베이시 신뎬구 부흥로쪽(新北市 新店區 復興路). 이곳은 메이리다오 사건 외에도 장제스, 장징궈 총통 시절의 반(反)국민당,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투옥되었던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서대문 형무소, 남영동 대공분실과 비슷한 성격의 장소인 셈. 타이베이 첩운 쑹산신뎬선의 다핑린역에서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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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12월, 사건 발생 35주년을 맞아, 이제는 대만의 정계 원로 및 민주화 유공자가 된 당시의 주요 인사들이 가오슝에서 기념 모임을 함께 했다. 특히 2016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재집권이 기대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