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숙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키,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 사회주의라더냐, 막걸리[1] 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머, 말두 마시오.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쎄…… 내 원!"

채만식의 단편소설로, 채만식이라는 작가의 성향과 특색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동아일보에 1938년 3월 7일부터 14일까지 연재되었다. 치숙을 한자로 풀이하면 어리석을 치(痴)자에 아저씨 숙(叔)자를 쓰는데, 직역하면 어리석은 아저씨. 실제로도 작내에서 서술자인 조카는 옥살이후 골골대는 친척 고모부[2]를 어리석다 여겨서 계속 친척을 밑도 끝도 없이 디스하고 있고, 소설 끝부분까지 "아저씨는 사회에 사폐만 끼치는 이상한 사람이니 하루속히 죽어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인 소설로, 서술자인 조카는 어느 일본인이 하고 있는 상점의 점원으로서 일본 문화에 동화되어 일본인처럼 살고 심지어는 일본 마누라도 얻어[3]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으려고 한다. 반면 그의 고모부는 사회주의자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난 후[4]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징역도 살았고 몸에 몹쓸 병(폐결핵으로 추정)까지 걸려 단간 셋방 구석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마냥 앓아눕고 있다.

또한 조카가 내지문물을 찬양할때 당시 인기있던(?) 작가나 잡지등이 언급되기도 한다. '킹'[5]이라는 남성대상 잡지, 요시카와 에이지의 찬바라[6] 소설들, 당대 유명 일본 소설가 키쿠치 칸 등...

조카는 일본 나라가 모든 것을 해준다고 믿고, 이 시대가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고모부가 이렇게 한심해 보이는 이유도 아저씨가 이 태평스러운 세상에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쓰잘 데 없는 수작을 부려 세상도 자기 몸도 학벌도 다 망쳐 놓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조카는 이 소설을 통해 온갖 험담을 하면서 아저씨를 부정적으로 보지만, 정작 이 소설에서 비판받는 대상은 서술자인 조카 자기 자신이다.

아저씨는 소설 글귀만 읽으면 한심한 사람으로 보일진 몰라도 정독하여 읽다 보면 실은 굉장한 지식인으로 식민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고 부당한 것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그를 위해 고뇌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 비하여 무조건 일본의 앞잡이만 되려고 하는 조카의 행동은 아저씨의 눈에 측은하게 비춰지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외려 치숙은 조카에 대한 일방적 비판이라기 보다는 모두까기 작품이라는 것.

실제로 채만식이 고모부인 치숙 또한 전적으로 긍정적 인물로 그리지는 않았다는 점이 근거가 된다.

사회 변혁을 이야기하면서 조강지처를 차고 동경가서 여학생과 딴 살림을 차렸다든지(...)[7][8] 정작 그렇게 내쳤던 본처에게는 출소 후에는 아무런 미안한 마음도 없이 얹혀 살고 있는 모습(...)[9], 그리고 부당함에 대한 인식은 있으나 이제는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그저 구들장만 짊어지고 있는 모습[10]을 보면 최소한 채만식이 그를 동정받아야 할, 혹은 올바름의 상징으로 그려내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만큼은 조카의 뒷다마가 아주 근거없지는 않으며,[11] 오히려 이렇게 본다면 치숙은 일제에 부화뇌동하는 친일파(조카) + 말만 앞세우고 행동하지 않는 / 새로운 문물에 혹해 본질을 잃어버린 지식인(치숙) 모두에 대한 비판이 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작품에서 치숙의 행동은 상세히 묘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제대로 평가하기에 모자라며, 애초에 편견을 가지고 지식이 짧은 조카의 관점에서 서술하는지라 묘사된 부분도 객관성을 띄고 있는지가 의심스럽고, 작가 역시 그것을 명백히 의도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와중에서는 치숙이 말은 이상을 떠들지만 마누라를 착취해먹는 가부장 내지 기둥서방인지, 아니면 심신의 고통 속에서 식민지 해방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하려던 많은 독립운동가중 한 명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의 경우 채만식의 다른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입장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어 레디메이드 인생을 보면 작가가 실용적이지 못한 인텔리에 대해 보내는 냉소를 쉽게 읽어낼 수 있으며, 방구석의 무능한 인텔리라는 인물상에서 두 작품은 매우 유사하다. 또한, 고모부에 대해 '학벌이 아깝지만 막노동이라도 하라'는 화자의 태도 역시 레디메이드 인생의 결말에서 창선을 인쇄소에 보내는 P의 모습과 겹치는 면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육체 노동을 천하게 여기던 당시의 시대적 풍조와 비교할 때 어리석은 조카가 오히려 작가의 급진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할수도 있는 것.

그리고, 작중에서 치숙의 행동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는 아내(본처, 고모)에 대한 행태 역시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혼하고 새로 결혼한 것'이니 근대적 관점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는데, 작품의 배경시대상을 생각하면 이는 도덕적으로 충분히 지탄받을만한 일이다. 이 당시의 이혼 개념은 현대처럼 '부부가 갈라서는 것'이라기보다는 '남편이 아내를 쫒아내는 것'에 가까웠고, 이혼녀에 대해서도 '뭔가 잘못을 했거나 흠이 있어서 쫒겨났을 것이다'라고 보는 시선이 대중적이었음을 생각하자.

무엇보다도 이 당시에는 과부나 이혼녀의 재혼 자체가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되지 않는 일이었고, 혼자 사는 여성이 직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것 역시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조강지처를 버리고 여학생과 새로 결혼한 치숙의 행태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니 인생이 어찌되는 내 알바 아니고, 어디가서 죽든 말든 내가 상관할 일 아니다'라는 행태로까지 보일 만 하다.

표현에 있어서 치숙은 여느 당대의 소설과는 독보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대상의 입을 빌려 긍정적으로 보는 인물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특이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는 작품이다. 하지만 긍정으로 보는 인물인 아저씨 역시 일제시대의 무능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의지는 있지만 실행하지는 못하는 지식인을 풍자한다고 볼 수 있다.
  1. 원문은 막덕. 당시 막시스트를 낮추어 부르던 말. 국어교과서 등지에는 아예 막걸리로 검열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2. 정확히는 오촌 고모부, 즉 종고모부
  3. 작중에선 '내지 여자'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내지(內地)'란 본토 여자(조선은 식민지이므로 일본이 본토이다), 즉 일본여자를 의미한다.
  4. 조카는 '이재학', 즉 '돈을 버는 학문'이라고 이해한다.(...) 그 인식은 차치하고, 돈 버는 학문을 익혀놓고 제대로 돈도 벌지 못하는 고모부를 보는 시선이 곱지 못할 수밖에....작중에서 고모부가 그 인식을 고치려고 경제학을 설명하려는데 말을 끊으며 '에그, 그 학문 참 쓸 데 없소'라고 한다.
  5. 작중에서는 킹구. 현재 코단샤계열이 그때 다른 이름으로 당시 펴냈던 잡지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정보). 고단샤에 의해 2000년대에 남성지로 반짝 부활했으나 2년만 펴내고 무기한 휴재상태.
  6. 미야모토 무사시 소설로 유명한 작가. 작중에서는 문학장르 이름을 진찐바라바라라고 한다.
  7. 심지어 출소하던 날에 아내가 형무소 앞에 마중을 나갔는데, 형무소를 나오면서도 아내는 놔두고 두리번거리면서 후처만 찾았다.(...) 그런데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혼을 하고 새로 결혼을 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근대적 관점으로는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그동안 뒷바라지 해준 것에 대해 보상이나 위자료 등은 내놓아야겠지만... 이 작품의 화자 특성상 자세한 것은 알기 힘들다.
  8. 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혼할 경우 보통 여자 쪽이 잘못해서 이혼한 거라는 인식이 강했고, 남편이 아내를 내친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그런 걸 고려해보면 이 행동 역시 마냥 곱게만은 볼 수 없을지도.
  9. 단, 본처에게 아무런 미안한 마음 없이 얹혀 살고 있다는 독해는 부적절하다. 일단 소설 본문에서도 자기 부인에 대해 고마운 사람이고 미안하다는 감정은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10. 물론 그가 앓고 있는 질병을 감안하면 이 점은 외려 납득할 수도 있지만. 실제 우리가 존경하는 대표적 독립운동가들도 저렇게 폐인생활로 보낼 때가 많았다.
  11. 주인공은 오갈 데 없던 자신을 키워줬던 고모가 어려움에 처하자 자기가 일하는 가게의 일본인 사장에게 얘기해서 거처와 일자리도 소개해줬다. 또한 고생하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긴 일본인 사장이 안정적인 재혼 자리를 소개시켜 주려고 해도 거절하자 답답해하는 모습도 보인다. 고모부를 디스하는 데는 자기가 친일파라는 점도 있지만 자기 고모를 고생만 시키는 고모부에 대한 원망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