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라우눔 전투

Battle of the Catalaunum

서기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과 서로마 제국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서로마 - 게르만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그때까지 무적으로 알려진 훈족이 최초로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인 동시에 서로마 제국 군대가 군대답게 싸운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샬롱(Chalons)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진 탓에, '샬롱 전투' 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1 전조

이 당시 갈리아의 정세는 로마의 통제력이 약해짐과 동시에 수많은 게르만족이 난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로마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이들을 상대하여 로마의 통제력을 강화시키려고 애썼고 많은 부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언제든 복속된 게르만족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이때 훈족의 왕 아틸라는 서로마를 공격하라는 반달족의 왕 게이세릭의 부추김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1]인 호노리아로부터 자신과 결혼하면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주겠다는 편지와 그녀의 반지[2]를 받게 된다. 이를 빌미로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에게 호노리아와 그녀의 지참금을 자신에게 건네주라고 강요했으며,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서기 451년 봄에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격하였다.

2 서전

300px-Attila_in_Gaul_451CE.svg.png

서기 451년 4월, 아틸라는 지금의 프랑스 메츠인 디보두룸을 약탈했고 그 뒤 계속 남하하여 많은 도시들을 파괴한다. 6월이 되자 아틸라는 오를레앙에 이르러 도시를 포위했는데, 이 도시는 론 강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요새 도시였으므로 서로마에게 있어선 잃어서는 안될 요충지였다.

한편, 아에티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진입한다. 그에겐 아틸라와 맞설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었으므로 서고트의 왕인 테오도릭 1세[3]에게 연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릭은 아틸라를 두려워하고 있긴 했으나 아에티우스에게 맞설만한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아에티우스는 당시 갈리아에서 영향력이 높았던 원로원 의원 아비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테오도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테오도릭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아에티우스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오를레앙을 점령하기 직전이었던 아틸라는 로마와 서고트의 연합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를레앙과 연합군 사이의 양면공격 가능성을 우려했기에 포위를 풀고 철수키로 결정한다. 곧바로 훈족의 왕과 그의 장군들은 서로마의 연합군과 맞설만한 지대를 찾았고, 트루아로 물러나 그곳의 주교 루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탈라우눔 평야에 진을 쳤다.

같은 시기 아에티우스는 휘하의 로마군 이외에 테오도릭이 이끄는 서고트군,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등과도 연합군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틸라를 요격하기 위해 그가 있는 장소로 진격하였고 6월 20일에 양진영은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조우하여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3 전투

역사가 요르다데스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아에티우스 편의 프랑크족 분대가 아틸라 편의 게피드족의 분대와 싸움을 벌여 1만 5천여 가량의 전사자를 냈다고 서술하나 이 일이 실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애시당초 이 당시 동원된 양군의 전력이 분명치 않거니와 동원된 병력 자체가 후세에 뻥튀기 되었다는 주장도 있는판이라...

이날 밤 아틸라는 훈족의 관습대로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지의 점쳤고 점을 친 결과[4] 훈족에게 재앙이 일어날 것이고 적의 수괴가 죽을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훈족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점은 불길한 점괘이긴 하였으나 아틸라는 전사한다는 적의 수괴를 아에티우스로 생각하였으므로 서로마 제국군과 맞붙기로 결정한다.

이후 회전을 진행하는 고대의 관습대로 군대를 좌익, 중앙, 우익으로 나눠 각각 적과 맞붙게 하였다. 카탈라우눔 평야는 완만하게 경사진 곳이었고 때문에 언덕을 점거한 쪽이 유리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 높은 지형에 진영의 한쪽 날개를 두고 낮은 지형에는 다른 쪽 날개를 둔 상태로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지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태였다.

로마-서고트 연합 측은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서고트족 - 우익(지형상 경사가 높은 곳에 포진)
아에티우스의 서로마군 - 좌익(지형상 낮은 경사 부분에 포진)
알라니족 왕 상기반의 군 - 중앙

상기반에게 중앙을 맡긴 것은 서로마군과 서고트족 모두 상기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한쪽 날개를 맡기면 달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아틸라는 자신의 좌익은 동고트족에게 맡겨 서고트족과 상대케 하고 우익은 게피드 족과 나머지 게르만족에게 맡겨 아에티우스의 로마군과 대적케 했다. 그리고 최정예인 훈족은 중앙에 포진,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다.

이렇게 배치하는 동안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의 꼭대기를 점거했는데 여기서 양측의 전략은 갈렸다. 아에티우스는 양쪽 날개에 정예 병력을 포진시켜 적을 포위하고자 하였고 아틸라는 그와 반대로 정예 병력인 훈족으로 중앙을 돌파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래 그림: 빨간색 훈족, 파란색 아에티우스의 연합군)

파일:Attachment/카탈라우눔 전투/cp1.jpg
(좌측이 높은 지대이며 우측이 낮은 지대이다. 산꼭대기의 토리스먼드(Thorismund)의 별동대에 주목)

이렇게 배치를 마친 뒤 양측 군은 서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다. 두 군이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아틸라는 급작스럽게 자신의 중앙군을 이끌고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양쪽 날개가 서로 맞붙기 전에 이미 아틸라 군과 상기반 군 병력간 교전이 시작된다. 중앙이 치열하기 교전하는 동안 전진하고 있던 우익의 서고트족과 훈족의 좌익을 맡은 동고트족이 전투에 돌입하였고 서고트족을 직접 지휘하던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할정도로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테오도릭의 전사 이후 서고트족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본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와 동고트족의 좌측을 향해 돌진한다. 이 덕분에 서고트족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에 돌입할 수 있었다.

한편 좌익에 포진된 아에티우스의 로마군은 공격하지 않고 그 자리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우익의 게피드 족 역시 로마군에게 덤비지 못한 채 공격할 기회를 엿보며 서로 마주보게 된다. 이렇게 대치하는 동안 중앙의 훈족은 알라니족을 뒤로 계속 밀어붙였고 시간이 지나자 훈족은 로마군에게 후미를 노출시키게 된다.

파일:Attachment/카탈라우눔 전투/cp2.jpg
(중앙의 아틸라 군(빨간색)과 우측의 아에티우스 군(파란색)의 위치에 주목. 아틸라 군은 후미가 아에티우스군에게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좌측의 토리스먼드가 훈족의 좌익을 협공하고 있는 것에 주목)

이를 본 아에티우스가 즉시 병력을 쪼개 훈족의 후미를 향해 돌격시켰고 갑작스러운 후미의 공격에 무너진 훈족의 군대는 패주하여 달아난다. 한편 서고트족과의 싸움에서 밀려나던 동고트족의 군대와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던 좌익의 게피드 족 군대도 중앙이 무너지는 것을 보자 진형을 무너뜨리며 퇴각하였다. 로마군과 서고트족의 군대, 그리고 중앙의 상기반의 군대가 이들을 추격하였고 아틸라의 군대는 진영으로 들어가 그곳을 사수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미처 진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진 잔존병력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이들은 뿔뿔히 흩어진다. 서로마-서고트 연합군은 이들을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추적하면서 살해하였다.

해가 져서 어두어지자 연합군 측은 추격을 중지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는데 이 와중에 서고트의 왕자 토리스먼드가 실수로 아틸라 진영으로 들어가 부상을 입고 간신히 빠져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아에티우스도 어두었으므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서고트족의 진영에서 그날 밤을 보내기로 한다.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연합군 측은 무너져버린 아틸라 군의 진영을 포위하였고 아틸라가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위에 안장을 얹어놓아 패배할 시에 안장에 앉아 불을 질러 자결할 생각을 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4 전투 이후

하지만 결국 아틸라는 살아 돌아갈 수 있었는데,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테오도릭의 유해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보고 분노한 토리스먼드가 부왕의 원한을 갚기 위해 아틸라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에티우스가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토리스먼드에게 빨리 서고트의 수도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그의 동생이 왕의 자리를 강탈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결국 그를 그의 군대와 함께 돌려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는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 실상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살려두어 서고트족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아에티우스는 그 동안 훈족에게 빌린 병력을 꾸준히 주력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훈족의 소멸은 그가 앞으로 병사를 제공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서고트족이 먼저 포위를 풀고 철수하고 뒤이어 아에티우스의 로마군도 철수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아틸라는 위 연합군이 철수하는 것이 자신을 평야로 유인하려는 함정이라고 생각하여 한동안 진에서 나가지 않다가 정찰병을 통해 이들이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군을 이끌고 진영을 정리한 뒤 갈리아에서 철수, 라인강을 넘어 자신의 본거지로 도주하였다.

이는 후일 아에티우스의 판단착오로 밝혀지게 되는데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아틸라가 일년 뒤 북이탈리아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훈족은 아에티우스의 예상를 넘어선 회복력을 보였고 결국 갈리아 주둔 로마군은 병력부족으로 훈족이 이탈리아 북부를 약탈하는 것을 막지못했다.

5 평가

전통적으로 이 전투는 역사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그 반대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와해시킬 결정적인 기회를 가지고도 이를 수행하지 않았고, 결국 북이탈리아 초토화를 초래함과 동시에 황제의 의심을 받음으로서 자신의 입지마저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이다.어째 스틸리코도 그렇고 결정적인 순간의 행보 때문에 의심받는건 서로마 제국 장군들의 전통인가 보다[5]

에드워드 기번은 이 전투에서 훈족이 이겼다면 갈리아는 훈족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말을 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훈족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서유럽 기독교 왕조의 성립이 늦춰지는 결말이 초래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전투는 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한페이지를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J.B. Bury의 경우 당시 훈족은 수많은 종족들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 종족은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훈족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한 처지였고 아틸라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 없이는 와해되기 쉬운 조직으로 훈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설령 위 전투를 이겨 갈리아의 지배를 확립했다고 하더라도 훈족의 통치는 얼마가지 못할 공산이 크므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후세의 영향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제쳐두더라도 아에티우스가 이 전투에서 전술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는 점에 대해선 많은 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아에티우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기반족 군대와 로마군의 포지션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훈족이 알라니족을 밀어붙이면 자연스럽게 로마군에게 그들의 후방을 노출되게끔 하였고 알라니족과 훈족의 전투력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훈족이 알라니족을 밀어붙이면 어디까지 밀려 후방이 노출될 것인가를 예측하여 시기적절한 후방 협공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서고트족과 동고트족과의 싸움에서 아에티우스는 토리스먼드에게 기병으로 언덕을 점령하게 한 뒤 전투가 무르익자 좌측을 협공하는 기동전술을 짰고 이러한 기동은 지형활용에 대한 뛰어난 지식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지형의 활용을 극대화하고 아군과 적군의 장단점을 정확히 고려한 배치가 이루어졌으며 전황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하여 적시에 협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이 전투는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싸움이었다 평가할 만하다.
  1.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도승이자 역사가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호노리아는 갈라 플라키디아가 낳은 세 아이 - 알라리크의 의제 아타울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테오도시우스, 로마 장군 콘스탄티우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호노리아, 발렌티니아누스 - 중 두번째로 언급되어, 발렌티니아누스의 누나라는 인상을 준다.
  2. 이때 호노리아는 궁정에서 봉직하던 관리와 불륜관계에 빠져 임신하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 벌로 낙태를 강제받은 뒤 수도원에 유폐된 상태였다고 한다.
  3. 로마 약탈을 주도했던 알라리크 1세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4. 당시 점을 치는 방식은 희생제물의 내장을 검시하는 방식이었다.
  5. 스틸리코 역시 비시고트의 왕 알라리크 1세를 놓아주고 그를 동맹으로 삼음으로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바 있었다. 당시 서로마 제국군의 병력 누수현상 때문에 쓸만한 동맹이 필요했다는 시각과 정치적 야심을 위해서라는 설이 공존하는데 공교롭게도 아에티우스 역시 이 전투로 비슷한 평가가 내려지는것은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