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페우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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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마키나의 전술적 토대

이름카를로스 데시데리오 페우셀레
(Carlos Desiderio Peucelle)
생년월일1908년 9월 13일
사망년월일1990년 4월 1일
국적아르헨티나
출신지부에노스아이레스
포지션아웃사이드 라이트
신체조건171cm / 72kg
등번호-[1]
소속팀산 텔모(1925-1926)
스포르티보 부에노스아이레스(1927-1930)
CA 리버 플레이트(1930-1941)
국가대표29경기 / 12골(1928-1940)
감독CA 리버 플레이트(1945~1946)
CA 산 로렌소(1954)
스포르팅 크리스탈(1960)
CA 리버 플레이트(1966)

1 생애

1.1 선수 생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페우셀레는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팀에서 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이름이 알려진 페우셀레에게 많은 클럽이 구애를 했고 최종 승자는 선수를 끌어모으며 신흥 강호로 떠오르던 리버 플레이트였다. 1930년부터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기 시작한 페우셀레는 1932년 베르나베 페레이라가 팀에 합류한 이후 첫 우승을 맛보았다. 그 이후는 팀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1.2 국가대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그는 소속팀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라이트 윙어로 활약하였지만 팀의 사정에 따라 스트라이커로도 종종 활약하였다. 1929년의 코파 아메리카초대 월드컵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초대 월드컵의 결승 토너먼트에서 3골을 넣는 활약을 하였다.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2차례 우승을 차지하였다.

1.3 감독 생활

라 마키나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그가 다시 리버 플레이트의 감독이 되었을 때 모레노 등의 이탈로 이미 라 마키나는 해체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도력+멤버빨로 리버 플레이트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드리블 스킬로 유명한 라이트 윙어였다. 또한 축구 지능이 뛰어나 소속팀과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다재다능한 멀티플레이어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리버 플레이트의 첫 전성기를 함께한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했으며, 라 마키나의 전술적 토대를 마련한 선수로도 유명하다.[2]

3 뒷 이야기

  • 페우셀레는 콜롬비아 내 최초의 축구 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 페우셀레는 초기 리버 플레이트 시절에 엘 프리메르 미요나리오(El primer millonario. 첫 백만장자)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의 이적에 꽤 많은 돈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년 후 베르나베 페레이라가 더 큰 금액의 이적료로 팀에 들어오면서 묻혔다.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이는 1969년 페우셀레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의 책 제목을 축구 시간과 라 마키나의 역사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