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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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경 서고트족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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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족의 확산 지역
구별 색상내용
전통적인 예탈란드(Götaland): 스웨덴의 남부지역
고틀란드 섬(Gotland)
3세기 비엘바르크(Wielbark) 문화 지역(지금의 폴란드)
체르니야코프(Chernyakhov) 문화 지역(지금의 우크라이나)
로마제국
Goths

1 개요

유럽 고대사에서 기원후 4세기에서 5세기, 로마 제국이 쇠퇴하는 틈을 노려 로마 영토를 꿰어 찬 동부 게르만족계 민족 가운데 하나. 그 이름은 고딕(Gothic) 양식이란 역사, 문화 용어로도 남아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전 북유럽 성당 양식을 세련되지 못했던 고트족에 빗대어 고딕 양식이라 일컬었으니.[1]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닌 셈. 그래도 원래 멸칭이었던 고딕은 오늘날에는 훌륭한 문화 양식으로 인정받으니 문화 파괴 활동 대명사인 반달리즘이란 오명을 얻게 된 반달족[2] 보다는 대접이 나은 셈이다. 고트족은 3세기 때까지만 해도 게르만족의 대부분을 느슨하게나마 거느렸던 거물급 민족이니 그 대접이 과했던 것도 아니다(덤으로, 3세기의 반달족은 고트족에게 굴복했던 잡다한 민족 중 하나다).

원래 지금의 고틀란드 섬과 지금의 스웨덴 남부인 예탈란드 지방에 살던 족속이었다. 현재 사용하는 지명인 고틀란드(Gotland)나 예탈란드(Götaland)도 추정컨대 '고트족의 땅'이란 뜻에서 유래한다.[3] 이후 점차 남하하여 로마 영내를 침범할 무렵에는 오늘날의 루마니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트족은 동서로 나뉘어 각자 독자 발전 과정을 거치므로 후일 서고트족(西-, Visigoths)과 동고트족(東-, Ostrogoths)으로 따로 일컫게 된다. 스칸다나비아 반도에 잔류한 고트족은 이후 기트족(Geats)이라 불리게 된다.[4]

고대 로마 제국 말기 민족대이동[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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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세기 이후 고트족

고트족이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건 3세기의 위기[6] 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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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년에서 418년 서고트족의 이동 경로

본격 영향은 기원후 4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온 훈족에게 밀려 로마 영내로 이주하게 되면서부터. 이 와중에 동고트는 370년경 일시로 멸망하고 서고트족은 도나우강을 건너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갈리아(프랑스)를 거쳐 에스파니아(스페인)까지 먼 걸음을 하게 된다.

국가 운영이 차츰 막장으로 기울던 로마는 최초엔 이들을 받아들여 북방 국경 안정화와 국경지대 경제 활성화라는 토끼 두 마리를 동시에 잡으려 했지만, 부정부패로 말미암은 삽질로 서고트족은 일부 동고트족까지 끌어들여 반란하게 해 버린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7] 로마는 대제 테오도시우스가 간신히 제압하는 듯했으나 때마침 사산조 페르시아와 긴장이 고조되면서 동맹을 결국 협정해 고트족을 로마 영내에 아예 정착할 수 있게 허용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야만족이라 멸시하던 이들을 물리치기는커녕 동맹 상대로 승인하고 국내 거주까지 허용했으니 로마 쇠퇴의 안습 크리는 여기서 시작(…)... 이라고는 하는데 이건 어폐가 조금 있는 표현. 본래 고대 로마는 이런 야만 부족들을 국경 내에 정착하게 해 동화정책[8]을 꾸준히 수행해 인력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정치상 목적을 실현하려는 방책으로 삼았다. 야만 부족들의 국경 내 정착이 안습을 초래한 게 아니고 안습이 된 국내 사정 탓에 야만 부족들을 전성기만큼 억제하지 못하면서 국경 내에 들어온 야만 부족들이 깽판을 부리게 된 것.

450년경 로마 제국의 세력도. 이미 서로마잉글랜드에서 철수, 북아프리카를 빼앗기고 이베리아 반도갈리아 곳곳에 야만족 세력이 있는 등 그 영토가 누더기로 변해버렸다.

이후 서고트족은 판노니아에 정착하고 동맹 부족으로 로마 제국에 상당 기간 봉사했으나 대제 테오도시우스 사후 제국이 영구 분열되자 아직 힘이 있(...다기보단 콘스탄티노플 성벽 때문에 털어 먹기 힘든)는 동로마보다는 서로마를 공략하기 시작하고 스틸리코에게 털리기도 하지만 마침내 410년 족장 알라리크[9]의 지휘 아래 로마를 점령, 약탈하는 초유 사태를 일으켰다. 알라리크는 로마에 입성하기 전 최후 통첩으로 다음과 같이 수수께끼의 라틴어 문장을 로마 시민에게 전하였다.

TETE RORO MAMA NUNU DADA TETE LALA TETE[10]

이후 서로마에 의해 아퀴타니아[11]를 할당받아 동맹자로 정착한 후 아틸라와의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의 동맹군으로 참여해 왕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이것을 물리치기도 했다. 450년대 이후 서로마가 막장화하자 주변 속주를 본격으로 털어 먹기 시작, 남서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에도 진출하여 잔여 서로마 지역을 정복하고 이 지역의 맹주로 있던 수에비 족을 탈탈 털어 먹고 반도 북서쪽으로 축출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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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경의 서고트 왕국 세력도.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은 수에비 족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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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년 ~ 540년의 동고트 왕국 세력도.

5세기 중엽 훈족의 왕 아틸라가 죽고 훈족이 빠진 판노니아에 정착했던 동고트족이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를 점유한 오도아케르를 물리치고 따로 살림을 차리니 이것이 동고트 왕국이다. 후에 반달족도 훨씬 심하게 로마를 털어 먹긴 했지만 로마시 자체를 최초로 약탈하고 제국의 위신을 실추하게 하는 결정타를 먹였다는 점에서 고트족의 역할은 가벼이 취급할 수 없다.

3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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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는 507년 부예 전투에서 경쟁 부족 프랑크인의 족장 클로비스에게 왕이 죽을 정도로 처참히 패배하고서 셉티마니아(남프랑스 연안)을 제외한 오늘날 프랑스 방면의 영토를 잃고[12] 본진을 탈탈 털어 먹힌 서고트 왕국은 장수왕에게 한성을 뺏기고 남쪽으로 피난한 백제처럼 이베리아 반도로 피난해 권토중래하여 세력을 다시 모으게 된다. 이때 동고트 족의 왕이 섭정하기도 했었고, 그 후엔 내분에 휘말려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동로마 제국에 내주지만, 그 후 반세기 간에 힘을 결집하여 최종으로 수에비 왕국과 기타 잡다한 북쪽의 민족들과 남부의 동로마 제국을 전부 물리치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게 된 후 그 왕국을 백 년간 유지했지만 고질인 왕권 투쟁은 여전했고 결국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침공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13]

한편 이탈리아 본토에서 군림하던 동고트 왕국은 522년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보낸 벨리사리우스에게 멸망당했으나, 적지 않은 고트족이 아나톨리아로 끌려가 대(對)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아예 일부는 고소그라이키란 부대로 편성되어 동로마 제국의 핵심 정예 부대로 탈바꿈했다. 이슬람 제국 전선에 끌려가 투입되었던 불가르족 중 적지 않은 수가 이슬람 측에게로 탈영하거나 배신했던 반면, 동고트 병사들은 의외로 동로마 제국을 잘 섬겼다.

이탈리아에 그대로 남은 동고트족 군인들은 동로마의 정규군으로 편입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랑고바르드족과 싸워서 그나마 이탈리아의 로마 영토를 보전한 건 바로 이 옛 동고트 군인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등으로 전출당해 편성된 동고트인들의 부대는 또 다른 부작용을 끼치게 되니, 이들이 훗날 옵티마테스 부대로 개명되는데, 이슬람 제국의 맹공에 제국이 제일 어려울 때도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시해하곤 했다. 앞서 말했듯 적에게 투항하진 않았지만, 대우를 시원찮게 하는 황제는 곧잘 죽였기에 콘스탄티누스 5세 때 전투 부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종합하면 이탈리아와 아르메니아, 발칸 반도의 동고트인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치는 않으나, 서고트 왕국이 이슬람에게 멸망한 후 정체성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동로마 제국에 용해된 것으로 보인다.[14]

본토에 남아 있던 기트족은 11세기경 스웨덴 왕국의 성립 이후로 북쪽의 스베아족과 점차 융합하여 스웨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성립하게 되었다.[15]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고트족의 이름은 현재 스웨덴 본토의 지명인 예탈란드(Götaland)와 고틀란드섬(Gotland)에만 남아 있게 되었다.[16]참고로 훈족의 침공 당시 크림 반도에도 고트족이 거주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크림 고트어 참조. 이들은 이후 훈족, 아바르족, 동로마 제국, 제노바인, 몽골인들에게 지배받았지만 19세기까지 근근히 살아남았다. 역사상으로 중요하지도 않고 빌빌대고 복종하면서 살아 왔지만, 다른 민족들보다 오래 남은 셈. 하지만 19세기에 이곳을 장악한 러시아의 동화정책으로 소멸해 버렸다.

여담으로 스웨덴에서 한때 고트족 열풍이 불어서 '스웨덴은 고트족의 종주권이 있고 고트족의 권리를 이어 전 유럽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환빠질을 해댄 흑역사가 있다.(…)[17] 스웨덴 왕의 정식 명칭은 '스웨덴인, 고트인, 반달인의 왕'이었지만 1973년 칼 16세 구스타프가 즉위하면서 '스웨덴의 왕'이란 명칭만 쓰게 되었다.

4 관련 항목

  1. 양식은 투박할지 몰라도 그 안에 든 건설 수준은 로마의 건설 유산을 이어받고 발전하게 한 것이며 고딕이라 업신여겼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는 르네상스가 지나갈 때까지 이런 건축술을 얻지 못한 채 로마네스크 양식만 고수했다.
  2.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레오 1세는 게이세리쿠스를 만나 도시 파괴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고 반달족은 이 약속을 지켰다고 알려져 있다. 후대 역사가들은 반달족이 무자비한 파괴 행위를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두산백과), 반달족이 들었다면 무척 억울했을 법하다. 사실 그들은 로마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잘 받아들였기에 문화재를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를 파괴하지 말라’는 로마 교황의 당부에도 순응했다. 후대 역사가들 역시 반달족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한경 경제용어사전)
  3. 스웨덴 제2의 도시인 예테보리(Göteborg)도 고트족의 명칭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예테보리의 영어식 이름은 고센버그(Gothenburg)다.
  4. 기트족(영문위키) 기트족은 영어식 표현으로 베오울프를 비롯한 고대 영문학에서 종종 언급되었다. 스웨덴 본토에서는 예타르(Götar)라고 부른다.
  5. 民族大移動은 4세기에서 6세기까지 게르만 諸 민족이 서유럽으로 대규모 이동해 정착한 일. 훈 족의 침입으로 쫓겨난 서고트 족이 로마 영내로 침입한 후 여러 민족이 잇따라 각지로 이동해, 중앙집권성 고대국가가 성립하기까지의 과도기성 국가 형태인, 원시사회에서 부족을 중심으로 세운 국가 중에 프랑크 왕국이 큰 세력을 형성해 중세 유럽 세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됐다. 유의어 게르만민족대이동.
  6. 기원후 3세기경 아우렐리아누스 사망 이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즉위 직전까지의 시기를 운위. 내전이 빈발하고 북방 게르만족의 침공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결로 여러 황제가 전사하고 최초로 부획되는 황제까지 나오던 시기를 지칭한다. 제국이 3분 된 적도 있다.
  7.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동방 황제 발렌스와 동로마 중위 · 고위 장군진, 그리고 주력 야전군의 3분의 2가 한 방에 날라갔다.
  8. 同化政策은 식민지를 경영하는 국가가 식민지 원주민의 고유한 언어, 문화, 생활 양식 따위를 없애고 자국의 것을 강요해 동화하게 하려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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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띄어쓰기를 달리하면 이렇게 된다. TE/TE RO/RO MA/MA NU/NU DA/DA TE/TE LA/LA TETE → TE TERO ROMA MANU NUDA. DATE TELA, LATETE ! : 난 그대를 파괴하겠다, 로마, 내 맨손들로, 무기갑옷들을 내주고 너 자신을 알아서 숨겨라 (영역 I will destroy you, Rome, with my bare hands, give arms and hide yourself!")All your base are belong to us??
  11. 현대 프랑스의 아키텐 지방으로 보르도와 그 일대이다.
  12. 이것을 계기로 프랑크는 갈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프랑스는 여기에 기초하고 클로비스는 실질에 부합한 프랑스 건국 시조 반열에 올라선다.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의 등장인 클로비스 라 브리타니아도 그 이름의 유래는 이 인에서.
  13. 고트족이란 정체성은 사라졌지만 스페인 내 여러 왕국의 전신이 되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서고트 왕국 출신 장군에 의해 건국되며 고트족이 남긴 기록 유산들(건물 같은 문화유산은 이슬람에 점령되면서 철저히 파괴된다)은 현 스페인 왕국의 토대를 이루었다. 아래 언급한 스웨덴과 스페인 사이에 서로 자기가 원조라고 싸우게 된 기반이 되었다.
  14. 그러나 동로마 특유의 아들이 아버지의 병역을 잇는 군제 특성상, 후임 부대원은 선임 부대원의 아들이거나 조카 혹은 사위인 경우가 많았고, 해서 옵티마테스 부대에 옛 동고트족 군인의 피가 상당히 짙게 흘렀을 개연성은 대단히 높다.
  15. 앵글로 색슨의 서사시 베오울프엔 6세기에서 7세기에 기트족과 스베아족 사이에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 다른 스칸디나비아 사가에는 이를 다룬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특이할 만하다.
  16. 고틀란트섬에서 씌었던 Gutnish란 언어가 고대 고트어의 후손으로서 남아 있지만 현재는 화자 500명 미만의 사어이다. 고대 노르드어의 특성이 잘 남아 있다. 본토의 기트족은 스베아, 데인인과 같은 동노르드어계열 언어를 썼다.
  17. 당연히 유럽 제국은 이에 대해 가뿐히 논파하면서 무시 중이다. 고트족의 명성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1434년 바젤 공의회에서 고트족의 역사상 종주권을 두고 스웨덴 대표와 스페인 대표가 언쟁을 했었는데, 스페인 측은 고향이랍시고 구석 촌에 쳐박혀 개화하지 않고 빌빌거린 야만인들보단 영웅다운 무용담이 전해 내려오는 서고트족의 후예인 스페인이 진정한 고트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스웨덴 대사의 말을 막았다...
  18. 전승에 따르면 스베아 족과 기트족의 혼혈로 기트족으로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