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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시대 레반트에 건설된 요새로 대표적인 십자군 건축물이다. '기사들의 성채'라는 뜻이 있다.[1]
십자군은 프랑스 계열의 기사들이 주류였으므로 프랑스식인 Krak Des Chevaliers 로 표기되었다.
이 요새의 내성은 원래 쿠르드족계열의 영주가 만든 성이었다가 1차 십자군에 참가한 대영주 중 한 명인 트리폴리 백작 레몽 드 생질이 점령하였는데, 당시 레몽 백작은 안티오크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보에몽 드 타란토 공작과 다투다가 패배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충성을 맹세하고 수복한 제국의 땅을 자신에게 돌려주겠다고 맹세한 십자군 영주들이 모조리 배신하고 땅을 자신들이 차지한 데에 분개하고 있었으므로 끝까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은 레몽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황제는 레몽에게 소수의 제국군을 지원해주고 갓 흘러들어온 십자군 무리와 동행시켰는데, 다시 레반트로 돌아온 레몽은 트리폴리를 점령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 싶어 했으므로 동로마 석수들을 동원하여 트리폴리 근처에 있는 이 요새를 확장 건설하였다. 그러나 정작 트리폴리 공략은 삽질만 하다 실패로 끝났고, 결국 초대 트리폴리 백작은 그의 조카가 레몽의 부음을 듣고 찾아와 공성을 마무리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후 12세기 중반 성채의 소유권은 구호기사단에게 양도되었고, 구호기사단은 이곳을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여 이슬람세력에게 타격을 주었다. 심지어 살라딘도 공성을 실패할 정도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이 높았다. 사진을 보다시피 성문 쪽을 제외하고는 심하게 비탈지고 성문 앞으로는 밑으로 크게 파여 있고 그 파여 있는 지역을 지나 좁은 다리로 언덕과 연결되어 있고, 설사 외성을 점령하더라도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큰 해자가 파져 있는 이중구조로 된 성으로 화포도 없는 12~13세기 당시 중동지역에서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하지만 십자군이 쇠퇴하고 맘루크 세력이 강해지던 1271년, 맘루크의 군주 바이바르스가 인근 12개 요새를 함락한 뒤 이 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크라크 데 슈발리에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성이었기에 병력상 20:1[2]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몇차례의 공성이 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바이마르스에게는 십자군의 세력보다 동쪽의 일 칸국의 움직임이 위협적이었기에 성 하나에 대군을 투입한 채로 매달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이마르스는 농성을 하고 있는 방어군이 그렇게까지 크게 성을 지킬 의지가 없다는 점을 이용했다. 백작 보에몽의 편지를 위조해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 항복하라.'라는 내용을 비둘기로 성 안에 보낸 것. 물론 속임수인 줄은 알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기사단은 속은 셈 치고 성을 내주었다. 어쨌거나 무사 철수를 전제로 한 협상이었기 때문에 바이마르스가 기사단의 뒤를 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200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의 포화를 피하지 못하고 2012년 8월, 시리아 정부군의 공습에 의해 성채가 일부 파손되어버렸다. 2013년 7월 시리아 정부군의 공습을 얻어 맞아 성채가 심하게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