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도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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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을 누가 태웠나보다...
大久保利通

1 인물 소개

분세이 13년 8월 10일(1830년 9월 26일) - 메이지 11년(1878년) 5월 14일

일본의 근대 정치인. 일본 최초의 내무경(内務卿). 내무경은 오늘날 일본 정부 내무대신의 전신에 해당하지만, '내무경'이라는 명칭을 쓸 때에는 오늘날 일본 총리로서의 기능도 맡고 있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 일본 최초의 총리로 봐도 무방하다.[1]

사쓰마번 무사 출신. 기도 다카요시·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유신삼걸(維新三傑)'로 불린다. 번주 나리아키 밑에서 사이고 등과 뜻을 같이하며 개혁파 도막(倒幕:에도막부를 쓰러뜨림) 운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1866년 이와쿠라 도모미와 제휴, 무력으로 막부 정권을 쓰러뜨리고 새 유신정권을 수립, 그 참의가 되어 판적봉환·폐번치현 등 과감한 제도개혁을 단행하였다. 정한론파인 사이고 일파가 하야한 뒤는 유신정부의 중심인물로서 지조제도 개혁·식산진흥책 등을 추진, 부국강병의 기틀을 쌓았다. 이것이 '오쿠보 정권'으로 불린 일본 최초의 절대주의 통일정권체제였다. 세이난 전쟁 진압 후인 1878년 5월 14일, 도쿄의 아카사카 궁에서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키오이자카에서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되었다.[2] 그리고 후세에는 이 사건을 키오이자카의 변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 당시로서는 드물 정도로 지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서양문물에 밝고 지성적이며 냉정하게 판단하는, 무사보다는 현대인에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또한 언변에 능해 신분에 관계 없이 사람을 잘 끌어모았다고 한다.

2 평가 및 일화

매우 근엄한 사람이어서 함부로 말도 못 붙이는 구석이 있었다고 한다. 복도를 지나가기만 해도 주변을 긴장케 만드는 존재였다고. 단 좋은 의미만은 아닌데, 부심이 강한 인물이라서 지나치게 무게를 잡은 것. 유신 운동에 매진하기 이전 사쓰마 번저에서 근무할 때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우월감이 강해서[3] 신분이 낮은 무사는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했다. 퇴근할 때 숙직무사가 인사를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을 근대국가로 발전시키는 단초를 마련하기는 했으나, 정작 본인은 신분 의식에 사로잡혔던 아이러니한 모양새를 보여준 샘이다.

이후 유신에 가담하면서 동료를 끌어들일 때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지만, 막상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하급 무가 출신은 가차 없이 내버리거나 심지어 막부 측에 희생양으로 넘겨 버리기도 했다. 나중에 신 정부 내각을 결성할 때도 차별의식은 여전해서 더 이상 눈치 살필 필요가 없어지자 본색을 드러냈는지 유신 지사 중 상인 출신이나 하급 무가 출신은 내각에서 배제시키려고 노력했다. 유신군 측에 자금을 지원한 미쓰비시(三菱)나 미쓰이(三井)에서 심어놓은 인사들도 이 배제대상에 포함되어서 유신운동 때보다 많은 불만과 원한을 샀다. 나중에 어이없이 암살당하게 된 계기도 이 당시 배제된 자들이 획책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교활한 술책으로 친구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계에서 쫓아내고 서남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 사이고와의 분열은 이타가키 다이스케에토 신페이 같은 히젠, 히고, 도사 번 출신들이 오쿠보와 이와쿠라 도모미가 해외로 순방을 떠나기 전에 맺은 12개소의 약정을 무시하고 관제개혁이나 징병령, 조선사절 파견 문제와 같은 중요 사항을 멋대로 처리해버렸으며, 참의의 숫자를 각 번에서 1명씩 뽑아놓은 밸런스를 무너트리고 도사, 히고 번 출신을 엄청나게 늘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이고는 이 와중에 조선 사절로 자신이 가고자 했으며, 이 주장에 대해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이와쿠라는 메이지6년의 정변을 일으켜 조선사절파견문제를 엎어버렸다. 이때 문제가 생긴다. 처음 사이고의 뜻에 따라 조선사절파견문제가 통과되자 이에 항의하여 오쿠보 도시미치, 오키 다카토, 오쿠마 시게노부가 사표를 제출했고, 이와쿠라가 조선사절파견을 뒤엎자 이에 항의하여 사이고,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사표를 제출해버렸다. 한번에 7명의 참의가 동시에 사표를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생긴 것이다. 이에 메이지 덴노는 오쿠보 등의 사표는 반려했으나, 사이고 등의 사표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이고와의 대립은 서남전쟁으로 이어져 사이고가 죽는 원인이 되었고, 고향인 사쓰마 일대에서는 아직도 역사적 아이돌이나 다름없을 만큼 사랑받는 사이고를 죽게 만든 자로 받아들여져 극도로 증오를 받은 탓에 그 시신도 가고시마 쪽에 가져와 묻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미국 남부에서 컨트리 음악과 공화당, 기독교를 욕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고시마에서는 가고시마 특산물인 돼지와 사이고는 절대 욕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오쿠보는 지방에서 그 사이고를 죽게 만든 천하의 간신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외에 지독한 골초였다는 증언도. 담뱃대를 매일 부지런히 청소해야 할 만큼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하며, 위엄을 갖추기 위해 기른 자신의 수염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사진을 보더라도 수염을 매우 풍성하게 기른 후에 그것을 서양식으로 가꾸려 한 흔적이 보인다.

3 여러 매체의 오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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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판의 오쿠보 도시미치.
만화 《바람의 검심》에서는 막부 말 이후 첫 재회로 사생결단을 내고 있던 히무라 켄신사이토 하지메의 싸움 중 등장. 위에서 언급된 것과 달리, 신분이 낮은 켄신을 차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공적을 높이 사서 육군장관 직을 권유할 정도. 그리고 교토편 직전 마차를 타고 가다가 세타 소지로에게 암살당하고, 시마다 이치로 일파는 자신들이 했다고 우기기 위해 시체유기를 한 것으로 나온다. 성우는 오오츠카 요시사다/온영삼(애니메이션), 오오츠카 아키오 (PS유신격투편). 만화가인 와츠키 노부히로의 말에 의하면, 바람의 검심에서의 생김새는 링컨을 참고하기도 했다고. 또 여담 삼아 일본의 링컨에 비유하며 칭찬하기도 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간신배타입의 뚱뚱보로 나오는데 사실 그는 날씬하다. 사진을 보면 얼굴도 괜찮게 생긴 편이다[4] 게다가 영화 자체가 오쿠보를 사리사욕을 위해서 일본의 옛 전통을 팔아치우려는 개화파의 우두머리로, 사이고를 존왕양이파 사무라이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좀 문제가 많다. 그냥 와패니즈의 되도 않는 니혼징 워너비 시나리오로 해석하는 것이 편하다.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서도 등장. 사이고와 함께 사쓰마 번의 대표로 나오는데, 실제 모습을 반영하듯 상당히 깐깐하고 불친절한 인상이다. 문제는 사실상 사이고의 쩌리 역할이라는 것. 삿초 동맹이 성사될 때는 사이고만 나오는데다 후에 등장할 때도 회담이나 정국 등을 주도하는건 죄다 사이고의 몫이다. 더군다나 오쿠보가 불친절하긴 하지만 평범한 인상인데 반해 사이고는 후덕하면서도 뇌리에 보다 쉽게 각인되는 외모인데다 사이고가 능수능란한 언변을 자랑하는 능구렁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더욱 어필하는지라 마치 사이고의 부하처럼(...) 보이는 안습함을 보여준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저 위의 사진을 참고했는지 저 사진처럼 독특한 수염을 달고 나온다.

여성향 모바일 게임 러브 인 교토에서 등장인물이자 공략 캐릭터로 나온다. 2016년 10월 현재 국내에서는 아직 본편 스토리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상태. 책을 좋아하여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읽는 지성인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호기심이 많다던가 하기도 하고, 차분하면서 대담하고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 여성향 게임이라 그런지 외모가 상당히 모에화 되었다.이렇게.[5]

  1. 내무경은 1885년 12월에 폐지되었고, 초대 '총리대신'은 이토 히로부미다.
  2. 이 때 시마다 일당이 얼마나 칼을 세게 휘둘렀는지, 오쿠보의 시신이 발견된 당시 칼날이 목을 뚫고 땅바닥까지 박혀 있었다고 한다.
  3. 오쿠보 본인은 사쓰마 번주의 가신 출신.
  4. 배우 이재용씨와 닮았다. 배우가 누군지 추가바람.
  5. 사실 이건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지만.