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카미 겐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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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上 彦斎
텐포 5년 11월 25일(1834년 12월 25일) - 메이지 4년 12월 4일(1872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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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실제 사진

일본 에도시대 무사. 쿠마모토(熊本) 번에서 탈번한 낭인(狼人).
막부 말기에 존왕파의 암살자로 막부 말기의 대표적인 검사이다.
막부말 4대 칼잡이 중 한 사람. [1][2]

부친 오모리 사다스케(小森貞助)、모친 와카(和歌)의 차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오모리 히코지로우(小森彦治郞)이었으나, 카와카미 겐페이(河上源兵衛)의 양자가 되면서 카와카미 겐사이라 개명했다.

히고(肥後)의 양이파의 한 사람인 그는 문학은 토도로기 무헤이(轟武兵衛)에게, 병학은 미야베 켄조우(宮部鼎蔵)에게, 황학은 하야시 오우엔(林園)을 통해 익히므로서, 근왕사상을 품게 된다. 이러한 지식은 그의 검을 히토키리(人斬り)의 길로 빠져들게 했다.

1851년 쿠마모토 영주 호소카와 나리모리의 수하에 들어간 겐사이는 에도에서 영주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도착하였을때 당시 겐사이는 에도에 있었다. 막부는 미국의 힘에 눌려 일련의 불평등조약들을 맺어갔으며 이에 분노한 겐사이는 에도를 떠나 쿠마모토로 돌아와 학업에 정진하였고, 학교를 졸업한 이후 에도로 다시 돌아갔다.

안제이 숙청 당시 겐사이는 에도 내의 쿠마모토인 거주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사건 이후 도주한 일군의 암살자들이 이 거주지역으로 숨어들었고, 주민들의 동요를 진정시킨 겐사이는 이들에게 의사를 불러주고 차를 대접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겐사이는 평소에 자신이 이들의 뜻을 존경하고 있었음을 밝였다.

1861년 겐사이는 쿠마모토 다이묘의 다른 가신의 딸인 미사와 테이코와 결혼하였다. 미사와는 나기나타를 잘 사용했던 무예가이기도 하였다. 부부는 곧 아들 겐타로를 낳았다. 아이는 병약하였지만 테이코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살아남았다.

1863년. 30세의 나이로 구마모토 번친병에 선발되어 미야베 테이조(宮部鼎蔵)등과 함께 간부로 추천을 받았다. 8월 18일의 정변 후 조슈로 옮겨가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의 경호를 맡았으며 1864년 6월에 이케다야 소동으로 신센구미에게 살해당한 미야베 테이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교토로 향했다. 7월 11일 공무합체파이자 개국론자의 중진이었던 사쿠마 쇼우잔을 베고 나서는 다시는 살인검을 휘두르지 않았는데. 사람을 벨 때는 마치 인형을 베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쇼우잔을 벨 때는 달랐다. 처음으로 사람을 벤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필경 쇼우잔은 당대의 호걸이었을 것이다. 하고 그때 일을 토로했다고 한다. 2차 조슈 정벌 때는 조슈군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867년에 구마모토번으로 귀번했으나 당시 구마모토번은 좌막파가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투옥되고 만다. 이 때문에 대정봉환, 왕정복고, 토바 후시비 전투 당시에는 감옥에서 보냈고 1868년에 좌막파였던 구마모토번은 겐사이의 힘을 빌려 유신 세력에 참가하려 했으나 겐사이는 이를 거절하고 만다. 유신 후 개국 정책을 내세우던 메이지 신정부는 계속 양이를 주장하는 겐사이를 두려워했고 겐사이는 메이지 정부에 의해 이경사건(1871년에 양이파의 공경 둘이 메이지 정부의 전복을 꾀한 쿠데타 미수 사건)과 참의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真臣) 암살의 혐의로 1871년 12월에 참수되고 만다.

보통 '사람 베는 겐사이'. '칼잡이 겐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는데 겐사이가 벤 인물로 확실한 것은 사쿠마 쇼우잔(佐久間象山)뿐이고 언제 누구를 몇사람이나 베었는지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막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검사중 하나였기에 그가 벤 사람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키는 150cm 전후로 몸집이 작고 살결이 희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여성처럼 보였다고 한다. 도장에도 다니긴 하였으나 죽도검술은 서툴렀던 모양으로 매번 두들겨 맞는 편이었으나, 진검을 들면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다고 한다. 한쪽 무릎이 지면에 닿을만큼 낮은 자세에서 칼을 뽑아 베는 것이 특기인데. 그런 그의 검법은 시라누이류(不知火流)라 불려지며, 독자적으로 창안한 것이라 한다.

절정의 경지에 달한 검술, 많은 사람을 베었던 히토키리 기믹과, 한번 정한 양이의 뜻을 죽을때까지도 굽히지 않은 정절, 막부 말기의 시대상. 이런 요소들 때문에 오키타 소우지나, 사이토 하지메와 같이 막말시대를 대표하는 검사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를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로는 《바람의 검심》의 히무라 켄신과, 《은혼》의 카와카미 반사이 등이 있다.

검호3의 최종보스 수라의 길 끝에 나오는 최종보스다. 하지만 정작 최종보스라기엔 그 포스가 떨어져 보이는게, 수라의 길을 보려면 모든 검호가 사망해야 하기 때문에 무사시 이벤트나(무사시가 실제로 상대했던 요시오카 형제, 인슌, 바이켄, 코지로는 제때 이벤트를 챙겨서 플레이어가 선수치지 않으면 무사시가 모조리 살해해버린다) 야규일족 이벤트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검호를 플레이어 자신이 살해하게 하는데 이 중에는 괴물같은 스펙의 무사시나 리치가 길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바이켄이나 인슌, 코지로나 검형이 강해서 무시무시한 소우지나 스스메 등 포스 넘치는 검호들이 많다. 그에 비하면 겐사이의 스텟이나 검형은 최종보스라 하기에는 약한 편. 검호3 최강의 형인 화돌을 만들때 필요한 딱따구리를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딱따구리의 성능이 영 좋지 않다는것. 제자리에서 자세를 잡고 연속으로 찌르기를 구사하는데 모션 특징상 사거리가 긴 것도 아니고 연타 속도도 느린데다가 전진하는것도 아니라 구석에 몰아넣고 맞추는게 아니면 풀히트 시키는게 불가능하다. 같은 연속찌르기 계열의 오키타 소우지의 3단찌르기와 비교하면 매우 초라한 수준. 대신 오이시 스스메의 형과 조합해 완성하는 화돌의 경우 리치도 길어지는데다가 공격 속도도 빨라지고 전진하며 공격하기 때문에 풀히트 시키기 매우 쉬운 엄청난 기술이다. 다만 수라의 길은 진행 과정도 그렇고 엔딩 뒤의 나레이션도 그렇고 뒷맛이 찝찝하다.

바람의 검심》에서의 설정

만화 《바람의 검심》의 팬 북인 《바람의 검심 ~ 검심전수》의 표지 뒤에 수록된 『검심재필』에 짤막하게 실려있는 카와카미 겐사이의 설정에 의하면, 막말 동란기 당시 그 여성스럽게 생긴 풍모와 기술의 성질 등이 히무라 발도제(히무라 켄신)와 닮은 탓[3]에 서로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서 폐가 된다고 생각 중이었다 한다. 이는 밧토사이 쪽도 마찬가지라 서로 언젠가 담판을 지어야겠다며 마음 먹었다고. 물론 이 설정은 본편이 완결된 이후에나 밝혀진 것이긴 하다.

  1. (다른 세 명은 토사(土佐)의 오카다 이조(岡田 以藏), 사쓰마(薩摩)의 나카무라 한지로(中村 半次郞), 다나카 신베에(田中新兵衛)).
  2. 다만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지로나 신베에는 제외시키는 사람이 있기 때문.
  3. 이는 히무라 켄신의 모델 자체가 카와카미 겐사이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