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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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

고대 로마의 쇠퇴기당시 몰락에 직,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정체불명의 유목민들.


가장 많이 알려진 훈족의 최고 강성기 시절 활동영역( 유목민에게는 정주민과 같은 영토의 개념이 없고 훈족이 국가로 정착한것도 아니므로 대충 활동범위라 보는 것이 맞다)

1 훈족은 누구인가

2편을 보고싶다면 여기로

문맹이었던 훈족 자신들이 기록을 남기지 못해 로마인들의 기록에 의존해야 하는데다가 훈족들이 세운 유적이라든지 문화적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어느 종족인지 파악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다. 후대에 알려진 훈족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게르만어인데, 이것은 훈족이 빠르게 게르만식 이름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아틸라의 궁정에서도 고트어가 통용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훈족의 기원을 언어를 통해 추정하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깝다.

한동안 훈족을 흉노와 동일시하는 설이 있었고 대중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 또한 확실한 근거는 없는 상태다. 이 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리된 흉노 중에서 중국으로 복속되기를 거부한 북흉노가 남흉노-한 세력에게 밀려 일부 세력이 서쪽으로 도망쳤다는 것이 중국 측 기록에 남아 있는데, 이들이 유럽에 나타난 훈족이라는 주장.

흉노=훈족설의 약점은 다음과 같다.

  • 북흉노가 중국 사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시기(기원후 93년)와, 훈족이 로마 사료에서 최초로 언급된 시기(기원후 370년) 사이의 차가 너무 크다. 유라시아 대초원이 광활하긴 하지만 횡단에 있어서 그것도 유목민이 300년이 걸리진 않는다.
  • 유럽에 나타난 훈족은 흉노족과 문화적 차이가 많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하나의 선우가 있었던 흉노와는 달리 훈족에는 서열이 나뉘는 왕이 여럿 존재했고, 머리를 묶었던 흉노와 달리 훈족은 머리를 묶지 않았다.

흉노=훈족 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흉노는 튀르크계 언어를 썼으며, 훈족 또한 튀르크계 언어를 썼다(어족의 일치는 곧 같은 계통의 민족임을 뜻한다). 유럽 사서에 남아있는 훈의 왕족의 이름은 튀르크 계통의 언어(아틸라 등), 아랍 지역에 남아있는 훈족 추장의 이름 또한 튀르크 계통의 언어(카프간 등)이며, 흉노(=흉)와 훈(=후니)은 튀르크계 언어상 같은 단어일 가능성이 높다.
  • 흉노와 훈은 중국과 유럽의 기록에서 동일한 민족으로 교차검증이 되는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 표시된 훈족의 거주 지역과 중국의 위서를 비롯한 역사서에서 언급하는 흉노의 출현 지역이 상당부분 일치한다.[1]
  • 흉노와 훈족이 남긴 동복(=구리 솥)의 유물 분포를 보면 시대적으로 화북 -> 몽고 -> 중앙아시아 -> 유럽의 순서로 이어진다.
구리 솥 양식의 일치는 곧 흉노와 훈족이 같은 양식으로 음식을 지어먹을 만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되며, 시대적으로도 흉노에서 훈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훈족이 흉노의 유민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위의 근거들은 말 그대로 추론에 불과할뿐 단 하나도 결정적인 근거가 없는데,

  • 어족이 일치하고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는 말이 곧 같은 민족임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실제 역사에선 같은 계통의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 민족의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훈족의 거주지역과 흉노의 거주지역이 일치한다고 해서 둘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는건 어불성설이다. 그 일대에서 활동했던 유목민이 한둘도 아니고, 한족과 흉노의 출현,활동지역이 일치한다고 같은 민족이면 역사에 존재했던 오만가지 유목민족 대부분이 다 같은 민족이란 소리다. 당장 몽골고원에서 발흥하고 활동하나 수많은 유목민족들도 다 따로 분류하는 판국에...
  • 훈족과 흉노랑만 유물과 풍습이 비슷한게 아니다. 몽골고원에서 우크라이나 평원까지 활동했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정말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이는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중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던 유목민들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지 훈과 흉노의 민족적 공통점을 말해주는게 아니다.

일부 유물의 유사성 때문에 흉노와 훈족 사이에 어느 정도는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긴 하나, 반대로 흉노와 훈족 사이의 차이에 대한 증거도 많다. 일부는 훈족의 선조가 흉노의 주류 세력은 아니고, 흉노 집단에 속해 있었던 소집단일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이는 흉노 항목에서도 서술되었듯이 사실 흉노가 중국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동질적인 단일 민족의 집단은 아니었기 때문.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훈족의 기원에 대해 현재로선 그들이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유럽으로 왔다는 것 외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훈족이 100% 튀르크계통 유목민일 것 또한 이 확실하지 않고 주로 대표적인 튀르크계 국가인 터키와 투르크메니스탄이나 아제르바이잔에서 주장하고있다.

일부 국가들 중 민족주의 선전 차원에서 본인들이 훈족의 후손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나 어느 나라도 제대로 된 학술적 근거는 없다.

1.1 아틸라 이전

4세기 중반 유라시아 대초원 서부에 나타나 흑해 북안의 게르만족들을 격파하고 복속 시킨 것이 훈족의 첫 등장이다. 이 당시 로마측은 국경 저 멀리에서 야만족들끼리 치고 받는다는 정도로만 사태를 파악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는데, 훈족을 피해 서쪽으로, 남쪽으로 도망친 고트족이 도나우 국경에 나타나며 로마에서도 난리가 난다. 고트족과 로마 사이의 사건에 대해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항목 참조.

4세기에만 해도 훈족이 로마에 미친 영향은 간접적인 것이었다. 4세기 말까지도 훈족의 주력 집단은 카프카스 이북 지역에 남아 있었고, 이들의 무자비한 약탈에 시달리던 게르만족이 로마 국경에 침투하는 것이 로마 입장에서는 더 큰 문제였다. 스틸리코의 부상과 실각, 라다가이수스의 이탈리아 침공,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 히스파니아에서의 로마 지배권 붕괴->재확립->붕괴, 아프리카의 상실 같은 스펙타클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훈족이 로마 세계에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훈족은 로마와 동맹 관계를 맺고 게르만족이나 로마 반역자를 상대로 로마와 합동 전선을 펼친 경우도 있었다. 예외적인 사례로 408년에는 그간 로마의 동맹으로 행동해오던 훈족 왕 울딘이 동맹을 깨고 도나우 강을 건너 침략해온 일이 있었는데, 이후로도 동로마의 비장의 수단으로 자주 활약하는 매수 전략에 울딘의 부하 상당수가 그를 배신하여 제압되었다. 서로마 말기의 실권자 아이티우스는 훈족과의 친분을 십분 이용해 결정적인 순간에 훈족의 지원군을 활용하곤 하였다.

1.2 신의 채찍

훈족과 로마 사이의 의외로 원만하던 관계는 아틸라의 시대에 끝장났다. 당시 훈족은 몇 세대에 걸쳐 조금씩 서진, 로마 국경 바로 건너편까지 진출해 있었다. 형 블레다와 함께 훈족을 통치했던 아틸라는 즉위 초기에는 근방의 게르만족을 공격하는데 집중했으나, 게르만족에 대한 정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때마침 동로마가 서로마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자 그 기회를 활용, 440년 말 동로마를 침공했다. 동로마 역시 훈족의 준동을 틀어막기 위해 연공을 두배로 올리는 조건을 제시한 상태였으나,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이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얼마 안있어 사소한 트집을 잡아 협정을 깨버린다. 이 당시 동로마가 아프리카 수복 작전을 위해 서로마에 보낸 병력은 상당 부분 발칸 야전군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동로마는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이는 동로마 입장에서도 상당한 타격이었지만, 서로마는 부유한 아프리카 속주를 반달족에게서 탈환할 절호의 기회에 동로마의 지원군이 철군해버렸기에 더욱 뼈아픈 일이었다.

아틸라는 442년까지 발칸 북부의 주요 군사거점들을 여럿 함락했다. 이전 세기 말에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패배를 당한 뒤에도, 요새화된 거점들은 고트족이 공성전을 할 능력이 없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으나,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고트족과는 다르게 공성전에도 능숙했다. 동로마 정부는 442년에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조약은 연공으로 황금 1,400 파운드를 지급하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틸라가 처음에 씹어버린 연공 조건이 700 파운드였으며, 이것이 그 전해의 350 파운드를 두배로 늘린 조건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3년만에 연공이 네배로 늘어난 것이다. 또한 로마는 훈족 사이의 내분에서 패배하여 로마로 망명해있던 망명자들을 훈족에 인도하기도 했다.

물론 로마가 아틸라에게 계속 굽히고 있을 계획은 아니었다. 동로마는 시칠리아까지 진출해 있던 아프리카 원정군이 복귀한 직후인 443년 즈음부터 훈족에 대한 연공 지급을 중단해버린다. 때마침 444년 혹은 445년에 아틸라가 형이자 공동지배자인 블레다가 사망하고[2] 단독 통치자 자리에 오르며 훈족 내부의 정치 상황이 어수선해졌고, 이 시기에 동로마는 반격을 준비했다. 447년 동로마와 아틸라의 훈족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아틸라는 이 전쟁에서 압승을 거뒀고, 그리스 남부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발칸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 이 시기에 로마령 발칸 반도가 입은 타격은 참혹한 수준으로, 유적 발굴 사례를 보면 고트 전쟁에서 회복했던 도시가 아틸라 전쟁 시기에 완전히 파괴된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궁지에 몰린 동로마는 이전까지 지급을 거부한 연공을 포함해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동로마는 449년에 아틸라의 측근을 매수해 아틸라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돈을 먹은 아틸라의 측근이 곧바로 아틸라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치며 계획이 들통났다. 아틸라는 영악하게도 로마가 암살자들에게 지급하려고 보낸 금을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내며, 황제 접견실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째서 명예로운 가문의 후계자가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가?'라고 조롱했다.

동로마로부터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뜯어낸 아틸라는 공격의 방향을 서로마로 돌린다. 아틸라의 서로마 원정에 대해 역사가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첫번째는 본인을 세계의 정복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틸라의 정복욕, 두번째는 서로마 황제의 누이가 보낸 청혼(이 여자가 딱히 정치적인 수를 쓴게 아니라 그냥 막 질러본 미친 짓에 가깝다는게 중론이다), 세번째는 당시 훈족 사회의 특징이다. 아틸라의 행동과, 아틸라 사후 훈족이 겪은 붕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훈족 사회의 특징을 알 필요가 있다. 훈족은 숫적으로 압도적인 게르만족을 예속민으로 부리고 있었는데, 훈족 체제의 한계 때문에 이들 게르만족은 훈족에게 동화되거나 정교한 행정력 하에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한채로 불안한 공존을 하는 상태였다. 이들 게르만족을 상대로 훈족의 지배력이 유지되려면 군사적 위용을 보이면서 동시에 게르만족 귀족층에 정복의 성과를 분배하는 채찍과 당근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도나우 유역의 무덤을 발굴해보면 훈족 귀족층과 훈족에 예속된 게르만족 최상층의 귀족에서 대량의 부장품이 나오곤 하는데, 이것은 대부분 당시 로마에게 삥 뜯거나 약탈해온 금으로, 훈족이 전쟁으로 얻은 부를 (상당히 불균등하게나마) 재분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당시의 아틸라는 몇 년간 동로마를 털어먹으면서 발칸을 초토화시킨 결과 더 이상 약탈을 하기에도 마땅찮았고, 더 궁지에 몰린 동로마가 사생결단으로 나올시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로마가 비록 아틸라와 벌인 두 차례 전쟁에서 참패하긴 했으나, 동로마의 주력군은 언제나 페르시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음을 동로마측도, 아틸라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털어먹을 수 있는 게르만족은 거의 다 털어먹고 예속 시켰으며, 아틸라 역시 즉위 초기에는 여러 게르만 부족을 공격한 바 있었다. 즉 아틸라는 본인의 권력 유지와 훈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야 했던 상황에서, 서로마를 제외하면 더 이상 공격할 대상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을 인용하자면, 아틸라의 훈족은 '패배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전쟁기계'였다.

하지만 갈리아를 침공한 훈족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군에게 저지 당하고, 이듬해 개시한 이탈리아 침공은 야전에서는 패배하지 않았으나 보급난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교황의 중재[3]를 받아들여 철수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아틸라는 새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식의 첫날밤에 의문사하는데, 사망 원인은 암살, 복상사, 과음 등등 참으로 다양한 설들이 제시된다.

1.3 붕괴

비록 두 번의 서로마 원정에서 실패했다곤 해도, 아틸라는 뛰어난 장악력과 군사적 능력을 갖춘, 불안한 구조의 훈족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후 세 아들이 왕위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는데, 이 틈을 타 게피다이족이 훈족에게 반기를 들었다. 처절한 전투 끝에 게피다이족은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다른 게르만 부족들도 반란을 일으키며 훈족의 게르만 지배는 상당부분 붕괴된다. 훈족 지배 하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한 정도에 따라 독자세력화에 걸린 시간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로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킨 게피다이족은 세력을 결집한데 걸린 시간으로 보아 훈족 통치하에서도 나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오도아케르의 출신 부족으로 유명한 스키리족의 경우 독립 과정에서 내세운 왕이 스키리족 혈통조차 아니었던 것으로 보아 아틸라 사후의 혼란기에 내부를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헝가리 지역의 상황은 훈족 잔당과 아직까지 독립하지 못한 게르만족 + 독립한 여러 게르만족이 투쟁을 벌이고, 독립을 얻은, 혹은 시도하는 게르만족 내에서도 대대적인 정치적 격변이 벌어지는 난세 그 자체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자세하게 남지 않아 완벽한 전말은 알 수 없다.

아틸라의 살아남은 두 아들이 이끄는 훈족 잔당은 한동안 여전히 일정 수준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떨어져나간 게르만족들과 치고받고 싸웠지만, 패권을 잡은 동고트족에게 참패한 끝에 동로마 영토로 도망쳤다. 이들은 훈족이 전성기에 동로마와 맺은 조약을 근거로 교역권 등을 요구했으나 동로마는 이를 거부했다. 아틸라의 아들 중 한 명은 끝내 동로마군과 충돌한 끝에 대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하나는 도나우 강변에 정착하여 로마가 제공한 작은 영토에서 조용히 살았다는 것이 마지막 기록으로, 아틸라의 마지막 살아남은 아들이 이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기록이 전해오는 바가 없다. 이렇게 허망하게 훈족 제국이 멸망한 것이다.

1.4 이후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서의 훈족은 소멸했지만, 민족으로서의 훈족이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서방으로 파견된 동로마군의 일원으로서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받았다

2 니들 훈족이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인들은 독일군을 훈족이라 불렀다. 정작 독일의 민족인 게르만족이 훈족에게 쫓겨서 유럽으로 왔다는 것을 연상하면 묘하다. 1900년에 빌헬름 2세가 의화단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으로 원정나가려던 병사들에게 '아틸라의 훈족처럼 악귀같이 싸워라'라는 연설을 했던 것이 기원으로 보인다. 헬싱에서 월터 쿰 도르네즈라 나치 잔당들을 훈족이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반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인들은 독일 영토까지 반격해온 소련군을 보고 훈족의 재림이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냥 무서우면 훈족 유럽의 암묵의 룰

3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훈족

PC용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 로마의 부흥에서는 로마의 적들 캠페인에서 마지막 시나리오의 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는 훈족 문명이 없었기 때문에 히타이트로 설정되어 나온다... 안습.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에이지 오브 킹의 확장팩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정복자에서 비로소 독자적인 문명으로 나오며 캠페인도 있다. 특이하게도 집을 짓지 않고도 시작부터 인구가 200[4]이어서 집짓는데 나무를 쓰지 않아도 된다. food for thought가 패시브로 깔린 종족이다. 이 편리함 때문에 멀티에서 많은 유저들이 훈족을 고른다. 또한, 중기병 테크도 최종형태인 팔라딘까지 나오고, 혈통 업글도 되어 기병 라인도 상당히 강력하다. 덕분에 밸런스 붕괴

로마: 토탈 워 확장팩 로마: 토탈 워 - 바바리안 인베이젼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는 아틸라와 그 일당들이 주인공을 열심히 쫓아다닌다. 배우의 생김새가 몽골계 같이 생겼다가도 투르크계 같이 생겼다. 말 그대로 동서양을 짬뽕한 얼굴. #

2001년, '정복자 아틸라'라는 제목의 영화(300으로 알려진 제라드 버틀러가 아틸라로 나왔다)도 나왔다.

문명 5의 확장팩 '신과 왕'에서 훈족과 아틸라가 추가되었다.

토탈 워: 아틸라라는 토탈 워 시리즈의 차기작이 발표되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아틸라가 주인공. 훈족 유닛들을 보면 대체로 아시아계, 특히 몽골쪽 인상을 많이 닮았다. 그리고 메인메뉴에서 나오는 음악도 몽골 유목민 특유의 Throat Singing 이다. 다만 아틸라는 영어에는 서툴지만 트레일러를 보면 약간 서양인과 동양인을 합쳐놓은 모습이다. 아무래도 동양과 서양의 기록이 엇갈려서 그냥 적당히 섞어놓은 듯하다.

4 관련 항목

  1. 예로 소그드족(실크로드를 지배하고 장사하던 이란계 민족)이 북위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는 "영가의 난(흉노족장 유연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훈족이 낙양을 함락하고 소그드족 상인들을 붙잡았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2. 의문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아틸라가 살해한 거 아니냐는 게 정설이다.
  3. 일설중에는 교황이 아틸라를 예수의 이름으로 베드로와 바울의 응원을 받아 꾸짖었고 아틸라가 이에 반성을 하며 물러갔다. 라는 이야기 와 함께 그걸 묘사한 미술작품도 있다.
  4. 시나리오 편집기나 대기방에서의 인구 최대치 설정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보다 적거나 많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