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전쟁

西南戦争(せいなんせんそう : 세이난센소). 西南の役 (せいなんのえき : 세이난노에키)라고도 한다. 일본에서 1877년에 일어난 내란으로, 2016년 현재까지의 일본 역사상 무기를 들고 싸운 최후의 내전이다.

1 발단

메이지 유신을 이끈 유신지사의 리더 중 하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의 국서거부 사건으로 일본 내부에서 정한론이 거세지자 지금껏 우리가 조선에 외무성 하급관리나 보내며 대충 상대했으니 조선이 대일외교를 건성으로 대응하는 것도 당연하다면서 조선의 요구에 맞추어 전통복식을 갖춘 거물급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바로 잡아야한다는 주장을 하며 정한론자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 거물급 사신으론 다름아닌 자신이 갈 것을 제의했는데 오쿠보도 해외에 있고 사이고는 거의 유일하다싶은 조정 내 거물이라서 일본 내에서는 그가 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주장이 강했다. 사이고는 자신이 살해당하면 오히려 조선정벌의 커다란 대의명분이 된다고까지 주장하며 그들을 설득했으나 이후 귀국한 오쿠보도 사이고 급의 거물이 조선에 가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반대하면서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에 가는 것은 없던 일로 되었다.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정부 인사들(주로 조슈계)의 태도에 분노한 사이고는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 고향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 현 서부)[1]에서 사학당을 열고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기회를 엿보게 된다. 당시 사이고뿐만 아니라 사쓰마계 군인과 정부요인들이 함께 낙향하여 사학교 학생들과 함께 큰 파벌을 이루었고, 이들은 사학교당(私學敎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3만명에 달했고, 군사훈련도 겸하고 있었다. 정부 측에서 보면 사병조직인 위협적인 존재였다.

1877년은 구 무사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으로, 무사들에게 주어지던 녹읍이 폐지되고 폐도령이 발호되어 칼을 차는 것을 금지당했다. 또 국민개병제를 실행하기 위해 무사들로 구성되었던 구 신정부군에서 무사들이 제대당하고 농민 등 평민 위주로 군대를 편성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공헌을 했고 당연히 그 대가로 신정부 군대에서 복무할 것으로 여겼던 무사들은 커다란 배신감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지에서 구 무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에도 신페이가 일으킨 사가의 난, 오타쿠로 한도가 일으킨 신풍련의 난, 마에바라 잇세가 일으킨 하기의 난, 미야자키 쿠루마노스케가 일으킨 아키츠키의 난을 비롯한 조직적인 반란까지 발생하여 군 주둔지가 습격당하고 사령관이 살해당하는 등 무사들의 불만이 무력반란의 형태로 터져나오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낙향하여 사학당을 열고 이것을 중심으로 가고시마의 무사들이 결집하는 양상을 보이자 신정부는 이를 크게 경계하면서 사학당과 사이고에 대한 감시 체제에 들어갔다. 만일 사이고 다카모리가 거병을 할 경우 전국 40개현의 무사들이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이고와 사쓰마 무사군의 반란 결행에는 이런 예상이 깔려있었다. 일차적으로 사이고 군대가 내세운 목표는 <조정의 간신을 물리치고 사이고 선생님의 충의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분을 모시고 상경한다> 였으며, 결과적으로 신정부군의 평민 위주의 군대의 무력함을 증명하여 사무라이들의 입지를 재정립하고, 군사력을 내세워 정치적 입지를 유리한 방향으로 확대해나가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즉 군사력을 통한 기득권과 정국주도권의 획득에 그 목적이 있었다.

다만 반란의 전개 자체는 우발적인 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정부는 암호를 사용하여 전보를 전달하여 사학교당의 동태를 감시했는데 사이고를 보오즈(坊主)라고 불렀다. 사학교당은 전보의 내용을 입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ボオズヲシサツセヨ(보오즈오시사쓰세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원래 뜻은 <보오즈를 시찰(示察:시사쓰)하라> 라는 의미였다고 하나, 사학교당에서 <보오즈를 척살(刺殺:시사쓰)하라>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보는 한자가 아닌 가타카나로만 수신되어버려서 생긴 오해. 이에 분노한 사학교당은 가고시마 내의 정부군 무기고를 습격하고 총과 대포를 빼앗아 무장, 가고시마 각지에서 무진전쟁 당시의 군복부터 평범한 기모노를 입은 무사들이 소장했던 총이나 칼 한자루만이라도 들고 집결했고, 사이고를 따라 낙향했던 간부들이 사이고에게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자 "그대들이 그런 마음이라면 나의 몸을 내어줄 따름" 라고 하며 1877년 2월 15일 마침내 사이고 다카모리는 거병한다.

2 전쟁의 전개

2.1 초기 전황

당시 사쓰마는 중앙정부에 지극히 반항적이었다. 또한 사쓰마 무사들은 거친 것으로 일본 전체에서 명성이 높았다. 이들은 신정부가 무사의 특권을 하나씩 없애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군대에서 사족을 몰아내고 평민을 징집하여 새로이 군대를 구성한다는 신정부의 방침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런 불만을 배경으로 봉기한 사이고의 반란군[2]은 연전연승으로 큐슈 일대의 정부군을 대부분 격파, 전투의 주도권을 잡았다.

2.2 구마모토 성 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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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의 중심부 구마모토에는 가토 기요마사임진왜란 중 울산성 전투에서의 전훈을 바탕으로 축조한 난공불락의 요새 구마모토 성[3]이 버티고 있었다. 축조로부터 무려 20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천혜의 요새로 건재하여 정부군은 이 성을 거점으로 사이고의 반군을 가로막고 농성전에 돌입한다. 반란 초기의 구원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다.[4]

사이고가 이끄는 파죽지세의 사쓰마 반군도, 재래식 방어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성을 두고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이고 군은 숫적인 우위와 함께 , 화포 및 근대적 전술과 사무라이 정신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나 정부군보다 장비상황이 좋다고 하긴 어려웠고[5] 구마모토성의 철벽 방어를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사이고의 사쓰마 1만 3천 대군은 성을 포위하고 밤낮없이 포화를 퍼부으며 사력을 다해 맹공했다. 그에 비해 농성하는 정부군은 고작 3천. 사쓰마 군은 설령 성의 방벽 돌파에 실패하더라도 보급선을 끊어 성 내의 정부군을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여기에 성 내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해 천수각이 소실되는 등 수비측 정부군에게는 재앙이 겹쳤다.[6] 성 주변의 곳곳에서 크고 작은 격전이 벌어졌으며 사쓰마군이 강물을 성 주변으로 끌어들여 서쪽과 동북쪽을 호수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전선은 더욱 좁혀졌다.

포위 공성전은 50여일이나 지속되었고, 마침내 본토에서 편성된 정부측 충배군이 구마모토성에서 농성중인 정부군을 구원하려 내려왔다.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충배군은 구마모토성에 입성하여 더욱 강력하게 사쓰마 반군을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구마모토성 전투로 사망한 양측 병력의 숫자만 1만 2천 명. 끝끝내 난공불락인 구마모토성 함락에 실패한 사쓰마 반군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역관광, 결국 다시 근거지로 패주해 밀려나기 시작했다.

2.3 타바루자카 전투

구마모토성 포위전이 진행중이었던 시점에서 사쓰마군 전위대는 정부의 구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노기 마레스케가 지휘하는 코쿠라 제14연대를 3번에 걸쳐 연파하였으나 연락수단의 부재로 추격섬멸에 실패했다. 그러던 와중 정부군이 타카세 방면에 집결중이라는 정보를 얻은 사쓰마군 주력이 타카세로 진격하여 서남전쟁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패배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전력을 회복하여 사쓰마군이 물러선다. 사쓰마군은 구마모토성 북방의 키치지 고개, 타바루자카, 야마가, 미노타케, 가와치 해안에 이르는 약 40km의 방어선을 구축, 특히 타바루자카와 키치지 고개 사이에는 참호와 화력거점을 설치한 참호선을 구축했다.

신정부군은 하루라도 빨리 구마모토성을 구원해야 했기 때문에 타바루자카 정면에 대한 총공격을 결의한다. 1877년 3월 3일 타바루자카를 주공, 키치지 고개를 조공으로 삼아 돌격을 개시하지만 사쓰마군의 십자포화, 참호에 육박하면 발도 돌격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공세는 돈좌된다. 그러나 사쓰마군도 키치지 고개를 방어하던 1번 대대장 시노하라 구니모토(篠原国幹)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는다.

정부군은 이에 대해 타바루자카를 공세중점으로 삼아 물량을 동원한 화력전으로 맞섰으며, 이때의 탄약소비량은 일일평균 32만발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대다수는 징집된 평민병사들로써 화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효과도 부족하고 특히 발도 돌격만 시작되면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참살당하거나 도주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에 경찰 발도대를 편성하고 사족 출신이 많은 포/공병에서 저격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타바루자카 측면 요충지인 요코히로야마 점령에 나섰다. 사쓰마군도 요코히로야마 방어를 위해 7연발 스펜서 연발총 40정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발도대의 발도 돌격과 저격대의 정확한 사격 속에 마침내 요코히로야마를 점령하여 타바루자카 방어선 돌파를 실행하게 된다.

3월 20일, 타바루자카를 남쪽에서 우회하여 사쓰마군의 7번포대를 기습한 정부군은 폭우로 방어선이 약화되고 사쓰마군이 쓰던 전장식 소총의 불량률이 높아진 점을 이용하여 전선 돌파에 성공한다. 이로써 타바루자카 방어선은 함락되지만, 사쓰마군이 재역습을 감행하여 사쓰마군 전선은 다시 고착화된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한 것은 야시로 만에 상륙한 정부 충배군으로써, 사쓰마군은 결국 방어선을 포기하고 퇴각, 4월 15일에 구마모토성은 해방된다.

2.4 와다고에 전투

야시로 만에 상륙한 정부 충배군(衝背軍:후방을 치는 군대라는 의미)을 의식하여 타바루자카를 포기한 사쓰마군은 부대 재편성을 수행하고 히토요시(人吉)방면에서 방어를 꾀하지만 정부군은 1877년 5월 하순부터 히토요시 방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 6월 1일 히토요시가 함락되면서 방어선이 무너진다. 사이고는 히토요시 함락 전에 이미 가고시마현 청사가 있던 미야자키로 이동, 독립정부를 선포하고 각 방면의 방어를 지시했다.

예하 사령관들이 지형에 익숙하다는 장점을 살려 게릴라전으로 정부군에게 몇차례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좋았으나, 결국 후장식 소총을 보유한 정부군에 비해 사쓰마군은 전장식 소총을 보유했고[7], 병력 자체가 워낙 차이가 심했기 때문에 결국 총공격이 이루어진 7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사쓰마군의 각 방어선은 함락, 대대적인 패주가 이루어진다. 미야자키도 8월 14일에 함락, 궁지에 몰린 사쓰마군은 잔존병력은 겨우 3000, 그에 비해 정부군은 7개 여단 35000명에 달하는 병력의 차이가 있어 이대로는 패배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사쓰마군은 최후의 발도 돌격을 결의한다.

정부군이 주재하고 있는 논밭 지역과 구마다 분지를 감싸고 있는 에노다케~와다고에 능선은 약 40m의 높이를 가진 곳으로 사쓰마군이 방어를 하든, 정부군이 방어를 하든 어차피 와다고에 능선을 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쓰마 군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직접 독전을 하는 가운데 8월 15일 오전 8시, 최후의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다. 총병력 3000에 대포3문에 불과한 장비로 감행한 발도 돌격은 예상외로 정부군의 화력의 우세를 제압하고 정부군 제4여단과 별동 제2여단을 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곧 시작된 정부군의 함포 사격을 통해 사쓰마군의 포대가 파괴되고, 화력의 우세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 정부군의 공세에 정오 즈음에는 대략 승패가 결정, 사쓰마군 잔존병력은 능선을 타고 에노다케 방면으로 도주를 개시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갈 즈음 칼을 빼들고 싸우다 죽겠다고 나섰으나, 간부들이 강제로 팔을 붙들어 에노다케 방면으로 끌고 도주했다고 한다.

2.5 에노다케 돌파

와다고에에서 승리를 거둔 정부군은 8월 16일 새벽 부대를 정비하면서 제2여단, 제3여단을 동원하여 사쓰마군의 도주로인 에노다케 방면으로 진출, 제1여단은 에노다케에 출장본영을 설치하여 사쓰마군의 퇴각에 대비했다. 북쪽에서는 구마모토 진대병력과 경찰 발도대가 진입, 별동 제2여단과 제4여단은 각각 와다고에에 진주, 강을 건너 가와시마를 넘어 감으로써, 사쓰마군은 정부군에게 타와라노 방면에서 완전포위를 당했다.

사쓰마군은 8월 17일 오후 10시경 전 부대를 전,중,후 3제대로 나누고 정부군 1여단이 출장본영을 설치한 에노다케 방면으로 돌진, 1여단 출장본영을 습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다음 포위망을 돌파해 시로야마(城山)로 도주한다.

2.6 시로야마 전투

에노다케 돌파 이후 22일간 사쓰마군은 행방이 묘연하였으나 실제로는 능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총 225km의 거리를 거쳐 옛 사쓰마의 수도인 가고시마로 향하고 있었다. 9월 1일 가고시마에 도착한 사쓰마군은 곧 사학교 건물에 주둔하던 정부군 치중대를 습격, 물자를 탈취하여 가고시마 북쪽의 시로야마에 진을 친다. 정부군은 가고시마를 4월 27일에 이미 점령하였으나 후방으로 보고 설마 사쓰마 군이 오겠나 싶어 소수의 병력만을 두고 있다가 당한 것이었다. 사이고와 사쓰마 군의 복귀를 기뻐한 가고시마 시민은 즉시 봉기하여 경찰, 군인, 관리들을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시로야마에 주둔한 사쓰마 군에 합류했다.

용기를 얻은 사쓰마군은 현청 부근에서 농성중인 정부군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심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잔존병력은 부상자를 포함하여 370여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정부군은 속속 가고시마에 도착, 5만~7만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대군으로 시로야마를 완전 포위, 5중의 포위망을 구축하여 절대로 돌파할 수 없게 만든 다음 연일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사쓰마군은 참호를 파고 버티면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구명을 위해 간부회의를 거쳐 정부군에 사신을 보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휘하의 정부군은 사이고에게 자결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 또한 9월 24일까지 항복하지 않을 경우 총공격을 개시하겠다는 경고를 추가했다.

9월 24일 오전 4시, 3발의 신호포격을 시작으로 정부군은 총공격을 개시한다. 공격 2시간만에 시로야마의 방어진지는 모두 함락되고, 시로야마의 미야자키타니에 구축한 동굴에서 14명의 병력이 최후의 발도 돌격을 감행하여 분전하였으나 모두 사망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분전중 총상을 입자 부하인 벳푸 신스케를 향해 가고시마 사투리로 "신, 신, 여기까지인가벼"하고 말한 뒤 할복 준비를 하고, 가이샤쿠[8]를 맡은 벳푸는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죄송하구먼유!"하고 외치며 칼을 내리치고 자신도 곧바로 할복했다고.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 사쓰마 간부들은 전원 사망, 서남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2.7 그 이후

사쓰마군의 발도 돌격의 위력을 경험한 정부군은 백병전을 경시하던 방침을 버리고 일본식 검술을 다시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하는 논의가 분분하게 되었고, 프랑스식 검술의 무력함도 함께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검술은 제대로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껏해야 3년 근무하던 당시 일본 징병제 하에서는 하나마나라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또 정작 사쓰마-쵸슈 군도 무진전쟁에서 막부군을 패퇴시킨 비결은 후장식 총과 암스트롱포 등의 화력 우위였다는 점도 있어 1차대전 이전까지 백병전보다는 화력에 집중하는 형태의 군대가 되었다.

막부 편을 들었던 아이즈 번에 비해, 사쓰마는 유신웅번이었고 사이고 계열이 아니더라도 군경에 사쓰마 출신자들이 많았던 탓에 달리 차별은 받지 않았다. 사이고를 배척하고 진압군으로 활약한 오야마 이와오는 훗날 일본 육군 원수 직위에 오르는 등 사쓰마 계열의 출세도 이어졌다.

이때 이후로 큐슈에서 기승을 부리던 이른바 <사족반란>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일본 제일의 사무라이로 기대를 받았던 사쓰마 군대조차 참패했다는 점이 무사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9] 그대신 사족들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특정 계파들이 장악한 정부를 양당제의 입헌군주국으로 만드는 운동을 전개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이전까지만 해도 총기류나 도검류의 사적 소지에 큰 제한을 두지 않았고, 이는 사족들의 정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또 전장식의 소총은 후장식의 정부군의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샤스포, 스나이더 총기의 위력으로 쉽게 제압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쓰마군이 전장식 구형 소총으로도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준 것 때문에 이후는 민간인의 총기 소지에 간섭을 많이 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육군의 유일한 대장으로 군 총사령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카리스마도 대단했다. 모든 직위를 내던지고 낙향했지만 육군 대장 직급은 그냥 유지했을 정도. 일본은 정부군이 보여준 추태가 정신적 구심점이 없고 정신교육이 없어서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 최고원수를 덴노로 규정, 정신교육 면에서는 군인칙유 등의 봉건적 요소가 가득한 표어를 내리는 방식으로 향후 정신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본군의 군 교범을 만들어내는 시발점이 되었다.

전쟁에서는 졌어도 지금까지 가고시마현에서는 서남전쟁과 사이고를 옹호하는 지역 여론이 강한 편이다.

전투 도중 소실된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1960년에 가서야 복원되었다.

3 이야기거리

  • 만화 바람의 검심의 시작 부분이 서남전쟁이 끝난 직후이며 카미야 카오루의 아버지가 경찰관으로 징집되어 이 전쟁에 종군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적절한 설정이다. 실제로 이 당시에는 정부에서 '징모순사대'[10]라는 경찰 부대를 조직해 서남전쟁에서 활용했다. 이렇게 "반란 진압을 위해 징집"된 자들이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 된 것은 당시 메이지 정부가 이제 막 수립, 시행한 국민개병제의 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을 했던 탓이다. 사이토 하지메 역시 정부 측에서 이 전쟁에 참가했다. 그외에도 많은 인물이 참가한 것으로 나온다.
    • 메이지 정부는 이전까지의 무사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폐지하고 3년간 복무하는 일반 평민으로 구성된 새 군대를 창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서남전쟁 시점에서는 이 플랜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이제 겨우 2년차에 접어든 참이었기 때문에 병역 경험이 있는 평민이 거의 없었다. 즉 비상시에 소집할 예비군이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 당시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정규군은 3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란군은 당시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군대만으로 진압하기에는 너무 강성했고, 추가적인 병력이 필요했지만 동원할 수 있는 예비역도 없고 1877년에 동원될 징병 예정인력을 서둘러 징병하기는 했으나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두려워한 평민층의 기피현상이 심각해서 충분한 숫자의 병력을 뽑는 것이 곤란했다.
여기서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 무기를 다룬 경험도 있고 지금은 실업자로 놀고 있는 수십만의 사무라이들이었으나 여기에는 명분상의 문제가 있었으니, 기껏 군대를 일반 평민으로 조직하려고 새 제도를 만들었고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제 와서 사무라이들을 다시 군대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온 타협점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징집한 사족을 군대가 아닌 경찰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전투경찰? 또한 이제 갓 메이지 유신을 마무리짓는 시점에 내전에 군대를 동원했다가는 말 그대로 내정이 불안하다고 전 세계에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에 어찌 되었건 군대를 동원할 형편은 아니었다. 이 조치로 인하여 총 1만여 명의 무사족들이 군복이 아닌 경찰복을 입고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이들은 막대한 전공을 세웠으나 메이지 신정부는 사족 군대가 아닌 평민 군대를 키워나간다는 방침을 계속 고수했다.
  • '징모순사대'가 용감하게 싸운 이유 중 하나는 이들 중 다수가 사이고가 이끄는 사쓰마 군대에 패한 아이즈 번이나 신선조막부측의 조직에 속해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쓰러진 후 폐번치현으로 일자리를 잃은 이들 실직 사족들은 사이고와 사쓰마에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 반란 진압에서 그 분노를 풀었다.
  • 톰 크루즈가 출연한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정부군과의 전투는 이 전투를 각색하였다. 단 실제와 다르게 영화의 내용은 각색된 부분이 많다.
  • 일본인 중에는 전쟁의 결과로 사무라이의 중세적 특권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서남전쟁은 넓은 의미에서 메이지 유신의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 구마모토 성의 내부에 있는 박물관에 서남전쟁 당시에 쓰였던 무기들을 비롯한 각종 장비들과 문서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1. 사쓰마 지역은 가고시마 현 서부이다. 가고시마현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반도와 부속도서로 이루어 져 있는데, 서쪽에 위치한 반도가 사쓰마, 동쪽이 오스미 반도. 참고로 사이고의 사학교는 현재의 가고시마시 시로야마초에 위치함.
  2. 봉기 시점에서 약 1만 3천명.
  3.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 거대한 해자와 매우 가파른 방벽이 있고,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 전투의 참상을 뼈저리게 느껴서 식수를 보충 가능한 수많은 우물이 성 내에 파여있고 다다미 마저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서 필요시엔 먹을수 있게끔 만들었다.
  4. 지원군을 이끌고 왔다가 사쓰마의 발도 돌격에 큰 참패를 당한 지휘관 중에는 훗날 203고지 공략을 지휘하는 노기 마레스케도 있었다. 그는 이때의 참패를 평생의 치욕으로 결코 잊지 못했다고 하며, 훗날 자결할 때 유서에 쓴 3가지 창피 중 하나로 쓸 정도였다.
  5. 서양제 최신식 장비는 메이지 유신 후 신정부군이 거의 다 수거해갔고, 봉기가 우발적인 면도 겹쳐서 최근 연구에서는 메이지 유신 때 보다 평균적 무장상태가 나빠졌다는 견해가 많다
  6. 정부군이 일부러 포격 목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질렀다는 설이 있다
  7. 전장식은 우리가 흔히 아는 머스킷이며 후장식은 초기의 볼트액션식 소총이다. 전장식은 탄환을 비롯한 발사에 필요한 장약등을 안에 쑤셔넣은 뒤에 발사해야 하는 등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림에 비해 후장식은 탄피를 사용하기 때문에 탄환을 넣은 뒤에는 쏘고 볼트를 당기고 다시 쏘면 되어 동작이 단순하고 시간도 절약될수 있다. 게다가 전장식은 이 특유의 발사 순서로 인해 엎드리거나 누워서는 장전이 안되는데다 한번 쏜 뒤에 다시 조준을 해야 하지만 후장식은 한번 쏘고선 거의 그 자세에서 장전과 발사를 할수 있다. 즉 연사력과 명중률에서 후장식이 전장식에 비해 우월했다.
  8. 할복자살한 사람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목을 자르는 것
  9. 칼만 믿고 들고 일어나다가 망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총과 대포까지 가지고 접근전에 약한 상대방의 약점을 발도 돌격으로 뚫을 만큼 강력한 전술까지 쓰는 최강의 부대가 졌으니 그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다.
  10. '경시청 발도대'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