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DN20030057-00_01370929.jpg

한국 법의학이 외국 법의학에게 처참히 깨진 사건

한국판 O. J. 심슨 사건[1]

심증과 정황적으로는 살인의 동기가 드러나지만, 경・검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무죄판결이 난 사건.

변호인 측은 당시 의뢰인인 L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스위스의 법의학자까지 데려와서 증언석에 세웠다.

이 사건에 대해서 인권운동가 고상만이 항소심과 상고심에 당시 천주교인권위원회 일원으로 참여하여 활동을 했고, 자신이 출연하는 2015년 2월 10일자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최종무죄를 선고받은 당시 피고인의 본명과 사건내용을 모두 밝혔다.

1 개요

1995년 6월 12일 아침 8시 45분경,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의 모 아파트에서 흰 연기가 발생했다. 이후 9시 10분경, 경비가 화재가 난 것을 알아채고 119에 신고했다. 오전 9시 20분경 소방관들이 도착하여 10여분 만에 화재를 진화했다. 화재는 안방의 장롱에서 시작되었으며, 장롱과 일부 옷, 커튼과 벽지 일부만을 태웠다.

불을 모두 끈 후, 소방관들은 현장에서 외과의사 L(본명 이도행)의 부인 C(본명 최수희, 당시 31세)와 딸(본명 이화영, 당시 2세)이 사망한 채로 욕조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때 남편인 외과의사 L은 개인병원을 개원하는 날이어서 외출한 상태였다.

L이 외과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사건명이 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인 이유는, 부인인 C가 치과의사였기 때문이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다음 블로그를 참조.#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조사 민원을 수락하여 참여를 한 인권운동가 고상만이 밝힌 내용은 여기를 참조.#

2 현장

부인 C와 딸은 물이 담긴 목욕탕 욕조에 엎드린 상태로 숨져 있었다. C는 발견 당시 상의가 벗겨지고 팬티가 내려가 있는 상태였으며, 목에는 교살(絞殺)의 흔적이 나타났다. 그리고 목, 팔 등에는 미세한 찰과상이 발견되었다. 딸 역시 끈으로 목이 졸린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욕조의 물에 잠겨 있었다. 이로 볼 때 타살임이 명백하였으며, 화재 역시 장롱에서 불이 난 것으로 보아 명백한 방화였다. 이에 수사팀은 누군가 살인을 저지른 후, 증거인멸을 위해 불을 질렀다고 결론 내렸다.

특이한 점은, 현관문이 잠겨있는 상태였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의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집 안의 현금과 귀중품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집을 뒤진 흔적도 없었다. 따라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한 살인사건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피해자들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수사한 결과, 그들은 용의선상에서 배제되었다. C와의 내연관계였던, 인테리어 업자 J가 있었으나, 그는 그 시간에 다른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자연스럽게 의심의 시선은 남편 L에게 쏠리게 되었다.[2]

3 L의 알리바이

L은 자신이 7시에 집을 나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녀는 살아 있었으며, 둘의 배웅을 받으면서 병원에 출근했다고 증언한다. L이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자신의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였다.

4 핵심 쟁점

따라서 사건 최대의 쟁점은 모녀가 사망한 시간을 추정하는 일이다. L이 출근한 7시 이전에 모녀가 사망하였다면 L이 범인으로 확정되고, 그 이후에 사망하였다면 L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4.1 L이 범인이라는 증거

4.1.1 시반(屍斑)의 형성

당시 모녀에 대한 검안(檢案)이 이루어진 시간은 오전 11시 30분이었다. 검안 당시, C에게는 우측 대퇴부를 중심으로 하여 양측성 시반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측성 시반이 형성되려면 사후 6-8시간이 경과하여야 한다. 이를 고려할 때, 모녀의 사망추정시간은 오전 3시 30분~5시 30분이 된다.

4.1.2 시강(屍強)의 진행

지문을 뜨기 위해 손가락을 펼치자, 이미 손가락에 시강이 진행된 상태였다. 지관절(指關節)에 시강이 진행되려면 사후 6~12시간이 지나야 한다. 이 경우, 모녀의 사망추정시간은 전날 밤 11시 30분~사건당일 아침 5시 30분 사이가 된다.

4.1.3 C의 소화상태

C의 위에서는 소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밥이 350g 정도 있었으며, 위의 내용물에서 사건당일 전날 저녁에 먹었다는 미역국의 미역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L이 아침에 먹었다고 주장한 콩나물국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잔존물의 상태로 미루어보아, 저녁을 먹은 지는 시간이 조금 되었으나, 아침을 먹기 전에 살해되었으며, 사망시간은 11일 23시 30분경부터 12일 4시 사이로 추정되었다.

4.1.4 제 3자의 침입이 불가능

당시 집 안에는 제 3자의 침입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집에서 혼란스럽게 다닌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의 구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파악하였다.

하지만 살인에 이용된 도구에서 지문이나 머리카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따라서 간접증거와 정황만으로 재판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게 된다.

4.2 L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

4.2.1 사망추정 시간의 문제

시반(屍斑)과 시강(屍強)으로 사망시각을 추정하는 것은 오차범위가 굉장히 넓다. 사람에 따라 시반의 발생시점과 정도가 다르다. 최초 검안 시에는 목, 가슴, 배에도 시반이 관찰되었다. 하지만 부검을 하는 시점에서는 우측대퇴부 이외의 시반이 모두 소실되었다. 우측대퇴부의 경우, 그녀가 팬티를 입고 있었기에 압력으로 인해 시반이 먼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시반이 모두 소멸한 것으로 볼 때, 시반이 형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피고가 집을 나간 이후인 7시 40분경까지 사망추정시간이 늘어난다.

이는 시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온도가 높을 경우, 조기강직이 나타난다. 이 사건에서는 욕조물의 온도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아 시강의 원인이 불분명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시강이 나타난 것인지, 혹은 용의자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고의적으로 급속한 시강을 유도했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시강으로 사망시간을 추정한 것 역시 반박되었다.

게다가 당시 욕조물의 온도를 경찰이 처음 현장조사를 할 때 측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향후 이것을 지적받자, 당시 수사했던 경찰의 손등에 온도별로 물방울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이 온도가 맞습니까?"라는 식으로 증언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2.2 화재의 발생시간

화재가 났다고 신고가 온 시간은 9시 10분경이었다. 따라서 화재는 그 이전에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몇 시에 불씨가 옮겨 붙어, 밖에서 화재가 났음을 알아챌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변호인 측은 1,800만 원짜리 아파트 모형으로 화재실험을 진행하여, 만약 장롱에 불이 났다고 하더라도, 5~6분 이후면 외부에서 연기를 인지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 주장에 따르면, 8시 30분 전후에 누군가가 방화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L의 출근 이후, 누군가가 집에 들어와 범행을 저지르고 방화를 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4.2.3 C의 소화상태

C가 아침식사를 할 때, L과 달리 미역국을 먹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평소 C가 아침을 잘 챙겨먹지 않았기 때문에, 공복상태여서 콩나물이 발견되지 않았을 수 있다. 전자레인지에서는 C가 아침대용으로 먹는 걸로 추정되는 한약이 발견되었다.

4.2.4 콘택트렌즈

C는 사망당시 렌즈를 낀 상태였다. C의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C는 평소 자기 전 렌즈를 빼고,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을 한 이후 다시 렌즈를 착용하였다. C가 렌즈를 낀 상태에서 죽었다는 것은, 자기 전에 사망했거나 혹은 일어나서 렌즈를 낀 이후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자기 전 그녀가 사망했다면, 몸에 더 많은 시반에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일어난 이후에 죽었으며, L이 출근하고 난 이후 자신도 출근준비를 하는 도중 사망했다고 볼 수 있다.

5 기타 정황

기타 정황은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기에,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하자.

5.1 C의 외도

당시 C에게는 내연남이 있었다. C는 1989년 L과 결혼하였으나, C는 1992년에 알게 된 인테리어 업자 J와 사건 직전까지 불륜행각을 벌였다. C는 자신의 병원 진료실 안에서까지 J와 관계를 가졌다. 이는 차후 C의 병원에서 근무하였던 간호사들에 의해 밝혀졌다. 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C의 일기장에서는, 'L과 잠자리를 하면서도 J가 생각났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만약 L이 이를 알았더라면, 살해의 동기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L은 C의 외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L이 J를 최초로 본 시간은 사건발생 1달 전이었으며, 그때도 그냥 아내의 병문안을 온 사람들 중 한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C와의 사이도 나쁘지 않아서, C가 먹던 한약은 둘째 아이를 갖기 위해서 먹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5.2 가정불화

수사팀은 C가 외도를 저지른 것 뿐 아니라, L이 장모의 집안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장모는 L을 구박하였지만, L의 성격이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화를 억누르다가, 결국 살인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L은 이 주장을 일축한다. 둘 사이에서 불화는 잦지 않았으며, 사건발생 2주 전에는 온 가족이 장모를 모시고 괌에 여행을 다녀왔다고 증언한다.

다만 평상시 사이가 안 좋았던 상태에서 같이 여행을 갔다가 오히려 갈등이 더 커져서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이 경우는 오히려 여행이 범행의 도화선이 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 커플이 여행을 갔다가, 여행 중에 싸우거나 여행 직후 헤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유명한 수지 김 사건 역시 부부가 홍콩에서 말다툼 끝에 우발적으로 살해했던 사건이었다. 또한 만약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고 계획적인 범행이라면, 오히려 알리바이 용도로 계획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5.3 《위험한 독신녀》?

당시 집을 수사하던 수사관들은 L의 트레이닝복 바지에서 쪽지를 발견한다. 여기에는 수많은 영화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92년 개봉했던 《위험한 독신녀》를 비롯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있었다. 이에 책임자 Y는 목록에 있는 영화를 구해서 본다. 이 중 한 영화에는, 극중 여자범인이 남성을 죽여 욕조에 시신을 담그는 장면이 등장하였다.

이에 Y는 L에게 그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물어보았으나, L은 부정한다. Y는 L이 공중보건의로 근무하였던 강릉에 수사팀을 급파하여, L이 해당 비디오를 대여했는지 확인한다. 그 결과, L은 94년 2월 28일에 해당 비디오를 빌려, 3월 2일 반납했다는 것을 알아낸다. 같은 해 10월 26일, 또 다른 대여점에서 이를 빌린 후, 한참 뒤에야 연체료를 물며 이를 반납한 정황이 드러난다. L은 자신이 끝까지 그 영화에 대해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6 판결

1996년 2월, 1심에서는 사형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1996년 9월, 2심에서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에 1998년 11월 13일, 대법원 상고심에서는 유죄의 취지로 파기환송을 한다. 하지만 2001년 2월, 고등법원은 파기 환송심에서 무죄를 선언. 2003년 2월 대법원의 재상고심에서는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한다. 아래는 판결문을 그대로 발췌하였다.

"피고인의 범행동기를 쉽게 인정할 수 없다는 점, 사망시각 또는 사망시간대의 추정에 관한 검찰 제출의 사체 현상에 관한 각 증거에 유죄의 증거가치를 부여하기에는 부족한 점, 이 사건 화재가 피고인의 출근 이후 발생하였다고 보여지는 점, 피고인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거나 거짓으로 보이는 일부 내용은 유죄의 증거로까지 인정하기에는 부족한 점, 그리고 오히려 사망인의 콘택트렌즈, 한약봉지 관련 내용 등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보이는 정황도 상당 부분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점 등에 비추어, 위 유죄의 각 정황만으로는 피고인이 범인이라고 단정하기에 의문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제3자의 범행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할 것이므로, 결국 여러 가지 유죄의 간접사실 내지 정황을 인정할 수 있는 간접증거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 종합적 증명력이 위 공소사실을 진정한 것이라고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이 인정할 정도에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다."

7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초기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많은 허점을 보였다. 발견 당시 사체와 욕조 물의 온도를 재는 것조차 시행하지 않아, 사망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놓쳤다. 또 사건 초기에, '가까운 사람이 살해'했다고 단정하여 수사범위를 가까운 인물들로 한정하여, 중요할 수도 있는 다른 증거수집을 소홀히 하였다. 한 예로, 아기를 죽일 때 쓰인 실을 '외과용 실'로 단정하였으나, 이는 나중에는 치실로 밝혀진다.

게다가 파기환송심에서, 검사 측은 화재발생에 관한 내용에서, 불을 조그맣게 피워놔(…) 지연화재를 일으켜서 가능하다, 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 피고 측과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해외의 화재 전문가들에게 검찰의 주장이 가능한 것인지 의뢰메일을 보냈다. 답장 결과가 예상외로 도착했는데, 그 내용을 토대로 직접 실험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가능한지 1999년에 용인에서 MBC 《PD수첩》 제작진이 참여한 상황에서 실험을 하였는데, 실험을 개시하고 3분 만에 큰 불로 번지는 것이 증명되었다. 당시 화재 전문가들의 의견은, "지연화재라는 것은 없다"였는데, 이는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이 실험결과를 통해 파기환송심 당시, 피고 이도행이 모녀를 살해하고서 지연화재를 일으켜, 화재가 자신의 출근 이후에 번지게 하고는 현장에서 도주했다는 검찰 측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부정되었다. 이런 식으로 무리한 기소와, 검증으로 논파되어버린 엉성한 범행근거를 경찰과 검찰이 주장하여 진범을 잡지 못하게 된 것이다.

8 법의학

이 사건의 핵심은, 피해자가 7시 이전에 죽었느냐, 7시 이후에 죽었느냐, 였다. 7시 이전에 죽었다면 남편인 L씨가 살해한 게 맞으나, 7시 이후에 죽었다면 L씨가 죽인 것이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 변호인 측은 모두 이 사망 시각 입증을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했었다.

검사 측은 국내 법의학자 3명(서울대, 고대, 국과수)에게 사건을 의뢰했고, 3명 모두에게서 피해자가 오전 7시 이전에 죽었다는 증언을 받아냈고, 1심에서 용의자에게 사형판결을 받아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변호인 측은 스위스 법의학자인 토마스 크롬페처를 증언대에 세워서, 피해자가 오전 7시 이후에 죽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며, 고등,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무죄로 끝나면서, 한국의 법의학은 본의 아니게 외국의 법의학에 무릎을 꿇은 모양새가 되어버렸고, 그 뒤로 정부는 한국의 법의학 관련 분야와 부서를 엄청나게 활성화시켰다. 모 대학 교수님은 원래 형사였지만, 이 사건 때문에 열 받아서 과학수사를 공부한 끝에 교수되었다 카더라 아직도 이 사건은 시험에 꼭 내고 있지 그리하여 이 사건에 빠삭한 그 교수님 수업 수강생들은 나무위키로 모이는 거지 본격 대학생 위키러

그 뒤에, 마포 만삭 의사부인 사망사건에서, 변호인 측이 캐나다 법의학자를 초빙함으로써 한국 vs 외국 법의학 리벤지 매치가 성사되었으나, 이번에는 한국이 승리하여 피고에게 징역 20년형을 때릴 수 있었다.

9 사건 이후 여담

이 사건에서 최종무죄를 선고받은 L은 이후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하였고, 이 사건에서 천주교인권위원회를 만난 것을 계기로, 국내의 대표 의문사 중 하나인 김훈 중위 사건에서 미군이 작성한 공식 의료차트의 해독 작업에 참여하였다.

10 L이 범인이라는 추론과 범인이 아니라는 추론

무죄(증거 불충분)라는 판결 자체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결정적인 물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고고학에서 여러가지 증거들을 짜맞춰서 그럴 듯한 가설을 만들어내듯이, 여러 정황증거를 통해서 L이 범인이라는 추론과 아니라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위키러들의 사견(私見)에 불과하다는 점은 감안하고 읽자.

10.1 L이 수상하다

영화 《위험한 독신녀》에 대해 L이 초지일관 부인한다는 점은 L의 진술의 신뢰성에 대해 판단을 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 한번 빌려 본 영화를 한참 뒤에 또 빌려 본다는 것은 그 영화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든지, 뭔가 그 영화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게 있었다든지 등의 경우이기에, 이 영화를 본 것을 완전히 잊는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2월과 10월에 두 번이나 빌려 본 영화에 대해 L이 부인한 것은, 그가 부인의 외도를 몰랐다든가 등의 다른 진술의 신뢰성도 의심하게 만들 수 있다.

영화 《위험한 독신녀》 건은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적어도 L이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100%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명백하게 두 번이나 빌려 본 증거가 있음에도 끝까지 모른다고 부인하는 판국에, 하물며 증거가 없는 다른 진술에 과연 얼마나 신뢰성이 있을까?

물론, 자신이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건내용과 일부 유사점이 있는 그 영화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회피하려는 방어심리로 일체 부인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자신이 범인으로 의심될만한 정황 등도(아내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든지) 방어 심리로 부인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또한 L이 친구나 지인의 부탁으로 빌려다줬다거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시간이 지나서 기억나지 않는다 등으로 진술하면 그것을 부정할 증거도 없다는 반론도 있으나, 누구에게 빌려줬다고 하면 정말인지 그 사람에게 확인이 가능하다. 만약 8개월 밖에 안됐는데 누구 빌려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으로 그와 연락을 주고 받는 지인 모두에게 탐문조사도 가능하다.

10.2 L은 일반인이 아니다

L은 외과의사이다. 그는 법의학과 관련된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건 현장을 보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고 계획범죄일 가능성이 높은데, 외과의사가 사람을 죽여 욕조에 시신을 담그는 영화를 무려 두 번이나 빌려보며 연구했다면, 얼마든지 완전범죄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단순 일반 살인 사건처럼 접근한다는 것은, 범인의 은폐공작에 넘어갈 위험이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국내 최고의 법의학자 3명(서울대, 고대, 국과수) 모두에게서 피해자가 오전 7시 이전에 죽었다는 증언을 받아냈으나, 변호인 측은 스위스 법의학자를 증언대에 세워서, 피해자가 오전 7시 이후에 죽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며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이처럼 법의학자들 간에도 논쟁이 있었을 정도로 상당히 애매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범인이 아니란 게 입증되어서 무죄판결이 나왔다기보다, 범인이라고 입증할 증거가 부족해서 무죄판결이 나왔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사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일반인들 같았으면 국과수의 판정만으로도 유죄확정이었을 텐데, 변호인 측은 스위스에서 입맛에 맞는 법의학자까지 섭외하여 데려와서, 국과수를 버로우시키며 무죄판결을 이끌어냈을 정도로, 일반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10.3 사망시각 은폐

그리고 왜 하필 욕조였을까? 일반 강도나 살인자가 침입해서 죽였다면, 그냥 흉기로 죽이고 바로 도주하지, 굳이 욕조에 시신을 담가놔야 할 이유를 딱히 찾기 힘들다. 게다가 두 살 난 딸까지도 욕조의 물에 잠겨 있었다. 범인은 시체의 사망 시간 추정에 혼선을 주려고 시도했다고 추정가능하다. 즉 범인에게는 사망 시간이 정확히 밝혀져선 안 될 절박한 사유가 있어서, 사망시간을 감추는 게 중요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사건의 핵심 쟁점은 모녀가 사망한 시간이었는데, 경찰의 초기 조사 미흡 등의 여러 상황이 겹쳐져, 정확한 사망 시간 추정에 대해 법의학자들 간에도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정확한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없게 되어, '증거 불충분'으로 붕 떠버렸다. 상기(上記)했듯, 시체의 주변 온도가 높을 경우 조기강직이 발생하는데, 사건현장 조사 당시 욕조물의 온도를 경찰이 조사, 기록하지 않는 등 시강의 원인이 불분명해져, 시강으로 사망시간을 추정한 것 역시 확실한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수사팀은 L과 아내, 장모와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고, L의 성격이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화를 억누르다가 결국 살인으로 표출된 것으로 추정했다. 애초에 부부간의 금슬이 좋다면, 누군가가 바람을 피울 가능성은 낮아진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안 좋으니까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경우, 아내가 잠깐 외도를 한 게 아니라, 살해당할 때까지 수년간 아내의 병원의 간호사들까지 알아챌 정도로 내연관계를 지속해왔음에도 남편은 전혀 몰랐다고 한 것을 보면, 부부라기 보단 동거인 관계에 가까울 정도로 냉랭한 사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아내의 일기장에, 남편과 잠자리할 때도 내연남이 떠오른다고 써놓았는데, 만에 하나 L이 우연히 이 일기장을 봤다면 살인 동기 자체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살인을 계획하다가, 우연히 예전에 본 《위험한 독신녀》의 살해 장면이 떠올라, 다시 빌려보며 살해방법을 연구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공중보건의 생활 당시 많은 영화를 빌려 봤다는 L이니만큼, 그냥 한번 빌려봤다면 우연이라고 넘길 수도 있으나, 8개월 뒤에 이 영화를 다시 빌려봤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는 이 영화에서 다시 보고픈 무언가가 있다는 걸 추론가능하게 하며, L이 굳이 이 영화를 본 것에 대해 일관되게 부인한다는 점은, 그가 이 영화를 본 게 알려져서는 안 될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욕조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8개월 전에, 욕조 살인 영화를 다시 빌려봤던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만약 L이 범인이고 전문지식을 동원하여 이런 은폐공작을 했다면, 직업의 특성상 그 자신이 용의자로 떠오를 것이 유력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으므로, L은 스스로를 옭아매게 될 일을 할 리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평범하게 죽이면 바로 사망시간을 쉽게 알아내서 잡히게 된다.(...) 실제 결과적으로도 사망시간을 정확히 추정하는데 실패하여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지 않은가?

L이 킬러라도 고용하지 않는 이상, 만약 본인이 아내를 살해했을 시 다른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렇게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게 불가능했을 시에 의심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체의 사망 시간 추정에 혼선을 빚게 하는 것일 뿐이고, 실제 이번 사건은 사망 시간 추정 시간 혼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만약 그냥 일반적으로 죽였다면 사망 시간이 정확히 추정 가능하여 L이 완전히 범인으로 인정되거나, 혹은 완전한 무죄로 판명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만일 이런 종류의 지식을 아는 진범이 L이 외과의사임을 감안하여,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로 L을 지목하여 수사력이 그에게 집중되게 하여 자신은 빠져나가려 한 계획적 범행이라고 한다면 그는 L과 매우 가까운 사이고 그 뿐 아니라 이 집과 가정사에 대해 매우 빠삭한 인물이었다는 것인데, 그런 유력한 인물이 있었다면 L이 가장 먼저 알았을 것이다. 헌데 알다시피 이 사건에서 용의선상에 오른 용의자는 L밖에 없다.

10.4 다른 용의자가 없다

결정적으로 다른 용의자가 전혀 없다. 범행 형태를 보면 강도가 들어와서 우발적으로 죽인 형태가 아니고, 명백히 원한에 의한 살해인데, L이 출근한 잠깐 사이(당연히 이런 정보도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부리나케 들어와 후다닥 죽이고 바람처럼 사라질 정도로 내부 구조나 안의 상황도 잘 알고 있을 사람이라면, 피해자의 지인 밖에 없기에 용의자는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는데, 안타깝게도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L밖에 없다.

만약 L이 죽인 게 아니라면, 범행의 형태로 보아 절대 일반 강도는 아니고, 누군가에게 고용된 킬러일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들어와 두 모녀를 깔끔하게 살해한 뒤 바람처럼 사라진 것을 보면, 매우 프로페셔널한 킬러의 살해형태다. 보통 이런 교사(敎唆)살인의 경우는 배우자의 외도를 의심하거나, 보험금을 노려 저지르는 경우가 많으나, 이번 사건은 피해자의 사망으로 딱히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철저히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보인다.

원한에 의한 살인 치고는 시체의 형태가 너무 온전하다면서 격렬한 감정발산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는데, 보통 격렬한 감정 발산은 우발적인 범행때 많이 보이는 패턴이다. 말 그대로 너무 분노해서 욱해서 상대를 마구 공격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이므로 이경우는 격렬한 감정발산의 형태가 보이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계획범죄는 다르다. 계획범죄는 당연히 매우 이성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하고, 또한 최대한 증거를 안남기고 상대를 제거하는게 목적이지 감정을 발산하는게 목적이 아니므로 계획대로 냉정하게 딱 '살인'만 하는 경우가 많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괜히 이짓저짓 하다가 불필요한 증거를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제3자의 범행이 가능하다는 추론도 있다. L의 출근시간은 오전 7시이므로 최대 1시간 30분의 시간여유가 있으므로 집안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는 10~20분, 남은 1시간 정도라면 둘을 죽이고 현장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뭐 사실 틀린 말은 아니나, 이런 추론은 L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론'에만 치중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럼 범인은 어떤 인물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란 것이다.

경찰들도 바보는 아니며 나름 오랜 수사를 통해서 얻은 짬밥과 감이 있다. 당연히 일반적인 강도들이 벌이는 패턴들이 있고, 강도살인이 발생했다고 해서 다짜고짜 남편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헌데 수사관들이 L을 의심하게 된 이유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강도 패턴과는 양상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인근 강도 전과자 등 다 조사했음에도 딱히 용의자가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제3자가 가능할 수가 있지만, 누가,왜 범행을 했는가에 대해선 L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뚜렷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인 강도도 아니고, 범행 형태상 원한 범죄라서 피해자의 주변인물인데 L이외에 용의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피해자와 안면이 있는 지인이 원한이든 금전적 목적이든 죽이기로 계획한 경우, 낯선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여 죽이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므로, 보통 자신이 사전답사한 곳이라든지 익숙한 곳으로 불러낸 뒤 죽이는 패턴이 많은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집 안의 욕조에서 두 명을 깔끔하게 살해하고 바로 장롱에 불을 지른 형태를 보면, 그 집의 구조가 익숙하고 편안한 인물임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피해자와 안면이 없는 제3자인 킬러인 경우는 피해자를 불러내서 유인하기가 쉽지 않으니 보통 피해자의 동선을 파악한 후 인적 드문 곳에서 잽싸게 범행 저지르고 도망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저렇게 대놓고 환한 오전에 남의 집에 대놓고 침입해서 대학살극을 저지르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물론 킬러 고용자가 그 집에 사는 인물인지라 열쇠를 줬다면 가능하지만, 이 경우 L도 결국 범죄와 연관된 셈이니까 제외.

특히 두 살 난 어린 아이까지 냉정하게 목 졸라 살해한 것을 보면, 그는 악마가 틀림없다. 만약 그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2016년 기준,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어엿한 성인여성이었을 텐데 그렇게 비참하게 짧은 생을 마감하다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있는데, 왜 굳이 어린아이까지 죽여야 했냐는 점이다. 사실 원한에 의한 범인이라면, 그 원한은 피해자인 아내에게 가졌을 것이지, 그녀의 아기에게 원한을 가졌을 리는 없다. 사실 보통 곁다리에 있는 사람까지 죽이는 경우는 목격자 제거의 목적이 많은데, 두 살 난 아기는 목격자로서의 의미도 없기에 킬러라도 굳이 아기까지 죽여야 할 이유는 없다. 이는 아기가 살아있을 경우 귀찮은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만약 그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아버지인 L이 양육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피해자인 아내에게 원한이 너무 크면 아이까지 죽일 수도 있는데, 이는 철저히 원한에 의한 살인인데 딱히 용의선상에 올릴 인물이 없었다.

악명높은 강도 살인마라면 2016년 탈옥하려다가 붙잡힌 정두영이 있다. 당시 정두영은 강도를 목적으로 침입하여 방해하면 정말 그야말로 무참하게 살해하여 죽였지만, 그냥 자기 말에 잘 따르면 굳이 죽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기가 있던 여자에겐 '아기 잘 키워'란 말을 남기고 나갔을 정도였다. 즉, 사람을 죽이는게 목적이 아니라 강도가 목적이었다면 굳이 아기까지 잔혹하게 살해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극악한 강도라면 아이가 시끄럽게 운다고 거슬린다고 죽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이 정도 수준이라면 악명높은 강도 정두영도 명함을 못내밀 정도로 극단적인 강도라는 거고 솜씨를 봐서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일대 강도 전과자 탐문 수사도 그렇고 딱히 근처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그야말로 용의선상에 올릴 인물 자체가 없었다. 애초에 금품을 노린 범행 행태도 아니었고, 딱 살인만 하고 빠져나갔을 정도니까 강도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1995년 당시는 지금처럼 과학수사가 발달한 시기도 아니고, 주먹구구식이의 관행이 남아있었기에, 용의주도한 인물이라면 빠져나갈 수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였을까. 두 명이 살해당했음에도 범인은 없는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됐다. 2016년, 중국판 화성연쇄살인 사건 범인이 수십 년 만에 검거되었는데, 그는 학교 매점을 운영하며 자상한 아저씨로 유명하였고, 또한 아들 둘을 모두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등, 지역에서 모범으로 꼽히는 아버지상으로 존경받고 있었기에 중국사회를 경악시켰다.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의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으니, 두 살 난 어린아이마저 냉정하게 살해한 그 악마는 서민들 속에 섞여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태연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악마의 본성을 숨긴 채 말이다.

11 재반론

11.1 《위험한 독신녀》를 봤음에도 부인한다?

영화 《위험한 독신녀》를 L이 여러 차례 보았다는 증거가 있다 해도, 그 영화를 보았다는 것과 이 사건의 연관성을 입증하기는 곤란하다. L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건내용과 일부 유사점이 있는 그 영화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회피하려는 방어심리로 일체 부인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진술의 일부에서 거짓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해도, 그것이 명확하게 거짓임이 증명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진술 전체의 맥락에 영향을 주거나, 여러 차례 바뀌는 것이 아닌 이상, 판결문에서 보듯이 진술 전체의 신빙성의 의심되는 것은 법정에서도 드물다. 대여기록과 연체기록 등이 있으니, L이 그 영화를 여러 번 본 것이 분명하다는 증거가 된다 해도, L이 친구나 지인의 부탁으로 빌려다줬다거나 등의 진술로 대응하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시간이 지나서 기억나지 않는다 등으로 진술하면 그것을 부정할 증거도 없다.

11.2 L은 일반인이 아니다?

L은 법의학과 관련된 상당한 지식을 보유한 외과의사이고, 외과의사가 사람을 죽여 욕조에 시신을 담그는 영화를 무려 두 번이나 빌려보며 연구했다면, 얼마든지 완전범죄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물적 증거가 없는 이상,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하기에 결코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그리고 할 수 있다그것을 실제로 한다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죽일 수 있다’와 ‘실제로 죽였다’의 차이는 지대(至大)하듯이.

L 측이 스위스에서 법의학자까지 섭외하여 데려올 수 있을 정도의 재력(財力)을 갖고 있었기에,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주장은 대중을 향한 선동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공소유지나 재심 등에는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 만약 검사가 재심을 신청하며 이런 주장을 편다면 이는 자폭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이고, 철학적으로는 각 개체의 의무이기도 하다.

범인이 아니란 게 입증되어서 무죄판결이 나왔다기보다, 범인이라고 입증할 증거가 부족해서 무죄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심증과 정황증거가 120% 확실해 보인다고 해도, 그 심증과 정황증거를 뒷받침할 물적 증거가 전혀 없다면, 그 용의자는 반드시 무죄가 되어야만 한다.

11.3 남편 L이 아내 C의 외도를 몰랐을 리 없다?

이웃이나 친구들이 대부분 알게 될 정도로 장기간 이어진 배우자의 외도를, 정작 그 상대 배우자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실제로는 그리 드물지는 않다. 남편이나 아내가 자신의 배우자의 외도를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이를 보다 못한 친구나 이웃이 귀띔하여 뒤늦게 알게 되어, 이혼소송 등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현실에서 꽤나 많다. 극단적인 예로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한 끝에 임신했지만, 남편의 아이라고 속이고 낳아 키워,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남편이 전혀 몰랐다가, 남편이 뒤늦게 그 자녀의 헌혈 등을 통해 알게 된 실제 사례도 있다. 조금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남편의 거짓말은 아내에게 잘 통하지 않는 반면, 아내의 거짓말은 남편이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11.4 사망시각 은폐?

욕조에 시신을 담가놓아 범인은 시체의 사망 시간 추정에 혼선을 주려고 시도했다는 추론에는 물적 증거가 없다. 그러므로 범인에게는 사망 시간이 정확히 밝혀져선 안 될 절박한 사유가 있어서, 사망시간을 감추는 게 중요했다는 추론 역시 그 힘을 잃는다. 모녀가 사망한 시간이 핵심쟁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일 L의 전문지식으로, 욕조의 온수로 인해 시강(屍強)까지의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을 악용했다고 주장한다면 그 역(逆)도 가능하다. 만약 L이 범인이고 전문지식을 동원하여 이런 은폐공작을 했다면, 직업의 특성상 그 자신이 용의자로 떠오를 것이 유력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으므로, L은 스스로를 옭아매게 될 일을 할 리가 없다고 반론한다면?

결과적으로, 경찰의 초기 조사 소홀이 결정적이었음은 분명하다. 만일 이런 종류의 지식을 아는 진범이, L이 외과의사임을 감안하여,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로 L을 지목하여 수사력이 그에게 집중되게 하여, 자신은 빠져나가려 한 계획적 범행이라고 한다면?

그런 증거가 없으므로 L이 범인이라고 한다면, L이 계획적으로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사망시각 은폐와 혼란을 유도했다는 증거 역시 없다는 점도 주목하자. 마찬가지로 영화 《위험한 독신녀》를 보고 범행수법을 연구했다는 추정도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11.5 다른 용의자가 없으면 유일한 용의자가 범인이다?

이는 사건 초기에 L을 용의자로 특정 짓고, 초기 현장검증과 초기수사를 소홀히 한 탓이 크다. 2000년대 이후 과학 수사가 본격 도입된 이후에도, 사건 초기에 용의자를 특정 짓고 그 용의자의 범죄 입증에만 수사력을 집중하다가, 명백히 그 용의자가 범인이 아님이 증명되고 나자, 수사가 미궁에 빠진 경우가 적지 않다. 초기의 잘못된 용의자와 관련된 증거만 수집한 탓에 시일이 지난 버려, 사건 초기에는 남아있었을지도 모르는 모든 증거가 소실된 것이다.

명백히 원한에 의한 살인이고, L이 출근한 잠깐 사이에 부리나케 들어와 후다닥 죽이고 바람처럼 사라진 사건이므로, 범인은 집의 내부 구조나 안의 상황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며, 남편인 L이 언제 출근하는지도 알고 있어야 하므로, 피해자의 지인 밖에 없기에 용의자는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L밖에 없다? 이 역시 반박 가능하다. 우선 원한에 의한 살인 치고는 시체의 형태가 너무 온전하다. 격렬한 감정발산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범행의 형태가 일반 강도가 아닌, 누군가에게 고용된 킬러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주 짧은 시간에 두 모녀를 깔끔하게 살해하고 바람처럼 사라졌으므로, 매우 프로페셔널한 킬러의 살해형태임에 틀림없는 것일까?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L의 출근 이후 A라는 범인에 의해 사건이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 L 의 출근시간은 오전 7시, 그리고 화재가 났다고 신고가 온 시간은 9시 10분경, 그리고 화재발생시간은 8시 30분 전후로 추정. 그렇다면 A에게는 최대 1시간 30분의 시간여유가 있다. 숙달된 범죄꾼이거나 주도면밀한 계획범이라면, 조심조심 집안에 침입했기에 혼란스럽게 돌아다닌 흔적이 없었을 것이고, 고대광실(高大廣室)이 아닌 이상, 집안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는 10~20분이면 충분했을 것이므로, 남은 1시간 정도라면, 둘을 죽이고 현장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즉각 둘을 살해하고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라는 주장은 반박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죽이기로 계획한 경우, 낯선 남의 집에 들어가서 죽이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므로, 보통 자신이 사전답사한 곳이라든지 익숙한 곳으로 불러낸 뒤 죽이는 패턴이 많다는 추론도 마찬가지이다. 사전답사한 곳이나 익숙한 곳으로 불러내는 과정에서 증거를 남기게 되기 때문에, 실제 청부살인의 경우, 피해자의 동선(動線)과 일과를 파악한 후, 허점을 노려 습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반박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집 안의 욕조에서 두 명을 깔끔하게 살해하고 바로 장롱에 불을 지른 형태를 보면, 그 집의 구조가 익숙하고 편안한 인물임을 유추할 수 있다는 추론을 반박하거나, 최소한 그 설득력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두 살 난 어린 아이까지 살해한 이유도 다른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아이가 소리에 놀라거나 하여 울음을 터뜨렸다면? 이에 당황한 범인이 아기를 욕조의 물에 빠뜨려서 소리를 줄여보려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아기는 치실로 목을 묶어 울지 못하게 놔두어 결과적으로 교살(絞殺)했다면? 이렇게 추론하면 욕조의 물에 시체가 들어가 있는 이유까지 설명되어버린다.

그러나 반박과 이 재반박 역시 증거가 없는, 한마디로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명심하자. 법은 열 명의 범죄자를 놓아 보내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미세하나마 L이 범인임을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가 있었다면, 위의 정황증거는 그 증거에 힘을 실어주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물적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의심스러운 정황이나 심증(心證)이 있어도, 물증(物證)이 없는 이상 결코 L이 범인이라고 몰아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1.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부르나, Orenthal James Simpson은 이 사건의 유력용의자였던 L과 많은 차이가 있다. OJ심슨은 니콜 심슨과 론 골드만의 살해에 대해 형사에선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민사에선 패했고, 이후 강력범죄를 저질러서 결국 교도소로 들어간다. 반면, L은 이 사건 이후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 몇몇 일선 형사들에 의하면, 부부 중 남편이나 아내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우선 그 배우자를 가장 먼저 의심해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