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폰 슐라이허

역대 독일 총리
22대23대[1]24대
프란츠 폰 파펜쿠르트 폰 슐라이허아돌프 히틀러


쿠르트 폰 슐라이허[2](Kurt Ferdinand Friederich Hermann von Schleicher)
(1882년 4월 4일 - 1934년 6월 30일)

1 개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총리이자 군인. 그러나 그는 나치 독일이 탄생하게 된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다.

2 생애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에서 육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슐라이허는 1900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해 근위 제 3 보병연대 제 5중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동료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부대에서는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친한 사이였다.

1913년에 참모본부에 배치된 슐라이허는 자신의 희망에 의해 빌헬름 그레너 중령의 철도부에 배속되었다. 그곳에서 지인인 프란츠 폰 파펜을 알게 되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위로서 병참부대에 소속되었다가 1917년에 제 237보병사단참모로 대전을 보냈다.

1918년에 소령으로 진급 후 독일혁명 당시 그가 속한 군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주도의 임시정부 협력에 찬성했다. 상관이던 그레너 참모차장과 SPD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오토 벨스는 서로 협약을 맺어 두 사람을 반란군의 손에서 구출했다. 이 협약은 잠정정부의 안정과 함께 군부에게 국가안의 국가라는 독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1차대전 후 병무국장이던 한스 폰 젝트의 측근이 되어 아들 오스카를 통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도 개인적 신뢰관계를 쌓은 슐라이허는 독일군 내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1929년에 국방차관으로 취임한 후 1931년에는 종형제의 미망인이던 폰 헤닝 장군의 딸이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슐라이허는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총리란 이미지로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민주투사(?) 비운의 주인공(?)이란 왜곡된 이미지가 있는데 애초에 파펜을 추천해서 원격 조종하려고 했고 그 이전에도 민간인들이 감히 범접 못하는 군부에서 정치 뒷공작이나 하던 정치군인 똥별 출신이다.

1932년에 하인리히 브뤼닝 수상이 세계 대공황의 선후처리를 위해 경제정책을 손대자 사회주의적이라며 슐라이허는 반대했는데 나치스의 돌격대가 대두되자 돌격대 금지령을 둘러싸고 상사였던 그뤼너 국방장관과 마찰을 빚자 그뤼너를 사직으로 몰아놓어 브뤼닝 내각은 큰 타격을 입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지를 잃은 브뤼닝 내각은 퇴진하여 슐라이허는 후임 수상으로 오랜 지기였던 파펜을 추천했다. 파펜 내각에서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슐라이허는 8월에 나치의 수상이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부수상직을 제시하면서 여당으로 끌이들이려 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사회민주당 오토 브라운이 수반으로 일하던 프로이센 주 정부를 프로이센 쿠데타로 해산시키고 정부지배에는 성공했지만 파펜의 정치능력과 인기는 거의 없는 수준이였고. 파펜은 의회를 정지시키기 위해 군부를 이용한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군권을 잡고있던 슐라이허가 거부하여 결국 파펜을 실각시켰다. 파펜이 물러나지 않으면 내전이 터질 수도 있다는 사실상의 협박으로 12월 3일에 슐라이허는 신임 수상으로 취임했다.

파펜의 실각 후 슐라이허는 나치당에 연대를 제안했지만 결과는 슈트라서만 해외로 날라버리고 끝났다. 군부의 자금원조와 신문에 의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슐라이허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우익에선 “붉은 장군”이라며 경멸했고 좌익에서는 프로이센 주 자치정부의 전복경위에 의해 “반동주의자”라 찍혀서 사실상 공공의 적이 되어버려 우왕좌왕했다. 당시에 트로츠키강철의 대원수에게서 도망쳐 독일에 있었는데 트로츠키조차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가 힘들었을 정도로 그는 우왕좌왕했다.[3]

한편 슐라이허에게 실각당한 파펜은 히틀러와 접촉해 이들은 1933년 1월에 은행가의 중개로 두 차례의 극비회담을 가졌다. 1월 22일 회담에서는 슐라이허의 옛 친구이던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은행가, 대통령부 장관인 오토 마이스너도 히틀러 같은 인물을 왜 총리에 임명하지 않느냐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여기에 국가인민당도 참여하는 형태로 슐라이허의 포위망이 형성되어 사면초가가 된 슐라이허는 1월 28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회담에서 사직을 권고받은 후 히틀러를 차기 수상으로 한다는 힌덴부르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나는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디디고 있다. 후에 천국에 가서도 이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슐라이허는 그런데 각하, 이 배신 후에는 각하께서 천국에 가시게 될지 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그렇게 쫒겨난 슐라이허는 여전히 독일군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히틀러에게 있어서 위험 요소였기 때문에 그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1934년 6월 30일에 슐라이허는 히틀러가 일으킨 숙청 이른바 장검의 밤 사건으로 신혼 집에서 부인과 함께 총 맞고 죽었다. 그는 예비역 육군 중장[4]였지만 나치 친위대가 그와 그의 부인까지 살해했어도 독일 국방군은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던 가정부는 다음 해에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공식적으론 자살로 발표되었고 2년 후에는 슐라이허가 에른스트 룀과 손잡고 반역을 일으키려는 꿍꿍이가 있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히틀러가 집권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독일에서 까인다.
  1. 그동안 나무위키에서는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21대 총리라고 했는데, 프란츠 폰 파펜은 22대,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23대, 아돌프 히틀러는 24대 총리이다. 이 문서는 2015년 12월 13일에 수정되었다.
  2. 풀네임은 쿠르트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폰 슐라이허이며, 웃긴 사실은 슐라이허라는 뜻이 기회주의자, 살살거리는 자 라는 뜻이라고 한다
  3. 공산당에 손을 내밀었다가 우파에다가 손을 내미는 둥 한마디로 개판 그 자체였다. 트로츠키의 표현에 의하면 '군복을 입은 물음표' 였다고.
  4. 총리에 취임하면서 전역했고,(국방장관은 겸임) 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이 겨우 상급대장이었다. 베르사유 조약때문에 군비 제한으로 군의 규모가 축소된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