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청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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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가오청융(高承勇)
출생1964년 11월 10일
출생시간쑤 성 란저우
국적중화인민공화국
범죄유형연쇄살인
가족부인, 슬하 아들 2명
별명중국의 잭 더 리퍼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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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는 가오청융

중국판 잭 더 리퍼[1]

가오청융은 1988년부터 2002년까지 14년 동안 9명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바이인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이다.[2] 바이인에서 저지른 9건의 연쇄살인 사건 외에도 내몽골자치구의 바오터우에서 2건의 살인사건을 더 저질러 총 11명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동안 호적이 외지에 등록되어 있어 DNA 대조가 불가능해 번번이 공안의 수사망을 피하는데 성공했으나 공안에서 호적과 관계없이 바이인 시에 거주하는 모든 남성의 DNA를 전수조사하면서 결국 빠져나가지 못하며 2016년 8월 26일에 검거되었다.

2 생애

가오청융은 1964년 11월 10일, 중국 간쑤 성 란저우(蘭州) 시 위중(楡中)현 출생으로 어렸을 적 그의 꿈은 비행기 조종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비행기 조종사가 되려고 시험을 치렀지만 번번이 낙방해 결국 방적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공장 노동자로 살면서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는 1988년부터 그의 고향에서 약 120km 떨어진 바이인(白銀) 시에 정착해서 살았다. 2013년부터 그는 주거시설이 갖춰진 바이인공업학교 매점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어렸을 적 꿈을 이루지 못한 탓인지 성격이 매우 내성적이었으며 우울하고 차가운 면이 있었고 사람들과 원만하게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있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매우 효성이 깊어 마을에서는 소문난 효자로 알려졌다고 한다. 또 자신의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강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아들들은 이루게 하려고 했던 모양인지 공부를 열심히 시켜서 중국 내 명문대에 진학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오청융을 부러워했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이웃들에게 '부모 봉양을 잘하는 효자',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을 명문대에 진학시킨 훌륭한 부모'로 칭송받던 그가 사실 중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악랄한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일 것이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3]

3 범행 일지

그는 1988년 5월 26일, 그가 24세였던 시절에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것이 바로 2016년 그가 체포될 때까지 28년 동안 중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바이인 연쇄살인 사건의 서막이었다. 그의 범행 일지는 다음과 같다.

- 1988년 5월 26일, 바이인시 바이인구 융펑가(永丰街)에서 바이인공사(白銀公司) 직원 바이(白) 모 씨(23세, 여)의 집에 침입해 강간한 후 목을 자르고 칼로 26군데를 난자해 살해.

- 1994년 7월 27일, 바이인 공전국(供電局) 여사원 독신자 숙소에 침입해 스(石) 모 씨(19세, 여)를 강간한 후 목을 자르고 칼로 36군데를 난자해 살해.

- 1998년 1월 13일, 바이인시 바이인구 성리가(胜利街)에서 양(楊) 모 씨(29세, 여)의 집에 침입해 강간한 후 목을 자르고 칼로 16군데를 난자해 살해한 후 귀에서 두정부까지 13×24cm의 살을 도려냄.

- 1998년 1월 19일, 바이인시 바이인구 수이촨로(水川路)에서 덩(鄧) 모 씨(27세, 여)의 집에 침입해 강간한 후 목을 찌르고 칼로 8군데를 난자해 살해한 후 왼쪽 유두와 등에서 30×24cm의 살을 도려냄.

- 1998년 7월 30일, 바이인 공전국 직원 쩡(曾) 씨의 집에 침입해 그의 8살 딸을 강간한 후 허리띠로 목을 졸라 살해.

- 1998년 11월 30일, 바이인시 바이인구 둥산로(東山路)에서 바이인공사 직원 추이(崔)모 씨(16세, 여)의 집에 침입해 강간한 후 목을 자르고 칼로 22군데를 난자해 살해한 후 양쪽 젖가슴과 양손, 음부를 모두 도려냄.

- 2000년 11월 20일, 바이인 면방적공장 노동자 뤄(羅) 모 씨(28세, 여)의 집에 침입해 강간한 후 목을 잘라 살해하고 양손을 잘라냄.

- 2001년 5월 22일, 바이인시 바이인구 수이촨로에서 부녀보건소 간호사 장(張) 모 씨(28세, 여)의 집에 침입해 강간한 후 칼로 16군데를 난자해 살해.

- 2002년 2월 9일, 바이인시 바이인구 타오러춘(陶樂春) 호텔 객실에 침입해 투숙객 주(朱) 모 씨(25세, 여)를 강간한 후 목을 잘라 살해.

이외에도 내몽골자치구의 바오터우에서 2건의 살인사건을 더 저질렀는데[4] 위 사건과 바오터우에서 일어난 2건의 살인사건까지 도합 11명의 피해자는 모두 젊은 여성이었다. 범인 가오청융은 체포될 당시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체격이 비교적 왜소한 편이었고 키도 170cm 남짓한 정도로 그리 큰 키가 아니었다. 즉, 자신의 힘으로 제압하지 못할 것 같은 성인 남성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만만한 여성들만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8살밖에 안 된 어린이도 있었다! 더군다나 첫 범행을 저지른 1988년은 그의 큰아들이 태어난 해이기도 했다. 즉, 아내와 자식들까지 둔 가장이 무고한 여성들을 잔인하게 해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범행을 철두철미하게 숨긴 채 태연하게 가장 노릇을 해 왔다는 것이다.

또 위 범행 일지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건 범행 주기이다. 사실, 연쇄살인범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주 살인을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한다. 과거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면서 인터뷰에 응했던 미국의 유명한 프로파일러 펫 브라운의 말에 따르면 연쇄살인범의 감정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타입이며 그들이 극도로 기분이 나쁠 때에만 살인을 저지른다고 한다. 첫 살인사건은 1988년에 일어났는데 2차 사건은 1994년에 일어나 그 주기가 6년 2개월이었는데 3차 사건은 1998년 1월에 일어나 그 주기가 3년 6개월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1999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최소 1건 씩 살인사건을 저질렀다.

이는 살인을 거듭하면서 그 자신이 살인에 맛을 들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명한 쾌락살인마 정남규는 일찍이 "담배 끊는 건 할 수 있어도 살인을 끊는 건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자신이 살인중독을 앓고 있음을 밝혀 세간을 경악시킨 바 있다. 가오청융 역시 범행 주기가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는 것에서 살인에 맛을 들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살인에 앞서 성범죄가 수반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안에서는 범인이 여성혐오증을 앓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추리한 바 있다. 이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을 보이는데 가오청융 역시 어린 시절에 여성으로부터 억압되지 않았나 생각해볼 수 있다. 또 눈여겨봐야 할 것은 3차 사건부터 시신의 일부를 도려내는 짓을 했다는 것이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역시 초반에 일어난 사건에서는 사체를 훼손하는 일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체를 훼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과거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분석했던 미국의 프로파일러 펫 브라운은 연쇄살인사건 사이에 범인이 범행에 실패한 적이 있었고 그 때 생긴 분노를 다음 희생자에게 풀었기 때문에 사체가 훼손되었다는 견해를 보인 바 있었고 과연 2차 사건과 3차 사건 사이에 1건의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공통점을 볼 때 가오청융 역시 혹 2차 사건과 3차 사건 사이에 범행에 실패한 적이 있었던 게 아닐까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 체포

사실 공안 측은 범인의 DNA를 확보한지 오래되었다. 피해 여성들의 몸 안에서 정액이 검출되었는데 그 정액을 토대로 DNA를 추출해 확보해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범인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호적 때문이었다. 당시, 공안에서는 범인이 바이인 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바이인에 호적을 둔 사람을 대상으로 DNA를 대조했다. 하지만 가오청융의 호적은 바이인이 아니라 란저우의 위중현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번번이 미꾸라지처럼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고 14년이 지나도록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자 공안 측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근데 그 방법이란게 참으로 대륙의 기상이 느껴지는 발상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DNA 전수조사였다. 호적 등록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바이인시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남성들의 DNA와 지문들을 대조하는 수법으로 범인을 찾아냈고[5] 마침내 첫 사건이 있고 무려 28년 3개월 만인 2016년 8월 26일, 범인 가오청융을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그때까지 일일이 DNA, 지문 대조 노가다를 했던 중국 경찰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위로의 말씀을..

가족들과 이웃들은 가오청융이 그 끔찍한 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오청융은 주변 사람들에게 '효자', '훌륭한 부모' 등으로 칭송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공안이 착오를 했겠거니 생각했지만 현장에 남겨진 지문과 DNA가 가오청융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고 그 같은 확실한 물증에 그도 자백하면서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용의자 가오청융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6차 사건의 희생자 추이 씨 가족들은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16세에 불과했던 추이 씨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후 아버지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쓰러져 곧바로 사망했다고 한다. 추이 씨의 오빠는 "가오청융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태껏 웬만한 일에는 눈물 한 번 보이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통곡을 하셨다."고 언론에 전했다.

5 그의 미래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인 지문과 DNA가 고스란히 있는 이상 결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엄벌주의가 아직도 남아 있는 중국에서는 단순 살인범이라도 사형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죄질이 심하게 나쁜 연쇄살인 용의자인 만큼 가오 역시 약물주사형으로 사형이 집행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1.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장기간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 범행 대상이 여성들 뿐이었다는 점, 범행 후 시체를 잔혹하게 훼손했다는 점, 끔찍한 참극을 벌이고도 철저하게 일반시민으로 위장해 살아왔다는 점에서 잭 더 리퍼가 벌인 전적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인지 세간의 언론들도 그에게 이런 별명을 붙였다.
  2. 현재까지는 법적으로 용의자 단계지만 증거가 확실하고 본인도 자백했으므로 장차 범인으로 바뀌는 건 거의 기정사실.
  3. 가오청용의 가족들 조차도 가오청용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으며 가오청융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때는 처음에는 어리둥절 할 정도.
  4. 바오터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날짜에 대해서는 추후 추가바람.
  5. 일설에 의하면 직접 찾아낸 것이 아니라 비슷한 DNA를 가진 경범죄자가 나타났고 이에 가오의 친척일 것으로 판단하여 수사 범위를 좁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