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시대의 악습. 남편 혹은 시가(媤家)가 아내를 내칠 수 있는 7가지 근거를 말한다. 칠거지악을 저지른 처를 내치지 않은 경우에는 남편이 곤장 80대 형에 처해지게 되니, 강제력이 있는 법률이었다. 혼인을 가문과의 연계를 염두하고 개인의 권리 특히 여성의 권리를 경시했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다만 '삼불거'라 하여 칠거지악에 해당해도 쫒아낼 수 없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름이 비슷한 7대 죄악과는 관련이 없다. 이혼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악이다.
2 사유
대체적으로 악습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현대적으로 납득이 가는 사안이라도 역으로 적용은 불가능하기에 남녀차별적인 악습이라는 굴레는 피할 수 없다.
1.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 악습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것이, 당시에는 윗사람을 잘 섬기는 것이 이치에 맞는 행동이었다. 다만 그 당시 결혼한 여성의 대우를 보자면 악습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시집살이나 집안일, 농사일 등 중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처지기 때문에. 당연히 현대에는 일방적으로 어찌하는 것 자체가 이혼사유에 속해있다. 기본적으로는 노인학대나 노인의 복지후생 개념을 포함하는 시대적인 한계에 가까운 조목.
2.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 대를 잇는 게 중요한 특성상 당연시 되었다.[1] 딸만 낳는 것은 질투와 함께 조선 말에는 빠졌으나, 근대까지도 이런 이유로 소박맞는 여성들이 은근히 많았기 때문에 현재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사유로는 재판상 이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2] 조선 후기에는 질투와 같이 허영이나 사치로 대체하는 곳도 있었으나, 형법대전에선 그냥 빼버리고 오출사불거가 된다. 사실 본처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본처를 내쫒고 후처를 맞이하는 것보다 가까운 친적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집안의 갈등을 줄이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에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번듯한 집안에서는 딸을 첩으로 시집보낼 일도 없거니와 씨받이 등으로 인해 많이 왜곡된 개념이지만, 당시의 양반들의 첩은 대부분 눈이 맞아 데리고 사는 여자였지 대를 이을려고 들이는 경우가 아니었다. 서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생각해보자. 또한 일반 서민들의 가정에는 첩을 들이는 것보다 조카 등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덜 부담스러웠기도 했다.[3] 당연하지만 임신시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거기에 불임은 남성 측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책임만 추궁받았기에 현대적인 가치관으로는 부당할 수 밖에 없는 조목이다.
3. 간통 : 애당초 반인륜적인 행위이니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대에도 내쳐야 하고 미래에도 내쳐야 되는 사례. 더욱이 당시에는 유전자 검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친자 확인이 불가능했다. 문제는 남성한테는 적용이 안되었다는 것. 그런데 이 조목은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법률[4]에 의하면 간통은 항상 쌍벌제인데다 중종 이후로는 아예 양반가문에서 여자가 간통을 벌인 경우 족보에 써넣는, 즉 그 자식까지 영향이 미치게 만들어놨기 때문에 가중처벌에 가까웠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정절을 강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간통녀의 자식의 경우 설령 친자라 하더라도 출세길이 막히기 때문. 남자가 첩을 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라서, 축첩 자체는 그렇다쳐도 서자는 당연히 관직 상승에 제한이 있었고 사회적 차별이 심했다.) 일방적인 성범죄는 더더욱 강력하게 처벌해서, 상대가 비록 기녀라 하여도 동의가 없었다면 강간으로 보았으며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의 죽을 정도로 처벌했다.[5] 즉, 간통으로 이혼을 운운하기 이전에 관아에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4. 질투 : 처첩제가 허용된 상황이라 서로 시기하여 생길 불상사를 막기위한 수단이었을 공산이 크다. 조선 말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 것과 함께 질투와 같이 허영이나 사치로 대체하는 곳도 있었으나, 형법대전에선 그냥 빼버리고 오출사불거가 된다.
5. 유전병 : 사실 자녀들에게도 대물림되는 문제인지라, 신부 측에서도 신랑을 고를 때 이런 조건을 많이 봤다.
6. 말이 많은 것 : 말이 많은 건 그 당시의 미덕이 아닌데다가, 말 많은 여자를 천박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3 삼불거
아무리 칠거지악을 범했어도 절대로 내칠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처가가 전멸하여 아내를 내칠 경우 그 아내가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 일종의 인도적인 조치로 보인다. 과거에는 가정이 곧 사회복지적인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2. 남편과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루었을 때 : 효 혹은 정절을 증명했으므로 이에 대해 인정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2번의 경우는 매우 중요시했는데, 1처럼 아예 잃을 게 없다고 막나갈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3처럼 유세 부릴 여지도 없기 때문에 2번의 사유가 있는데 칠거지악으로 내친다고 할 경우에는 시부모와 남편이 형벌을 받았다.
3. 결혼 당시에는 비천했으나 결혼 이후 집안이 귀해졌을 때 : 집안에 복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이를 내치면 화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사실 처가의 세력이 강할 경우 도리어 아내가 시가에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는 의외로(!) 인도주의적인 면도 있었고, 집안에 헌신하는 사람이 부정을 할 여지도 없다고 판단을 했기에 삼불거에 해당하는 사람이 칠거지악이 있어도 내치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주로 아내가 오갈 데가 없는 사람이거나, 힘든 시기에 함께 고생했으면 내치면 안된다는 것이 삼불거의 요지.
조선말기 형법대전에서는 칠거지악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조항과 질투를 삭제하고, 대신 삼불거에 자식이 있으면 처를 내치지 못한다는 규정을 추가하여 오출사불거로 바뀌었다.- ↑ 여담이지만, 사실 아들을 못 낳는 건 100% 남자 탓이다. 여자는 X염색체인 난자만을 생성하므로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정자이기 때문.
- ↑ 일방 유책으로 이혼할 수 없다는 말이지 합의이혼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자녀양육 또한 결혼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일방의 행복 추구를 위한 의미에서 합의 의혼 사유로 일방의 불임은 제시될 수 있다. 또한 결혼 전 불임 사실을 알고도 속였다면 유책 사유가 될 수 있다.
- ↑ 다만 아무리 장손 집에 대가 끊길 상황이라도 생으로 자식을 뺏거나 동생 집의 대를 끊으면서까지 양자를 데려올 순 없었다. 그럴 만한 나이 대의 아이가 친척 내에서 없는 경우나,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자식이 여럿이라도 아들은 하나 뿐이라 보낼 수 없는 경우 등이 있었기 때문에, 서민 가정에서는 첩을 대를 이을 목적으로 들이는 경우도 분명히 있었다. 아직도 노인 세대 중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게 남아있는데 이를 그린 다큐 영화로 "춘희막이"가 있다.
- ↑ 형벌의 기준인 대명률과 간통, 강간을 다스리는 법률인 범간률 기준
- ↑ 간통과 강간은 대체로 장형 80~100대가 기준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성인 남성이라도 곤장 10대 이상이면 생명에 위협이 오는 것으로 본다. 다 맞기 전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