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슈투덴트

Bundesarchiv_Bild_146-1979-128-26%2C_Bernhard-Hermann_Ramcke%2C_Kurt_Student_crop.jpg
Kurt Student 1890.5.12 ~ 1978.7.1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독일군의 장성. 전쟁 내내 공수부대의 신화적인 존재인 독일 제7공수사단, 공수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2 생애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브란덴부르크 주의 비르크홀츠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소위로 임관하여 처음에는 육군 소속이었지만 비행 훈련을 받고 공군으로 군적을 옮기게 된다. 1차대전 초기에는 동부전선에서 활동하다가 중반 이후로는 서부전선에서 활동하였으며, 전간기에는 독일의 공군 보유를 금지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다시 육군으로 군적을 옮겨 자원개발부서에서 근무하는 한편 명목상으로는 민간인들의 모임이었던 글라이더 협회에서 활동한다. 또한 라팔로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이 소련과 군사교류를 진행함에 따라 슈투덴트 역시 소련의 적군과 교류를 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공수부대라는 개념을 맞닥뜨리게 된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조역의 파기를 선언함에 따라 루프트바페는 재건되었고, 슈투덴트 역시 공군에 복귀하게 된다. 한동안 비행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독일 공군의 재건에 힘쓰던 슈투덴트 장군은 독일이 전쟁 준비를 하면서 헤르만 괴링이 설립한 '괴링 장군 연대'가 독일 국방군으로 흡수되고 육군 공수부대가 공군에 통합되면서 조직된 제7공수사단의 지휘를 맡게된다.

당시 독일군 안에서는 공수부대를 대규모로 투입해서 일반 보병작전을 구사해야한다는 육군의 주장과 이들을 소규모 특공대로 운용해서 후방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구사해야한다는 공군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는데, 슈투덴트는 공군 측 인물이면서도 육군의 입장에 찬성했기 때문에 육군의 지지를 받았다. 독일군 장성으로는 드물게 나치당과 부하들의 신뢰를 골고루 받았던 인물이라는 점도 독특했다. 칼 되니츠 제독 정도가 이럴까... 이후 그가 이끄는 7공수사단은 프랑스 침공을 비롯해 전쟁기간 내내 놀라운 활약상을 펼쳤으며, 전후에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1]한 뒤에 출옥, 1976년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작고했다.
  1. 포로 학살등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징역 5년이면 거의 껀덕지가 없던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