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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츠라 코고로시절
木戸孝允
텐포 4년 6월 26일(1833년 8월 11일) - 메이지 10년(1877년) 5월 26일
일본의 정치가이며,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삼걸 중의 하나이다.
기도 다카요시는 지금의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의 하기 시에서 무사 집안인 와다 마사카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 되고, 1862년 영주에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진언하였다가, 곧 개국·도막(倒幕:에도막부를 쓰러뜨림) 정책으로 전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도막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무렵 도망을 하도 잘쳐서 줄행랑 코고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되자 정책강령 발포, 제도 개혁, 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법전 편찬, 도쿄로의 천도 등 신정부의 거두로서 정책결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71년에는 서양 여러 나라를 순방, 내치(內治)의 긴급성을 통감하여 정한론(征韓論)에 반대하고 입헌정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정작 처음엔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영향으로 정한론을 주장했다. 이때 반대한 게 아이러니하게도 사이고 다카모리. 단 정말 본심에서 한국을 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아닌 사이고와의 파워 게임의 일환과 함께 시기상조론에 가까운 의견이다. 즉 치긴쳐야하나 사이고 다카모리의 주도하에 사쓰마 번의 공으로 넘길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 도모하자는 것.
나는 우리가 타당한 이유 없이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논리적 근거를 개진하고 싶은 것뿐이다. 내가 내세우는 싶은 논리적 근거란 우리의 우월한 국가정책을 그 땅에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1869년 7월에 남긴 기도 다카요시의 일기 중
이에 대해 저명한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이자 교수인 마리우스 B.잰슨[1] "이보다 더 조잡하고 편협한 '정당화'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많은 일본인이 바로 이 환상 때문에 고생했지만, 1869년에 이런 환상이 "보편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더더욱 대경실색할 일이다. 1870년 7월 기도는 조선에 파견될 특명대사는 자임했으나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현대 일본을 찾아서' 1권에 서술하기도.
1874년 타이완 출병(出兵)에 반대하여 요직에서 물러났다가 요인들의 설득으로 복직했다. 이후 서구식 헌법의 제정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건강의 악화로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했다.
서남전쟁이 일어나던 1877년 5월 26일, 45살의 나이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자중하라는 편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