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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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범 재판을 풍자한 그림 - "Mein Name ist Hase(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 의사 재판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


▲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발두어 폰 시라흐,[1] 프리츠 자우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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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Nuremberg Trials
독일어: Die Nürnberger Prozesse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1948년 독일뉘른베르크에서 옛 나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거행된 재판.

1945년 8월 8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사이에는 유럽의 추축국(樞軸國) 핵심 범죄자의 소추 및 처벌을 위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에 의거하여 전쟁범죄자를 재판할 수 있는 국제군사법원이 설치되었다. 당시 피고들은 침략 전쟁 등의 공모와 참가, 계획, 실행과 전쟁 범죄, 비인도적 범죄(유대인 학살) 등의 이유로 총 24명이 기소되었다.

1945년 11월에 시작되어 403회에 걸쳐 진행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전쟁의 공동모의,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 등의 항목으로 공군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3], 외무장관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등 12명에게 사형이 언도되었고, 부총통 루돌프 헤스 등 3명에게 종신금고형이, 그 외의 알베르트 슈페어, 칼 되니츠 등 기타 전범자들에게는 20년 금고, 15년 금고, 10년 금고형이 언도되었다. 그리고 3명인 한스 프리체와 프란츠 폰 파펜, 얄마르 샤흐트는 무죄로 풀려났으며, 기소된 전범 중 사형선고된 마르틴 보어만은 궐석재판으로 기소됐으며, 로베르트 라이는 공판 전에 자살했고,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은 질병 사유로 출석이 연기되어 얼마 후 으로 사망했다.

판결 측은 승전국에서 각각 뽑혀 왔고, 뉘른베르크 주요 전범 재판은 미국영국, 소비에트 연방, 프랑스에서 각각 수석 판사 1명과 대리 1명, 검사 1명씩으로 법정을 구성했기 때문에 4명의 검사가 있었다. 재판장은 영국의 제프리 로런스 경이 선택되었다.

미국: 프란시스 비들(수석 판사)[4], 존 파커(대리 판사)
영국: 제프리 로렌스(수석 판사 겸 재판장), 노먼 버켓(대리 판사)
소련: 이오나 니키첸코 소장(수석 판사), 알렉산드르 볼코프 중령(대리 판사)
프랑스: 앙리 돈디유 드 바브르(수석 판사), 로베르 팔크(대리 판사)
미국: 로버트 H. 잭슨 검사[5][6]
영국 : 하틀리 쇼크로스 검사
소련 : 로만 루덴코 중장 검사
프랑스 : 오귀스트 샹페티에 드 리베 검사[7]

12명 중 헤르만 괴링과 마르틴 보어만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사형은 10월 16일 실시되었다[8].

그 후 2차 재판은 1946년 12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있었고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실시되었다.

2 논쟁점

당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시 논쟁이 된 부분은 사병 즉, 병사들과 하사관들의 경우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벌해야 할 것인가였다.

또다른 논쟁으로는 죄형법정주의가 문제되었다.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법규가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 범죄를 규정짓고 소급 적용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처칠의 경우 1945년까지 재판은 있을 수 없고, 악질범은 과거의 처리 방식대로 군대에서 총살하자고 의견을 제시. 소련 측의 한 인사는 고위직 정치인과 범죄 행위가 확실한 자들만을 추려 약 5만명 정도 주요 범죄자들을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총살하자고 의견 개진. 그러나 미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끝까지 관철하였다.[9] 이후 국제법을 공부한다면 한번쯤은 볼 만한 판례. 이와 같은 기본적 입장은 도쿄 재판에서도 관철되었다. 단,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통역으로 일했던 조선인들이 독일의 부총통 헤스에게 내려진 것과 같은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10]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법체계인 영미법과 소련과 프랑스의 법체계인 대륙법의 법철학이 다르다는 점도 문제였다. 가령, 영미법에서는 범죄 의도만 있어도 처벌할 수 있는데 반해, 대륙법에서는 의도만 가지고는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11] 전범재판에서도 이런 법철학적인 마찰이 상당히 있었다.

여기에 마이너한 문제지만 엄청난 통역량도 문제였다. 피고는 독일인, 재판부는 연합국 4개국 다행히 영국과 미국은 같은 영어를 쓴다에서 파견되었으므로, 통역의 경우의 수는 6가지나 되었다. (영-독, 영-프, 영-소, 독-프,독-소, 프-소)

훗날 이 재판 과정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제목은 <뉘른베르크에서의 재판> 영화에선 괴링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사실상 주인공이라 봐도 될정도. 독빠 기질을 가진 자신의 전담 장교[12]인 미 육군 소위[13]를 꼬드겨 청산가리를 밀반입해 자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잉여돼지 김괴링 이라고는 전혀 생각할수 없는 캐릭터로 나온다.

3 24명의 전범들

범례
죄명
I: 반평화적 범죄(Crime against peace)를 위한 공모죄
II: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
III: 전쟁법 위반
IV: 반인륜적 범죄
판결
I: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
O: 이 죄목으로 기소당하지 않음
G: 유죄 판결

전범 이름역할IIIIIIIV판결
마르틴 보어만[14]나치당 비서실장IOGG사형
칼 되니츠해군총사령관 겸 제3제국 2대 대통령(1945.4.30부터)[15]IGGO10년형
한스 프랑크[16][17]폴란드 총독IOGG사형
빌헬름 프리크전(前)내무부 장관[18], 체코 총독. 뉘른베르크 인종 법 작성 참여.IGGG사형
한스 프리체[19][20]선전부 라디오 방송부장IIIO무죄
발터 풍크경제부 장관, 국가은행 총재IGGG종신형, 그러나 57년 석방.
헤르만 괴링공군총사령관, 4개년 경제계획청장, 항공부 장관, 산림청장GGGG사형, 그러나 그 전날 청산가리 자살.
루돌프 헤스[21]부총통GGII종신형
알프레트 요들[22]국방군 작전부장GGGG사형
에른스트 칼텐브루너[23]국가중앙보안본부 대장.[24] 무장친위대 및 경찰대장.[25]IOGG사형
빌헬름 카이텔국방군 총사령관GGGG사형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크루프사의 최고경영자OIII---[26]
로베르트 라이나치당 조직부장, 노동전선 지도자IIII재판 전 자살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전(前)외무부 장관.[27], 전(前)체코 총독.[28]GGGG15년형, 54년 석방
프란츠 폰 파펜전(前)수상(총리), 전(前)부수상(부총리), 오스트리아 대사, 터키 대사IIOO무죄
에리히 레더전(前)해군총사령관.[29]GGGO종신형. 55년 석방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외무부 장관GGGG사형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나치당 교육부장, 나치당 외교정책부장, 동유럽 점령지 관리 장관GGGG사형
프리츠 자우켈외국인 노동고용 전권 총감IIGG사형[30]
얄마르 샤흐트[31][32]전(前)경제부 장관, 전(前)국가은행 총재.[33]IIOO무죄
발두어 폰 시라흐[34]전(前)히틀러 유겐트 단장IOOG20년형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35]오스트리아 수상(총리), 네덜란드 총독[36]IGGG사형
알베르트 슈페어군수&탄약부 장관IIGG20년형[37]
율리우스 슈트라이허[38][39]나치당 고위 간부, 대중잡지 돌격병(Der Stürmer)의 사장IOOG사형

소련 재판부 측은 기소된 모든 전범에게 유죄를 선고하려고 하였지만, 영국, 미국, 프랑스 측의 반대에 부딪혀 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루돌프 헤스도 사형시키길 바랬지만 결국엔 무기징역에 만족해야 되었다. 결국엔 소련 측에서 반대의견을 따로 펴내는 것으로 끝냈다. 한스 프리체 같은 경우엔 다른 전범들 조차도 "쟤 누구임?" 할 정도로 영향력이 미미했고, 얄마르 샤흐트 박사 같은 경우엔 히틀러 반대했다가 수용소까지 들어갔던 인물이다. 이 쯤되면 나치가 그냥 싫어서 다 감옥에 넣고 싶다는 것으로 보인다 (...).[40]

4 형 집행

재판 당시 행방불명 상태라 궐석 선고받은 마르틴 보르만을 제외한 11명의 사형수들은 1946년 10월 16일 새벽에 뉘른베르크 교도소의 체육관에 급조한 교수대 두 군데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군인 신분이었던 괴링과 카이텔의 경우 총살형으로 집행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이 청을 기각했다. 그리고 사형수들 중 괴링은 집행 직전에 밀반입한 시안화칼륨 캡슐을 깨물고 자살한 채로 발견되어 실제 사형이 집행된 이들은 10명으로 줄었다.

사형 집행은 미 육군 교수형 담당관이었던 헌병상사 존 C. 우즈가 헌병 병사 조셉 몰타의 보조를 받으며 행했고, 증인들로 미군소련군, 영국군, 프랑스군 관계자들과 군종장교, 군의관, 취재 허락을 받은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의 기자 킹스버리 스미스 등이 입회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사형은 1시 11분부터 2시 57분까지 약 1시간 40분 동안 집행되었고, 리벤트로프를 시작으로 카이텔, 칼텐브루너, 로젠베르크, 프랑크, 프리크, 슈트라이허, 자우켈, 요들, 자이스-잉크바르트 순으로 집행되었다. 하지만 공식 보도에 의하면 그 전까지 347명에 달하는 전범과 군 사형수들을 처형한 경험이 있다는 우즈 상사는 무슨 일인지 밧줄 길이를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밧줄 매듭을 지어놓았는데, 이 때문에 많은 피형자들이 경추 골절로 즉사하지 못하고 10~30분 동안 호흡 곤란으로 고통스럽게 질식사했다. 이거 고의 아닐까. 게다가 사형수들이 떨어지는 발판도 너무 작게 만들어지는 바람에, 카이텔과 프리크의 경우 떨어지면서 머리가 교수대 바닥에 심하게 부딪히는 바람에 피까지 흘리며 죽었다.

사형수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유언을 남겼는데[41] 한스 프랑크처럼 용서를 빌면서 반성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잘못 자체에 대한 반성은 않고 단지 회한만을 남긴 이들[42]이 대다수라고 하며,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처럼 죽는 순간까지 반성하지 않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유대인 학살을 합리화하던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우켈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은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겼다.[43]

자살한 괴링을 비롯한 사형수들의 시신은 검시 후 연합군 검찰 관계자들에 의해 사진 촬영된 뒤 입관되었고, 군용 트럭에 실려 비밀리에 뮌헨의 한 화장터로 보내져 가명으로 일괄 화장되었다. 화장하고 남은 재는 묘지에 안장하지 않고 이자르 강의 어느 지류에 뿌려서 사후 준동할 지도 모르는 극우파들의 우상화를 막도록 했다.

사형이 아닌 금고형을 선고받은 풍크(종신형), 헤스(종신형), 레더(종신형), 시라흐(20년형), 슈페어(20년형), 노이라트(15년형), 되니츠(10년형)는 뉘른베르크 교도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1947년 7월 18일에 서베를린 영국군 관할 지구에 있던 슈판다우 교도소로 이감되어 나머지 형을 살게 되었다. 이들 중 풍크와 레더, 노이라트는 건강 악화 등의 이유로 1954~57년 사이에 가석방되었고 몇년 후 모두 사망했으며, 시라흐와 슈페어, 되니츠는 형기를 채운 뒤 석방되었다. 이후 유일한 수감자로 건강에 별 문제가 없어 감옥에 갇혀 있던 헤스는 90대까지 장수하다가[44] 1987년 8월 17일에 목을 매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헤스의 유족들은 헤스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부검 결과도 자살로 나왔다. 헤스가 자살한 뒤 슈판다우 교도소도 사형수들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네오 나치의 우상화를 막기 위해 철거되었고, 잔해는 깔끔히 부수어져 북해에 뿌려지거나 영국군 관할 비행장이었던 가토 비행장에서 폐기 처분되었다.

5 기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소련군에 투항한 덕에 이 재판에서 전범이 아니라 증인의 자격으로 증언을 했다. 만일 투항하지 않았다면 전범이 되어 최소한 몇 년은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45]

히틀러의 경우 본래 살아 있었을 가능성을 근거로 기소 대상자 명단에 있었으나 얼마 후 소련측에서 사망을 공식 발표하면서 제외되었다. 살아서 재판을 받았어도 사형수가 12명에서 13명으로 늘어나는 정도였겠지만.

지금도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서 뒷이야기의 말이 많아서 1949년, 감옥에 수감된 나치는 3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부 유대인들은 복수를 위해 비밀결사대 나캄 (담 예후디 나캄 Dam Yehudi Nakam : 유대인의 피에 대한 복수라는 뜻이다.)을 만들기도 했다.#

나치가 행한 인체실험에 대한 충격적 진실이 밝혀지고, 과학과 의학의 이름을 참칭해 벌어진 참혹한 학살에 대한 과학계 전반의 반성으로 의료실험 연구윤리에 대해 규정한 뉘른베르크 강령이 발표되었다. 이후 국제적으로 과학자 연구윤리의 대한 스탠다드가 되었다.

또한 자국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그것이 반인륜 범죄에 해당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그 죄를 벌할 수 있다는 판례가 만들어진 것도 이 때의 일이다. T-4 프로그램에 가담한 전쟁 범죄자들이 살해한 자들의 대다수는 독일 자국민이었지만, 연합국은 그 역시 전쟁 범죄의 일환이라 판단하여 똑같이 죄를 물었다.

6 매체

두 차례 영화화 되었는데 1961년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이 만든 뉘른베르크의 재판과 2000년 이베스 시몬누 감독이 만든 뉘른베르크가 있다. 후자의 경우 알렉 볼드윈브라이언 콕스가 주연을 맡아 각각 로버트 잭슨 수석검사와 헤르만 괴링을 맡았다.

7 관련 항목

  1. 그 유명한 히틀러 유겐트의 총책임자. 재판에서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이 남자가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믿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2. 제3제국의 외국인 노동력 징발 총책임자. 자신이 노동력 동원을 주도한 점은 인정했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당한 가혹 행위나 부당한 처우, 살해 등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3. 여담으로 《뉘른베르크》의 괴링 역 배우는 브라이언 콕스. 제이슨 본 영화 시리즈《본 아이덴티티》에서 주인공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자살하는 CIA 고위간부 워드 애봇으로 나오는 그 사람이다.
  4. 1941년에서 1945년 간 58대 미 법무장관에 재직하였다.
  5. 2000년작 영화《뉘른베르크》에서 알렉 볼드윈이 잭슨 검사로 출연했다. 이 배우는 《진주만》에서 제임스 둘리틀 중령 역, 《붉은 10월》에서 잭 라이언 역으로도 등장한다.
  6. 1940년에서 1941년 간 57대 미 법무장관, 1941년에서 1954년 간 연방 대법관에 재직하였다.
  7. 프랑스 상원의원이었으며, 비시정부 수립에 반대한 80명의 국회의원 중 한 명이다.
  8. 괴링은 형 집행 직전 청산가리로 자살, 마르틴 보어만은 실종 상태에서 궐석 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후일 베를린에서 유해가 발견됨
  9. 에른스트 벤다가 저술한 '새로운 국제법의 기초를 세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원출처, 김명섭 연세대 정외과 교수가 저술한 '대서양 문명사'가 674p에서 재인용
  10. 김명섭 연세대 정외과 교수 저, '대서양 문명사', 675p
  11. 예를 들어 영미에서는 함정수사로 잡은 범인도 처벌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가끔씩 여경이 창녀로 분장하고 호객행위를 해서 걸려든 자들을 성매매범으로 체포하는데, 대륙법체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일.
  12. 전범 1명당 연합군측 위관급 장교 한 명이 붙어 고충 처리 등을 맡았다.
  13. 이들 전담 장교들과 전범들과의 관계는 각양각색이었는데, 전담 전범을 무시하고 험하게 대한 경우도 있고, 괴링의 전담 장교처럼 그의 화술에 넘어가 정중히 예우하고 편의를 봐 준 경우도 있다.
  14. 실종되어 궐석재판으로 진행되었으며-이 때문에 오치아이 노부히코고바야시 모토후미는 그가 살아서 네오나치를 이끌고 있다는 소설/만화를 쓴 적이 있다. 나치독일시절 정보부대에 근무하고, 서독성립후 서독정보기관 수장이 된 갤런은 보어만이 사실 소련의 첩자로서, 소련에서 은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1972년 그의 유골이 발견되어 최종적으로 사망으로 판정. 몰락(역사서와 영화 모두)에서는 1945년 5월 2일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최근에 유골에 묻어있던 흙이 독일의 것이 아니라 다른나라 것으로 감정되어, 남미나 소련 은신설도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15. 히틀러의 지시로 2대 대통령이 되며, 총통직이 히틀러 집권 전처럼 대통령과 수상(총리)직으로 분리됨
  16. 알베르트 슈페어와 더불어서 진솔하게 사죄한 나치 고위관리자 중 한 명이다. 알렉 볼드윈이 주연으로 나온 2000년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는 프랑크의 진솔함에 감명받은 프랑스 재판관이 무죄를 선고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지만 나머지 재판관들에게 묵살당한다. 프랑크의 아들은 아버지는 극렬 나치빠였고, 뉘우치는 건 진심이 아니었을거라는 식의 발언을 해서 논란이 있었다.
  17. 아래의 한스 프리체하고는 형제라는 얘기도 나오는데 아시는 분이 계시면 추가바람.(설령 진짜 형제라도 성이 다른 걸 봐서는 이복형제나 이부형제일것이다.)
  18. 그 후임이 하인리히 힘러.
  19. 종적 직전 자살한 파울 요제프 괴벨스 대신 기소당함. 그런데 괴벨스의 위상이 너무 높았는지 정작 같이 기소당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프리체가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20. 공교롭게도 단지 괴벨스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라디오 해설자로 발탁된 사람이다. 간단히 말하면 목소리 대역이 전범재판에까지 대신 끌려온 셈.
  21. 처음에 4가지 죄목 모두 기소 당했으나 1941년에 영국으로 날아갔던 시점엔 반인륜 전쟁범죄에 대한 범죄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웠다. 결국 재판부는 전쟁 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서는 무죄 판결을 내린다.
  22. 프랑스측 판사는 요들의 사형 판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결국 다른 판사들이 사형을 찬성하는 바람에 묵살되었고 동의할 수 없었던 사형 판결문을 본인이 읽어야 했지만... 이후 독일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으나 연합국 측은 이 판결을 인정하지 않음. 현재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3. 어느 문서에 서명했냐 물어보면 죽어도 안 했다고 일관해서 변호인단은 그를 "Der Mann ohne Unterschrift" (the man without a signature, 즉 서명 없는 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24. 전임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25.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26. 병으로 재판에 불참. 얼마후 사망. 검사팀은 아들을 대신 재판에 앉히려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부가 거부하였다.
  27. 그 후임이 리벤트로프.
  28. 그 후임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서 프리크임.
  29. 그 후임이 되니츠.
  30. 알베르트 슈페어의 죄까지 뒤집어 썼다는 논란도 있다. 그는 사형대에 올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교수대를 바라보며 "난 죄 없이 죽는거요."라고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31. 샤흐트는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재판 증언석에서도 독일어 대신 영어로 응수했고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슈트라이허가 비꼬길 "전쟁에 반대한 유태인의 개이니 이제 훈장만 받으면 완벽하겠군!" 이라며 조롱했다. 그리고 에른스트 칼텐부르너 역시 "전쟁에 반대했으니 연합군 놈들이 황금 백엽검 철십자훈장을 주겠구먼."이라고 역시 조롱했다. 그러자 헤르만 괴링이 박장대소를 했다고.
  32. 그리고 이말은 사실이 되었다. 훗날 서독정부에서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
  33. 그 후임이 풍크.
  34. 알베르트 슈페어, 한스 프랑크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뉘우친 자 중 한 명이다.
  35. 사람같이 생겼지만 절대 사람이 아니다. 반인륜적 범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거물 전범 중 하나이다. 레온 골든손(Leon Goldensohn)의 뉘른베르크 인터뷰에서도 괴링이 반인륜적 범죄에 가장 앞장섰던 전범 중 하나로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
  36. 네덜란드의 도살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가지고 있었다.
  37. 같은 임무를 맡았던 부하 프리츠 자우켈은 사형인데 이쪽은 20년형이라서 사법거래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다만 사형이 마땅할 정도의 반인륜 범죄에 적극 가담한 증거는 없다. 어쨌든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판결 중 하나.
  38. 유태인을 병적으로 증오한다. 오죽하면 변호사들도 이 사람 정신병 있는 거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물론 정신병이 있는지가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유죄판결.
  39. 원래 이 정도면 사형까지 가기는 무리였지만 연합국 측은 그가 나치 이념의 구성 및 선동의 핵심 역할을 했음을 고려하여 사형을 판결했다. 일종의 시범 케이스라는 평가도 있다.
  40. 샤흐트의 경우 애초에 무죄가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전범재판을 걸어 재판이 승자의 철저한 보복 파티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견해가 있으며, 샤흐트 본인도 그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재판관 두명(소련측, 미국측 한명)이 샤흐트에게 유죄를 주장하자 나머지 6명의 재판관들이 "아니 전쟁을 반대한 사람까지 유죄라면 도대체 무죄는 누구냐?"라며 유죄를 주장한 쪽에게에게 반박했다. 심지어 소련측 동료 판사였던 알렉산드르 볼코프 판사가 "이보시오, 동지. 저 사람이 왜 유죄입니까?"라고 어이없어 했다.
  41.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유언이 있냐난 말에 "없다(No)."라고 답하였다.
  42. 리벤도르프는 유언을 묻자 독일이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는 것과 세계 평화라는 말을 남겼으며, 카이텔은 자신은 그저 독일을 위해 먼저 죽은 부하들을 따라간다고만 하였다고 한다.
  43. 근데 자기 상관인 슈페어는 20년형인데 자기는 사형이니 유무죄는 몰라도 양형에 대해선 억울하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44. 다만 수감 생활은 많이 편했다고 한다. 거대한 감옥의 정원 및 시설을 혼자서 이용하면서 지낸 데다 면회를 온 사람도 꽤 많았다고.
  45. 하지만 파울루스는 뚜렷하게 전범혐의를 할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소련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중에서 전범혐의자는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전범 재판을 받았으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전범혐의로 볼만한 행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소되지 않았다. 일단 파울루스는 1942년 봄에 6군 사령관을 맡기 전까지는 지휘계통과는 거리가 먼 참모장교로만 일했기 때문에, 휘하부대의 학살혐의에 대한 감독 책임은 없었고, 그가 비로소 야전직을 맡은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민간인이 거의 빠져나간 도시에서 격전을 치뤘기 때문에 학살같은 일을 벌일 여지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전범혐의는 받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옛 동료였던 요들이나 카이텔등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여 바로 석방되지 못하고 몇년간 더 억류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