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l Orff
1895년 7월 10일 - 1982년 3월 29일
20세기 독일의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가 뮌헨의 군인가정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부터 피아노를 비롯해 오르간 첼로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작곡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10살때는 어린이 잡지에 자연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기도 했고 피아노, 바이올린이 포함된 인형극을 가족들을 위해 작곡하기 까지 했다고 한다. 남는 시간은 곤충수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청소년이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작곡에 뛰어들었는데 체계적인 화음법, 작곡법을 공부하지않고 교사의 도움없이 오직 어머니의 도움으로 작곡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때 그에게 영향을 준 작곡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니체의 철학소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성악곡으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뮌헨음악학교(현 뮌헨 국립음악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중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대에 징집된 오르프는 전선에서 여러번 부상을 입었고 한번은 사망직전까지 간적도 있었다고 한다. 제대 후 뮌헨에 돌아와서는 다시 본업인 음악에 열중했다.
문제는 2차대전 시기. 오르프의 스타일은 나치 치하 독일에 딱 맞았고, 카를 오르프는 나치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열성적인 지지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음악가로서 활동을 하면서 살았다. 예를 들어서 카를 오르프는 백장미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이걸 밀고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참여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오르프의 문제는 나치 독일이 그의 음악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선전에 이용하였고, 그 결과 오르프 자신도 큰 이득을 보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오르프에게는 나치 부역 문제가 끈질기게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르프도 자신이 나치전범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반나치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대표적인 위에 언급한 백장미의 창설멤버라고 주장한 것이데, 이는 모든 자료 들에 있어서 부인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2차대전 이후인 1954년에 결혼한 부인이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생의 한가운데'를 쓴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인데, 루이제 린저 역시 사소한 수준의 나치 부역 흔적과 함께 자신 반 나치주의자였다는 상당한 거짓증언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 잘 알려진 작품은 카르미나 부라나[1]로, 이 역시 나치 시기에 쓰여진 곡이다. 2015년에는 이걸 이스라엘, 그것도 마사다 요새 근처에서 열린 페스티벌에다 대놓고 상연했는데 당연히 논란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